2020년 8월 22일 발행 성공회 신문 ‘성서와 함께'(복음서를 중심으로)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나에게 넌, 너에게 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파네아스’(Paneas)라 불리던 곳입니다. ‘목자들의 신인 판’(Pan)을 섬기던 ‘큰 신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체는 ‘양’이고 상체는 ‘인간’ 모습인 ‘판 신’은 ‘팬플릇’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를 형상화한 만화 캐릭터가 ‘피터팬’입니다. ‘파네아스’에는 여러 이방 신전도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을 ‘헤로데 필립보’가 자기 아버지 ‘헤로데’로부터 물려받아 도시를 확장하고 수도로 삼았습니다. 고대에는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솟는 암반동굴이 있었고, 지금도 ‘요르단강’의 주요 ‘수원’(水源) 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 속에 자신이 어떤 존재로 자리하고 있는지 확인하시 참입니다. 마치 친구였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할 때 묻듯이 말입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질문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동문서답’을 합니다. 듣기 좋은 말만 갖다 붙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밝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 생각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소리 톤을 바꿔 질문의 속뜻을 알려주십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눈길이 시몬에게 가 닿았습니다. 고요히 바라볼 뿐입니다. 가슴이 쿵쾅 거리기 시작합니다. “시몬, 너에게 나는 누구냐”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놀랄만한 고백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방 신전이 점령한 그 땅에서, 그것도 너무나 확신에 차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탄복과 함께 복들이 선언됩니다. ‘새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베드로’(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로 ‘바위’,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 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존재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는 자식이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이름과 신분, 즉 존재가 바뀌었습니다. 땅의 어부에서 ‘하늘 아버지의 일’을 하는 명예롭고 존귀한 사람으로 높여졌습니다. 그 다음 “이 반석 위에”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맥락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맥락’이라 함은 ‘시공간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방문한 곳은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솟는 ‘암반지대’입니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살리는 ‘요르단 강의 물’이 그 곳 ‘반석’에서 솟아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반석’이라 칭해진 베드로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신앙고백이 우리들이 지켜야할 ‘생명과 같은 고백’임을 교훈 받습니다. 이것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 복은 ‘그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런 다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의 열쇠가 소중해도 어디 하늘나라 열쇠에 비교하겠습니까?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와 하늘나라 열쇠를 소유한 복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 중에는 이 은총과 복을 망각하고 여전히 땅의 열쇠를 더 소유하려고 노심초사하며 평화를 잃어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선물 받은 사람답게 하늘보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너에게 나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우리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그에 맞는 가치를 추구하도록 초대합니다.

이제 우리가 베드로가 될 차례입니다. 좌충우돌하던 그였지만 평생토록 주님의 교회에 ‘헌신’했고, ‘순교’로써 그 고백을 ‘완성’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일’을 하는 명예롭고 존귀한 사람으로 높여주신 고귀하신 뜻을 성취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물어 오십니다. “나에게 너는 사랑인데 너에게 나는 누구냐?”, “자신에 대해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무엇이라 고백하든 거기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의 삶을 통해 그 고백을 완성시켜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