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2. 연중18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성자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어 새 힘과 용기를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32:23-32
  • 시편 – 17:1-7,15
  • 독서 – 로마 9:1-5
  • 복음서 – 마태 14:13-21

연중 1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도 – 생명의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생명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누리는 행복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교회력으로 ‘연중시기’ 여정(旅程) 중에 있습니다. 주일을 기준으로 하자면 ‘연중 1주일’(주의세례)부터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 주일’까지가 ‘1차 연중시기’였습니다. 사순절기와 부활절기를 지나, ‘성삼위일체주일’부터 ‘왕이신 그리스도주일’까지가 ‘2차 연중시기’에 해당합니다. 지금 우리는 2차 연중시기의 거의 중간쯤을 지나고 있습니다.

 

저는 ‘연중시기’(보다 정확히는 2차 연중시기) ‘말씀 나눔’을 위한 <전례독서>로 ‘계속 독서’ 전통을 선택하고 있습니다(계속 독서에 대한 설명은 2020. 6.14일. 연중 11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아무래도 《성경》을 ‘순차적’으로 읽게 한 <전례독서> 배정 의도이기에 1독서 <구약>, 성시 《시편》, 2독서 <서신>과 <복음서>와의 연결성이 다소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독서’가 갖는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네 개의 구슬’을 ‘한 주제로 꿰는 노력’을 그동안 해 왔습니다. 사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물된 하느님의 구원의 복음’이라는 ‘대(大)주제’가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고 매주일 ‘말씀 나눔’ 결과물을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습니다. 사제의 ‘구슬 꿰는 솜씨’가 신통치 않다고 여겨지는 분은 <성공회기도서> ‘개정정과표’(RCL, Revised Common Lectionary)에 실린 ‘해당 주일’의 ‘선택 독서’(오늘은 연중 18주일로 이사야 55:1-5와 시편 145:8-9,14-21이 안내됨)를 참고하시면, 복음이야기 주제를 이해하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는 안내도 드렸습니다. <성공회기도서>가 없는 분들은 우리교회 홈페이지 첫 대문에서 <전례독서>를 클릭하시면 ‘계속 독서’와 ‘선택 독서’ 본문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말씀 나눔에 앞서 이런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습니다. 금주도 말씀 나눔을 준비하면서 <전례독서>를 한 주제로 연결하기 위해 수고했지만, 아직 제 공부가 짧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습니다. 차라리 오늘은 ‘선택 독서’(이사 55:1-5와 시편 145:8-9,14-21)로 갈아탈까 하는 유혹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그만큼 <전례독서> 네 개의 본문을 한 주제로 꿰뚫어보기가(어쩌면 이 일은 ‘계속 독서의 한계’ 상 불가능) 수월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성령의 인도를 간청하며 ‘구원의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 <전례독서>를 붙들고 한 주간 최선의 씨름을 감행한 저를 주님께서는 토닥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야곱의 일생일대의 이야기입니다. 요즘말로하면 《성경》에서 꼽을 수 있는 ‘야곱의 인생 샷’입니다. 귀향길에 오른 야곱은 야뽁 나루에서 ‘하느님을 체험’(브니엘)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야곱의 빈약한 ‘정체성을 치유’하시고, 내면을 ‘약속의 상속자’로 변화시키십니다. 그 체험은 ‘씨름’이라는 ‘기도의 은유’에 담겨 있습니다. 씨름처럼 ‘기도’ 역시 언제나 ‘하느님과의 궁극적인(있는 힘을 다한 끈질긴) 대면’이고, 자신을 ‘직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야뽁 나루에서 궁극적 생명이신 ‘하느님의 얼굴(브니엘)을 대면’한 후 사랑의 대상인 ‘자신을 직시’(直視)했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선택’하시고, ‘동행’해 주신 ‘사랑의 하느님’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이유’, 즉 ‘사명’(자기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진실’에 대해 드디어 ‘눈’을 떴습니다. 종국에는 에사오로 대변되는 다른 이들의 얼굴마다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는 복’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목적해서 이 이야기를 묵상합니까? 그의 귀향, 씨름, 이름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요, 생명의 하느님을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로 교회가 오늘 존재해야 함을 우리에게 웅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의 체험은 삶과 신앙을 분리할 수 없는 교회인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다른 교우들이 아니라 내가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본질입니다. 자신에게 야곱 같은 ‘하느님 체험’, ‘궁극적 생명에 대한 대면’, ‘자신에 대한 직시의 기도’, ‘자기존재 이유의 발견’, ‘이웃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눈’을 갖고 있느냐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웃들이 나를 통해 ‘생명의 하느님을 보게 하는 삶’,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다른 껍데기들에 속지 마십시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진리 체험’, ‘궁극적 생명 체험’, ‘사랑 체험’이 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일생일대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겠습니다.

모든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창세기》라는 책답게 ‘씨름 이야기’ 하나로 여러 전통의 기원을 알려줍니다. 그곳이 ‘야뽁’, ‘브니엘’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유래,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유래,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는 그들의 음식문화가 생기게 된 유래를 알려줍니다. 물론 전체 이야기의 배경에는 ‘야곱의 가족사’가 있습니다.

 

하란으로 도망간 야곱은 삼촌 집에서 20년을 보냈습니다. 타향살이 설움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벌레(구더기)처럼 무기력하게 짓밟히지 않으려(이사 41:14) 얼마나 꾀를 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장가들어 ‘일가’(一家)도 일구었습니다. 지팡이 하나만 들고 찾아든 땅이었지만 ‘재산’도 많이 불어났습니다. 하지만 타향살이가 끝까지 행복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를 ‘경쟁자’로 여긴 삼촌 자식들의 보는 눈이 곱지 않았습니다(창세 31:1-2). 삼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욱이 얼마 전부터 찾아들기 시작한 ‘손님’으로 인해 야곱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손님은 다름 아닌 ‘고향’에 대한 ‘향수’였습니다.

어느 날 들에서 양을 치던 그는 꿈에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네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 창세 31:3

우여곡절 끝에 삼촌 라반과의 관계를 정리합니다(창세 31:20~32:1). 타향에서 떠돌이로 살던 야곱 인생의 한 단락이 마감됩니다. 먼 바다로 나간 ‘연어’가 강으로 돌아오듯이 ‘귀향길’에 오릅니다(창세 32:2). 그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어디일까요? 20년 전, 그는 ‘브엘세바’에서 ‘베델’을 거쳐 ‘하란’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경로와는 반대로 ‘약속의 땅’(가나안)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 세월동안 아버지 ‘이사악’은 ‘헤브론’으로 이주하였습니다(창세 35:27).

