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16. 연중20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성령을 보내시어 죄의 억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하느님의 참 자녀로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영광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45:1-15
  • 시편 – 133
  • 독서 – 로마 11:1-2상, 29-32
  • 복음서 – 마태 15:21-28

연중 2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재회(再會) 이야기’입니다. 그 이름이 <30장>에 처음 등장해 <50장>까지 이어지는 요셉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지난주일 독서에서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는 ‘시련의 이야기’를 낭독했습니다. 그 단락을 설명하면서 ‘통과의례’(분리-전이-통합)의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미리 살핀 바 있습니다(통과의례 관점은 2020. 8. 9. 연중 19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오늘은 요셉이 자신의 인생에 부과된 ‘통과의례’를 완성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삶을 ‘파라오’로 대변되는 더 큰 사회에 ‘통합’한 후, 즉 ‘내적 존재 변화(성숙한 자아)를 완성한’ 후의 이야기입니다. 방금 들었다시피 형제들에게 ‘자비’와 ‘생명’을 선물하는 ‘눈물의 재회’는 언제나 ‘심금’(心琴)을 울립니다. 흔히 ‘가족 간의 용서와 화해의 전형’이라 말해집니다.

드디어 요셉은 어릴 적 꿈처럼(창세 37:6-9), 하느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이 현실로 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창세 42:6-8). 사실 그들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이입니다. 형제들은 동생을 팔아넘기고 아버지에게 동생이 맹수의 밥이 되었다고 속인 이들입니다. 어린 시절 야곱이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속인 일이 있는데, 그는 자기 자식들로부터 크게 당했습니다. 그들은 ‘기근’을 계기로 극적으로 ‘재회’합니다.

그 예정된 시간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도 요셉은 철저히 하느님을 의식하고 자신을 낮춥니다. 오늘 ‘재회 이야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과 가족과 민족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고백합니다(창세 45:5b,7-8). 자신을 죽음에 넘긴 형제들에게 ‘자비’(사랑)와 ‘생명’을 선물함으로써 ‘진정한 통합’을 이루어냈음을 증명합니다. 정말이지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통합의 경지’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재회 이야기’를 <전례독서>로 묵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증오와 복수의 땅’에 머물던 요셉이 그 땅의 ‘경계를 넘어서 용서와 화해의 땅으로’ 갔음을 칭송하라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요셉의 위대함’을 묵상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보셨다면 오해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묵상하다보면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인간의 ‘악함’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계획을 성취’해 가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인간들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를 허물고, 지금도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오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가나안’(헤브론)에 살던 한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 결정적인 경위가 ‘재회 이야기’ 속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계획’(창세 15:13-16) 속에 진행된 일부입니다. 아브라함을 은총으로 선택하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이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집트로 이주한 한 가족은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룰 것입니다. 그 땅에서 종이 되어 살며 압제를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개입으로 결국 ‘해방’되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해방의 출발을 우리는 다음 주일 1독서인 《출애굽기》에서 들을 것입니다.

