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3. 연중2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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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 믿음의 반석으로 삼으셨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빛을 비추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하시고, 거룩한 교회에서 쓰임 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8-2:10
  • 시편 – 124
  • 독서 – 로마 12:1-8
  • 복음서 – 마태 16:13-20

연중 2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깨어나라, 주님의 교회여! 생명의 힘을 소유한 부활공동체여!’입니다.

우리는 2차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성삼위일체주일’부터 ‘연중 20주일’까지 《창세기》를 1독서로 낭독했습니다. 창조이야기로 시작해서, 아브라함 가족 드리마 시리즈를 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을 부르심, 이사악의 탄생과 하갈로 대변되는 약자도 돌보시는 하느님, 번제물로 바쳐지는 이사악과 하느님의 절대주권, 외로운 이사악과 치료자인 리브가의 결혼, 야곱과 에사오의 출생과 경쟁, 베델에서의 하느님 체험, 야곱의 결혼과 처가살이, 야곱의 귀향길과 브니엘에서의 씨름, 이집트로 팔려가는 시련의 요셉, 자신을 통합한 요셉과 형제들의 재회, 이집트 이주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 일련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삶의 ‘혼돈과 어둠과 무질서’를 향해 ‘질서와 빛과 조화’를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온갖 약점과 결함투성이의 ‘가문’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시고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지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부르심(선택)과 구원의 선물이 결코 무효화 될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은혜의 불멸성, 구원의 영속성입니다. 그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렇다는 것이 ‘교회의 믿음’입니다.

오늘부터 연중 29주일까지는 1독서로 《출애굽기》를 계속 독서로 낭독합니다. 앞으로 낭독하게 될 《출애굽기》가 《창세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한 낱말’이 있어서 우선 그 설명으로 시작합합니다. 모든 히브리어 글자(알파벳)는 그 자체로 ‘뜻’을 갖는 ‘낱말’(word)이자 ‘숫자’(gematria)입니다. 또 히브리어 글자는 사물의 모양에서 유래했기에 ‘고유한 그림’(picture)으로 나타낼 수도 있고, 다양한 ‘상징적 의미’(symbolic meaning)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이제 말씀드릴 ‘바브’(ו)는 히브리어 ‘여섯 번째’ 글자(알파벳)입니다. 낱말의 뜻은 ‘갈고리’입니다. 글자 ‘모양’(그림)도 ‘못’(nail), ‘갈고리’(hook), ‘말뚝’(peg), ‘핀’(pin)처럼 생겼습니다. 여섯 번째 글자이기에 ‘숫자’로는 ‘6’이고, 발전된 ‘상징적 의미’는 ‘붙이다, 연결하다’(bind, attach, connect)입니다. 벽에 액자를 ‘붙일 때’ 사용하는 ‘못’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또 아담이 6일째에 창조되었기에 ‘사람’이라는 발전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바브’(ו)가 낱말 사이나 문장 맨 앞에 오면 앞뒤를 ‘붙여주는’(연결하는) 접속사 ‘그리고’(그러므로, 그 다음에, 그 후에, 더 나아가서, 따라서)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두 사물이나 생각을 ‘병렬로 연결해’ 줍니다.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항상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은 ‘그리고’(and)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 ‘또한’, ‘아직’, ‘그러나’, ‘하지만’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우리가 낭독한 1독서 《출애굽기》는 ‘죽음의 억압을 받는 이스라엘’과 ‘모세의 출생에 얽힌 비밀’입니다. 정확히는 하느님께서 ‘죽음의 덫’에 걸려든 당신 백성을 도와주시고 해방하시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려는 시작입니다. 본문이 속해 있는 《출애굽기》 1장 1절, ‘첫 문장의 첫 낱말’이 ‘바브’(ו)로 시작합니다. <공동번역>에는 ‘그리고’ 없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야곱을 따라 가족을 데리고 에집트로 내려 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출애 1:1

하지만 정확히 번역하면 “‘그리고’ 야곱을 따라 가족을 데리고 에집트로 내려 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And these are the names of the sons of Israel who went to Egypt with Jacob, each with his family)입니다. 이렇게 앞에 나온 문장(창세기 50장 26절)에 ‘연결하는’ 바브가 ‘첫 문장의 첫 낱말 맨 앞’에 있습니다(וְאֵ֗לֶּה, 엘레흐, ‘그리고 이들’이라는 뜻).

붉은색 네모가 첫 문장의 시작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며 첫 낱말은 ‘브엘레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연중 11주일(정확히는 삼위일체주일) 이래로 낭독해 온 《창세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 1장 ‘첫 문장의 첫 낱말 맨 앞’에 ‘그리고’라는 뜻의 ‘바브’(ו)가 없었다면 ‘새로운 시작(새로운 시대)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그리고’라는 뜻의 접속사 ‘바브’(ו)로 시작함으로써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하나로 이어진 책’임을 말해 줍니다.

이집트에서 ‘억압받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전하는 오늘 1독서 첫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8절의 ‘그런데’로 번역한 단어가 ‘바브’(ו)입니다. 요셉이 죽고 난 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땅에서 하나의 ‘민족’이 될 정도로 불어났습니다. ‘그런데’(ו) 멸절의 위협에 직면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이미 기근으로 사라질 뻔한 위협을 당한 바 있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형제들에게 배반당한’ 요셉을 ‘앞서’ 이집트로 데려가시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또 위협에 직면합니다. 이번에는 ‘왕(파라오)의 탐욕’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이집트는 요셉이라는 한 위대한 인물 덕택에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요셉의 ‘사적’(事績)을 모르는 이가 ‘왕’(파라오)이 되자 상황이 급변합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배신의 아이콘’입니다. ‘파라오’는 불어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여 대책을 세웁니다. 하나는 ‘강제노동’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인구 증가’를 막는 일입니다. 그는 ‘폭군의 길’을 갑니다. 특히 파라오는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산파들’을 불러 ‘은밀히’ 명령합니다. 산파들은 그 명령을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합니다. 그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사타구니를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 버리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 출애 1: 16

엄청난 음모입니다. 민족의 멸절입니다. 왕은 누구에게도 이 비밀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하느님은 그때에도 ‘개입’하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시브라’(아름다움, 공정함, fairness)와 ‘부아’(빛남, 찬란함, splendor)라는 산파를 예비하십니다. 흥미롭게도 《출애굽기》는 모세를 데려다 키운 이집트 공주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산파들의 이름만은 남겨서 기억하게 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이집트 왕의 음모와 억압에 비밀스럽게 ‘저항’함으로써 그 이름처럼 자신들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자신의 음모가 실패하자 왕은 공개적으로 명령을 내립니다.