하느님께서 그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하시는 고향이 그 ‘가나안 땅’일까요? 문자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깊이 묵상하면 그 고향은 야곱이 있어야할 본래적 ‘삶의 자리’(자기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미리 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처럼, 야곱이 ‘자기 정체성(약속의 상속자)과 사명을 회복’하여 살아가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야말로 그가 돌아가야 할 ‘고향’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삶의 자리’가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품’(하느님 나라)임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귀향하는 야곱의 발걸음이 어땠을까요? 즐거웠을 것이라 생각하신다면 이전의 《창세기》 이야기를 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가족들 중 누구도 모르는 어떤 ‘두려움’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풀어야할 ‘매듭’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야곱 자신에게는 ‘매듭’ 이상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괴물’에 대한 생각으로 ‘가나안’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어떤 짐보다도 무거웠습니다. 그 ‘괴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야곱은 그 괴물이 ‘세일’ 지방에 살고 있는 ‘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장자상속권의 복’을 가로채서 달아난 자신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에사오’ 말입니다. 실제로 에사오는 야곱을 죽일 마음을 품었습니다(창세 27:41). 그런 ‘형의 얼굴’을 마주할 일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작용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20년 전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인 ‘진짜 괴물’은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괴물이 ‘자기 안’에 자리하고 있는 ‘야곱 자신’임을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될 것입니다.

 

“에돔 벌 세일 지방”에 사는 형에게 먼저 ‘종들’을 보냈습니다(창세 32:4~6). ‘화해’를 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일’은 야곱이 출발한 ‘하란’에서 적어도 1,00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따라서 귀향길이 몇 개월 전부터 준비된 여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고대로부터 이용되던 ‘왕의 대로’(大路)로 갔을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어떤 나루’에 도착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그곳에 잠시 머뭅니다. 심부름 보냈던 종들을 만나기로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후 돌아온 종들로부터 야곱은 ‘최악의 상황’을 전해 듣습니다. 에사오가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창세 32:7-8). 에사오가 자신을 ‘환대’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죽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큰 ‘불안’을 불러왔습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이 쌓여갑니다. 다시 라반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는 ‘만남’에 대비한 치밀한 ‘계책’(計策)을 세웁니다. 그 계책이 야곱답습니다. 일행과 가축을 두 패로 나눕니다(출애 32:8). 에사오가 한 패를 치를 동안, 나머지 한 패라도 도망하게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재산의 절반이라도 지키려는 의도였습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밤이면 홀로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나갑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창세 32:10~13).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저에게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면 앞길을 열어 주마고 약속하신 야훼여!… 저를 형 에사오의 손에서 건져주십시오. 에사오가 와서 어미들과 자식들까지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 창세 32:10-12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바쳐진 그의 기도제목은 ‘형의 손에서 살려 달라.’는 ‘애원’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의지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만 욕망했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물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생존’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려 들었습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물론 기도하는 그의 태도와 《시편》으로 노래한 <17편>의 ‘애원’이 정확히 포개집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오늘 ‘씨름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누구로부터 야곱을 건져주셔야할지는 ‘씨름’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야곱은 기도 후에 어떻게 합니까? 그가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찾아낸 술책은 ‘선물’(사실은 뇌물) 공세였습니다(창세 32:14-21). 정말 잔머리 대왕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550마리나 되는 ‘가축 선물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성공한 사람’인 자신을 에사오가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기도까지 했으면서도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의 ‘부’(富)를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선물들’을 보낸 야곱은 그 날 밤을 ‘천막’에서 묵었습니다. 여기까지가 1독서 《창세기》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야곱의 결단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그 날 밤, 그는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야뽁 나루를 건넜다. – 창세 32:23

고대로부터 ‘강’을 끼고 문명이 형성되었고, 도시 사이의 경계도 ‘강’이 기준이 됩니다. 신화나 종교적으로도 ‘강’은 두 세계의 경계입니다. 그리스신화에서 ‘아케론’(슬픔의 강), ‘코퀴토스’(후회와 탄식의 강), ‘플레게톤’(불과 정화의 강), ‘레테’(망각의 강), ‘스틱스’(증오의 강)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강입니다.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삼도천’(三途川)이 있다고 말하고, 그리스도교는 ‘요르단강’이 있다고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강을 건넜다’는 것은 신화적(종교적)으로 한 인물(민족)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상징입니다. 《성경》에도 ‘홍해’는 자유인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고, ‘요르단강’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경계에 있었음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후대에 그가 결단하고 건넜던 ‘강’의 이름은 ‘야뽁’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 구절만 가지고는 그가 ‘강’을 건넜는지, 아니면 건너지 않았는지 특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 구전전승이 야곱의 이야기 속에 섞여 정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쟁이 야곱이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다고 봅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요르단’에 입국했을 때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 ‘야뽁강’이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와 ‘염해’(사해) 사이에 있습니다. 비가 내릴 때만 동쪽에서 ‘요르단강’으로 물이 흐르는 ‘간헐하천’(와디)입니다. 해질 무렵 잠시 그 강줄기를 따라 걸었습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신앙영웅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강가 어딘가에 머물렀을 야곱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어원부터 보겠습니다. ‘야뽁’(יַבֹּֽק, Yabboq)이라는 단어는 ‘먼지를 일으키다’, ‘먼지를 뒤집어쓰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바크’(אָבַק abaq)와 자음이 같습니다. ‘먼지를 일으키고 뒤집어 쓸’ 정도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경우는 어느 때입니까? ‘씨름’을 하거나 ‘싸울 때’입니다. 따라서 그 강의 유래는 ‘어떤 격렬한 싸움’(씨름)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의 히브리어 기원을 ‘바카크’(בקק, baqaq)에서 찾습니다. ‘바카크’는 한동안 ‘안’에 숨기고 있던 어떤 것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서’(토해져서) 속이 ‘비워지고’, ‘허사가 되고’, ‘완전히 무효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야뽁’(씨름하다)이라는 말에도 이런 의미가 녹아져 있습니다. 이 곳(야뽁, 후대에 ‘브니엘’이라고도 불리는)에서의 ‘씨름’(내면의 영적투쟁)을 통해 평생토록 ‘야곱’이 간직해 온 ‘옛 자아’가 ‘폐기’(토해지고, 비워지고, 회개하게)됩니다. 오래도록 ‘열등감’을 벗기 위해 버둥대던(남의 발뒤꿈치나 잡던) ‘야곱’이었습니다. 짓밟히기 쉬운 ‘벌레’(구더기)처럼(이사 41:14), 형편없는 자아정체성으로 살아 온 야곱이었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임수와 편법’을 쓰던 야곱이었습니다. 얌체처럼 교활하게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아온 ‘야곱’이었습니다. ‘서원’과 말은 그럴 듯하지만, ‘내면’은 ‘빈약한’ 야곱이었습니다(창세 28:20-22).

이런 ‘야곱의 옛 자아’가 송두리째 ‘허물어지고 비워진 곳’입니다. 그가 사모했던 것처럼 ‘약속의 상속자’로서 ‘새 정체성’을 부여받아 ‘거듭난 곳’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존재’로 그의 속이 채워지고,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겸손한 인생으로 변화되는 ‘출발지’입니다. ‘꼼수장이’ 야곱이 비로소 ‘하느님의 설계와 섭리’ 속에 있는 ‘자기 인생의 진실(사명)에 대해 눈을 뜬 곳’입니다. 한마디로 장자상속권자인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대전환의 영적싸움’이 일어났던 곳이기에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 ‘야뽁’입니다.

