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26. 연중1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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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17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하느님의 설계와 성취인 그 좋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지혜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설계와 성취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그 구원 역사의 설계와 성취가 궁극적으로는 ‘하늘나라’임을 명백히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시작하신 하늘나라 운동을 교회가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를 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 상속자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올바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도록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에서 故김종현님, 故김계훈님의 안식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지혜의 샘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분별력을 주시어 하느님 나라의 소망을 간직하게 하시고, 그 은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9:15-28
  • 시편 – 105:1-11,45
  • 독서 – 로마 8:26-39
  • 복음서 – 마태 13:31-33,44-52

연중 17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하느님의 설계와 성취인 그 좋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지혜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야곱이 장가가는 이야기입니다. 두 자매를 아내로 취합니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류학(人類學)을 참고하자면 고대에는 자매가 한 남편과 혼인하는 일도 일반적이었습니다. 곁가지로 가지 않고 ‘야곱의 혼인이야기’에서 찾아내야 할 핵심부터 말씀드립니다. 혼인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특히 《시편》에서 노래하는 선민의식과 계약, 즉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성취’되었는지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의 자손’을 통해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훗날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민족형성사의 원초적 뿌리’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1독서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혼인이야기의 핵심은 <전례독서>에도 그대로 관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도록 설계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나라’(영원한 생명)를 상속받도록 오래 전에 설계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설계대로 성취해 가십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느님께 선택되고 하늘나라를 상속받는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듯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상속 덕택입니다. <전례독서>와의 이런 연결을 염두에 두고 ‘야곱의 장가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어느 장면을 펼치든 ‘연속극’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합니다. ‘속임수’를 써서 아버지로부터 형의 복을 가로챘습니다(창세 27:1-29). 한 발 늦은 에사오는 자신에게도 복을 빌어달라고 통곡하며 거듭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창세 27:30-40). 얼마나 화나고 억울하고 슬펐을까요? 아버지는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창세 27:37). 그러면서 “아우를 섬기든가, 아니면 스스로 힘을 길러 자유를 쟁취하라”(창세 27:40)고 말합니다. 에사오는 ‘복’을 가로 챈 야곱을 없애버릴 마음을 먹습니다. ‘삶이란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그는 격분했습니다.

형의 원한을 산 야곱은 외가집, 즉 삼촌 집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칩니다.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냅니다. 훗날 그곳은 ‘베델’이라 불립니다. 자신을 찾아오신 하느님을 체험(소명체험)한 곳이기 때문입니다(창세 28:10-17). 아침에 일어나 하느님께 예배하면서 세 가지를 ‘서원’합니다(창세 28:18-22). 천신만고 끝에 ‘하란’에 도착해 ‘우물가’에서 목자들을 만납니다(창세 29:1-3). 그 우물가는 아브라함이 보낸 종이 이사악의 신부감, 즉 자기 어머니 ‘리브가’를 처음 만난 곳입니다. 그들에게 삼촌 라반의 안부를 묻다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납니다(창세 29:4-11). ‘라헬’입니다.

야곱은 삼촌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합니다(창세 29:12-14).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까지 말입니다. 이번 연속극의 마지막을 보면 이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삼촌의 일을 도우며 한 달 동안 머뭅니다. 여기까지가 1독서 《창세기》의 배경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라반이 야곱에게 일해 준 보답을 어떻게 해주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자기 이름 말고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이의 당돌함입니다.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7년간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라헬’이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입니다. 라반으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복음이야기의 보물과 진주가 야곱에게는 ‘라헬’이었던 셈입니다.

사실 야곱은 라헬을 향한 사랑을 이미 삼촌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이제 보면 아시겠지만 라반은 라헬을 이용해 야곱을 붙잡을 ‘교활한 꾀’를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라반은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사랑에 눈이 먼 야곱은 삼촌의 그런 ‘교활한 꾀’를 알 리가 없습니다. 삼촌이 ‘호의’를 베풀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얼마나 사랑에 눈이 멀었던지 라헬을 준다는 확답이 없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보다 너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라는 삼촌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계약’을 이행합니다.