이렇게 연중 11주일이래로 이어져온 ‘아브라함 가족 드라마 시리즈’가 오늘로 ‘최종회’를 맞이합니다. 이 연속된 이야기는 《창세기》 1장의 구현입니다. 삶의 ‘혼돈’, ‘공허’,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 속에 있던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그들 삶으로부터 뒤로 물로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빚으시고, 구원 계획을 위해 개입하시며, 행동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혼돈’ 속에 있던 그들의 삶을 ‘질서’로 바꿉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공허함’ 속에 있던 그들의 삶에 ‘진정한 위로’를 가져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둠’ 속에 있던 그들의 삶에 ‘빛’을 가져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깊은 물’(고달픈 눈물) 속에 있던 그들의 삶에 ‘기쁨’을 가져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지금도 코로나19의 혼돈, 공허, 어둠, 깊은 물에 잠긴 인생들을 살려내는 ‘사랑과 생명과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가족 드라마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들 자신’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위대한 미래를 향해 떠나라’는 명령을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했지만 약속의 성취는 더디게만 느껴지는 순간들도 지났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약속’을 성취하려던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더 깊은 고통 속으로 자신들을 밀어 넣던 때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제사’처럼 이해할 수 없는 요청을 받고 ‘혼돈과 어둠’ 속으로 빠져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깊은 물’(슬픔의 눈물) 속에서 ‘생명’을 돌려받은 ‘이사악’이 되기도 합니다. ‘리브가’처럼 자기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할 때도 있습니다. 이사악처럼, 리브가처럼 자녀 양육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이사악처럼 누군가로부터, 심지어 아내와 자식에게 속임을 당하거나 이용당할 때도 있습니다. 야곱과 에사오처럼 우리 안의 통합되지 않은 두 자아로 힘겨워 할 때도 있습니다. 야곱처럼, 라반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누군가를 속이거나 이용할 때도 있습니다. ‘레아’처럼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데’ 상대방은 너무도 쉽게 얻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을 겪습니다. ‘라헬’처럼 자신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인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빼앗겨야’ 하는 그런 상황을 겪습니다. 야곱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신임을 발견하고서도 여전히 변화는 더디기도 합니다. 야곱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요셉처럼 자기 자랑을 늘어놓다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처럼 ‘악’을 꾸미거나 ‘악의 방관자’가 되기도 합니다. 르우벤처럼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남보다 앞장서 ‘정의의 투사’가 되기도 합니다. 요셉처럼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과 시련의’ 터널 속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삶은 통제할 수 없고, 공정하지도 않으며,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순간들을 겪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자신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발견합니다.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관계가 무엇인지, 가족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족처럼, 우리 인생이 어떤 상실의 시기 가운데 있든지,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인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이 심각한 갈등과 불화를 겪더라도 하느님은 각각의 구성원과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만은 ‘우리를 위해’ 장래 일을 미리 마련하시고 행하시는 분임을 ‘아브라함 가족 드라마’는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러한 인간적 결함과 나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처럼 ‘경계’ 안에 떠도는 인생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사랑을, 구원을, 이 세상에 지속적으로 드러내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창세기》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3편>은 ‘수염’, ‘기름’, ‘이슬’이라는 아름다운 ‘그림 언어’로 ‘가족의 화목’을 찬미합니다. 마치 ‘혐오’의 경계 안에 갇혀있던 요셉이 형제를 용서하고, 온 가족이 다시 만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시인은 자기 마음에 ‘이상적인 가족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사는 모습입니다. 그는 이것이 어떤 영적 가치를 가지는지를 ‘그림 언어’를 통해 찬미합니다.

전통적으로 ‘혈연’이 가족의 중심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가족 형태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혈연에서 ‘관계’로, 혈연에서 ‘정서’ 중심으로, 가족의 정의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혈연’에 중심한 전통적 가족관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중심을 이루는 가장 일반적인 조건은 혈연입니다.

사실 요즘 세상에 ‘명절’ 말고 형제들이 한데 모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예외인 경우가 결혼이나 장례 같은 대사(大事)나 특히 별세기념미사의 경우입니다. 별세기념미사를 드리는 날이면, ‘평화의 인사’ 시간에 가장 어르신께 가족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을 하시라고 권합니다. 하나같이 그분들 마음에서 나오는 말씀이 “신앙생활 잘 하고, 형제들끼리 화목 하라.”는 당부입니다.

고대에는 형제들이 한 데 모여 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연합적 경영을 통해 조상의 세습 재산을 보존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혈연)의 확고한 결속력과 연합이 국가 공동체의 힘의 근간이자 근본 질서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족 간의 결속과 연합을 중요시 여기는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에는 가족불화의 후회스러운 모습이 거의 날 것 형태로 전해옵니다. 저 같으면 좀 걸러서 이야기를 썼을 텐데 《창세기》 기자는 용기가 대단합니다. 하느님이 세우신 인류 최초의 가족은 어땠습니까? 아담은 하와에게 자기행위의 핑계를 댔고, 하와는 뱀에게 전가합니다. 뱀도 하느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느님 탓도 있다는 항변입니다.