선물들을 앞서 보낸 그 날 밤, 마침내 야곱은 ‘결단’을 내립니다. 야뽁 나루에 달빛이 조요(照耀)합니다. 가족과 일행과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를 인도하여 ‘강’을 ‘먼저’ 건너게 합니다. 자신은 ‘혼자’ 뒤떨어져 있습니다. ‘혼자’ 남기로 한 그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혹시라도 앞서 간 가족들과 가축들이 형에게 몰살당하면 도망칠 속셈이었던 것일까요? 정말 그렇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이유에서 나온 행동일까요?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하느님이 예정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야뽁’(영적투쟁)이 일어날 차례입니다. 아침이 밝아오면 맞이해야 할 ‘형’이라는 괴물보다 ‘자신’이라는 ‘괴물’과 ‘직면’할 시간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이 야곱을 다루기(빚어 가시기) 위해서는 일행들로부터 ‘먼저’ 그를 떼어놓으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진정한 ‘자기 직시’(直視)의 체험은 홀로 인격적으로 감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혼자’ 남은 야곱은 ‘본래적 자신’을 ‘직면’(直面)해야 하는 ‘절대고독의 시간’ 속으로 서서히 들어갑니다. 지팡이를 끌며 근처 모래 언덕에 앉습니다. 강을 건넌 일행의 횃불이 서서히 멀어져 갑니다. 그 불빛이 멀어져 갈수록 무엇인가는 점점 가까이 다가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2곡에 나오는 글귀를 참고해 봅니다. “밤은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그 노고에서 풀어주는데…” 짐을 내려놓고 쉬어야할 밤이지만 아직 ‘풀지 못한 이야기’를 가진 나그네의 ‘기억’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순간적으로 펼쳐집니다. 그 속에는 숨기고픈 기억도 있습니다. ‘장자상속권’을 두고 형과 흥정하던 날의 자신을 봅니다. 어머니가 해 준 요리를 가지고 들어가 아버지로부터 형의 축복을 가로채던 날의 자신을 봅니다.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던 날의 자신을 봅니다. ‘베델’에서의 밤과 석상을 세워 ‘예배’하며, ‘서원’을 바치던 날의 자신을 봅니다. 천신만고 끝에 하란에 당도해 ‘라헬’을 만났던 날의 자신을 봅니다. 첫날밤을 치룬 후의 황당함과 첫아들을 낳고 기뻐하던 날의 자신을 봅니다. 아버지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아버지 얼굴’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아! 어머니…….’ 자신을 위해 저주까지 받겠다고 나섰던(창세 27:13) 어머니는 어찌 지내실까?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벌써 60살이 넘었습니다. 많은 물소리를 들으며, 홀로 밤하늘을 쳐다보는 신세가 처량하기만 합니다. 많은 ‘부’(富)를 이루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 부질없게 느껴집니다. 만약 ‘담배’가 그 시절에 있었다면, 이때쯤 한 대 물며, 깊은 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인생이 빗나갔을까?… 나는 진정 누구일까?… 무엇을 위해 살아 온 인생일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간직한 신앙이란 무엇일까?… 어째서 좀 더 일찍 에사오와 화해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못한 것일까?… 세월은 또 왜 이리 빨리 지나간 것일까?…’

 

문득 자신이 동원한 방법으로는 살기를 띤 형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올라옵니다. 그 순간 ‘별’ 하나가 그에게로 떨어져 내립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납니다. ‘별’이 아니었습니다. ‘느닷없이 어떤 분’이 나타나 그를 ‘습격’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입니다. 에사오를 만나는 일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결정적인 ‘만남’이라는 사실이 곧 밝혀질 것입니다.

‘발현’(theophany, ‘신의 현현’이기에 이렇게 부릅니다)한 ‘어떤 분’(אִישׁ֙, ish/사람 man)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호세 12:4), ‘성육신’ 이전의 ‘성자의 현현’이라는 해석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분’은 야곱에게 ‘씨름’(야뽁)을 걸어오셨습니다. 우리 민담에도 ‘씨름’을 좋아하는 ‘도깨비’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깨비’에게 홀린 것처럼, 야곱은 불가항력적으로 그 ‘씨름’(싸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생도 전혀 예상치 않은, 혹은 의도하지 않은 ‘씨름(영적투쟁, 기도)의 급류’에 빠져들곤 합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코로나19’와 이토록 치열한 씨름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전염병 말고도 인생들은 원치 않는 수많은 사건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야곱이 원해서 시작된 ‘씨름’(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하느님, 하느님의 천사, 사람)이 야곱에게서 원하는 어떤 것이 있어서 걸어 온 ‘씨름’입니다.

‘그분’은 상대를 잘못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이 트기까지’ 먼지를 뒤집어쓰는 결렬한 ‘씨름’(영적투쟁, 기도)이 진행됩니다. 일단 ‘씨름’이 시작된 이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야곱의 욕망’이 작동했습니다. ‘무죄 선언’을 듣기 위해 생사를 걸고 애원하던 <17편>의 시인처럼, 생명을 건 야곱의 치열함이 작동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야곱의 ‘성정’(性情)에 비춰볼 때, ‘씨름’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계략’(計略)을 써서 자신의 ‘적수’를 구슬려내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대등한 씨름’처럼 보였습니다. ‘밤새도록 오래’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대등할 수 없는 ‘씨름’(싸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그분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해서 쉽게 ‘씨름’(싸움)을 끝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이 트기까지’ 그분이 야곱과 씨름을 계속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해 온 방법으로는 “야곱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표현은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그만큼 ‘야곱이 이기려는 마음을 크게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물론이려니와 그 때까지 살아오면서 ‘경쟁’(싸움)에서 이기려는 마음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등감’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난 순서만 제외하고, 그는 모든 ‘경쟁’(싸움)에서 늘 이기는 수단과 방법(그것이 속임수라 하더라도)을 동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비상수단’을 사용합니다. 비겁합니다. 야곱의 ‘엉덩이뼈를 만집니다.’ 그 ‘엉덩이뼈’[허벅지 관절, ‘카프(כַּף, kaph/the socket)-야렉’(ָרֵךְ, yarek/thigh)]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저는 이 뼈의 위치가 ‘생명 탄생의 자리’와 관련 있기에 남성의 ‘생식기’에 대한 ‘완곡어법’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가령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똥’을 ‘매화’라고도 했듯이 말입니다. 사실 그곳은 가장 중요한 ‘급소’이며, 야곱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딸 ‘디나’까지 합쳐 열셋씩이나 두었겠지요(본문에는 베냐민이 태어나기 전이니까 열둘입니다).