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 – 출애 1:22

‘영아 학살’입니다.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의 ‘헤로데 대왕’을 보는 듯합니다. 이스라엘은 참극을 겪습니다. 탄생의 기쁨이 슬픔의 눈물바다로 바뀝니다. 그 엄혹한 시절에 한 생명이 돋아나고 태어납니다. 부모는 더는 ‘비밀’로 할 수 없게 되자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기기로 합니다. 아기를 넣어두었던 ‘상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테바’(תֵּבָה)입니다. 이 단어는 ‘노아의 방주’를 묘사할 때도 쓰였습니다. 방주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노아의 가족이 탄 것처럼, ‘상자’에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킬 영웅이 타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이 어떻게 전개됩니까?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가문’(야곱의 후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물 없는 구덩이’에서 ‘요셉’을 건져내셨습니다(창세 37:24,28).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또 다른 요셉, 즉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일은 이스라엘을 ‘죽음의 위협’에 빠뜨린 ‘파라오 자신의 딸’을 통해서였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믿음’을 세울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모든 음모와 억압, 죽음의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도와주시고 건져내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24편>처럼, ‘그물’(올가미)에 걸릴 ‘참새’ 같은 처지의 가련한 우리를 ‘도와주시고 건져주시는 은혜의 하느님’입니다. 사실 ‘모세’는, 2독서 《로마서》가 교훈하듯이,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한때 길 잃어버린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통해 ‘죽음의 물’에서 ‘건짐’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 삶이 ‘코로나19의 위협’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이 시련에서 우리를 꼭 ‘도와주시고 건져주시는’(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더욱이 우리만 ‘건짐’(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브라’와 ‘부아’처럼,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구원’하는 거룩한 도구가 된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인물 중에는 ‘요셉’과 ‘모세’처럼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들도 있지만, ‘시브라’와 ‘부아’처럼 소수에게만 알려진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심지어 이집트의 공주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도구인 모두가 한 데 어울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일구는 공동체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24편>은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에 대한 ‘회상’과 깊은 ‘감사 찬미’입니다. 교우들의 입술에서 날마다 흘러나와야 할 위대한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먼저 지난 역사를 ‘회상’합니다(1-5절).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들을 ‘선택’하시고 ‘편’이 되어주신 ‘하느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찬미합니다(1-2절). 마치 한편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민족 앞에 닥쳐왔던 ‘엄청난 위협’[살기 등등(분노), 거센 물살(홍수), 거품 뿜는 물결]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3-5절). 민족의 말살에 직면했던 1독서 《출애굽기》를 보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위협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명확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1독서 《출애굽기》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민족이 사라지고 말았을 ‘큰 환난’이었다는 점입니다.

‘회상’ 후에 ‘감사 찬미’가 이어집니다(6-8절a). 하느님께서 민족의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6절). 시인은 민족의 가련했던 처지를 ‘새 잡는 그물’, 즉 ‘죽음의 올가미에 걸린 참새’에 비유합니다(7절). ‘올가미’는 일종의 ‘음모’입니다. 짐승을 잡기 위해 위장한 ‘비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비밀스럽게 쳐 놓은 ‘죽음의 그물’(올가미, 함정)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7절). 그물은 찢어지고 그들은 살아났습니다(8절a).

시인의 이 같은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진실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쳐 놓은 ‘죄와 죽음의 그물’에 걸린 신세였습니다. 자신의 ‘힘’(지성)으로는 그 ‘끔찍한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인 처지’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간의 처지가 그랬습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Macbeth)는 이러한 인간의 모순적인 모습과 내면의 본질을 너무나 비극적으로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특히 5막 5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맥베스의 독백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숨죽이게 할 뿐 아니라 인간적 애정과 연민까지 들게 만드는 명대사입니다.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었다.
언젠가는 듣게 될 소식이었다.
내일, 내일, 또 내일.
정해진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매일 조금씩 기어가고 있다.
과거는 어리석은 이들을 비추어
한낱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밝히어 왔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
제시간이 되면 무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시끄럽게 떠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없이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한 바보들의 떠드는 이야기일 뿐.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그물에 걸려든 가련한 처지의 ‘우리 죄인’들을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희생제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심으로써 ‘죄의 그물’을 끊어주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의 그물’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잡아둘 그물이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은 2독서 ≪로마서≫가 교훈하듯이 우리의 편이 되어주신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 덕택입니다.

시인은 위협으로부터 민족을 건지고 도와주신 은총의 하느님을 베드로처럼 확신에 차서 고백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주님의 이름밖에는 우리의 구원이 없구나. – 시편 124:8b

그렇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이 비참한 인생의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만이 인간을 잡아 둔 ‘죽음의 힘’(올가미, 환난, 삶의 무의미, 허무, 파괴, 지옥)들에게 풀어주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고백하는 하느님입니다. 복음 이야기와 연결하자면 시인은 우리에게 “너는 하느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답하는 셈입니다.

지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시련’ 속에 있습니까? 우리를 ‘그물’(환난)에 잡아두려는 어떤 비밀의 힘이 느껴집니까? 삶의 무의미, 허무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길’,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어린아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엄마는 그 즉시 달려옵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셨고, 우리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삶의 태도’가 하느님이 편들어 줄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삶의 길에 있다면 어서 돌아서십시오. 하느님께서 편들어 주시는 삶이 되는 순간 살길은 열립니다. 물론 우리가 미처 다 돌아서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향한 ‘은총과 구원’을 거두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해 주신 은총의 부르심과 구원의 선물은 결코 무효화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길 위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과 부르심이 옳았음을 ‘착한 행실’로 증명해야 할 책임이 우리 각 사람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편들어 주실 만한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구원, 우리의 도움은 주님뿐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찬미가 돼야 합니다.

