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9. 연중19주일/평화통일 기원주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깨달아, 모든 시련을 이기고 마침내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37:1-4,12-28
  • 시편 – 105:1-7,16-22,45
  • 독서 – 로마 10:5-15
  • 복음서 – 마태 14:22-33

연중 19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믿음 – 모든 시공간에 함께하시고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는 힘’입니다.

연중 11주일이래로 지금까지 우리는 1독서로 《창세기》를 낭독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 대변되는 ‘족장들의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 가족 드라마 시리즈’입니다. 이 가족 드라마를 ‘계속 독서’로 이토록 길게 배정한 분명한 ‘신앙적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고 성취해 가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교훈’하려는 목적입니다.

특히 연중 15주일부터 시작된 ‘야곱의 생애’(生涯)는 흥미진진합니다. 태교와 출생, 성장과 ‘장자상속권’을 둘러싼 도피, 처가생활과 타향살이의 설움, 귀향길과 ‘브니엘’에서의 씨름, 인간적인 약점들에도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시고 ‘이스라엘’로 빚으시어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보아왔습니다.

오늘 드라마는 ‘이스라엘(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덧 아브라함 가족 드리마가 ‘최종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의 ‘요셉’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가나안(헤브론)에 살던 한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 경위와 거기서부터 나오게 된 것인지를 추적해 가는 시작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요셉의 이야기를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지는 《시편》으로 노래한 <105편>이 잘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105편>처럼 인간의 ‘시련’(인생, 삶)을 설명하는 관점을 ‘목적론적 해석’(현재가 미래를 위해 존재)이라 합니다. 그의 ‘시련’(현재)은 성취해야 할 ‘목적’(미래)을 위한 ‘수단’(현재)이었다는 뜻입니다. 시작해 보겠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는 시련의 이야기입니다. 정확히는 ‘인생의 풍파’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 일은 요셉이 17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습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살던 ‘헤브론’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많은 가축들을 소유한 그 일대에서 이름난 ‘목축업자’였습니다. 고대에는 ‘장남’이 ‘총애’(寵愛)를 받았고 ‘아버지의 권위’(장자상속권)를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야곱(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유독 ‘편애’(偏愛)했습니다.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힐 정도였습니다. 이 ‘유별난 사랑’ 때문에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샀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에서부터 형제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관계’를 잡아낼 수 있습니다. 상담학에서 말하는 ‘역기능 가정’(逆機能家庭, Dysfunctional family)의 전형이 등장인물들로부터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편애’(偏愛)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도 ‘편애’(偏愛)의 희생양이었는데도 그 일이 반복된다는 점이 ‘아이러니’입니다(역기능 가정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요셉은 아버지의 ‘말벗’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17살이 된 요셉도 형들처럼 ‘목축’ 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해질 무렵이면 형들과 함께 근처 동굴에 양 떼를 몰아넣습니다. 밤에는 동굴 어귀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별을 헤아리거나 피리를 불다 잠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소란스런 울음소리에 잠을 설쳤습니다. 이리 떼가 습격했기 때문입니다. 벌써 양 몇 마리가 희생당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께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구두쇠 같은 성미를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족은 운명공동체였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기에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요람에서 무덤까지 똘똘 뭉쳐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이가 ‘형제’입니다. 사실 ‘형제’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흐’(אָח)는 ‘알레프’와 ‘헤트’라는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글자(알파벳)에서 첫 글자인 ‘알레프’(א)는 ‘힘’을 상징하는 ‘황소’이고, ‘헤트’(ח)는 ‘울타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형제는 서로를 지켜주는 강력한 울타리’ 같은 것입니다. 서로를 보호해주는 사이가 형제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하는 돌출행동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요셉은 형들을 아버지께 좋지 않게 일러바쳤습니다. ‘형제애’에 거스르는 ‘고자질’을 한 셈입니다. 그 일로 형들은 아버지께 크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대신 요셉은 아버지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미운털 박히기 딱 좋은 성격입니다.

게다가 요셉은 ‘꿈쟁이’였습니다. 혼자만 간직하면 좋으련만 철딱서니 없게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형들 앞에서 ‘꿈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창세 37:5-10). ‘공감 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청소년이라는 뜻입니다. 그 일로 ‘더욱’ 미움을 샀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스스로를 가족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철없는 ‘자아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역기능적 자아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야곱)은 요셉에게 ‘심부름’을 보냅니다. “형들과 양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보내서는 안 될 심부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형들은 요셉을 몹시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역기능적 자아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서적으로 1대 10인 상황입니다. 그만큼 야곱이 아들들의 ‘형제애’에 무감각했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튼튼한 샌들을 만들어 ‘요셉의 발’에 신겨 주었습니다.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먼 거리를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천막을 나서던 요셉이 ‘샬롬’이라고 건네던 인사가 그토록 긴 이별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인류학’에서 ‘통과의례’(분리, 전이, 통합)라고 말하는 ‘분리’ 단계가 시작됩니다. 형들을 찾아 나선 요셉은 ‘세겜’을 거쳐 ‘도다인’으로 향합니다. 형들은 들판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달려오는 것을 봅니다. 햇빛에 요란하게 반사되는 ‘장신구’ 때문에 단번에 반가운 얼굴이 아님을 알아차립니다. 미움의 불길이 그들 속에서 일어나 급격히 서로에게로 번져갑니다. 그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 짓을 합니다. 환영받지 못한 방문입니다.

형들은 이미 안 좋은 경험이 있습니다. 요셉이 다녀간다면 아버지께 좋지 않게 일러바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 무슨 말씀을 드리던 아버지는 자신들보다 요셉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이고 칭찬할 것입니다. 아버지께 ‘꾸지람’을 듣는 일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럴 바에는 혼자 잘난 척하며, 따로 노는 동생을 ‘죽이는 편이 낫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형제살해 시도’라는 비극의 시작입니다. 오늘이 평화통일 남북기도주일인데 그들 못지않은 ‘형제살해’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 한반도의 모습이 아프게 포개집니다.