홍수이야기로 유명한 ‘노아’ 가족은 어땠습니까? 위대한 구원의 여행을 감행한 노아마저도 늘그막에 술타령에 빠져 자식을 저주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칭송하는 아브라함의 가족은 어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의 마지막을 서로 헤어져 살았습니다. 일종의 황혼이혼이지요. 아브라함의 부자관계는 어땠습니까? 이스마엘이든 이사악이든 썩 마뜩치 않습니다.

형제들끼리는 어떻습니까?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심에 살해했습니다. 야곱과 에사오는 장자 상속권을 놓고 경쟁하다 서로 원수처럼 떨어져 살았습니다. 요셉과 형제들도 시기와 질투, 음모와 속임수로 뒤섞인 관계였습니다. 이것이 비단 창세기만의 이야기일 뿐입니까? 우리 가족들은 어떻습니까? ‘향기’ 나게 살고 있습니까?

<133편>은 이런 ‘그림 언어’를 씁니다.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 시편 133:2-3상

요즘은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동양 전통에서 길게 흘러내린 ‘수염’은 남자다운 준수함과 존엄함의 표시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도 성별된 사제로서 지켜야할 규정 중 하나가 ‘수염’을 기르는 일입니다(레위 21:5). 그러니까 옷깃까지 흘러내린 아론의 수염은 단지 남성을 장식하는 모습이라는 차원을 넘어 하느님을 보여주는 한 신성한 모델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다는 것입니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즉 ‘가족의 화목’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보여주는 신성한 한 모델과 같다는 뜻입니다.

또 시인은 밤사이 충분히 내린 ‘이슬’로 신선함과 화려함을 뽐내는 ‘헤르몬 산’의 아름다운 전경을 통해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찬미합니다. 이처럼 수염, 기름, 이슬이라는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닌 ‘그림 언어’를 통해 ‘가족의 화목’이 갖는 영적 가치를 찬미합니다.

더욱이 시인은 수염, 기름, 이슬의 공통적인 특징을 잡아내어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라드’(יָרַד)입니다. 본문에는 ‘흐르는’, ‘흘러내리는’, ‘내리는’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아래로’(to come or go down, descend)의 의미를 갖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시인이 형제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은 이 단어를 통해 하느님께서 형제들이 한 데 어울려 사는 가족공동체 위에 내려주시는 축복, 즉 ‘하느님의 축복’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실제로 수염, 기름, 이슬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 시편 133:3

그곳이란 시온산, 즉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언뜻 듣기에 지금까지는 ‘가정의 화목’을 찬미하다가 갑자기 방향이 틀어진 느낌입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온에서 있었던 ‘계약갱신의 축제’에서 하느님은 계약을 통해 당신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공동체’(하느님의 가정)를 위한 축복과 생명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계약을 맺고 하나의 ‘가족’이 된 이 공동체가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한,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십니다. 또 정기적으로 바쳐지는 ‘제의를 통해’ 하느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구원을 갱신’해 주십니다.

이처럼 시인은 ‘국가 공동체의 기초가 가족’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이 갖는 영적 가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가치는 ‘하느님이 세우셨다’는 데 있습니다. ‘가족의 화목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계약 백성이 된 그들 공동체를 지속시키고, 하느님의 축복을 보존하는 절대적 조건이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이 갖는 이 영적 가치 때문에 <133편>의 시인은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사는 가족 공동체의 관습을 보존하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찬미했던 것입니다.

2독서 《로마서》는 사도 바울로가 가지고 있던 ‘삶의 수수께끼’입니다(로마 9-11장). 그는 하느님의 가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늘 고민이었습니다. 그가 이 수수께끼를 풀면서 내린 결론이 오늘 서신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시지 않습니다. – 로마 11:29

이렇게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점을 확신합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실패가 ‘하느님의 은혜’를 결코 좌절시킬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그는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류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과 《로마서》 이야기를 기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느님의 더 큰 가족을 바라봅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인종, 성별, 문화, 종교, 국가, 이데올로기, 개인적인 자부심의 경계 안에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한 가족임에 눈을 뜨고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별세기념미사에 나온 어르신뿐만 아니라 하느님도 인류가 화목하고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믿기로는 인류의 화목과 평화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도구가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종교가 인류의 화목과 평화에 가장 방해물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히 종교적 폐쇄주의, 배타주의가 그것입니다. 오죽하면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는 없다”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복음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예수님과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평생토록 자식들만을 위하시는 우리 시대 어머니와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래아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예외입니다. 예수님은 활동의 ‘경계’를 넘어서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십니다.