2독서 《로마서》는 하느님의 자비로 새 생명을 얻은 신자공동체의 실천적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신자공동체인 ‘교회’는 ‘새 생활의 실천’으로써 성령 안에서 얻은 새 생명을 완성해 가야 합니다. ‘교회’(에클레시아, ἐκκλεσία)란 말이 갖는 본래 의미는 복음 이야기에서 다루겠습니다. 특히 신자공동체인 ‘교회’를 ‘몸’과 대조합니다.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미지화하여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비밀’을 밝혀줍니다. 그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바울로에 따르면 교회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발이 손보다 못하지 않듯이 부름을 받은 우리는 ‘서로 평등’합니다. 하느님께 주신 다양한 은총의 선물과 상호관련성 속에서 우리는 제구실을 해야 하는 평등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머리의 명령을 따라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이 평등공동체가 주의할 삶의 태도가 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분수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즉 자신이 받은 복에 못 미쳐서도 안 되고, 자기 역할의 한계를 넘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의 기능을 잘 분별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뜻이 교회를 통해 지상에 실현되도록 ‘충실하고’, ‘건전하며’, ‘완전한(완덕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 로마 12:2

어째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 덕택에 ‘이미’ 구원받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랑받은 자녀이기에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여야 마땅합니다. 충실하고, 건전하며, 완전한(완덕) 삶을 추구해 가는 모습이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 마땅히 드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을 얻은 신자공동체의 실천적 삶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을 기억합니다. 부동산 광풍의 ‘탐욕’에 빠진 세상을 보면서 오늘의 교회를 돌아봅니다. 교회는 ‘탐욕’이라는 ‘죽음의 올무’에 걸려든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야고 1:15). 오늘날 교회는 충실하고, 건전하며, 완전한(완덕을 추구하는) 삶의 모범입니까? 교회가 사회의 어떤 면을 개선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회의 건강치 못한 ‘지배적 가치’(황금만능과 개인주의)가 교회를 통해서 충실하고(절제), 건전하며, 건강한 삶의 가치로 갱신되고 있습니까? 어떤 사회적 구조와 실천이 교회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오늘의 교회를 보면서 이 질문 중 어느 하나에도 “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19’ 확산방지 대응을 놓고 교회가 다시 ‘구설’에 올랐습니다. 우리 서울교구는 코로나19 확산방지 대응을 위해 ‘공동체 예배’(성찬례)를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였습니다. 잘 된 결정입니다. 하지만 연일 터져 나오는 ‘교회’ 관련 확진자 수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 말하는 우리 삶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기능한다는 우리는 삶 전체를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태도로 가정과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참회하는 교회의 마음을 받아주시고, 몸의 세포를 이루는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의 위대한 사명 선언처럼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마태 5:13-14)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날을 기도할 뿐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죽음의 힘을 이기는 교회, ‘메시아 비밀’ 명령입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공관복음> 모두에 전해집니다. 특히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 ‘구절’들(마태 16:17-19) 때문에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여전히 논란이 많습니다. 흥미로운 공통점은 예수께서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비밀’이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너한테만 털어놓는 거니까 꼭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그를 ‘신뢰’할 때입니다. 딱 한 사람에게만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밀이라는 말이 사제와 관련해서 쓰일 때는 ‘고해성사’입니다. 사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의 끈이 연결되어있는 한 ‘고해’를 누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비밀’은 지키기 어렵습니다. 살면서 보니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비밀’을 지키는 일입니다. 비밀이 지켜지리라 생각하면서 누군가에게 발설하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습니다.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소설, 드라마, 영화를 봐도 그렇지요. 비밀이라는 것은 아무리 눌러놓으려 해도 결국 솟구쳐 오르는 용수철 같습니다. 비밀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지금 ‘비밀’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셨을까요?

사진의 왼쪽 아래 동그라미 표시가 지중해변에 있는 ‘가이사리아’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은 ‘가이사리아’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가이사리아’(Caesarea)라는 지명(地名)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는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리아’로 ‘헤로데 대왕’이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를 기념하여 세운 ‘항구 도시’입니다(사진의 왼쪽 아래 동그라미 표시입니다). 어릴 적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입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양자로 입양된 후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입니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는 그의 출신 가문을 나타냅니다. 황제가 된 후 그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입니다. ‘신의 아들(divi filius)이자 존엄한(Augustus) 황제 카이사르’(Imperator Caesar)라는 뜻입니다. ‘이름’(타이틀)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복음 이야기에도 ‘이름’이 바뀐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가이사리아’(Caesarea)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의 아테네와 더불어 지중해 3대 항구로 불릴 정도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파견한 ‘유대 총독부’가 있던 곳이고(사도 23:23-35), 예수님 당시 유다 총독이던 ‘빌라도’도 그곳에 상주(常駐)하다 명절엔 순례자들로 붐비고 있는 ‘예루살렘’ 치안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올라왔습니다. 작년 성지 순례 때 ‘가이사리아’(Caesarea)를 방문했는데 지중해가 바라다보이는 풍광이 꽤 멋졌습니다. 헤로데의 궁전, 원형경기장, 야외극장이 복원되었고, 빌라도 총독의 비문도 발견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로마로 이송되기 전 2년간 수감 되었던 감옥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 위 붉은 줄이 ‘헤르몬산’이고, 그 아래 초록색 동그라미가 ‘바니야스’입니다

다른 지명(地名) 하나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Caesarea Philippi)입니다. 이스라엘 최북단 ‘골란 고원’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Mount Hermon 2,814m, 백두산보다 높습니다) 남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시리아’와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바니야스’(Banyas)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국립공원’입니다(사진 오른쪽 위 붉은 줄이 ‘헤르몬산’이고, 그 아래 초록색 동그라미가 ‘바니야스’입니다).