요즘 시대의 사회상에서 보자면, 여성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재산’처럼 거래되었습니다(창세 31:15). 여성의 가치는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었습니다. 아내를 얻으려면 다소 큰 결혼 지참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그런 시절입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장가들 일념하나로 7년을 견뎠습니다. 세월이 화살처럼 달려 ‘약속의 날’이 왔습니다.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됩니까? ‘라반’(흰색이라는 뜻)에게는 ‘라헬’(암양이라는 뜻) 말고도 딸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언니 ‘레아’(암소라는 뜻)입니다. 둘의 이미지는 ‘이름’에 드러나 있습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습니다.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습니다. 레아의 눈매를 묘사하는 ‘부드러운’이 어떤 의미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약한’이라는 뜻으로도 번역되기에 ‘흐릿하고 광채 없는 눈’ 정도로 해석합니다. 한마디로 동생이 언니보다 더 매력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잔칫날이 밝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고 성대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야곱은 사람들이 건네는 술잔에 벌써 ‘취기’가 올랐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라반은 ‘음모’를 꾸밉니다. 종들을 시켜 ‘라헬’을 빼돌립니다. 큰 딸 ‘레아’가 ‘신방’(新房)에 들어가게 합니다. 엄청난 ‘속임수’입니다. 라헬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자신을 사랑한 남자인데,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이유 하나로 언니에게 양보해야 하는 심정 말입니다. 라헬도 ‘에사오’처럼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며 울분을 삼킵니다.

‘신방’(新房)에 들어가는 레아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야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도 언제부턴가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올라왔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났는데 동생은 외모가 매력적이고 자신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라도 온 기회를 차지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숨기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라헬처럼 행동’합니다. 아침이면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밤’은 그녀의 편입니다.

드디어 첫날밤이 지났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속았음을 알고 격분했습니다.

삼촌이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왜 저를 속이시는 것입니까? – 창세 29:25

아버지와 형을 속인 ‘인과응보’일까요? 형 에사오의 심정이 자신과 같았을까요? 아침에 일어 난 야곱은 ‘삶이 온통 불공정해 보이는’ 그런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엉망진창인 상황’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첫날밤을 치렀기에 ‘레아’는 법적으로 야곱의 ‘정식 부인’입니다. 더욱이 라반이 한 말은 그의 폐부를 찌릅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큰딸보다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네. – 창세 29:26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문이 막힌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레아’가 사실은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사오 행세’를 하며 아버지를 속인 자신입니다. 형을 따돌리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삼촌이 그런 사람일 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잘못입니다. 술에 곯아떨어져 라헬과 레아를 ‘식별’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 지점에 착안해 ‘성령의 분별력’이라는 기도말을 추가합니다. 노련한 사기꾼인 라반은 야곱이 당황스러워하는 빈틈을 노립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꾀’를 또 냅니다.

초례 기간 한 주일만 채우면 작은딸도 주지. 그 대신 또 칠 년 동안 내 일을 해 주어야 하네. – 창세 29:27

그는 딸들을 ‘상품’처럼 거래합니다. 이 일로 나중에 라반은 라헬로부터 비난을 당합니다(창세 31:15). 야곱은 7일간의 초례 기간을 치르고 마침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2주 만에 아내를 둘씩이나 얻었습니다. 세상에나!

거부당한 신부로서 일의 경과를 지켜 본 레아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계획’에 따른 ‘담보’(擔保)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했습니다. 복음이야기의 ‘겨자씨와 누룩’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미미’하고, ‘미약한’ 자신의 처지입니다. 여기까지가 1독서 《창세기》의 배정입니다.