“엉덩이뼈를 쳤다”라고 번역했기에 우리는 ‘강하게 때린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나가’(נָגַע, naga)는 ‘손을 대다’(to touch, reach, strike)는 정도입니다. 그 ‘만짐’으로 야곱은 생애 처음으로 깊은 ‘패배감’을 느낍니다. ‘동이 트기까지’ 계속된 ‘지난한 씨름’이 ‘결판’났습니다. 그는 ‘환도뼈’(엉덩이뼈)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out of joint the socket of the hip)는 뜻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그를 도와주시고 치료해주셔도 시원찮을 판에 제대로 걷지도, 힘을 쓰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에사오’로부터 도망갈 생각은 이제 꿈도 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의 ‘옛 자아’에서 출발한 ‘힘과 수단들’(사실은 편법들)은 ‘그분’에게, 또 ‘세상’에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야곱의 ‘옛 자아’를 ‘완전히 짓눌러’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날부터 죽을 때까지 야곱은 절뚝거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뽁’은 야곱이 그분에게 완전히 ‘정복당한 곳’입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 온 그에서 힘을 빼앗아버리신 곳입니다. 야곱이 더 이상 자신의 인간적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 의지하도록 그의 신체적인 힘을 줄이신 곳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비뚤어진’ 그를 ‘곧게’ 바꾸어놓은 곳입니다. 이것은 그가 받은 ‘새 이름’(새 정체성)인 ‘이스라엘’에서 말씀 드릴 것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야뽁’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도달해야할 ‘기도의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정복’하시는 ‘승리의 자리’입니다. 그 ‘정복당함’을 다른 말로 ‘회개’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씨름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신비하고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우리와 씨름’하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전전긍긍하는 우리를 결코 가만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어느 날 우리 마음에 불쑥 ‘습격’해 들어오시어 ‘마음의 샅바’를 잡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의 적수’라도 되는 냥, ‘기도’ 중에 ‘자기 뜻을 고집’하며, 결코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단식’까지 해 가며 ‘있는 힘’을 다하고 ‘자신의 뜻’을 밀어붙입니다. 대단한 끈기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마음을 만지시는’ 하느님의 그 ‘부드러운 손길’에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회개하며, 정복당합니다.

드디어 ‘씨름’이 결판났고 야곱은 육체적으로 완전히 정복당했습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야곱의 ‘마음’은 ‘항복’하지 않습니다. 지독합니다. 그분은 야곱에게 이제 ‘씨름이 끝났다’고 알려줍니다. 다급한 어투로 “동이 밝아오니 이제 그만 놓으라.”고 말합니다. 재미있습니다. 꼭 ‘도깨비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우리 민담에도 ‘씨름’을 좋아하는 ‘도깨비’ 이야기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도깨비는 해질녘 사람 모습으로 나타나 시끌벅적하게 놀다가 ‘동이 트면’ 서둘러 보따리를 들고 사라지거나 사물로 변합니다. 유대교 랍비들도 이 구절이 불편했나 봅니다. ‘미드라쉬’(일종의 모세오경 주석서)는 이 구절을 “그분이 하느님의 보좌 앞에서 아침 합창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라고 멋지게 풀어줍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아침 점호(點呼) 시간에 참석해야 합니다.

“이제 그만 놓으라.”는 말에 야곱은 큰소리로 울며 ‘복’을 애걸합니다(호세 12:3-5). ‘복’을 애걸한 이유는 그분이 ‘신적 존재’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 알아차림을 어찌 보아야할까요? 그만큼 그가 무감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민한 것일까요? 어찌되었든 야곱은 자신이 씨름한 사람이 신적존재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고 필사적으로 떼를 씁니다. ‘축복’을 맹세하지 않으면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변화의 메시지’를 얻습니다. 그것은 ‘그분과 씨름’하고 난 뒤 ‘야곱의 기도 제목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분과 씨름하기 전 야곱의 기도 제목은 ‘형의 손에서 자기 목숨과 재산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창세 32:12). 있는 힘을 다한 ‘영적씨름’의 패배 후에는 “자기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로 바뀌었습니다(창세 32:27).역설적이게도 패배 후에야 그에게서 참된 기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궁극적 생명이신 하느님의 복(福)을 사모하는 사람으로 그의 내면이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내 뜻’, ‘내 방식’, ‘내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방식’, ‘하느님의 시간’을 사모하는 삶으로 마침내 ‘그가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야곱은 어떤 ‘복’을 빌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까? ‘재물’로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하란’(바딴아람)으로 도망가던 때에 비하면 그는 이미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550마리나 되는 가축을 형에게 선물로 보낸 그를 떠올려보십시오. 그 중 어느 것도 자기 아버지 이사악으로부터 상속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형으로부터 약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복’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가 원했던 ‘복’이 ‘자기존재를 살리는 한 말씀 듣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모든 인생은 ‘자신을 살리는 한 말씀 듣기’를 원합니다. ‘듣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 보다 먼저 ‘질문’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어떤 질문은 다른 모든 질문들보다 무게’를 갖습니다. 그것을 ‘궁극적 질문’이라 합니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그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사람’, ‘자기존재 이유’에 대한 ‘답을 찾은 사람’,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을 찾은 사람’, 즉 ‘한 말씀을 들은 사람’(깨친 사람)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에 대해 ‘누구’라고 말해야 하는지 그 ‘정체성’을 알기 위해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사명)을 찾아서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자기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아서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형 그림자에 가려진 ‘2인자’라는 운명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할 ‘더 높은 세계’를 찾아 평생을 ‘씨름’해 왔습니다. 그분이라면 자신이 씨름해 온 평생의 그 ‘궁극적 질문들’(자기존재 이유, 삶의 의미)에 대해 ‘한 말씀’ 들려 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 ‘한 말씀’에 담긴 ‘신적 생명의 복’을 받는다면, 그 ‘깨달음’을 갖게 된다면, 지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담대한 ‘응수’(應酬)였습니다.

결국 ‘한 말씀’이란, 우리를 ‘신적 생명력’으로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한 말씀’이십니다(요한 1:1-4). 하느님만이 다른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느님만이 인생이 붙잡고 씨름하는 ‘궁극적 질문’(자기존재 이유, 삶의 의미)에 ‘한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하느님만이 가지도 오지도 않는 ‘영원한 현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시편》으로 노래한 <17편>처럼, 우리의 간절한 ‘기도’(질문)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고, ‘한 말씀’(대답)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야곱의 변화에 감동한 그분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창세 32:28a

이것이 ‘한 말씀’ 하시기 전 야곱에게 하신 그분의 ‘질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 보라”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궁극적 질문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름’(שֵׁם, shem/name)에는 한 존재의 본질적 속성과 운명이 담겨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름’은 개인의 ‘기질’과 ‘성격’을 드러내며, 부모나 공동체의 ‘기대’ 등을 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질문에 ‘야곱’은 당황스러웠고 고민스러웠습니다. 그의 이름은 ‘발꿈치’(heel, 아케브, עָקֵב)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발꿈치를 잡은 자’, ‘모사꾼’(얌체)’, ‘속이는 자’(사기꾼), ‘약탈자’, ‘비열한 악당’이라는 뜻이 있습니다(창세 25:26; 27:35-36). 결코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 아닙니다. 자기 입으로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이 ‘형’과 ‘아버지’와 ‘장인’을 ‘속이며’ 살아온 인생임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무엇을 택합니까?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 창세 32:28b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여기서 전율을 느낍니다. 그는 ‘진실’(정직)을 택합니다. 어쩌면 처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실존(實存), 즉 ‘어두운 진실’에 ‘직면’합니다. 자신이 ‘모사꾼’(얌체), ‘속이는 자’(사기꾼), ‘약탈자’로 인생길을 걸어왔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인정’합니다. 그 불명예스런 이름과 존재에 대한 ‘고백’에는 그가 ‘빛’이신 하느님과 ‘대면’하여(하느님을 보고) 스스로의 ‘어두운 진실을 직시한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모사꾼’(얌체), ‘속이는 자’(사기꾼), ‘약탈자’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그런 자신의 ‘추함’을 더 이상 외면치 않고,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자신의 ‘인간됨’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압니다. 그 고백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납니다. 그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인정’하고 ‘고백’하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놀랍게도 ‘자신과의 화해’가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는 남을 ‘속이기’에 앞서 항상 ‘먼저 자신’을 속입니다(그럴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 합니다). 남에게 잘못을 저지르기에 앞서 항상 ‘먼저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릅니다. 따라서 ‘신적 생명력’으로 초대하시는 ‘한 말씀’을 ‘듣고’, ‘복 있는 새 삶’을 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먼저 용서’를 청하고, ‘자신과 화해’를 이루십시오. 이렇게 ‘빛’이신 하느님과 대면하여 ‘자신의 어두운 진실’을 ‘본’ 사람은 더 이상 누구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마침내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 – 창세 32:29