고대로부터 ‘눈 덮인 헤르몬산’의 모습은 사람들의 종교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텔 단’(Tel Dan, 여기도 국립공원)이라 불리는 지역에 ‘울창한 숲’이 우거져있고, ‘푸른 초원’과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가는 ‘요르단강’의 여러 ‘수원’(水源)들이 있어서 목축과 농사(포도)에 적당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단’과 ‘므낫세’ 지파가 차지했던 풍요로운 지역으로(구약시대에는 ‘바산’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정복자들은 이 지역을 탐냈습니다. 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는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했고, 기원전 4세기 그리스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왕자 출신인 ‘알렉산더 대왕’은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의 스승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스승의 영향으로 정복지에 ‘그리스문화’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피정복 지역의 주민들이 ‘그리스문화’만 받아들이면 그 지역의 종교와 문화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러 가는 길에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을 때 그곳에 살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두 손 들고 환영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의 정복과 함께 다수의 그리스 사람들이 ‘근동’(the East)으로 이주했고, 헤르몬산 남쪽 인근의 ‘바니야스’(Banyas)에도 들어왔습니다.

이주한 그리스 사람들은 정책적으로 현지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푸른 초목으로 우거진 ‘바니야스’(Banyas)의 아름다운 경치에 사로잡혔습니다. 특히 그 도시 ‘언덕’, 그야말로 엄청난 크기의 천연 암벽지대에 있는 신비해 보이는 ‘깊은 동굴’에 끌렸습니다. 그 동굴에서는 ‘풍부한 샘물’이 솟아 흘렀습니다. 그 지역만 벗어나도 전반적으로 물이 ‘생명’처럼 귀한 땅이었기에 그들은 그 동굴을 ‘신성시’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을 관장할 ‘신’(神)을 선택합니다. 가나안 시대부터 그 지역 사람들이 섬기던 자연신 ‘바알’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신’(神)을 선택합니다. 그때 선택한 ‘신’(神)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푸른 초목과 목자들의 신’(神)인 ‘판’(Pan)입니다. ‘판’(Pan)은 ‘모든’이라는 뜻으로 ‘제우스’의 전령인 ‘헤르메스’ 신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판 신’에게 봉헌해서 생겨난 도시의 이름이 ‘파네아스’(Paneas)입니다. 오늘날은 이 도시를 ‘바니야스’(Banias)라 부른다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후대에 이 지역을 점령한 ‘아랍인들’(특히 시리아 사람들)의 언어인 ‘아랍어’에는 ‘ㅍ’ 발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도시 사람들은 ‘판’(Pan)을 위한 대형 ‘신상’(神像)과 ‘신전’(神殿)을 샘물이 솟아 나오는 그 신비해 보이는 ‘동굴’ 앞에 세웠습니다. 희생제물은 동굴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샘의 근원’에서 바쳤습니다. 지금은 그 동굴에 있는 샘이 말랐고 ‘우기’(雨期)에만 물이 찹니다. 오히려 그 ‘언덕 아래’에 있는 ‘바니야스 샘’에서 엄청난 양의 샘물이 솟아나 ‘요르단강’으로 흘러갑니다. 그 외에도 암벽에 벽장을 만들어 ‘님프’와 ‘네메시스’ 신상(神像)을 세워 놓고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판’(Pan)의 ‘신상’(神像)은 한 번쯤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체는 ‘양’(염소)이고 상체는 ‘인간’인 ‘반인반수’(半人半獸)입니다. 인간과 짐승 모습 ‘모두’(pan)를 가진 셈입니다. 그가 갖고 다니며 불던 악기가 ‘팬플루트’입니다. 그 악기로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놀라게 하거나(영어로 ‘공포’, ‘공황’을 뜻하는 panic이 pan에서 왔습니다), 개망나니 짓(난잡한 성관계)을 하고 다니기로 유명했습니다. 사실 ‘판’(pan)은 너무나 유명한 캐릭터로 변해 아이들 곁에 함께 합니다. 들으시면 ‘동심’이 파괴될 이야기지만 그를 형상화한 만화 캐릭터가 ‘제임스 매튜 배리’(James Matthew Barrie)가 창조한 ‘피터 팬’(Peter Pan)입니다.

이스라엘 고고학협회의 ‘쯔비 우리 마오즈’(Zvi Uri Ma’oz) 박사의 발굴에 근거한 ‘판 신전의 상상도'(想像圖)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새나갔습니다. 기원전 20년경 ‘로마 제국’은 ‘파네아스’(Paneas)를 ‘헤로데 대왕’에게 주었습니다. ‘헤로데’는 감사의 표시로 로마 제국의 첫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자)의 영광을 위한 거대한 대리석 ‘신전’(神殿)을 ‘판 신의 동굴’ 앞에 세워 헌정하였습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로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된 그의 이름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라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사후에는 원로원으로부터 ‘신’(神)으로 선포되어 로마인들로부터 숭배를 받았습니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필립보’가 ‘파네아스’(Paneas)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갈릴래아 북부, 즉 ‘이두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領主)였습니다(루가 3:1). 기원전 2년경 그는 ‘파네아스’를 확장하고 자기 영지(領地)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제 ‘종교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 지방의 영주로 임명한 로마 제국의 2대 황제(가이사르, 그리스어로 카이사르) ‘티베리우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를 명예롭게 하려고 도시 이름도 바꾸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운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가이사리아’(사도 23:23-35)와 구별하려고 자기 이름인 ‘필립보’를 붙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이름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Caesarea Philippi)입니다.