띠로와 시돈은 역사적으로 ‘페니키아’라 알려진 곳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철저히 로마화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일행은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질적인 곳에 발을 들여놓으신 셈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마태오복음》 15장 첫머리의 ‘정결법’ 시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적대적인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군중들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도주입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즉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라고 간청하였다. – 마태 15:22

그녀는 딸을 위해 간청하러 온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특별하게’ 부릅니다.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처럼 “랍비”나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 “주님”이라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결코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칭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메시아’를 뜻합니다. 사실 대화 시작부터 그녀는 자신을 ‘이방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방인인 그녀가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 ‘호칭들’이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일종의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음이 복음이야기 말미에 드러납니다. 아무튼 그녀는 이방인임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진심으로 ‘환대’합니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전개됩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 마태 15:23상

예수님은 ‘무관심’합니다.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슨 이유로 그러시는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의 그런 반응은 그녀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한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냥 놓아드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예수님 일행을 따라 가면서 ‘큰 소리’로 간청합니다. 그녀의 ‘부르짖음’이 그들을 괴롭힙니다. 성가시게 여긴 제자들이 오히려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 마태 15:23하

아무 말이 없으시던 예수님이 드디어 제자들에게 대꾸하십니다. 그러나 듣는 우리의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만드는 답변입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돌보라고 해서 왔다. – 마태 15:24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선택하셨다고 제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아니, 이런 ‘속 좁은 분’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러려면 이 ‘낯선 땅’에 왜 왔습니까? 이 땅에서의 ‘이방인’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일행’이잖습니까?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너무 지나친 도발 아닙니까? 이럴 거면 갈릴래아 지방이나 유대 땅에나 계시지 왜 오신 것입니까? ‘다른 민족’에게는 아니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방인’이나, ‘여성’이나, 다른 민족에게는 아닙니다. 왜 아니어야 합니까? 예수님 역시 우리 시대의 ‘인종주의자’나 ‘민족 우월주의자’와 다를 바 없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경계’ 지어놓은 ‘차별의식과 혐오’로 똘똘 뭉쳐있는 분이란 말입니까? 그녀가 사람을 잘 못 본 거란 말입니까?

예수님의 ‘무반응’에 그녀는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다. – 마태 15:25

그녀는 ‘두 가지 비범한 행동’을 합니다. 마치 ‘예배하듯이’ “다가와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녀가 간직한 간절한 ‘속내의 드러남’입니다. 이 비범한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특별한 신앙과 이해와 끈기’를 보여 줍니다. ‘메시아’가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자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보내졌다’는 고결한 표현입니다(이사 42:1).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자기 같은 ‘이방인과 모든 민족을 위해서도 메시아를 보내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정말이지 그녀가 표현한 믿음은 간단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간청하고 있는 분이 자신의 간청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가진 “주님”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주님”이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호소합니다. 거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도와주십시오!”라고 소리칩니다.

여기서부터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과 그녀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자주 ‘논쟁’을 벌이십니다. 또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질문자들에게 친절하게 응답해 주신 것으로 <복음서>는 기록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 논쟁과 대화에서 예수님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외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논쟁에서 지는 경우’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 괜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복음서>에 보면 여태껏 논쟁에서 예수님을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과 끝까지 맞서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끝까지 예수님과 과감히 맞섰고, 예수님을 이겼습니다. 그만큼 오늘 이야기는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의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논쟁의 포문은 예수님이 여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반응을 시작하셨다’는 점입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며 거절하셨다. – 마태 15:26