이제 다른 <전례독서>와의 연결, 즉 ‘이스라엘 역사를 설계(계획, 예정)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느님’과 연결하기 위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이야기에 따르면 나중에 레아와 라헬의 인생이 어떻게 진행되고, 결말은 또 어떻게 됩니까? ‘레아’는 결혼 후에도 라헬보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옵니다. 여전히 ‘차별’입니다. ‘불공정한 대우’를 겪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레아’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6명(6남 1녀)을 낳는 ‘복’을 받습니다. 자식을 낳을 때마다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겪고 있는 차별과 삶의 불공정(억울한 심정)이 하느님으로 인해 바로 잡아졌다며 찬미합니다(창세 29:31-35). 그만큼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의탁했다는 뜻도 됩니다. 마침내 ‘레아’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복음이야기의 ‘겨자씨’처럼 세상 모든 민족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죄악과 심판, 저주와 형벌의 세상이 ‘복과 친교’(구원)의 세상으로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변화의 누룩’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이 흥미진진한 일련의 드라마를 누가 설계(계획)하고 성취하신 것입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형을 속인 야곱의 ‘간사한 꾀’였고, 야곱을 속인 라반의 ‘음모’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보는 사람은 아직 보아야할 ‘진실’을 다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건들에는 차별, 불공정을 바로 잡기 위해 행동하시는 하느님의 ‘예정’과 ‘개입’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특히 야곱의 ‘잔꾀’가 하느님의 ‘예정’과 만나고 있습니다. 야곱의 ‘분노’가 하느님의 ‘개입’과 만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시편》으로 노래한 <105편>처럼,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행동에 나서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락한 아담 이래로 이어져 온 죄악과 심판, 저주와 형벌로 일그러진 인류의 역사를 끝내고 싶으셨습니다(창세 3-11장). 본래부터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류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고, 하느님과의 ‘친교’(올바른 관계) 속에 있게 될 ‘새 인류를 시작’하고 싶으셨습니다. 그 ‘새로운 시작’(구원의 설계)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은총’으로 ‘선택’하셨습니다(창세 12:1-3). 그를 불러 하느님의 ‘복’을 전달할 ‘큰 민족’으로 만들어 가실 것을 ‘언약’(言約)하셨습니다(로마 4:9-13,16-18; 사도 7:2-3; 히브 11:8).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그 ‘부르심과 언약’(言約)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설계, 언약)이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 갑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흥미진진하게 보아온대로입니다. 그 ‘언약’(설계), 즉 ‘약속의 성취’ 속에 사라, 하갈, 이스마엘, 이사악, ‘아브라함의 심복’, ‘리브가’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복’을 전달할 ‘큰 민족’으로 만드는 ‘약속의 성취’를 위해 그들을 선택하셨듯이 ‘야곱’도 태중에 있을 때부터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복’을 전달할 ‘큰 민족’으로 만드는 약속의 성취를 위해 ‘리브가’를 선택하셨듯이 ‘레아’도 선택하셨습니다.

더욱이 ‘야곱과 레아’는 상대적으로 ‘약자’였습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형’ 에사오에게 밀리는 ‘약자’(2인자)였고, 레아 역시 동생보다 매력이 떨어지는 ‘약자’(꼴찌)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약자들’을 ‘은총’으로 ‘선택’하시어 당신의 설계(계획), 즉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차별의 아픔’을 겪는 이들, ‘삶이 공정하지 않다’며 눈물짓는 미약한 이들의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로도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교훈한 바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 1고린 1:27-28

하느님은 차별 속에서 ‘눈물짓는 이들의 편’이십니다. 하느님은 삶이 공정하지 않다고 ‘하소연하는 이들의 편’이십니다. 하느님은 ‘약자들의 편’이십니다. 만일 스스로를 ‘강한 자’, ‘지혜 있는 자’, ‘유력한 자’라고 추켜세운다면 하느님의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형에게 밀리는 ‘약자’(2인자)인 야곱 같은 우리를 통해서, ‘겨자씨’와 ‘누룩’처럼 보잘 것 없고 매력 없는 ‘레아’ 같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의 구원’(하느님의 복과 친교를 모든 민족에게 전달하는 그 복된 일)을 완성해 가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에 ‘실수’처럼 보이는 일조차도 2독서 《로마서》 말씀처럼 종국에는 ‘선한 결과’로 만드시는 하느님입니다(로마 8:28)

우리는 그런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들이 아닙니다. ‘삶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며 눈물짓는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로마 8:28-30) 하느님의 계획(예정) 안에서 ‘선택 받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겪어가는 모든 일들이 종국에는 좋은 결과를 이루도록 개입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은혜의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생각할수록 하느님의 예정과 개입, 그 설계(계획)와 성취는 놀랍습니다. 그 은혜가 정말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차별받던 레아’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르우벤도, 시므온도, 레위도, 유다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주인공인 모세는 레위의 후손이고, 이스라엘 최고의 왕으로 꼽히는 다윗은 유다의 후손입니다. 더욱이 유다의 혈통에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차별’과 ‘삶의 불공정’에 시달리던 ‘약자’인 레아를 ‘특별한 섭리’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녀의 삶에 ‘개입’하시어 ‘구세주의 조상’이 되는 은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약자의 승리’입니다. ‘레아’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으로 이어지는 ‘약속의 가문’을 잇는 ‘큰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설계대로 그녀가 걸어야 할 길을 다 걸은 후에는 조상의 묘인 ‘막벨라 굴’에 장사됨으로써(창세 49:29-31) 동생과의 경쟁에서 승자가 되었습니다(창세 35:19).