좀 더 나중이지만 서기 53년 ‘헤로데 아그리파 2세’(Herod Agrippa II)는 이 도시를 더 확장하여 로마 제국의 5대 황제 ‘네로’(Nero)를 향한 충성으로 ‘네로아니스’(Neroanis)라 이름을 또 바꾸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그렇게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서기 98년은 이 도시 설립 100주년이자, 로마 제국 역사상 최대로 영토를 확장한 제13대 황제 ‘트라야누스’(Traianus)가 즉위한 해였습니다. 그 일을 기념해 거대한 ‘제우스’의 신전이 ‘판 신전’ 옆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파네아스’는 여러 ‘신전’들이 세워진 ‘로마식 도시’(우상의 도시), 좋게 말하면 ‘종교 중심지’였던 셈입니다. 말씀 나눔 끝까지 이러한 특징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헤르몬산’과 ‘골란 고원’ 일대는 ‘지리적’으로도 ‘이스라엘’에 무척 중요합니다. 특히 ‘수자원’(水資源)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요 식수원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지하로 스며들었던 ‘헤르몬산’의 눈과 비와 이슬이 터져 나와 ‘요르단강’을 거쳐 호수로 흘러듭니다. 그 ‘요르단강’(최종적으로는 갈릴래아 호수)의 주요 ‘수원’(水源) 중 하나인 ‘바니야스 샘’이 ‘파네아스’(Paneas 또는 바니야스)에 있습니다. 바니야스 샘의 물길을 따라 3km 정도 내려가면 ‘바니야스 폭포’라는 명소가 있습니다. 참고로 ‘요르단강’(갈릴래아 호수)의 가장 중요한 ‘수원’(水源)은 근처에 있는 ‘텔 단’(Tel Dan, 여기도 국립공원)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갈릴래아 호수의 물 50%가 ‘헤르몬산’과 시리아 소유의 ‘골란 고원’에서 발원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수자원 확보’를 위해 ‘6일 전쟁’(3차 중동 전쟁)을 일으켜 ‘시리아’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아 지금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을 사건이 일어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바니야스 샘’ 근처로 좀 더 좁히겠습니다. 여러 ‘신전’과 ‘신상’이 세워져 있던 그 ‘천연 암벽’(암반)지대 언덕 아래에서는 엄청난 양의 ‘샘물’(지하수)이 지금도 솟아 나오고 있습니다. 작년 성지 순례 때 제가 교회밴드에 우쿨렐레 연주 영상을 올린 걸 기억하시지요? 그곳이 바로 ‘바니야스 샘’이 있는 국립공원입니다. ‘초막절 연휴 기간’이어서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한 가족이 우쿨렐레를 가지고 있어서 제가 한번 연주해도 되겠냐고 받아서 찍은 영상입니다. ‘길거리 공연’(busking)이었습니다.

그날 ‘판 신전’ 터가 있던 그 ‘웅장한 천연 암벽’(암반)이 주었던 인상은 잊히지 않습니다. ‘반석’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렷이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언덕 아래 있는 ‘돌 틈’에서 솟아 나와 ‘냇물’(요르단강)을 이루는 ‘바니야스 샘’이 주었던 인상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믿음의 고백’이 어째서 그토록 귀중한지 깨닫는 계기였습니다.

‘우기’(雨期)가 끝나가는 어느 봄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향하셨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여기고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잡아들일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의 눈을 피해야 했습니다.

점심 무렵 ‘판 신’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오늘의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에 들어섰습니다. 로마식 수도이자 다마스쿠스로 가는 ‘교통의 요지’답게 거리는 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신전들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큰 시내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물줄기를 따라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아래 잠깐 멈추었습니다. 세차게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다른 지방도 아니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 이름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 황제’를 ‘신’(神)으로 떠받들던 바로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실 참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하늘나라) 운동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3년여를 함께 지내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궁극적 사랑’이심을 여러 비유와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 일들은 대부분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펼쳐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에서의 활동을 끝내실 참입니다. 여우 같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아니어도 스스로 목숨을 바치기 위해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제자들 속에 자신이 어떤 존재로 자리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셨습니다. 마치 친구였던 관계가 연인으로 발전할 때 묻듯이 말입니다.

바니아스 폭포입니다

나무 아래 있던 제자들은 하나둘씩 시냇물로 내려가 발을 담갔습니다. 예수님도 내려가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셨습니다. 불쑥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 마태 16:13

《마태오복음》은 원자료인 《마르코복음》과 달리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인물)이라는 표현을 추가해 좀 더 격식 있게 표현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 즉 ‘여론’을 듣고자 하는 질문처럼 들립니다만 ‘속뜻’은 “너에게 나는 누구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속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동문서답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마태오복음에만 추가되었습니다)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마태 16:14

이것이 당시 제자들이 전해드린 ‘여론’입니다. 예수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갖다 붙입니다. 사실 언급된 인물들은 예수님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마태 14:2). 메시아가 나타나기 전에 올 것(환생할 것)으로 민중들이 기대한 종말론적인 인물인 ‘엘리야’처럼(말라 3:23-24) 예수님도 이스라엘 북부 출신입니다. ‘예레미야’는 구약의 인물 중 예수님의 수난과 가장 많이 포개지는 ‘눈물(고난)의 예언자’입니다.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입니다(신명 18:15). 사람들의 이러한 언급을 통해 그들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인물들은 하나같이 하느님께서 그 시대를 위해 보내신 예언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전해주는 말을 듣고도 예수님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과거의 그런 인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소리 톤을 낮추어 ‘질문의 속뜻’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마태 16:15

 

그야말로 기습적인 질문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는 제일 어렵습니다. 그 질문이 발을 담그고 있는 냇물보다 더 차갑게 제자들의 심장을 적셨습니다. ‘너희는’은 원문에서 강조 용법으로 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론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 맞은편 바위에 앉았던 ‘토마’는 눈을 물속으로 내리깔았고, ‘안드레아’는 눈빛이 마주치자 당혹감에 얼굴이 벌게졌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눈이 차례로 마주치며 천천히 지나갑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눈길이 ‘시몬’에게 가 닿았습니다. 그저 고요히 바라볼 뿐이었지만 시몬의 가슴은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스승이 그런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오신 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분명 그 눈빛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시몬, 너에게 나는 누구냐?

이 질문은 지금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의 물음은 주변 동료들의 생각이나,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한 대답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권유로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나만의 인격적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의견과 행동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 주님과 나와의 분명한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시몬이 그랬습니다. 쿵쾅거리던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깜짝 놀랄만한 고백을 합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 마태 16:16

정말 ‘대박’을 쳤습니다. 담대한 고백이자 명답입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 대망’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원자료인 《마르코복음》과 달리 ‘그리스도’라는 고백 앞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추가해 좀 더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시몬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을 ‘생명의 근원이신 분’으로 증언하는 중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시고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사도 10:38; 시편 45:7; 이사 61:1). 물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시몬의 고백이 처음은 아닙니다. 연중 19주일 <전례독서>인 ‘물 위를 걸으신 기적’(마태 14:22-33)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들은 바 있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 마태 14:33b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 모두’가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 ‘그리스도’ 고백은 《마태오복음》에서 ‘개인’이 인격적으로 내놓은 최초의 것입니다. 시몬이 어떤 자세와 어조로 이 고백을 했을까요?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크게 소리쳤을까요? 아니면 뛰는 심장에 손을 얹고 예수님 쪽으로 몸을 구부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아주 확신에 차서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탄복’과 함께 ‘복’들이 선언됩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 마태 16:17