그들은 “저 녀석을 죽여 아무 구덩이에나 처넣고는 들짐승이 잡아먹었다.”고 말하기로 공모합니다. 과연 요람에서 무덤까지 똘똘 뭉쳐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형제들답습니다. 얼마나 동생이 미웠으면 그런 ‘공모’를 했을까요? 장자 ‘르우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기보다는 빈들에 있는 구덩이에 처넣자”고 제안합니다. 나중에 동생들의 분노가 가라앉으면 요셉을 살려내어 아버지께 돌려보낼 참이었습니다.

큰 형의 말을 듣고 동생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형제간의 ‘우애와 증오’가 내면에서 씨름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요셉을 죽임으로써 얻는 유익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열심히 설득합니다.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애씁니다. 아무리 미워도 동기(同氣)이고, 또 아버지가 끔찍이도 위하는 자식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사실 연로한 아버지는 형제들이 ‘우애’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뜻 동의하지 못합니다. ‘우애와 증오’라는 ‘상충된 감정’으로 마음이 복잡합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원망스럽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말 한마디 곱게 건네지 않으면서 요셉에게는 온갖 사랑을 퍼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동생을 향한 ‘시기심’ 때문에 괴롭습니다. 동생이 다녀간 다음에 맞이하게 될 미래도 두렵습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공모가 진행되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요셉이 도착합니다.

형들은 다짜고짜 요셉의 옷을 벗겼습니다. “옷을 벗겼다”는 것은 그에게 ‘정서적 수치심’을 안겨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근처 ‘구덩이’로 끌고 가 처넣었습니다. ‘신체적인 학대’입니다. 한 길도 넘는 깊은 구덩이였습니다. 아래서 위를 쳐다보는 데 서글프게도 하늘은 너무나 맑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올라올 수 없습니다. 물 없는 빈 구덩이였다는 것을 통해 아직 ‘건기’(乾期)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둘러 앉아 음식을 먹습니다. 정말 잔인합니다.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이 바람을 타고 들립니다. 일단 구덩이에 처넣고 뒷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할 참이었는데 괴롭습니다. 누구도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다는 것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그들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서적 역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책감’을 느낀 ‘유다’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죽이는 대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 ‘물질적 이득’을 취하자고 제안합니다. 그 제안이 그나마 그들 마음을 짓누르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형들에게 거절당해 ‘구덩이’에 처넣어졌을 때 요셉은 이미 ‘자아의 죽음’을 겪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발’을 동동 구릅니다. 살려달라고 가슴 아프게 애원하던 그의 ‘몸짓’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전례독서>에는 공통소재로 ‘발’이 클로즈업 됩니다. 1독서 《창세기》는 형제로부터 버림당하는 요셉의 ‘절규하는 발’입니다. 《시편》은 차꼬에 채여 종으로 팔려가는 요셉의 ‘비참한 발’입니다. 《로마서》는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발’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베드로가 내딛는 ‘믿음의 발’입니다. 이 ‘발’이 종국에는 누구에게로 인도하는 상징인지는 여러분도 생각하면서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구덩이’에서 끌어올려집니다. ‘은 이십 냥’(소년 노예의 몸값)에 ‘이집트’로 가던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립니다. 형들에게 시기, 질투,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가는 요셉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팔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그의 ‘발’은 상처로 이미 피가 나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이 장면에서 형제처럼 여기던 ‘가리옷 사람 유다’에게 팔리시는 예수님이 겹쳐집니다. 공교롭게도 파는 일에 앞장 선 사람의 ‘이름’이 같습니다.

이제 요셉은 ‘통과의례’의 ‘분리’ 단계를 거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전이’(전문용어로 ‘리미널리티’(liminality)라고 합니다) 단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격리’되어 ‘시련’을 통해 ‘자기 존재를 변형’시켜야 하는 공간으로 들어섰습니다. ‘과거의 자신’(옛 자아)을 지우고,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어중간한 존재, 익명적이고 비가시적인 존재로 취급당하는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요셉이 ‘전이’ 단계 속에서 자신을 변형시켜 가는 과정은 오늘 이야기에는 없습니다. 비극적으로 팔려가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대신 《시편》으로 노래한 <105편>에 ‘전이’와 ‘통합’의 단계가 압축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시편 105:16-18). 그 단계들이 다음 주일 1독서와 연결되니 미리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요셉은 파라오의 신하인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갑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이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억울하게 팔려와 시련을 겪는 요셉의 삶에 개입하시어 돌보아주십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당신의 구원 섭리를 이루셔야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참소로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창세 39:7-20). 그 옥살이는 더 깊은 차원에서 그를 ‘변형’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내면’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자유가 없는 삶, 즉 ‘노예’로 살면서 좀 더 깊이 자신의 ‘불편한 진실들’을 보았습니다. 어리석게 살아온 자신을 세월이 지나면서 온전히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을 고자질하고, 자기중심으로 살며, 기고만장했던 그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는 체험을 합니다. 대신 새로운 요셉이 내면에서 태어나 튼튼히 자라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옥살이의 시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창세기》는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다”(창세 39:2,21,23) “한결같은 사랑을 쏟으시고 은총을 베푸시었다”(창세 39:2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요셉은 어린 시절의 ‘꿈’을 되찾았습니다. 사실 ‘꿈’은 절망의 이겨내는 원천입니다. 더욱이 ‘꿈’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지혜’를 하느님께 선물 받았습니다(창세 40:8-22; 시편 105:19). 결국 ‘꿈 해석의 지혜’는 ‘전이’ 단계의 ‘시련’을 통해 ‘내적 존재 변형’(성숙한 자아)을 완성한 그를 ‘파라오’ 앞으로 데려가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창세 41:9-14; 시편 105:20). 그 때 나이 ‘서른’ 즈음입니다(창세 41:46). 마침내 비극의 연속처럼 보였던 그의 삶은 ‘대반전’을 맞이합니다.