야곱이 장가 든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배움을 얻습니까? 이야기 속에는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했습니다. ‘삶에 차별이 있어요.’ ‘삶이 불공정해요!’ 이 외침에서 예외인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야곱’처럼 ‘어이없고’, ‘삶이 온통 불공정’해 보이는 그런 상황을 겪습니다. ‘라헬’처럼 자신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리인데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빼앗겨야’ 하는 그런 상황을 겪습니다. ‘레아’처럼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데’ 상대방은 너무도 쉽게 얻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을 겪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엇을 느꼈을 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당화되건 그렇지 않던 간에, 이사악, 리브가, 에사오, 야곱, 레아, 라헬, 그들은 자신이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상황에 처했었습니다. 삶은 통제할 수 없고, 공정하지도 않으며,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순간들을 겪었습니다. ‘차별과 불공정이 그들 삶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역사의 설계자이신 하느님은 삶에 ‘개입’하시어 차별과 불공정에 새 길을 열어주시고 소망을 간직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5편>은 ‘이스라엘 선민의식과 계약’에 대한 찬미입니다. 온 세상과 역사의 주관자(주권자)이신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관자(주권자)이십니다. 감사와 찬미를 받으실 ‘계약의 주인’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시는 주관자(주권자)이십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가장 기초가 되는 주제를 담고 있는 <105편>은 ‘가’해 <전례독서>에 무려 ‘4차례’(연중 17, 19, 22, 25주일)나 배정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먼저 시인은 ‘주님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높이 부르라’고 초대합니다(1-4절). 무엇을 ‘감사’하고 왜 ‘그 이름을 높이 불러야’ 하는지 말하기 위해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성찰’합니다(5절).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신 ‘아브라함의 여정’부터 시작합니다(6절). 그 선택과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의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인이시자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신 분임을 교훈해 나갑니다(7-10절). ‘가나안 땅’을 그들의 선조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음을 교훈합니다(11절).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것이 <105편>의 출발점입니다(11절). 오늘 시편은 여기까지만 배정하고 훌쩍 건너뛰어 45절을 배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심히 미약했습니다(12절). 적은 수의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국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이 민족 저 민족 사이를 떠도는 신세였습니다(13절).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들이 살던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셨습니다(16절). 그들을 이집트로 내려 보내십니다(17-23절). 그들은 이집트에 정착하여 큰 민족을 이뤘습니다(24절). 그들을 미워하는 원수들로부터 종살이를 하며 고난을 겪었습니다(25절).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하소’를 들으시고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어 ‘해방’(출애굽)시키셨습니다(26-38절). 그들은 자유의 여정인 광야생활을 거쳐(39-41절) 마침내 ‘약속의 땅’에 정착했습니다(42-45절). 이 모든 가나안 정착의 과정은 그들이 ‘강자’라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선물, 즉 무조건적인 상속이었습니다. 그들은 ‘겨자씨’에서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의 그들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적 뿌리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으신 때로부터 그들이 ‘선민’으로써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민족형성사’를 ‘성찰’하며 바치는 감사 찬미입니다. 그 ‘성찰’을 통해 이스라엘은 은총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며 ‘계약’에 신실하셨던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그들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주권적 언약 성취를 감사하고 찬미하는 ‘역사시’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105편>이 복음이야기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주신다는 ‘약속과 성취’가 복음이야기의 길잡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기의 주제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상속’하게 될 ‘하늘나라’(영원한 생명)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 되고, ‘가나안 땅’을 물려받은 것은 자신들의 ‘공로’ 덕택이 아닙니다. ‘겨자씨’ 같이 심히 미약한 아브라함, ‘보잘 것 없던’ 나그네 신세였던 그들을 ‘선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시며 ‘성취’하신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상속’ 덕택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공로 덕택이 아닙니다. 2독서 《로마서》가 교훈하듯이 오래전에 우리를 ‘선택’(예정)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하느님의 은혜’ 덕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시고(로마 8:17), ‘보잘 것 없는 우리의 편’이 되어주신 ‘하느님의 은혜’ 덕택입니다. 이 은총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것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확신을 주신다는 교훈이 2독서 《로마서》에서 이어집니다.