‘시몬’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바르요나’도 히브리어로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혈통적 신분을 강조하는 부르심입니다. 이어지는 ‘탄복’과 ‘복들’(18~19절)도 오로지 《마태오복음》에만 있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의 ‘교권’을 승인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탄복’과 ‘복들’은 오로지 《마태오 공동체》에서 생겨난 자료입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그 고백은 ‘사람’, 즉 ‘혈육을 가진 인간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지 않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정체와 사역을 꿰뚫는 그 고백은 인간의 ‘지성’이나 ‘교육’이나 ‘감정’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고백은 하느님에게서(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직접 온 ‘계시’(지혜)입니다(1고린 12:3). 오직 ‘하느님의 선물’(은혜)로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우리(나)는 이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 역시 ‘성령의 내적 조명’인 ‘하느님의 선물’(은혜)을 받은 셈이지요. 따라서 아무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 자랑할 수 없습니다(에페 2:8-9). 또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을 가지고서도 우쭐해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에게 복들을 선언하십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 마태 16:18-19

‘베드로’라는 그리스식 이름을 주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아우구스투스’처럼 자기 스스로가 취한 칭호(이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어 ‘페트로스’(petros, 남성형 명사)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길가의 ‘작은 돌’(small stone), 손으로 집어서 던질 수 있는 ‘둥근 조약돌’(pebble), 작은 돌보다 부피가 좀 더 크지만 ‘따로 떨어져 있는 하나의 바위(isolated rock)를 가리킵니다. ‘반석’은 그리스어 ‘페트라’(petra, 여성형 명사)를 번역한 말입니다. 산에 있는 ‘자연 그대로의 돌출된 거대한 암벽’(a projecting rock wall), 사람이 움직일 수 없는 ‘웅장한 암벽’(magnificent rock wall)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페트로스’(베드로, 따로 떨어진 작은 바위)는 ‘페트라’(엄청난 크기의 암벽지대)에서 파생된 낱말로 명확히 대비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페트로스’와 ‘페트라’라는 두 낱말을 가지고 그 ‘판 전’이 세워져 있던 그 ‘거대한 암벽지대’ 앞에서 일종의 ‘언어놀이’를 하시는 셈입니다. 참고로 ‘아람어’로는 ‘바위’를 ‘게파’라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이름은 시몬과의 첫 만남에서 주어진 것으로 보도됩니다(요한 1:42).

그러면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는 ‘새 이름’을 부여받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전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로 새롭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연중 19주일 복음 이야기를 통해(마태 14:22-33)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들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바다를 다스리시고 정복하신 분’이라 곳곳에서 증언합니다(시편 89:9; 이사 51:9; 하바 3:15). 《마태오복음》도 예수께서 그 ‘물(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 즉 ‘바다를 이기신 분으로 나타났다’라고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세상에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가져오는 모든 세력을 이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힘과 하느님의 힘은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셨듯이 ‘예수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새 이름을 지어준다.’라는 것은 ‘한 사람을 새로 빚어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 고백을 통해 시몬의 존재가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존재로 변화되었느냐면, ‘진정한 바위’(반석)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존재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시몬의 본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고대 유대 전통에서 자식은 당연히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이름이 바뀌고 신분이 바뀜으로써, 그는 땅에 속한 육신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하늘 아버지의 일을 하는 ‘명예로운 사람’으로 높여졌습니다. 그것이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사제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새 이름’을 선물 받았습니다. 땅의 일만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일을 하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드높여졌습니다.

이어지는 복들(마태 16:17-19), 특히 《마태오복음》의 원자료인 《마르코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을 두고 로마가톨릭과 개신교(정교회는 개신교와 같은 해석) 사이에 오래도록 해석 다툼이 존재해 왔습니다(관련 설교는 2017. 8. 27. 연중21주일을 참고하십시오).

저는 성공회 사제입니다. “이 반석”이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고백’을 의미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교회가 세워지는 ‘반석’(토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참 반석’(참 근원)은 언제나 ‘우리의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시편 18:1-2; 19:14; 62:2; 1고린 10:4). 이것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심지어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을 ‘살아있는 돌’, ‘귀한 돌’, ‘모퉁이의 머릿돌’, ‘바위’이신 분이라 증언했습니다(1베드 2:4-8).

오늘 <본기도>는 본문에 대한 우리 성공회의 입장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 믿음의 반석으로 삼으셨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빛을 비추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하시고, 거룩한 교회에서 쓰임 받게 하소서.

본문에 ‘교회’(敎會)로 번역한 그리스어 ‘에클레시아’(ἐκκλεσία)는 ‘불러모은다.’라는 뜻의 ‘에칼레오’(ἐκκαλεώ, ek는 ‘밖으로’, caleo는 ‘부르다’)에서 온 ‘여성형 명사’입니다. 본래는 ‘어떤 공적인 일을 결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불러모은 합법적인 ‘집회’(민회, 모임, 회중, 공동체)라는 의미가 ‘에클레시아’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특정 목적을 위해 불러냄을 받은 회중들의 집합체’(공동체)라는 의미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본래의 낱말 의미대로 하자면 ‘교회’라고 불릴만한 ‘시민들의 모임’(민회, 집회, 회중, 공동체)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교회’ 말고도 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떤 교회’(민회, 집회, 회중, 공동체)이냐는 그 ‘목적’에서 드러나고 구별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교회’의 ‘정체성’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의 나랏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이들의 모임’입니다.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혈육’으로 선민이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에 대체되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교회’입니다(갈라 6:16). 한마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교회’는 ‘내 교회’라는 표현처럼, ‘영원한 반석’(참 반석, 근원)이신 예수께 하느님의 은총으로(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신앙고백’을 바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더욱이 저는 이 구절을 가지고 로마가톨릭이 ‘교황권’(수위권) 주장을 하는 일이 좀 웃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탄복’과 ‘복들’은 오로지 《마태오복음》에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마태오복음》의 원자료인 《마르코복음》에 없는 이야기를 마태오가 ‘추가했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추가한 《마태오복음》의 ‘기록 의도’만 놓고 보자면, ‘이 반석’은 로마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의 원자료인 《마르코복음》까지 고려하면 어떻습니까? 《마르코복음》 공동체에게는 시몬이 ‘반석’인지 아니면 ‘나무’인지, ‘열쇠’를 받았는지 아니면 ‘칼’을 받았는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평행본문인 《루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까지 고려하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대-그리스도교 신자공동체’ 지도자인 ‘마태오’에게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호소해야만 하는 어떤 ‘특정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나중에 실패했을망정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 ‘베드로’만이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었다’라고 내세워야 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베드로’만이 사도 중에서 유일하게(혹은 사도들을 대표하여)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고, 그 ’베드로’를 ‘주님이 치켜세웠다’라고 내세워야 하는 어떤 ‘특정한 이유’가 그 시대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특정한 이유를 학자들은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증가’와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마찰’에서 찾습니다.