어느 날, 파라오는 아무도 ‘해몽’해 수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창세 41:1-8). 파라오 앞에 선 요셉은 ‘하느님이 주신 지혜’로 해몽하며, ‘기근’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구체적인 방안까지 내놓습니다(창세 41:16,25-36; 시편 105:19). 요셉의 ‘신통력’(지혜)에 반한 파라오는 그를 이집트의 ‘통치자’로 세웁니다(창세 41:38-44; 시편 105:21-22). 돌보아주신 하느님의 은총 덕택에 요셉은 천신만고 끝에 이집트의 2인자에 오릅니다. 이리하여 ‘시련’을 통해 ‘성숙한 자아’(내적 존재 변형)를 완성한 요셉은 ‘파라오’로 대변되는 더 큰 사회에 ‘통합’됨으로써 그의 인생에 부과된 ‘통과의례를 완성’합니다.

요셉은 풍년이 든 칠년 동안 곡식을 저장하며 ‘기근’에 대비합니다. 온 천하는 그의 꿈 풀이처럼 되었습니다(창세 41:47-57). 더욱이 하느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시편 105:16-17). 식량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만납니다(창세 42:6-7b). 형제들은 요셉에게 절을 합니다(창세 42:6; 43:26). 그의 어릴 적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창세 37:6-9).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절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요셉은 이미 ‘존재 변형’을 이루어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통차자요, ‘식량’이라고 하는 세계의 ‘생명줄’을 쥐고 있던 ‘권세가’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형제애’를 시험하고서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주일 독서에서 낭독될 것입니다.

《시편》은 <105편>에서 발췌했습니다(보다 자세한 해설은 2020. 7.26. 연중 17주일 설교 《시편》 해설을 참고하십시오).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선택과 민족형성사’, ‘이집트 종살이와 출애굽’, ‘광야 여정과 가나안 정착’을 ‘성찰’하며 바치는 감사 찬미입니다. 특히 요셉이 겪은 시련의 과정과 결과를 압축적으로 요약합니다. 그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일어난 일임을 감사하며 찬미합니다. 요셉의 ‘시련’조차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셉도 훗날 형들과 재회하면서 그 모든 일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셨다’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창세 45:5-8). 하느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이었다는 뜻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주권자’이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섭리’였습니다. 요셉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선한 도구’였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 삶을 성찰합니다. 요셉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련’들 속에서 ‘꿈’을 회복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시련’들을 통해서 청소년 시절의 ‘꿈’을 되찾았고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 시련들 속에서도 ‘하느님을 의지’(믿음)하면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점점 깨달아 갔습니다. 마침내 모든 시련을 이기고(통과하고), 세상에 ‘생명’을 선물하는 ‘자비(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된 그는 결코 잘난 척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에게조차도 ‘생명’을 선물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처럼 ‘고난의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손 내밀어 살려냈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그가 그렇게 변화를 완성하기 전, ‘인생의 풍파’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초입을 보여줄 뿐입니다. <105편>은 그가 시련 속에서 ‘믿음과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종국에는 ‘자비(사랑)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 그 과정과 결과를 압축적으로 들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시련’을 통해 ‘믿음과 희망의 사람’ 사람으로 변화된 인물입니다. 어떤 이는 십자가에 수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형’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의 삶을 묵상해 보면 어떤 ‘고난’(결과)은 그 ‘이유’(원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그는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의 ‘편애’, ‘고자질’, ‘돌출행동’, ‘꿈 자랑’, ‘공감능력 부족’, ‘자기만 아는 교만한 마음’이 ‘원인’이 되어 형들에게 미움(결과)을 샀고, 팔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고난을 설명하는 관점을 ‘인과론’(원인과 그에 다른 결과,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고난’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가령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이 경호대장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경우입니다(창세 39:7-20). 그 고난은 그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 초래한 결과가 아닙니다. 그가 원하고 선택해서 받은 고난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시련에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련들’을 통해 배움을 얻고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변화’, 이것이 시련을 겪던 그가 행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권’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도 요셉처럼 ‘시련’을 겪습니다. ‘누구도 시련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시련을 ‘극복’합니다. 분명 어떤 고난(결과)은 이유(원인)를 알 수 있지만(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성격적 결함이 원인입니다), 어떤 고난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련의 종류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고난’ 때문에 내 삶이 ‘허물어지는’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요셉처럼 ‘믿음’을 통해 ‘존재 변화의 길’로 가는 ‘선택’을 할 것인지의 그 ‘마음의 선택권’만은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요셉의 시련 이야기는 세상의 그 어떤 힘도 ‘하느님의 의지’를 막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모략’이나 ‘방해’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인생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은 관철됩니다. 심지어 ‘배신’이나 ‘불행’처럼 보이는 ‘시련’조차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오른손은 우리가 처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함께 하십니다. 그 상황이 우리 눈에 유리하게 보이든 아니면 복음이야기의 제자들처럼 불리하게 보이든 이것이 ‘진실’입니다.