이제야 야곱이 ‘누구와’ 씨름한 것인지가 그분 입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분’은 ‘밤도깨비’가 아니라 ‘하느님’(하느님의 천사, 성자)입니다(참고, 창세 35:10). 야곱은 그분으로부터 “하느님(엘로힘)과 겨루어 이겼다”(사리타 임 엘로힘)는 선언을 듣습니다. 이상합니다. 야곱은 이미 환도뼈를 다쳐 패배했고, 다리까지 절뚝거리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느님과 겨루어 이겼다”니 무슨 뜻입니까?

‘겨루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어근 ‘사라’(שָׂרָה)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孤軍奮鬪, ‘to struggle), 있는 힘껏 노력하다(strive), 치열하게 경쟁하다(contend), 끈질기게 인내하며 버티다(persevere), 고집하다(persist), 통치자가 되다(to be a ruler), 주권(힘)을 가지다(have power)는 뜻입니다. ‘이겼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어근 ‘야콜’(יָכֹל)은 ‘우세하다’(prevail, 압도하다), ‘극복하다’(overcome), ‘인내하다’(endure), ‘힘이 세다’(be able)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겨룸’과 ‘이김’은 하느님께서 그를 완전히 정복하실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그 씨름을 진실히 견디어냈다’(참아냈다)는 차원에서의 ‘판정’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끈질기게 ‘하느님과 진실히 대면’했던(씨름했던) 그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태도’에 대한 ‘인정’입니다. 심지어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궁극적 생명’이신 ‘하느님의 복’(자신을 살리는 한 말씀)을 사모하는 목숨을 건 그의 태도는 하느님마저도 ‘자신의 승리를 승리로 여기지 않으실 만큼 탄복’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너라는 인간에게 내가졌다.”라는 ‘인정’입니다.

저는 이 ‘인정’ 속에 ‘기도’에 대한 아주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우선 기도하지 않는 일보다 기도하는 일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 기도가 ‘가련한 나 자신의 욕심의 표출’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과 씨름’(기도)할 때는 ‘논리’나 ‘고상함’이 ‘주심’(主審)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있는 힘을 다해’ 씨름하면 됩니다. ‘숨김없이 끈질기게’ 하느님께 마음을 드러내보여야 합니다. 기도하기도 전에 스스로 포기하기보다 자신이 하느님께 정복당했음을 알게 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젖 먹던 힘을 다하는 끈기’(진실함)가 있어야 합니다. ‘들어주시면 좋고,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다’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씨름’(기도)에서 ‘하느님께 패배’할 것입니다. ‘기도는 항상 하느님이 이기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 ‘패배의 씨름 후’에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기도에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한 우리를 하느님께서 야곱처럼 결코 내치시지 않는다는 진실을 말입니다. 있는 힘을 다하고 ‘하느님의 뜻’ 앞에서 진실로 패배한 우리를 하느님께서 야곱처럼 거두신다는 역설을 말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 진실과 역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느님 뜻에 패배한 그 ‘순종’의 일이 참으로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었음을 점점 발견해 갑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 ‘정복당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이겼음’을 발견해 갑니다. ‘내 뜻’(욕심)대로 되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발견해 갑니다.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안겨주시는 ‘하느님’을 발견해 갑니다.

이제 야곱은 하느님께서 ‘탄복’하실 정도로 그 ‘기도의 진심’을 인정해주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이라고 하면, 일부러라도 ‘씨름’(기도)에서 져주시는 은총을 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그 씨름의 열정을 인정해주시고 탄복하시어, “네가 이겼다”라고 우리의 승리를 선언하실 만큼 하느님과 있는 힘을 다해 대면할 수 있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더욱이 ‘하느님의 져주심’이 야곱이 받은 선언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신이 겨루어 이겨야할 ‘사람들’이 ‘자기 밖’에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경쟁해 온 ‘에사오’나 ‘장인 라반과 그의 아들들’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동이 밝아올 무렵’ 그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비로소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겨루어 이겨야할 ‘사람’(들)은 자기 ‘밖’이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사람’이 여태껏 자신을 괴롭혀 온 ‘괴물’임을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괴물’은 너무나 경악스럽게도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마음이 ‘생존전략’처럼 만들어낸 ‘옛 자아’(들)말입니다. 그 ‘괴물’에게 자신이 평생토록 놀아났음을 ‘빛’이신 그분의 조명 아래 씨름하는 동안 ‘직시’하고, 뜨거운 눈물과 함께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진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향해 물어 오시는 ‘이름’에 정직하게 대답함으로써 그는 ‘야곱’(‘모사꾼’(얌체)’, ‘속이는 자’(사기꾼), ‘약탈자’, ‘비열한 악당’)으로 살아 온 자신을 ‘수용’했습니다. 그런 ‘인정’과 ‘수용’을 통해 야곱은 온전히 자신과 ‘화해’하였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립니다. 그것이 바로 ‘새 이름’입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새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새 인간이 탄생했다’는 뜻입니다. 본래의 자기정체성을 회복한 인간의 탄생, 자기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인간의 탄생입니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를 낳은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사제’(司祭)를 존칭하여 ‘신부님’(神父, Father)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세례성사’를 통해 한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래적 자기로의 회복)로 새로 태어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신자에게 ‘사제’는 ‘새 이름’(영세명)을 지어줍니다. 그래서 ‘신앙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성공회 여성 사제들은 이 부분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현재로서는 호칭에 한계가 있지만 성별을 초월하여 그 의미는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새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하느님과도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수용’하시고 ‘존중’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사랑’하기로 이미 ‘선택’하셨습니다(로마 9:11-13). 이렇게 ‘새 인간의 탄생과 화해’가 그 밤에 그분이 야곱에게 찾아오신 진짜 목적(의도)’입니다. 그분이 ‘동이 밝아올 때’까지 끈질기게 그와 씨름을 계속하신 이유’입니다.