예수님이 그녀에게 들려주는 ‘그림 언어’는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법한 비유 그림을 사용하십니다. 집에서 강아지와 함께 있는 아이들을 묘사합니다. 아무리 강아지가 예쁘다 해도 자녀들의 입에서 음식을 잡아채서 강아지에게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겉보기에 이렇게 ‘경멸적인 태도’로 반응하신 것입니까? 본문에는 예수님이 어떤 느낌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인지 얼굴표정이나 목소리 톤 같은 세부사항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모욕적’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그녀 역시 ‘화를 내며 떠나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존심’이든, ‘모멸감’이든, ‘수치심’이든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오로지 ‘딸’을 살려야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살려야합니다.

사실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고, 이방인은 ‘개’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니까 ‘개’라는 호칭은 유대인들에게는 상투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녀를 낮추어 부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오늘날의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너무한 일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그림 언어’는 확실히 그녀의 ‘진심’을 테스트합니다. 그녀가 단순히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믿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예수님은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당신에 대해 ‘믿는 대로’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보기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메시아)로 믿는 사람은 모든 것 위에 예수님을 모십니다. 인종, 성별, 문화, 종교, 국가, 이데올로기, 자부심, 성공, 자존심, 모멸감, 수치심, 실패 등 그 밖의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그림 언어’를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한 것 전부를 실제로 믿고 있음을 이어지는 대답으로 증명해 보입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 마태 15:27

이 대답을 통해 그녀 내면의 믿음과 동기가 드러납니다. 지난주일 복음이야기처럼, ‘물 위로 한 발을 내딛던 베드로’가 보여준 ‘위대한 믿음의 도약’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그림 언어’를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기회’로 바꿔 놓습니다. 먼저 그녀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백성, 즉 자녀들임을 인정합니다. 반면에 그 강아지는 집안에 있긴 했지만 언약의 백성도, 자녀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겸손히 동의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미처 생각지 못한 ‘한 가지 사실’까지 알려드립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빵을 다 먹을 때까지 강아지가 기다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대답입니다. 자녀들이 상 위에서 먹을 때 ‘흘리는 부스러기를 상 아래에서 함께 먹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우선순위를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차례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것까지는 없다는 대답입니다.

특히 그녀는 그 절박한 순간에 여전히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고대근동에서 다른 이를 ‘주님’(주인)으로 부르는 것은 그 함의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함부로 누군가를 ‘주님’(주인)이라 부르진 않습니다. 일단 자신이 누군가를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그를 ‘충성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말은 이미 ‘믿음’을 내포한 호칭입니다. 이렇게 그녀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예수님은 그녀의 ‘주인’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녀는 ‘주인(주님)의 보호 아래 들어간 가족’이나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갖습니다. 한마디로 “맞아요, 나 ‘개’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인인 당신이 책임지세요.” 이런 뜻입니다.

이제 뒤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주님”(주인)이라 불린 이가 ‘책임’을 져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 대표의 명예’와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공동체 대표가 ‘주인’(주님)이라고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는 ‘주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토록 그녀는 ‘현명’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주인)이라 부름으로써 ‘그 날개 아래 들어갔고’, 예수님이 그어놓은 이방인의 ‘경계마저 훌쩍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인류공동체의 대표’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현명한 대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짐짓 당신이 유지해온 ‘경계’를 허물어 버리십니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 마태 15:28a

이전까지는 상황이 정말 안 좋았습니다. 예수님의 머뭇거리시는 행동은 그녀에게 불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주님”이라 부르며 ‘충성을 맹세하는’ 그녀를 당신의 (개에서) ‘가족’(공동체)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한 마디로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여인아! 장하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마지막 대답을 어떤 태도, 목소리, 느낌으로 예수님께 간청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믿음’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장하다”의 그리스어는 ‘메가스’(μέγας, megas)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메가’(μέγα)라는 말을 한 때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나라 3대 통신망 중에 KT가 있습니다. 요즘은 KT가 Olleh로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초고속 인터넷 통합 브랜드로 ‘메가패스’를 썼었습니다.