오늘 ‘시련’ 속에 있습니까? 다시 주님을 향한 ‘믿음’을 곧게 세우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소유인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답게 ‘믿음의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우리는 ‘목적’ 없이 태어난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겪는 시련의 이유를 미쳐 다 헤아릴 순 없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실 것이고, 반드시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다시 ‘믿음’을 선택하고 용기를 내어 일어나십시오. 오랜 장마와 홍수로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의 햇살’을 선물하기 위해 오늘도 신비스럽게 우리 삶에 개입하고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전하러 가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 <구약성경> 독서가 전하고자 하는 요점은 시련(고난)을 통해 자신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켜간 요셉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당신의 ‘섭리와 주권’대로 빚어 가신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비극마저도 선용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본기도>처럼, “시련 속에 있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합니다.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깨달아 모든 시련을 이기고 빛나는 인생이 되라”고 용기를 줍니다.

이전 이야기들보다 훨씬 복잡한 방식이지만, 어떻게 하느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 계획’(구원의 역사, 후손과 약속의 땅을 주심)을 성취해 가시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요셉을 통해 세상살이와 우리 삶의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와 주권’ 속에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성경> 독서를 통해 역사를 주관하시고 비극마저도 선용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만을 강조하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 특히 1독서 《창세기》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삶을 묵상하면서 지금도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떠올립니다. 분명 하느님은 <105편>이 노래하듯이 역사와 우리 삶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역사와 삶의 주관자’시라 하더라도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사회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면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억울하게 팔려가는 요셉처럼, ‘고난당하는 이 시대의 요셉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의와 자유를 갈망하는 요셉들’, ‘도움을 간청하며 눈물짓는 요셉들’을 기억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 진실을 <구약성경> 독서로부터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반쪽짜리 묵상입니다. 다음 주면 ‘최종회’이지만, 묵상할수록 깊은 통찰로 이끄는 흥미진진한 가족 드라마 시리즈입니다.

2독서 《로마서》는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한 때 열정을 바쳐 헌신했던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살아있는 믿음 사이의 구별을 명백히 합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로 친히 마련하신 의’(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인간들이 시도하는 의’(율법에서 오는 의) 사이의 대조가 뚜렷합니다(5-8절). 마치 법정에서 증인이 증언하듯이 둘 사이의 대조를 여럿 제시합니다. 자신의 증언을 증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자유롭게 인용합니다(레위 18:5; 신명 30:12-14).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증언, 즉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완성되었다는 증언을 통해 유대교로부터 사실상 돌아섰습니다.

바울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의’(구원)를 얻는 방법을 간단명료하게 교훈합니다(9-13절).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 로마 10:9-1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즉 ‘구원’은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바울로는 <구약성경>을 자유롭게 인용합니다. 먼저 ‘믿음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로마 황제로 대변되는 세상의 권력가가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주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삶의 최고자리를 내어드린 세례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순종과 경배를 바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속죄)과 부활’(생명)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믿음의 내용입니다.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 각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단지 ‘지적 동의’(머리)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가슴)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입’으로 고백, 즉 ‘행동’(손발)으로 옮겨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왕궁’에 거하는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입술(행동)의 고백’을 동반해야 합니다. ‘고백’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믿음’ 없는 고백 역시 거짓입니다. 한마디로 마음과 입술은 하나여야 합니다.

믿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죄용서’와 ‘하느님의 자녀 됨’과‘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이사 28:16).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차별 없이 ‘구원’을 받습니다(요엘 2:32).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습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14-15절). 어쩌면 당연합니다. 바울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생기게 하는 단계를 부름, 들음, 전도, 파견으로 나누어 그 관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단계를 거쳐서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성찬례는 우리를 전도자로 파송하는 ‘사명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마치 바빌론 포로생활이 끝났다고 ‘해방의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그 전령처럼(이사 52:7),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의 즐거움과 자랑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 자유의 길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용서와 하느님의 자녀 됨과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 됨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고개를 숙여 여러분의 ‘발’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발’로 만드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을 바울로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복음이야기 《마태오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둠과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위로하시고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일으켜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마르코》와 《요한복음》에도 평행본문이 전해집니다(마르 6:45-52; 요한 6:15-21). 모두 ‘오병이어의 기적’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독특한 점은 ‘베드로’에게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엄두도 못 낼 때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음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유대-그리스도교 공동체인 ‘마태오교회’가 ‘친(親) 베드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의심’으로 인해 실패합니다. 그의 믿음도 ‘불완전하고 부실했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마태오는 이런 차이와 실패하는 베드로를 기록했을까요? 마태오는 ‘어둠과 풍랑’으로 대변되는 ‘환난과 박해시절’을 살던 ‘자신의 작고 연약한 공동체’를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제자들이 타고 가던 그 ‘배’를 통해 ‘교회’란 무엇인지(그 안에 누가 계셔야 하는지)에 대해 교훈하고 싶었습니다. ‘하늘나라 항해’ 중인 ‘제자공동체’(교회)가 시련 속에서 간직해야할 ‘믿음’에 대해 교훈하고 싶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회 초기부터 ‘배’(船)는 ‘교회’를, 성난 파도 일렁이는 ‘어두운 바다’는 ‘세상’을 상징해 왔습니다. 교회는 어두운 바다, 즉 ‘죄악과 죽음의 물’에 빠진 이들을 ‘생명선’(生命船, 구원의 방주)에 건져내어 ‘영원한 평화의 항구’(천국)에 도착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처럼, 교회도 때로는 ‘환난’과 ‘핍박’이라는 ‘역풍’을 만나 항해 중에 ‘시련’을 겪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배’는 항상 ‘항해 중’입니다. 세상에서 불고 있는 ‘악’이라는 ‘바람을 거슬러’ ‘오늘도 항해 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이 ‘죄의 밤’은 깊어가고, ‘악의 바람’(환난과 핍박)은 거세며, ‘죽음의 성난 물결’이 높이 설렌다하더라도 교회는 ‘항해’하는 일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배의 존재 목적은 ‘항해’하는 데 있는 것이지 항구에 ‘정박’(碇泊)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경험했다시피 세상에는 교회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어둠과 풍랑’이라는 ‘시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교회라는 ‘믿음의 배’는 자신들을 ‘찾아와주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어떤 ‘어둠과 풍랑’ 속에서도 결코 ‘난파’되지 않고 ‘영원한 평화의 항구에 도착’할 것입니다. 더욱이 참된 제자의 ‘믿음’이란 삶의 ‘환경’(어둠과 풍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온전히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모름지기 ‘예수 스승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어떤 ‘어두운 시련의 바다’를 지나더라도 ‘구원의 필요는 충족’되고, ‘선교의 사명은 완성’될 수 있습니다.