2독서 《로마서》는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도우심과 사랑의 승리를 교훈합니다. ‘기도’, ‘구원의 확신’, ‘구원의 예정’, ‘하느님의 사랑의 주권’,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영적 유대감’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가 차례로 이어집니다. 고난 속에 있는 로마의 교우들을 향한 사도 바울로의 절절한 ‘사랑의 마음’이 글자 하나하나마다 고여 있습니다. 그 사랑의 마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 로마 8:26

사실 그들의 처지는 너무나 힘겨웠습니다(35-36절). 그들은 기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대신 기도해 주셔야 할 정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로마서》는 사도 바울로가 스페인 선교를 위한 재정적 후원과 필요를 위해 집필했습니다. 서신을 쓸 때만 하더라도, 사도 바울로는 ‘곧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고 생각했고 그 맥락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삶이 고난 속에 있지 않고 온통 ‘장미 빛’이었다면, 서신 후반부(35절 이하)에 나오는 그런 ‘극단적 표현들’을 일부러 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로가 보기에 로마에 있던 교회 역시 자신이 직접 세운 소아시아의 교회들처럼 다른 집단들과 비교하면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보잘 것 없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습니다. 그 작은 겨자씨, 그 작은 누룩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로 상징되는 세상 문화의 도전과 폭력과 환난과 역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목적’(설계, 언약)은 분명코 ‘성취’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로마 8:28

그렇습니다. 바울로는 교회를 향한 ‘구원의 역사’를 오래 전에 ‘설계’하시고, ‘성취’해 가시는 하느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교회를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신 하느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교회가 ‘겨자씨’처럼 작지만, ‘세상에 복을 끼치는 큰 나무’가 될 것이라 믿은 사람입니다. 교회가 ‘누룩’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온통 부풀게 할 것이라 믿은 사람입니다. ‘보물’이자 ‘진주’인 예수 그리스도, 하늘나라의 가치에 헌신한 교회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선민’인 교회를 홀로 있게 만들 수 없다고 믿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편’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굳게 믿은 사람입니다.

그 연약한 공동체를 향한 바울로의 교훈을 들으며 우리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차별과 삶의 불공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착한 이웃으로 살고 있습니까? ‘약한 사람들의 편’이신 구원의 하느님을 얼마나 닮아가고 있습니까? 약한 사람들의 ‘입’이 되어주고, 그들이 목소리를 들어주는 ‘귀’가 되고 있습니까? 한 때 교회도 오로지 하느님 외에는 대신 기도해 줄 이 하나 없는 ‘약자’(겨자씨, 누룩)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이 너무나 오래돼서 이제는 다 잊어버렸지만 적어도 1세기 교회는 그랬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이야기 《마태오복음》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전하는 <13장>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전해지는 ‘5묶음의 설교’ 중에 세 번째 설교묶음이고(관련설교는 2020. 6.21. 연중 12주일의 복음이야기를 보십시오), 세 번째 설교묶음에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7개의 하늘나라 비유’가 있습니다(13장). 연중 15, 16주일에 두 개의 비유를 살펴보았고 오늘은 나머지 다섯 개의 비유를 다룹니다.

예수님은 인간사의 여러 분야에 비추어 당신이 시작하신 ‘하늘나라’를 설명해 주십니다. 하늘나라(하느님 나라)는 장차 다가올, 그리고 현재 자라나고 있는 미래적이고 현재적인 하느님의 ‘선하신 다스리심’(통치, 주권, 질서)을 뜻합니다. ‘하늘나라’라는 ‘맑고 큰 말’ 속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핵심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의 직접적인 ‘보살피심’, 즉 ‘사랑의 통치’입니다. 그 사랑 속에 있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으라는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하늘나라 도래의 선포로 시작하셨고,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한 하늘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외세로부터 해방된 ‘민족주의 국가’로 이해했습니다. ‘정치적 해방’을 실현시켜 줄 인물이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입니다(이사 11:1-9). 예수님은 이러한 하늘나라와 메시아 이해를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다스리심, 정의와 평화)이 자신을 통해 온 누리에 직접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제 ‘하늘나라’를 비유하는 ‘겨자씨 비유’부터 차례로 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이 이 비유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성장’, 즉 겨자씨가 ‘엄청나게 커지는’ 부분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석하곤 합니다.