그분이 지어주신 이름인 ‘이스라엘’(יִשְׂרָאֵ֑ל)은 무슨 뜻입니까? 이 이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풀이하기가 까다로운 말입니다. 우선 ‘엘’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문제는 ‘이스라’(יִשְׂרָ)에 있습니다. 어형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여러 뜻으로 해석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사라’(שָׂרָה) 동사의 3인칭 미완료형이라고 볼 경우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사무엘‘이나 ’다니엘‘처럼 히브리어 이름에서 하느님은 동사의 대상인 목적격이 아니라 항상 주격으로 쓰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실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참고로 ‘사라’의 마지막 글자인 ה(헤이)는 어떤 결합에서는 히브리어 알파벳 마지막 글자인 ‘타브’(ת)가 되어 어근을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통치자가 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권(힘)을 가지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실(주도하실, 보호하실) 것이다’라는 뜻으로 파생됩니다. 이외에도 ‘이스라’를 ‘곧은’, ‘평탄한’, ‘바른’, ‘정직한’, ‘강직한’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올바르게(곧게, 평탄하게, 강직하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올바른(곧은, 평탄한, 강직한) 사람이 될 것이다’란 뜻이 됩니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이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자 ‘정체성’입니다. 그가 ‘거짓 마음’이 부리는 ‘속임수’에 다스림 받는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겸손한 인생’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비뚤어진 ‘옛 자아’(야곱이 그 뜻입니다)의 본성에 지배받는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이 빚어주시는 올바른 인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다스리시고, 대신 싸워 이겨주시고, 빚어 가시는 올바른 인생이 되었으니 더 이상 에사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닙니다. 짓밟히기 쉬운 ‘벌레’나 내면이 ‘구더기’ 같이 무기력한 야곱(이사 41:14)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하는 ‘이스라엘’입니다. 한마디로 야곱으로 살지 말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인생으로 살아가라는 사명으로의 초대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계약의 주인공’(약속의 상속자)이 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하신 민족과 나라의 조상이 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마침내 ‘약속의 땅’(하느님 나라, 본래적 자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비록 ‘생명 탄생의 자리’인 ‘생식기’를 다치는 ‘고통’을 입었지만, 야곱은 마치 ‘산모’처럼 끝까지 고통을 끈질기게 참아내며 자신을 ‘이스라엘’로 새로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낳은 ‘아버지’라는 의미는 위에서 새긴 바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모든 존재는 스스로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신’을 낳는 ‘어머니’입니다.

 

그분이 자신을 하느님으로 계시하셨지만(참고, 창세 35:10) 야곱은 자신에게 그 같은 ‘이름’을 지어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기 원해서 ‘이름’을 물어 봅니다. 고대에는 ‘신의 이름’을 알면 ‘주술’(呪術)처럼 그 이름을 불러 ‘신의 능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담대한 질문이었지만 그분은 이름을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 ‘그분’(하느님의 천사)은 성취하여야 할 ‘목적’을 그 ‘씨름’을 통해 ‘다 이루었기’에 야곱을 ‘축복’하며 떠나갑니다. 다시 말해 야곱도 자신이 원하던 ‘복’을 그분에게 받았기에 미련 없이 놓아드립니다.

야곱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낸 그곳 이름을 ‘브니엘’(פְנוּאֵל, face of God)이라 불렀습니다. ‘브니엘’(원문으로는 프니엘)은 ‘얼굴’을 뜻하는 ‘파님’(panim)과 ‘하느님’을 뜻하는 ‘엘’(el)의 합성어입니다. ‘하느님’(하느님의 천사)을 대면하고도 은혜로 목숨을 건졌음을 깨우쳤습니다. 그 ‘깨우침’은 ‘자기 인생의 진실(사명)에 대해 눈을 떴다’는 뜻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을 일방적인 은총으로 ‘선택’하시고, ‘사랑’해 오셨을 뿐 아니라, ‘약속의 상속자’(하느님나라 장자상속권자)로 빚어 가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렸다’는 뜻입니다. 자기 인생이 ‘하느님의 설계와 섭리’ 속에 있음을 ‘깨우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진 그의 ‘내면’도 온통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비록 절뚝거리며 에사오를 만나기 위해 ‘브니엘’을 떠나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마음에는 ‘새로운 세계’(차지하게 될 약속의 땅)에 대한 ‘희망’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야곱을 ‘창조’하신 하느님, 이스라엘을 ‘빚어’ 가시는 하느님 덕택에 어느 새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 즉 ‘하느님을 발견’하는 ‘성스러운 마음의 소유자’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창세 33:10). ‘장자상속권’을 인정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온 세상에 전달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는 ‘자기 인생의 진실(자기존재의 이유, 삶의 의미, 사명,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뜬 일’,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으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뜬 일’이 그가 받은 진정한 ‘복’입니다. 물론 그 체험이 있었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성숙한 ‘이스라엘’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창세 35:1-15). 좀 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귀향길, 즉 ‘브니엘’에 있었던 그 ‘씨름’(기도)이 참된 변화의 출발점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7편>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생의 위기’ 순간에 하느님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시기를 ‘간청’하는 <17편>에서 발췌했습니다. 형이라는 괴물, 보다 정확히는 자신이라는 괴물에 직면해야 했던 ‘야곱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억울하게 죄인으로 고발당한 다윗이 믿을 분은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보호를 간청합니다. ‘가련한 자신의 처지’를 하느님께 절절이 호소합니다. 영광스러운 천국의 희망을 노래하는 것으로 마감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먼저 그는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호소합니다(1-2절).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죄로 고발당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맹세까지 하면서 보호하심을 간청합니다(3-5절). ‘성소’에 숨어들어 ‘하느님의 오른손’(힘)으로 잡으시어 ‘원수’(악인)들로부터 건져주시기를 간청합니다(6-8절). 오늘은 7절까지만 배정하고 건너뛰어 15절을 배정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천국의 희망을 노래하는 15절은 1독서 《창세기》의 ‘브니엘’과도 연결됩니다. 특히 다음 구절이 유명합니다.

당신의 눈동자처럼, 이 몸 고이 간수해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주소서. – 시편 17:8

 

“눈동자처럼”이라는 묘사는 참으로 강력한 인상을 줍니다(참고, 신명 32:10; 잠언 7:2; 즈가 2:8 개역개정판). 저도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때 꼭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사실 우리 몸에서 ‘눈동자처럼’ 소중하고 신중하게 보호받는 곳도 없습니다. ‘눈동자’는 너무나 연약하고 소중하기에 얼굴뼈, 눈꺼풀, 속눈썹, 내부의 여러 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먼지나 모래 하나라도 들어올 새라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작동합니다.

따라서 “당신의 눈동자처럼 고이 간수해 주소서”라는 구절은 소중하지만 쉽게 다칠 수 있기에 ‘세심한 보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항상 안전하게 지켜지기 위해서 ‘많은 경비’를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아주 ‘소중하고 가치’ 있지만, 쉽게 다칠 수 있는 ‘눈동자 같이 연약한 존재’에 비유하면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간청했습니다.

 

또 다윗은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 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이 구절도 강력한 인상을 줍니다. <성가> 582장 ‘주 날개 밑’이 바로 이 구절로 만들어졌습니다(참고 시편 36:7; 57:1; 63:7). 암탉은 포식자가 나타나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아서 보호합니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을 이 그림을 사용하여 나타내신 바 있습니다(마태 23:37; 루가 13:34). 이렇게 ‘눈동자’와 ‘날개 그늘 아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강력한 그림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나 ‘가련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이렇게 고뇌 속에서 하느님께 간청하지만 다윗은 ‘성소’에서조차도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9절). 그는 자신을 도와주고 변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오만불손한 악인들로부터, 굶주린 사자와도 같은 그들로부터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고 절절이 호소합니다(10~13절). 하느님께서 어서 손을 펴시어 자신의 몸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14절).

 

기도 후에 다윗은 이렇게 확신합니다.