분명 우리의 인생항해도 시련, 즉 ‘어둠과 풍랑’으로 인해 ‘두려움과 의심’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수제자’로 불리던 베드로도 ‘두려움과 의심’으로 실패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일에 실패합니다. 완전해 보였던 우리의 ‘믿음이 불완전하고 부실하다’는 점이 그 ‘시련’ 속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렇더라도(작은 믿음임이 밝혀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베드로처럼 다시 주님을 향해 ‘믿음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곁에, 우리 삶의 모든 곳에 팔만 뻗으면 닿는 곳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손을 붙잡아주시고’ 살려주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우리 교회를 붙잡아주십니다. ‘영원한 평화의 항구’인 천국의 항해, 제자의 여정을 가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향한 ‘큰 믿음’, ‘강한 믿음’은 필수입니다. 특히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꾸준히 제자의 길을 가게 하는 ‘엔진’입니다. ‘배’로 비유되는 우리 교회가 ‘어둠과 풍랑’이라는 ‘시련’을 이기고, ‘영원한 평화의 항구’에 도달하게 하는 ‘힘’은 ‘믿음’입니다. 마태오는 그것을 교훈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평화통일의 항구’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오늘, 한국의 모든 교회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배경은 헤로데의 잔치와는 너무나 비교되는 오병이어의 하늘잔치의 기적이 있은 후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우십니다. ‘재촉했다’는 말은 제자들이 ‘머뭇거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강제로’(억지로) 군중들로부터 떼어놓아 그들이 배에 타도록 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그렇게까지 하신 것일까요? 오병이어의 표적(기적)을 전하는 《요한복음》에 따르면 군중들은 예수님께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요한 6:14-15). 제자들도 군중들의 그 같은 심리에 휩쓸리는 낌새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셨습니다. 정치적 메시아가 되려고 ‘성육신’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 군중들을 돌려보내십니다. 아마 군중들은 쉽사리 흩어지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닙니다. 군중들은 오병이어에 담긴 그 ‘생명체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에 대해 오해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혼자 조용히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때의 예수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혼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헤로데’가 군중들을 몰고 다니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마태 14:2)는 말을 들으시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생각할 시간”(기도할 시간)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여우 같은 헤로데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감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육로로 따라오는 군중들 때문에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의 뜻과 속성을 알려주는 ‘특별한 계시의 공간’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도 ‘산’이었고,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께서 ‘하늘나라 백성의 자격요건’을 가르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마태 5-7장). 또한 ‘산’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욕심, 욕망, 애착, 집착, 속박, 번뇌, 의혹)을 넘어선 ‘지혜와 평화를 배우는 장소’입니다. 어려운 때의 피난처이시며, 힘과 도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신성한 장소’입니다(시편 125:2). 은유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과 자기 자신과 가까워지는 곳입니다. 우리가 말입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께서는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넘어서야 할 세상’이 많았던 것일까요? 《마태오복음》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두 곳에서 전해줍니다. 한 번은 오늘 본문이고, 다른 한 번은 ‘게쎄마니에서의 기도’입니다(마태 26:36-44). 둘 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바치신 기도입니다.

한편,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던 제자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떨어져 있었던 것일까요? 원문에 따르면 ‘많은 스타디온’입니다. ‘스타디온’(στάδιον)은 길이의 단위입니다. ‘1스타디온’은 약 190m 정도입니다. 육상 트랙이 있는 큰 규모의 경기장(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Jamsil Olympic Main Stadium)을 부를 때 ‘스타디움’(Stadium)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스타디온’에서 유래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배를 저어 간 거리가 ‘10여리쯤’(요한 6:19)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한 가운데까지 배를 저어 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에는 “바다 한 가운데”라고 되어 있습니다(마르 6:47).

지난 성지순례 때 이틀에 걸쳐 ‘갈릴래아 지역’을 돌아다녔습니다. 당연히 갈릴래아 호수도 가 보았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큰 줄이야. 과연 ‘바다’라 불릴 만했습니다. 실제로 영어표기도 ‘갈릴래아 바다’(Ses of Galilee)입니다. 남북으로는 약 21km, 동서로는 약 11km, 둘레가 63km에 이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호수’라 불러야 할까요? ‘바다’라 불러야 할까요?

‘갈릴래아 호수’(바다)에는 20여 종의 물고기가 삽니다. 세 종류의 물고기가 식용으로 쓰이는데, 그 중에 이름 하여 ‘베드로 물고기’도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바다)를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거의 모든 식당에서 이 물고기 튀김을 내놓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저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것보다 많이 잡히는 물고기가 ‘정어리’입니다. 정어리는 ‘바닷물고기’입니다. 그렇다면 ‘호수’가 아니라 ‘바다’일까요? 인천 ‘월미도’에서 ‘영종도’ 가는 배를 탈 때보면 ‘갈매기’에게 주려고 ‘새우깡’을 삽니다. 갈릴래아 호수(바다)에서도 선상 예배를 드리려고 배를 타면서 갈매기에게 주려고 ‘피타(pita) 빵’(속이 비어 있는 일종의 공갈빵)을 삽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영락없이 ‘바다’ 같습니다. 그런데 ‘물맛’은 하나도 안 짭니다. 도대체 뭐가 맞지요?