…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늘나라가 지금은 몹시 작아 보이지만 점점 ‘성장’해 갈 것입니다. 마침내 종말에는 엄청난 구원의 위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에는 예수님이 간직하신 하늘나라의 확신과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겨자씨의 비유’가 하늘나라의 보잘 것 없는 시작과 놀라운 성장의 결과를 대조한다고 해설합니다. 중요한 해설입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열려’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진실이 아직 있습니다. 그 해설은 더 중요한 부분을 놓쳤습니다. 첫 구절, 즉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이 부분을 지나쳤습니다. 왜 이 구절이 더 중요할까요?

밭에다 ‘의도적’으로 가꾸는 온갖 푸성귀를 ‘채소’라 합니다. ‘겨자’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 풀’입니다. 거의 ‘잡초’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때든 밖에 나가면 얻을 수 있기에 굳이 ‘자기 밭’에다 ‘일부러’ ‘겨자씨’(σιναπι)를 뿌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은 ‘밭’에다 ‘채소’를 가꾸듯 ‘의도적으로’(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겨자씨’를 뿌립니다. 당시 시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우스운 행동’입니다. 제자들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 귀중한 밭(땅)에다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나 대추야자나무나 꽃나무도 아니고 고작 ‘잡초’에 불과한 ‘겨자씨’를 ‘일부러’ 심느냐고 말입니다.

어째서 그 사람은 그렇게 했을까요? ‘어리석게’ 행동한 그 ‘남자’는 누구입니까? 더욱이 ‘겨자씨 한 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이 ‘하느님’(당신 자신)이라고 비유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행동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겨자씨’가 ‘우리’라면 이야기를 듣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그 행동(의도적으로 한 그 행동)이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언급한 ‘레아’처럼, ‘겨자씨’ 같은 우리,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잡초’ 같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불러주시어, ‘당신의 밭’(세상)에 ‘의도적’(목적을 가지고 일부러)으로 심으신 하느님’입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신 하느님입니다. 이 점이 우리가 비유에서 진실로 주목해야 할 점이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늘나라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당시 사회에서 ‘잡초’ 취급을 받던 ‘소외된 인생들’, 즉 병자들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마태 11:19). 잡초처럼 전부 뽑아버려야 한다고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이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1:31).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이런 하느님(예수님)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 운동을 한다면서 유력한 1인자들, 강한 자들을 놔두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이들(우리들)을 ‘당신의 밭’에 ‘의도적으로’(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심으신 일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하느님의 행동’(예정, 설계, 개입)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밭’ 심으실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겨자씨는 어느 정도까지 자랄까요?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 마태 13:32

이 구절에는 ‘과장’(誇張)이 좀 들어 있습니다. ‘겨자씨’가 작기는 하지만 가장 작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장법입니다. 실제로 성지 순례 때 겨자씨를 손에 놓고 본 일이 있습니다. 현지 인솔자가 갈릴래아 상부지역에 있는 ‘하솔’(여호 11:1-12; 판관 4:1-5:31; 열왕상 9:15-22; 열왕하 15:27-29)을 안내하던 중 바싹 마른 가지들을 가리켰습니다. “저게 ‘겨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너도나도 가지들을 뜯었습니다. 마른 ‘씨방’을 비벼서 나온 ‘씨’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았습니다. 작기는 작았는데 가장 작은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또 “새가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된다.”고 하니까 5-6미터 이상 자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해입니다. 겨자씨가 다 자라면 2-3미터 정도의 크기입니다. 우리식 분류에서는 겨자가 ‘여러해살이 풀’(잡초)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서는 ‘나무’입니다. 그들은 땅에서 나와 곧바로 잎이 펼쳐지는 것은 ‘풀’(푸성귀, 나물), 땅에서 돋아 줄기가 서고 가지가 나와 잎이 붙어 있는 것은 ‘나무’라고 분류했습니다. 우리식으로는 ‘풀’(푸성귀, 나물)인 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는 ‘나무’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더욱이 ‘겨자’는 단독으로 자라지 않는 ‘군집식물’입니다. 그런데도 ‘밭주인’은 겨자씨 ‘한 알’을 가져다 ‘의도적’(목적을 가지고 일부러)으로 ‘자기 밭’에다 ‘채소 씨앗’처럼 심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겨자씨를 뿌렸다”고 하니까 주인이 한 움큼 쥐고 밭에 뿌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문에는 “겨자씨 ‘한 알’을 심었다”입니다.