나는 떳떳하게 당신 얼굴을 뵈오리이다. 이 밤이 새어 당신을 뵙는 일,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 시편 17:15

‘아침’에는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져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렇지 않고 지상의 삶을 마감하더라도 ‘무죄한 그가’ 천국에서 ‘떳떳하게’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영광을 확신합니다. 그는 내세를 확신했습니다. 그가 범죄치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꾸준히 살아온 이유입니다. 지상의 삶에만 매몰된 원수들과는 대조적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17편>은 그 결말은 알려주지 않지만, 이 ‘시’(詩)가 《성경》에 남겨진 것을 보면, 하느님께서 다윗을 ‘후대’(厚待)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 직전까지, 아니 죽은 것 같았던 다윗은 ‘눈동자처럼 고이 간수해 주시고,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시는’ 하느님의 은총 덕택에 다시 살아나 이스라엘에서 제일가는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7편>을 <전례독서>로 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1독서 《창세기》의 응답으로 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시편은 항상 ‘회중의 응답’과 더 깊은 ‘묵상’을 위해 배정됩니다) 야곱을 선택하시고 끝까지 사랑으로 ‘후대’(厚待)하신 하느님, 가련한 자아정체성을 가진 야곱에게 ‘참 희망’을 주신 하느님을 다윗의 기도 속에서 재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이야기>와 연결하자면(이건 좀 무리한 연결이긴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사명)을 따라 하느님 나라 운동에 최선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들려주는 ‘시’(詩)이기 때문입니다(4절-5절). ‘가련한 다윗’을 고통과 절망, 죽음의 세계에 내버려두지 않고 ‘측은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건져내시는, 일으키시는, 보호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복음이야기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군중을 ‘측은히’ 여기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2독서 《로마서》는 자기 동족을 향한 바울로의 ‘슬픔과 번민의 기도’를 전해 줍니다. 바울로는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였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습니다(사도 9:1-2). 대사제는 그를 신뢰하여 ‘다마스커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올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보는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야곱처럼 자기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설계와 섭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바울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회심합니다(사도 9:3-19). ‘그 길 위’가 그에게는 ‘야곱의 브니엘’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야곱처럼 완전히 치유되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9:20).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진주’인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동족 때문에 깊은 슬픔과 연민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가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섰습니다(로마 9:30). 정작 ‘선민’임을 자처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이라는 하느님의 방법이 아니라 ‘공로’를 쌓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는 잘못된 길을 고집했습니다(로마 9:31-32; 10:3). 이것이 그의 슬픔과 연민의 원인이었습니다.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가슴 아파하는 바울로의 측은지심의 기도는 복음이야기에도 배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독서 《창세기》에 따르면 야곱은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하신 민족과 나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은 장자상속권을 물려받은 야곱처럼, 이 세상에서 ‘하느님(하느님 나라)을 보여주어야 할 거룩한 책무’, 즉 장자의 정체성을 맡은 ‘선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 출애 19:5-6a

 

그 ‘거룩한 책무’(사명)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2독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있고, 하느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으며,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고, 율법과 참된 예배와 하느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로마 9:4).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도 그 ‘하느님’(하느님 나라)을 보여주어야 할 ‘거룩한 책무’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책무(사명)를 망각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선민’이라는 생각으로 갈수록 교만해졌고,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자신들만 하느님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위선적이었고, 하느님(하느님 나라)을 보여주어야 할 장자의 명분을 에사오처럼 가벼이 여겼습니다. 예언자들은 그들을 경고했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책무’를 맡은 ‘선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하느님의 은총’과 ‘아브라함의 믿음’ 덕택인데도 이것을 망각하고, 자신들에게 그럴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있어서 ‘선민’이 된 줄로 착각했습니다. 종국에는 ‘하느님’(하느님 나라)을 세상에 드러내야할 거룩한 책무(사명), 즉 자신들이 받은 영광을 소홀이 하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에서 돌아온 뒤, 그들은 장자상속권을 위한 쇄신을 감행했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을 만족시키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이를 수 있다는 대범한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 운동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충족시킬 수도 없는 ‘율법’이라는 ‘공로’의 길에 천착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율법준수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죄의 영향력 하에 태어나는 가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선한 인간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목적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실상과 ‘율법의 목적’을 깨우친 사람이 그들 가운데서 일어섰습니다. 사도 바울로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으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 분을 향한 믿음이 하느님의 의, 즉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깨우쳤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 즉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바울로가 전한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 즉 야곱의 육체적 후손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길, 믿음의 길입니다. 그 복음과 믿음의 길을 통해 하느님은 차별 없이 모든 민족을 당신의 민족과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대신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 즉 ‘교회’를 당신의 사제와 겨레로 삼으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복음’, 이 ‘믿음’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처럼 하느님 나라를 상속하는 유일한 길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민족이요, 나라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교회가 이 지상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하신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1베드 2:9). 교회가 야곱이 상속한 장자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이 거룩한 책무, 즉 ‘장자의 명분’을 잘 간직하고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답게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장자도 아닌 세상 사람들이 온 천하의 ‘주인’인 것처럼 살도록 버려둘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의 참 주인이신 하느님의 자녀답게,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상속할 장자답게 교회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장자상속권자’로서 자신이 차지해야 할 ‘약속의 땅’(본래 있어야 할 자리)으로 귀향하던 야곱의 씨름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깨우쳐야할 진실이 이것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이 성찬례를 통해 야곱처럼 장자상속권, 즉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이야기 《마태오복음》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기적’이야기입니다. 다소 차이는 나지만 <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유일한 기적이야기입니다. 군중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마음’과 야곱을 저버리시지 않고 ‘측은히’ 여기시어 ‘이스라엘로 빚어 가신 하느님의 마음’이 포개집니다.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고요히(확신에 차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의 모습과 야곱의 치열했던 ‘씨름’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야곱은 천사(하느님)를 향해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써서 마침내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축복의 결과인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차례로 나누어주실 뿐입니다. 그 결과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만족하였습니다. 하늘나라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 말이란 ‘세례자 요한의 처형 소식’이 아닙니다(마태 14:3-12).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는 뜻입니다(마태 14:2). 예수님은 그 말을 자기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셨을 때 들으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고향을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광야,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헤로데의 눈을 피하자는 의도였습니다. 1독서 《창세기》의 야곱처럼, ‘혼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마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 생각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림: 아픈 사람들이 예수의 가는 길에서 기다리다, James Tissot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육로로 따라 왔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라는 영적 지도자를 잃은 ‘군중들’은 나자렛 예수에게서 희망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사람들’(군중)은 예수님 일행이 가시는 그 ‘한적한 곳’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육로로 해서 먼저 ‘그 한적한 곳’에 도착한 군중들은 예수님 일행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내려 자신에게로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십니다. 그 때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림: 예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다, James Tissot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정서’(情緖)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 행동의 원천’입니다. ‘사람들’, ‘군중’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오클로스’(ὄχλος)입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든 ‘많은 사람’을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쓰입니다(마태 4:25; 5:1; 7:28; 8:1,18; 9:33; 11:7; 12:46; 13:2; 14:13-15,19; 15:10). 이들은 종교권력자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며 ‘죄인’이라 정죄당한 ‘변두리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종교권력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입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 정치, 경제, 종교로부터 ‘인간다움을 박탈당하고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다’(연민憐愍, 측은지심惻隱之心)로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이를 보고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공감의 마음’입니다. 흔히 ‘애간장이 탄다’고 합니다. 아마 꼭 맞는 은유가 “아픈 자식을 보고 느끼는 어머니의 감정”일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를 자신처럼 여기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난 속에 있는 이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신속히 그의 삶에 뛰어 들어가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으로 항상 ‘군중’(오클로스)을 대하셨습니다. 인생들이 직면한 문제를 마음 깊이 공감하셨고 결코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처럼 자기 내면에서 ‘연민’(憐愍)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일깨우고 키워가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마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소처럼 그 마음으로 군중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하늘나라의 도래가 그 치유를 통해 드러납니다.