사실 바다와 호수로 나누는 것은 지금 우리의 개념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안 그랬습니다. 어차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라 부를지, ‘호수’라 부를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얌’(יָם, yam)이라 불렀습니다. 지중해도, 사해도, 갈릴래아도 전부 ‘얌’입니다. 다만 히브리어로 ‘얌’이라 기록한 곳은 ‘바다’라 번역했고, ‘얌’이라 되어 있지 않은 곳은 ‘호수’라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갈릴래아 바다’(Ses of Galilee, 지도에는 Yam Kinneret)라 부르기도 하고, ‘갈릴래아 호수’(겐네사렛 호수, 루가 5:1; 티베리아 호수, 요한 6:1)라 부르기도 합니다. 전부 ‘얌’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솔로몬왕이 세운 ‘성전’에 가면 ‘제사장’이 몸을 씻는데 사용할 ‘약 45톤 이상의 엄청난 양의 물’을 담아놓은 ‘큰 저수조’(대야)가 있었습니다(열왕상 7:23-26). 그것을 뭐라 불렀냐면 ‘바다’라 불렀습니다. 왜 ‘바다’라 불렀을까요? 히브리어로 ‘얌’(יָם, yam)이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바다’는 아닙니다. ‘갈릴래아 바다’도 오늘날의 우리 개념을 적용하자면 ‘민물 호수’입니다. 고대에는 이런 개념보다 “물이 많이 모인 곳”을 가리켜 ‘얌’이라 불렀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갈릴래아 얌’입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던 제자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평소 같으면 벌써 건너편에 당도했어야 했습니다. 웬일인지 그들은 밤이 새도록 여전히 ‘갈릴래아 얌’ 위에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역풍’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바다)는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수면도 지중해 보다 –211m 정도 낮습니다(참고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은 ‘사해’로 –423m입니다). 이런 지형적인 영향으로 밤에는 공기가 냉각되어 갑자기 ‘돌풍’이 불거나 북쪽 ‘헤르몬산’에서 불어오는 찬 공기와 남쪽 요르단 골짜기의 뜨거운 공기가 만나 급작스럽게 ‘폭풍우’가 휘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들이 탄 배도 이 ‘역풍’을 만나 ‘파도’(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습니다. 그 ‘얌’(많은 물)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들이 4명이나 타고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바다’(얌, yam)의 상징은 좀 무시무시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겪는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상징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대 이스라엘은 주로 땅에서 양과 염소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낯설 뿐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의 장소’였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의 사람들은 이런 ‘바다’를 보면서 ‘괴물 신이 산다.’는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은 그 ‘괴물 신’을 ‘얌’이라 불렀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바다에는 ‘용왕이 산다.’고 믿던 것과 같은 차원입니다. 무사항해를 기원하며 ‘인당수’(印塘水,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에 처녀를 ‘인신공희’한 《심청전》도 있습니다.

그 ‘괴물 신’은 바다 깊은 곳에 엎드려 있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오면 ‘풍어’를 선물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나, 죄인이 건너려고 하면 ‘광풍’이 불게 합니다. 구약성경의 요나 이야기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요나 1:4-6,14-16). 온갖 몸부림을 쳐서 배를 뒤집고 바다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민간 신앙이 고대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고대 바벨론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그 ‘괴물 신’, 즉 ‘어둠과 혼돈의 용’을 ‘티아마트’(Tiamat)라고도 주장합니다. 이 ‘티아마트’의 영향이 그리스신화에서는 ‘포세이돈’으로, 로마신화에서는 ‘넵튠’(Neptune)으로 전해집니다. 구약 학자들도 이 ‘티아마트’의 영향이 ‘라합, 괴물, 레비아단, 큰물고기, 용(뱀), 악어’ 등의 이름으로 《성경》에 표현된다고 주장합니다(욥기 26:12; 시편 74:13-14, 148:7; 이사 27:1, 51:9; 에제 29:3, 32:2).

‘바다 신’은 인간보다 힘센 존재이기에 항해하는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구약>은 ‘야훼’ 하느님이 ‘바다를 정복하신 전능하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의 장본인인 바다의 신을 제압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바다’를 다스리시고 징계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아래의 구절들이 그런 예입니다.

‘들끓는 바다’를 다스리시며 파도치는 물결을 걷잡으십니다, – 시편 89:9

야훼여, 당신은 팔을 벌떡 일으키십시오. 그 팔에 힘을 내십시오. 옛날 옛적에 하셨듯이 팔을 일으키십시오. ‘라합’을 찢던 그 팔을, ‘용’을 찔러 죽이던 그 팔을 일으키십시오. -이사 51:9