이렇게 밭의 주인은 누가 보든지 ‘이미’ 어리석은 행동을 했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심은 그 한 알의 겨자씨가 커져서 새들이 깃들기를 기대합니다. ‘어리석은’ 기대입니다. 왜냐하면 겨자는 ‘군집식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그루만 있어가지고서는 새들이 깃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겨자씨 비유를 발설하시는 예수님의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알만 심어가지고는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예수님)은 기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사람이 보기에 전혀 ‘이해가지 않는 행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기대’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연약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잡초처럼’ 쓸모없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밭’에 ‘의도적’(목적을 가지고 일부러)으로 심으셨습니다. 연약하고 미미한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이웃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큰 나무’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레아’처럼 이웃에게 ‘복’을 전달하는 ‘큰 나무’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설계하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특히 하늘나라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도래합니다. 하늘나라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도래합니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 정말 작고, 또 땅 속에 숨겨져 있어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땅에서 썩으면 역설적이게도 신비한 생명활동을 합니다. 싹이 트고 자라나면서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이 보잘 것 없고, 미미한 씨앗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경영’해 가시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은 보잘 것 없고, 미미한 것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약자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해 가시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오늘도 ‘기대감’에 차서 바라보십니다. 우리 마음에 ‘복음의 겨자씨’를 심으시고, ‘큰 나무’로 성장한 우리를 통해 꾸준히 확장되어갈 ‘하늘나라’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정말이지 연약하고 미미한 겨자씨 같은 우리에게서 하늘나라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을 어쩌면 좋을까요! 하기야 ‘잡초’ 같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훗날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깃들이는 ‘큰 나무’로 자라났다는 것이 교회사의 증언입니다. 그들을 통해 겨자씨의 비유는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시작도 겨자씨처럼 미약하였지만 지금은 심히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큰 것을 좋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구원의 복을 전해주는 착한 그리스도인’은 많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의 속성입니다.

‘누룩의 비유’도 ‘겨자씨의 비유’처럼 똑같이 놀라운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처럼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누룩의 비유’를 이렇게 해설합니다.

…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늘나라는 이 세상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엄청난 변화를 드러낼 정도로 하늘나라는 성장할 것입니다. 누룩의 비유에는 예수님이 간직하신 하늘나라의 확신과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숨겨져 있어서 보이지 않던 하늘나라가 엄청난 변화를 드러낼 정도로 성장한다는 그들의 해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들을 귀가 열려’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진실이 아직 있습니다. 그 해설은 더 중요한 부분을 놓쳤습니다. 왜냐하면 비유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밥’이 주식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식은 ‘빵’입니다. 밥이든 빵이든 ‘안주인’(어머니)이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요즘이야 전기밥솥이 밥을 하지만 예전에는 불 조절이 쉽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레 국과 반찬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손길이 식구들을 살립니다. 그래서 ‘안주인의 일’을 ‘살림’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빵을 만드는 일도 ‘밥’을 짓는 일만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선 보리든 밀이든 맷돌에 돌려 ‘가루’로 빻아야 합니다. 주로 ‘안주인’이 그 일을 했습니다. ‘누룩’을 넣어 반죽하면 빵이 더 부드럽게 되지만 ‘상’(傷)하기 쉽습니다. 이런 이유로 ‘누룩’을 넣지 않고 반죽해서 빵을 굽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다만 ‘소금’은 ‘반드시’ 넣어서 ‘반죽’했습니다.