실제로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 초대교회는 여러 ‘파벌’이 서로 ‘경쟁’ 중이었습니다(1고린 1:10-17). 그렇다고 그 공동체들이 서로 원수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약간의 ‘마찰’은 있었고, 명백히 말할 수 있는 점은 《마태오복음》이 ‘친(親) 베드로적’이었다면 《마르코복음》은 ‘반(反) 베드로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마르코복음》의 전체 시각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베드로는 철저히 예수님을 ‘오해’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르코복음》은 베드로를 제자 중에서 ‘리더’로 인식하면서도 그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아마 《마르코복음》 공동체가 이 탄복과 복들이 적혀있는 오늘 구절을 읽었다면 웃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로마가톨릭이 유리하게 해석하고픈 이 탄복과 복들은 《마태오복음》에만 의존합니다.

저는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이 같은 해석 다툼보다 더 중요한 진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습니다. 분명 인간 베드로에게 ‘프레임’을 맞추고 서로 갈라져 싸우는 모습은 본질을 흐리는 처사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교회사에서 증언하듯이 사도 중에서 으뜸’입니다. 그러나 그 으뜸은 지배하고 군림하는 으뜸이 아닙니다. 주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최후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모범을 보이셨듯이 ‘섬기는 일’에서 ‘으뜸’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첫 공의회인 ‘예루살렘 공의회’를 보면(사도 15장)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 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보다 ‘야고보’(주님의 형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더 권위를 가진 ‘의장’처럼 보입니다(사도 15:13-21).

따라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전하는 《마태오복음》을 통해 우리가 기억할 점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그 많은 이야기는 인간의 위대함을 증언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오늘은 천상에까지 올라간 시몬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다음 주일 복음 이야기를 보면(마태 16:21-28) 어떻습니까? 그는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시는 스승을 만류하려다 ‘사탄’(물론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그렇게 꾸짖으시지만 마태오복음에는 베드로 자신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단지 ‘사탄, 내 뒤로’라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장애물’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땅으로 곤두박질칩니다.

그렇다면 ‘수난의 그리스도’를 제외하려 했던 그의 ‘신앙고백’은 온전한 고백이 아니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물론 나중에 그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그리스도마저 이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왕국을 재현시킬 ‘정치적 메시아 대망의 오류’로부터 깨어났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그 이해와 깨달음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성취되기 전까지, 즉 진정한 신앙고백이 가능할 때까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따라 자신의 미성숙함을 견디며 ‘침묵’해야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이 같은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왕국을 재현시킬 ‘정치적 메시아 대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백성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제자들 모두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하셨지만 그들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기감정대로 하다가(마태 26:31-35) 스승을 부인하는 큰 실패를 겪었습니다(마태 26:69-75). 그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반석’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분명 베드로가 ‘바위’(반석)로 불리기 이전에 ‘하느님 자신’이 ‘반석’(바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십니다(시편 18:1-2; 19:14; 62:2).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십니다(1고린 10:4). 교회의 참 반석, 참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사건의 모든 전말(顚末)을 알고 있는 《마태오복음》을 참고하자면 어떻습니까? ‘죽음의 힘’도 감히 누르지 못하는 ‘그 이름’(반석, 바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시몬 베드로에게도 주어집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의 그의 불완전한 고백(다윗 왕국을 재현시킬 정치적 메시아 대망), 그의 장담과 배반, 부인과 회개, 오순절 성령강림과 위대한 설교, 교회를 위해 순교한 그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일의 과정과 결말을 알고 있는 《마태오복음》을 참고하자면 그렇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시몬 베드로뿐 아니라 ‘그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교회)에게 ‘죽음의 힘’도 감히 누르지 못하는 ‘당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에페 1:22-23). 이것 역시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석’이신 ‘그 이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함께 모여 성찬례를 시작하고 진행합니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 이름’으로 말씀 나눔과 기도를 바치고 영성체를 합니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강복을 받고 파송됩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반석’이신 ‘그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사도 베드로는 설교했습니다(사도 2:38-39; 3:16, 20; 4:12).

이어서 ‘죽음’(지옥)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를 살필 차례입니다. 그 낱말은 ‘하데스’(ᾅδης)입니다. ‘판 신’처럼 역시 그리스신화에 등장합니다. 그 신화에 따르면 ‘하데스’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으로 제우스와 포세이돈과 함께 우주를 지배합니다. 그런 ‘죽음(무덤, 지옥)의 힘’(문)도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죽음의 권세’(문)를 깨뜨리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모든 ‘죽음의 힘’(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죽음의 힘을 이기고 생명을 선물 받은 ‘부활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인생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욕심’, 즉 물질에 대한 ‘탐욕’이 그 자신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힘입니다(야고 1:15). 부활공동체인 교회는 자신들 안에 있는 ‘탐욕’을 십자가로 털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마음이 ‘탐욕의 먼지’에 휩싸여 산다면 자신이 부활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또 베드로에게 주었다는 ‘하늘나라 열쇠의 주인’도 분명 ‘예수님’입니다. 일반적으로 열쇠는 두 가지 용도로 쓰입니다. 무언가를 ‘문 안’에 넣고 ‘잠글’(맬) 때나 문을 ‘열기’(풀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을 문 안에 넣고 ‘잠그기’(매기) 위해 ‘하늘나라 열쇠’를 주셨습니까? ‘우리의 죄’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가 ‘장사’ 된 ‘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서 모든 죄를 빼앗아 십자가 문 저편에 던져넣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영원히 그 문은 잠겨졌습니다. 어느 죄도 그 십자가 문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또 열쇠는 잠긴 문을 ‘열기’(풀기) 위한 것입니다. 하늘나라 열쇠로 문을 연다는 것은 ‘천국의 문을 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올바로 해석하고 전파는 특권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맨 처음 ‘천국 문’을 열어주는 특권을 받았습니다(사도 10:34-48). 다시 말해 ‘그 이름을 믿고 죄를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특권을 주님께 받았습니다(사도 10:43).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른 다른 사도들도 ‘이 특권’을 주님께 받았습니다(마태 28:18-20; 24:14; 마르 16:15; 사도 1:8; 10:42). 그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도 ‘이 특권’을 주님께 받았습니다(2디모 2:2; 2베드 3:15; 2고린 5:20).