주께서 말을 타고 ‘바다 위’를 달리시니 바다 큰 물결이 들끓습니다. – 하바 3:15

이런 배경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복음이야기를 다시 봅시다. 제자들은 ‘절망’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깊은 곳으로 데려가려는 ‘바다 신’에 맞서 사투를 벌였지만 점점 지옥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4시쯤’되어, 그러니까 그 ‘절망의 시간’에 예수님께서 “물(바다, 호수라는 뜻의 ‘쌀라싸’, θαλάσσα) 위를 걸어서” ‘사투’ 중인 그들에게 오십니다. 얼마나 급하셨던지 “물(바다) 위를 성큼성큼 걸어서 오셨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그 시간’에야 찾아오신 것일까요? 좀 더 일찍 찾아오셔서 제자들(교회)을 구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문득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시간도 우연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다.’ 우리의 시간표와 주님의 시간표는 다르다는 점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삶이 고생스럽고 사정이 절박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한 것 같은 ‘캄캄한 밤’도 있었습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착각이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분명히 찾아오셨고, 또 도와주셨습니다. 물론 제가 요청하고 원하던 그 시간과 방법으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은 ‘저를 위한 가장 적절한 시간과 방법’으로 찾아오시어 도와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제 시간표와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과 방법’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를 의탁하며 오늘도 기도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진실입니다. 주님은 어느 시간, 어떤 방법이어야 우리의 ‘믿음’을 일깨워주고, 주님의 은혜임을 알아차리게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새벽 4시’라는 시간은 너무 늦은 것 같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주님의 은혜’를 깨우쳐주실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간입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방법은 ‘유령’으로 오해받기 쉬운 방법 같지만, 그 방법이야말로 ‘제자들의 믿음’을 한껏 키워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시련 속에 있을 때, 우리의 기도대로 당장 응답이 없다고 낙담할 일이 아닙니다. 좀 더 인내하는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전능하신 주님’은 우리와 만나실 가장 적절한 시간, 적절한 방법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적절한 시간, 적절한 방법으로 오시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 진실을 알 리 없는 제자들은 “유령이다!”라고 소리칩니다. 여태껏 물 위를 걷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먼저 “물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흔히 우리는 이 장면을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내신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닙니다. 마태오공동체에 속해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 마태 16:16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차리고 바치는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이야기는 그 고백이 있기기 전, 이미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혀줍니다. 언급한 것처럼, ‘바다’(얌)는 ‘세상’을 상징하고, 또 인생에게 주는 근본적인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바다를 다스리시고 정복하신 분’이라 곳곳에서 증언합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그 ‘물(바다) 위를 걸으시는 분’, 즉 ‘바다를 이기신 분으로 나타났다’고 들려줍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세상에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가져오는 모든 세력을 이기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힘과 하느님의 힘은 같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야기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정수’(精髓)입니다. 복음이야기가 아래의 ‘신앙고백’으로 이 사건을 끝맺는 이유입니다.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 마태 14:32-33

우리 생각으로는 좀 과한 신앙고백이다 싶을지 몰라도 제자들이 이렇게 신앙고백 할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빈부의 대물림’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소득별 사교육비 격차로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는 이젠 없고, 대부분 강남에 사는 부자 집 자녀들이 소위 말하는 명문대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주창한 것처럼, ‘사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가장 우수한 기제라는 ‘문화자본’의 병폐가 점점 우리사회를 공고히 점령하고 있어서 걱정스럽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1독서 《창세기》 요셉의 경우처럼,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는 일을 당연시했습니다. 아버지가 ‘목축일’을 했으니 아들도 ‘목축일’을 물려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면 자녀도 목수 일을 물려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자들도 이런 문화적 사고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이미 ‘바다와 바람을 이기신 분’입니다. 제자들은 ‘물(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바다를 이기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아버지처럼’ 일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넓게 말하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제자들은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배 가까이 다가오시자 겁에 질려 “유령이다!”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당시 민간신앙을 따라서 ‘바다의 신’인 ‘티아마트’(또는 얌신)가 나타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을 헤치려고 ‘역풍’과 ‘파도’(풍랑)가 일게 하더니, 급기야 자신들을 끌고 들어가려고 “물 위를 걸어서 나타났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정말 기절초풍할 광경입니다. 그 때 한 음성이 거센 바람소리를 뚫고 들려옵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 마태 14:27

저는 이 음성이 우리 내면에서 늘 들려오기를 기도합니다. ‘나다’(I am)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실 때 주로 사용하는 표현(출애 3:14)이라고 지난 부활절기 설교 때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바다의 신’을 이기시고, 세상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으로 거기 서 계신 분임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그렇게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 바다’(호수)를 건너기 바로 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은 광야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먹이시던 ‘하느님의 생명의 일’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지금은 ‘물 위로 걸어오심’으로써, 즉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의 바다를 이기심’으로써 인생들에게 ‘평안’을 가져오시는 ‘하느님의 일’을 보여주시는 중입니다.

그런 다음 “용기를 내어라”고 명령 하십니다. 원문에 쓰인 그리스어 동사 ‘싸르쎄오’(θαρσέω)는 “안심하여라.”가 아닙니다. 그 단어는 “용기를 내어라, 기운을 내어라, 담대하여라.”입니다.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겁낼 것 없다.”라고 명령하십니다. ‘유령’이라는 그런 ‘미신’ 같은 생각은 내버리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제자들은 그 목소리를 듣고 다소 ‘안심’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풍랑은 거셌지만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배에 타고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 됩니다. 이전처럼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면 잔잔해 질 것입니다(마태 8:23-27). 하지만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오직 마태오에만 전해지는 특수 자료입니다. 갑자기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 마태 14:28

“주님!”이라는 그의 말은 분명 ‘의심’보다는 ‘확신’에 가깝습니다. “과연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처럼 일하시는군요.”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어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라는 요청입니다. 대단한 확신이자 믿음의 도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하고 감격했으나 그런 요청까지 할 엄두는 못 냈습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반응은 1대 11로 극명하게 갈라졌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봅니다. 우리도 ‘물 위’를 걷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을 이기고 싶습니다. 우리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을 느낍니다. 물론 그 일은 입술의 고백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베드로를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벌써 한 발을 물에 담갔습니다. 예수님도 그를 꾸짖거나 말리지 않았습니다. “오너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짧은 순간, 자기 생각(이성)과 싸워야 했습니다.