‘메가’(μέγα)는 ‘위대한’(great), ‘소리가 큰’(large), ‘가장 넓은 의미에서’(in the widest sense), ‘중요한’(important), ‘의미심장한’(significant)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크고’, ‘높고’, ‘거대하고’, ‘강하고’, ‘힘센’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좀 우습지만, 예수님은 대형 확성기를 틀고 소리 지르는 것처럼 덤벼드는 그녀의 ‘믿음’(충성)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했고, 예수님이 그녀의 믿음에 얼마나 탄복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말씀은 그 뒤에 나옵니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 마태 15:28

그녀의 소원은 세상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생명의 구출과 치유, 즉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행동에 대한 간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생명을 살리는 은총의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그 순간, 딸이 나았습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그녀 자신’이 고통에서 풀려났습니다. ‘진짜 치유된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그녀는 강아지에서 ‘하느님의 딸’로 드높여졌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전부 ‘가족사’ 이야기입니다. 1독서 《창세기》 이야기는 이집트 땅의 ‘경계’를 넘어 들어간 ‘가족의 재회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혐오를 사랑’으로, ‘악을 선’으로, ‘미움을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킨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3편>은 ‘가족의 화목’이라는 ‘형제적 사랑’이 ‘하느님의 축복’임을 찬미합니다. 2독서 《로마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좀 더 큰 단위의 ‘가족’을 언급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실패가 ‘하느님의 은혜를 결코 좌절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인류 가족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복음이야기에서 우리는 마귀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을 만났습니다. ‘폐쇄적인’ 종교, 민족, 문화, 성별이 가져다 준 혐오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리는 가나안 여인의 ‘끈질긴 인내심과 위대한 믿음의 도약’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끈질긴 인내와 장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사실 그 여인은 자식들을 자신보다 더 위하시는 우리 시대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어머니들은 그런 마음으로 자식을 위하며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관점을 취하고, ‘구원의 새 가족’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어느 분야에서만큼은 폐쇄적이거나 근시안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더욱이 구원의 새 가족이 된 그 가나안 여인이 중요한 이유는 ‘이방인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느님의 선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만이 ‘선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잘 해서나 공로 때문에 받은 축복이 아닙니다. 1독서 《창세기》로 낭독해 온 ‘아브라함 가족 드라마 시리즈’처럼, 하느님의 은총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믿음 덕택입니다(창세 12:2).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복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이스라엘만이 모든 민족 중에서 하느님의 소유인 거룩한 백성이자 다른 민족을 위해 중재할 수 있는 제사장 나라로 선택되었습니다(출애 19:5-6). 이렇게 이스라엘만이 구원 역사에서 특권적인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2독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인인 우리, 즉 ‘교회가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는 사랑’을 입었습니다(에페 2:19).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덕택에 이방인인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입양될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처음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이방인이었고,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하느님의 원수였습니다(에페 2:11-17). 그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이고, 사랑의 선물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일어난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로마 8:14-15; 에페 2:18).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 깨달음으로 겸손히 서로를 용납하고 형제자매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7).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일에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은 무의미해 졌습니다. 인종과 민족, 성별과 성정체성, 신체조건과 외모, 정치적 지향(이념)과 사회적 신분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찬례를 바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확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 지를 되돌아봅니다. 성찬례는 무엇을 공급받는 시간인지 돌아봅니다. 예수님(성령)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영토, 즉 사람들의 내면에 들어가 ‘경계를 허물고’ 계시는 분입니다. 교회 역시 이 세상에서 ‘차별과 혐오의 경계를 깨뜨리고’, 사람들을 서로 ‘어깨동무하게 하는 도구’로 존재해야 합니다. 성찬례는 바로 그런 힘을 얻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요,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 안에서 깨달았고, 세상 사람들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기억하며 세상에 나아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경계와 차별을 넘어서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창세기》와 《시편》에서 보았던 용서와 화해, ‘인류라는 가족의 화목’이 교회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과 사랑의 실천에 달렸습니다. 부디 우리를 통해 본래부터 한 가족인 하느님 나라가 더 확장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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