이제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날 차례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부터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 보니 어느덧 ‘저녁 때’가 되었습니다. ‘저녁 때’라는 말은 유대인식 시간 개념으로 저녁이 시작되는 오후 3시쯤을 말합니다. 공간은 ‘외딴 곳’입니다. 아마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 근처 ‘베싸이다’ 근처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요청합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 마태 14:15

<공관복음>은 군중을 ‘흩어지게’(떠나가게) 할 것을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처지인데도 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좀체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식적인 ‘답’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눈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만 보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상황’에 매몰되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제자들이 내놓은 답은 상식적이지도 않고 현실성도 없습니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그 많은 군중들이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팔만한 곳은 근처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마태 14:16

 

전혀 뜻밖의 제안에 제자들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불가능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에게 책임을 요구하시는 예수님께 볼멘소리로 항변합니다. 어쩌면 ‘필립보’는 피식 웃었을 것입니다(요한 6:7).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 마태 14:17

 

그 상황에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주인이 ‘아이’라고 밝힙니다(요한 6:9). ‘보리빵’과 ‘작은 물고기’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공관복음>은 누구의 것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아마 그것은 예수님 일행의 하루치 식량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대답에 무어라 하십니까?

그것을 이리 가져오너라. – 마태 14:18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처럼 도전적이고 충격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 ‘작은 양’으로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군중을 ‘풀 위’에 앉게 하십니다. ‘풀’이라는 단어를 통해 시기적으로는 ‘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다드립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 마태 14:19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자세는 유대인 가정에서 가장이 인도하는 일반적인 기도법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하느님의 복이 임하기를 가장들은 기도합니다. 성찬례 속에서 사제도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 기도 후에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마태오복음》은 ‘빵’만을 언급합니다. 성찬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제도 축복하고 쪼개고 나누어줍니다. 제자들도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어떻게’ 빵과 물고기가 ‘화수분’처럼 늘어났는지에 대한 묘사는 없습니다. 단지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묘사만 있습니다. ‘어떻게’의 과정 묘사는 없고 결과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답을 시도해 왔습니다. 주로 기적을 부정하는 쪽입니다. 가령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파종과 성장, 추수와 맷돌질, 반죽과 화덕에 굽는 시간과 과정들, 즉 ‘물리법칙’을 어기시면 안 된다는 해석입니다. 하느님 스스로 창조의 원리를 거스르시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논리를 펴느냐면 작은 먹을거리를 내놓은 ‘어린이의 행동’(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렇습니다)에 ‘감동한 사람들’이 숨겨두었던 자신들의 도시락을 꺼내 ‘함께 나누었다’고 해설합니다. 어린이의 희생이 각박한 어른들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만일 어린이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일행의 것이었다면, 하루치 식량인 그 작은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祝謝)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어’ 저마다 숨겨두었던 도시락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해설합니다. 둘 다 기적을 부정하면서 본래부터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함께 나누었다’는 해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고, ‘사랑으로 바뀐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긴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단지 성찬례의 언어, 즉 성찬례의 상징일 뿐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또 “배불리 먹었다”를 육체적인 배가 아니라 ‘영적으로 배불렀다’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이슬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것과 연결합니다. 무엇을 믿기로 선택하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입니다. 그들이 오병이어 기적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는 그 메시지를 찾는 일이야말로 소중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초대교회 공동체)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통해 세상 누구도 가져올 수 없는 ‘새로운 체험’을 했음을 복음이야기에 담아 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 새로운 체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 체험’(구원, 자기존재의 이유, 삶의 의미, 사명, 정체성을 깨달음)입니다. 그 ‘생명 체험’(구원)이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기적 이야기가 가리키려는 방향입니다. 기적 이야기는 ‘생명 체험’(구원)의 주인이신 예수님,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구원)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에 나있는 털이나 주름에 주목하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그 ‘생명 체험’으로 직접 들어가는 일만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그 ‘생명 체험’의 도구들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일이지 제자들이 이루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통해 구원(생명)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제자들의 쓰임새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제자, 예수님과 우리는 ‘구원(생명)의 역사’를 위해 서로 연결된 존재입니다.

기적의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 가량 되었다. – 마태 14:20-21

모든 군중은 배불리 먹고 만족했습니다. 남은 조각마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찰만큼 충분했습니다. 여기서 ‘마태오’는 기적의 결과를 통해 누군가의 ‘잔치’와 극명하게 대조합니다. 누구 말입니까? ‘헤로데’입니다. 그는 자신의 왕궁에서 진수성찬을 차렸을 것입니다(마태 14:6). 참여자는 소수의 거물들과 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쟁반에 담아진 것은 ‘세례자 요한의 머리’뿐이었습니다. 폭력과 공포와 살인으로 얼룩진 잔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베푸신 잔치는 어땠습니까? 하늘을 지붕 삼아, 풀밭 위에서 베풀어진 잔치였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군중들이 참여자였습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이 모두가 평등했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인 식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기쁨과 만족과 풍요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잔치는 모세의 율법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음식 규정과 정결례 규정을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거기 있던 누구도 그런 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습니다. 어디서 그 음식이 온 것인지, 그 음식을 전달해 준 사람들의 손이 율법적으로 정결한지 어쩐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서로 하나가 되어 예수께서 베푸신 하늘나라의 잔치, 생명의 잔치를 즐겼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린이도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날 ‘온전히 하나’였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하느님께 붙잡힌 ‘기도의 씨름’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한 야곱이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은 하느님과 씨름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진정한 자신인 ‘이스라엘’로 태어나고 빚어지기 위해서는 옛 자아인 야곱을 버려야 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만용을 부릴 일이 아닙니다. 그에 앞서 ‘기도’ 속에서 ‘하느님 나라 상속자’임을 잊고 살아온 자신의 빈약한 ‘정체성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하늘나라 비유처럼 ‘작은 것’이 일으킬 변화를 내다보시며 빵과 물고기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빵과 물고기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처럼 하느님을 만나 ‘눈’을 뜨고,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통해 ‘생명 체험’을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에 ‘아브라함의 복’을, ‘생명 체험의 복’을 가져오는 ‘거룩한 도구’들이 되는 일만이 소중합니다.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갖고 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입니다. 기도로 자신을 직시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사랑 많으신 ‘하느님의 얼굴’이 생생하게 드러나기를 소망합니다. 하느님 나라 자녀답게 ‘측은지심’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맛을 느끼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이웃들이 ‘생명 체험의 기쁨’을 만끽하는 하늘잔치의 자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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