불가능해! 어떻게 물 위를 걸어! … 아니, 오라잖아! 틀림없이 예수님 목소리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입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무모(無謀)하다’고 말하겠지만 그는 ‘믿음의 도약’을 합니다. 정말 위대한 결단입니다.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것을 의탁한 채 옆으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습니다. 배를 짚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얼음판’에라도 내려 선 듯 그는 ‘물 위’에 섭니다. 어둠 속인데도 예수님께로 나 있는 ‘투명한 길’이 보입니다. 다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 길을 밟고 예수님께로 걸어갔습니다. ‘믿음’은 그로 하여금 ‘물 위’에 있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예수님만 자연법칙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예수님 가까이 걸어갔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갔다”고 할 때의 그 ‘물’(water)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휘도르’(ὕδωρ)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셨다”고 할 때의 ‘물’(바다, 호수라는 뜻의 ‘쌀라싸’, θαλάσσ)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마태오는 자신만이 갖고 있는 이 자료에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일을 베드로도 ‘완전 똑같이 했다’고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웠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잠시였습니다. 예수님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바로 앞’까지 갔던 그가 ‘거센 바람’(높은 파도)으로 ‘눈’을 돌리자(얼굴을 돌리자) ‘무서운 생각’이 치고 올라왔습니다.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순식간에 그는 ‘얼음판’이 깨진 듯 “물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여기 ‘물에 빠져들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카타폰티조’(καταποντίζω)는 ‘바다에 빠지다’(to throw into the sea)는 뜻입니다. ‘의심’이야말로 ‘물(바다, 두려움과 공포와 혼돈) 아래’로 그를 끌어당기는 ‘괴물’이었습니다.

실패하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우리도 처음에는 믿음으로 잘 시작하지만 중간에 실패하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을 때는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문제들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 위’를 걷습니다. 하지만 문제들에 마음이 빼앗길 때는 더 깊이 빠져듭니다. 쉽사리 바뀌지 않는 ‘상황’ 때문에 조급해 하고,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에 ‘의심’을 품는 순간, 우리는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듭니다. 자기 마음대로 문제가 해결될 시간과 방법을 정해 놓고 접근하다가는 오히려 그 문제들에 더 깊이 점령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한 곳을 바라보는 ‘충성’입니다. 두 얼굴이나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둘 이어도 초점은 한 곳, 즉 주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어부’로 살아왔기에 물에 빠지는 일을 평소에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수영 실력으로 버텨낼 수 있는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처럼 그는 성난 파도에 휩싸여 물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갔습니다. ‘죽음의 문’이 막 열리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라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 한 마디면 됩니다. 그는 비록 실패했지만 예수님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이 그의 위대함입니다. 저는 실패한 베드로가 참 좋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의심’으로 흔들리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처럼 진실하게 ‘주님을 부를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면 됩니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십니다. 손을 내밀면 닿을 정도로 베드로가 예수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는 뜻이고, 구원의 손길은 결코 더디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죽음의 문’은 소득도 없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 마태 14:31

이것이 어디 베드로만의 문제겠습니까? 우리도 믿음이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약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의심’을 품기도 합니다. ‘의심’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디스타조’(διστάζω)입니다. 둘(two)이라는 뜻의 접두사 dís와 자세(stance)라는 뜻의 stásis의 합성어입니다. 두 길로 가고자 하는 ‘이중적인 자세’,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둘로 나누어서 어느 하나를 붙잡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가 ‘의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약한 믿음’을 가진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다음 주일 복음이야기에서 만나게 될 ‘가나안 여인의 장한 믿음’이 극명하게 비교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꽉 붙잡았습니다.

이야기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구덩이에서 건져진 요셉은 팔리는 운명이었지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배에 탑니다.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결국 모든 시련을 이기고 평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경배’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시련을 통해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배자’로 거듭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시련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시련 때문에 오히려 기도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인생의 풍파’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시간과 방법으로 요셉의 삶에 개입하시어 돌보아주셨음을 전체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당신의 구원 섭리를 이루어 가셨음을 찬미했습니다. 연속된 ‘시련’들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깨달은 요셉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자신을 ‘통합’해 갔습니다. 마침내 모든 시련을 이기고(통과하고), 세상에 ‘생명’을 선물하는 ‘자비(사랑)의 사람’으로 우뚝 섰습니다.

바울로도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교훈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의(義)인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교훈했습니다. 우리도 그 ‘구원 섭리’를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은 항상 일정하진 않습니다. ‘시련’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상황에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 때는 활활 타오르다가도 어느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랭해 집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출퇴근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이야기의 베드로는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일을 성취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의심하고 실패합니다. 곧 죽을 것처럼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주님께 의지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큰 시련’ 속에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거센 풍랑’ 말입니다. 이 풍랑이 지나더라도 또 다른 풍랑에 직면할 것입니다. 그 풍랑들에 맞서기에 ‘무력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심을 마음에 일깨워주십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주님의 동행하심마저도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다독이시며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영원한 평화의 항구’로 가는 제자의 여정에 있어서 예수님을 향한 ‘큰 믿음’, ‘강한 믿음’은 필수입니다. 교회인 우리는 베드로처럼 실패하더라도 다시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손 내밀어 붙잡아 주실 수 있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도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팔려가는 요셉처럼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이 시대의 ‘요셉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정의’를 갈망하는 ‘고난 속에 있는 요셉들’에게 손을 내밀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인간이 가진 가장 궁극적 문제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우주의 어떤 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구원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비록 그 도우심이 우리가 원하는 시간이나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다만 주님을 향한 ‘믿음’을 곧게 세우십시오. ‘시련’마저도 우리의 믿음을 키우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임을 발견하는 눈을 터득하십시오. 시련 속에서 실패하는 사람도 있지만, 시련 때문에 오히려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통합되는 요셉 같은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성찬례를 바치는 우리를 성령 하느님께서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시련을 이기고 마침내 ‘영원한 평화’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삶의 시공간에 함께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심을 알아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민족이 ‘평화통일의 항구’에 도달하는 데 귀한 도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020. 8. 9. 연중19주일/평화통일 기원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20. 8. 16. 연중 20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