이처럼 베드로와 사도들뿐 아니라 그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교회)에게 주님은 죄용서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는 하늘나라 열쇠를 주셨습니다. 분명 우리에게 주시기 전 그 ‘열쇠’는 예수님 손에 있었습니다(이사 22:22; 묵시 1:17-18).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열쇠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삶뿐 아니라 죽음과 지옥마저도 지배하시는 영원한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하늘나라 열쇠를 소유한 복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은총과 복을 망각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 열쇠를 소유한 신자인 줄 알았는데, 땅의 열쇠만을 소유한 사람만큼도 안 되는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자신이 하늘나라 열쇠를 선물 받은, 하늘 신분의 사람임을 잊어버리고 영원하지도 못할 땅의 열쇠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평화를 잃고 헤매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열쇠를 선물 받은 사람답게 하늘 보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너에게 나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우리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그에 맞는 가치를 추구하도록 초대합니다. 특히 베드로가 그 신앙고백을 어떻게 지켜갔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교회 전승은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절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줍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그는 불같은 성질로 인해 좌충우돌했습니다. 하지만 평생토록 주님의 교회를 지키며 헌신했고, 종국에는 순교를 통해 자신의 고백을 완성하며, 존귀한 신분으로 높여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맞게 살았습니다.

끝으로 “이 반석 위에”라는 예수님의 복 선언이 《마태오복음》에 나올 수밖에 없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밝힙니다. 언제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맥락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맥락’이라 함은 ‘시공간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 일행이 방문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어떤 곳입니까?

‘판 신’을 위한 신전, ‘신’(神)으로 선포된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 이방의 각종 신전이 가득했던 로마식 ‘우상의 도시’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오병이어의 기적에 감동하고 있는 군중들 사이에서, 혹은 같은 동료들끼리만 있는 데서 살짝 이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의 각종 신전(우상)이 가득한 곳에서(어찌 보면 적진의 한가운데서) 그런 신들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세계를 호령하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선생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비록 ‘수난의 그리스도’까지 이해한 ‘완전한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어도 그의 고백은 정말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같은 그리스도인들만 있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한가운데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돈’이, ‘권력’이 ‘하느님 노릇’ 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정말 그런 신앙을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런 고백은 ‘교회 안’보다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입니다.

또 시몬의 신앙고백이 터져 나온 ‘파네아스’는 엄청난 양의 ‘샘물’(바니야스 샘)이 솟는 ‘암반지대’입니다. ‘물’이 ‘암반’(반석)에서 솟아 나옵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이 암반에서 솟아 나오는지 정말 똑똑히 보았습니다. 물은 어떤 이미지입니까?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은 ‘생명’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이스라엘을 살리는 ‘요르단강의 물’이 그곳 ‘암반지대’에서 솟아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바위’라 칭해진 시몬 베드로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신앙고백, 즉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이 그를 살립니다. 동시에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는 그 같은 신앙고백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과 같은 고백’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독서들은 전부 ‘죽음의 힘’과 ‘비밀’과 관련 있었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죽음의 억압을 받는 이스라엘’과 ‘모세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었습니다. 《시편》 <124편>은 비밀스럽게 쳐 놓은 ‘죽음의 그물’(올가미, 함정)에서 이스라엘을 풀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했습니다. 2독서 《로마서》는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미지화하여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비밀’을 밝혀주었습니다. 교회는 ‘탐욕’이라는 ‘죽음의 올무’에 걸려든 세상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야고 1:15). 복음 이야기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죽음의 힘을 이기는 교회’, ‘메시아 비밀’ 명령이었습니다. 이 모든 ‘죽음의 힘과 비밀’은 종국에는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특히 부활하신 그리스도 이후 ‘구원의 비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나라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물질(부동산)의 탐욕에 빠진 인생들,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들, 삶의 무의미와 죽음의 힘에 시달리는 인생들을 향해 ‘진정한 삶의 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울로가 교훈했듯이 충실하고, 건전하며, 완전(완덕)을 추구해 가는 우리의 착한 행실로 말입니다.

오늘도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 앞에 정직히 우리 자신을 세워봅니다. 이 물음은 교회 즉, 우리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와도 연결됩니다. 더욱이 이 물음은 과거에 한 번만 묻고 끝나는 물음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도 내일도 평생토록 물어 오시는 물음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고백(대답) 역시, 과거 어느 순간의 열정이나 감정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질문에 인격적으로 대답하면서, 평생토록 우리의 고백을 완성해 나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가 베드로가 될 차례입니다. 좌충우돌하던 그였지만 평생토록 주님의 교회에 ‘헌신’했고, ‘순교’로서 그 고백을 ‘완성’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일’을 하는 명예롭고 존귀한 사람으로 높여주신 고귀하신 뜻을 성취했습니다. 사실 신앙이란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을 충실히 완성해 가는 여정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물어 오십니다.

나에게 너는 사랑인데 너에게 나는 누구냐?
자신에 대해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무엇이라 고백하든 거기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의 삶을 통해 그 고백을 충실히 완성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깨어나라, 교회여! 죽음의 힘을 이기는 부활공동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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