고대에는 빵을 먹고 난 뒤 남은 ‘부스러기’를 잘 말려서 갈은 후에 ‘누룩’으로 사용했습니다. 누룩을 넣은 반죽이 ‘충분히’ 숙성’(발효)되기까지는 대략 3-4일이 걸렸습니다. 요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걸렸습니다. 전날 오후에 해놓은 반죽은 다음날 아침이면 충분히는 아니더라도 효소작용으로 어느 정도 부풀어 오릅니다. 어머니는 부풀어 오른 반죽에서 작게 떼어 내어 ‘화덕’에 굽습니다. 거친 ‘보리빵’은 가난한 사람들, 좀 더 부드러운 ‘밀빵’은 부자들이 주로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며 가족을 위해 ‘화덕’에서 ‘보리빵’을 굽던 ‘어머니의 고마운 손길’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빵 만들 반죽을 준비하는 ‘여자’의 행동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좀 이상한 면이 발견됩니다. 여자는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습니다. ‘서 말’은 어느 정도의 양과 무게일까요? 대략 150인분, 무게는 50kg 정도입니다. 비유를 듣던 제자들은 아마 크게 ‘웃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주인’(어머니)이 가족의 식사를 위해 준비하는 양 치고는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많은 양의 반죽’이 ‘발효’되려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야말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전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살림 교육을 제대로 받은 여자라면 그 ‘적은 양의 누룩’을 ‘서 말’이나 되는 ‘많은 양의 밀가루’에 넣는 ‘무모한 행동’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행동하는 여자가 있다면 빵 만드는 법을 모르거나,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어리석다며 꾸지람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 하늘나라를 가르치십니다. 밀가루 서 말이라는 양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점은 하느님을 ‘여인’에 비유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을 ‘어떤 남자’에 비유한 ‘겨자씨의 비유’와 대조됩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누룩’을 ‘하늘나라’ 비유에 사용하신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누룩은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6:8,11-12; 1고린 5:7-8).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 좋은 하늘나라’ 비유에 기꺼이 ‘누룩’을 사용하십니다. 비록 누룩 그 자체는 부패와 타락의 상징이지만 본래의 것을 ‘변화’(변질)시키는 ‘효력’은 정말 대단하기 때문입니다(1고린 5:6; 갈라 5:9).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채소’도 아닌 그 흔한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남자가 없는 것처럼, 그 많은 양의 밀가루 속에 ‘누룩’을 넣는 ‘여자’도 없습니다. 비유니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다며 손가락질 할 행동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예수님)께서는 이런 행동을 하십니다. 미약한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겨자씨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처럼, ‘잡초처럼’ 쓸모없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밭’에 ‘의도적’(목적을 가지고 일부러)으로 심으셨습니다. 은총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누룩’ 같은 사람들을 ‘선택’하시어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더욱이 타락한 세상을 하늘나라로 ‘변화’시키라고 ‘성령의 권능’을 주시어 ‘세상’에 ‘은밀히’ 파송하시며 집어넣으셨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복’과 ‘친교’를 전달하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구원 역사를 위한 하느님의 ‘설계’이자 하느님의 ‘기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곁에는 당시 사회에서 ‘누룩’ 취급을 받던 ‘소외된 인생들’, 즉 병자들과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마태 11:19).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을 ‘부패’시키고, ‘타락’시키는 ‘누룩’ 같은 존재들이라고 취급받던 당대의 ‘죄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소외된 인생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죄인 취급을 받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삶의 의미’(예수님 자신이 그들의 의미였습니다. 보화요 진주였습니다)를 발견하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그들, 즉 예수의 추종자와 제자들은 ‘복음의 능력’, ‘성령의 권능’으로 점차 ‘세상’을 ‘은밀히 변화’시켜 갔습니다.

반죽 속으로 녹아들어가 완전히 하나가 된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룩의 영향’으로 ‘반죽’은 온통 ‘부풀어’ 오릅니다. 그것처럼 ‘세상’ 사람들 속으로 철저히 녹아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동화’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라져 버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을 변화시켜 갔습니다.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성령의 사람들’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요란스럽게 ‘유별난’ 행동을 하면서, 즉 세상과 구분되는 삶(거룩한 삶)을 산다면서도 정작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오늘의 엉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도 있습니다. 엉터리 그리스도인들 말고 ‘세상’을 ‘은밀히 변화’시키는 누룩 같은 그리스도인들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누룩 같은 우리를 선택하시어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누룩 같이 ‘미약’한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시어 ‘세상’에 ‘은밀히’ 파송하셨습니다. ‘세상’ 한 가운데 녹아 들어가 살면서, 세상 사람과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맛나는 곳으로 변화시키라고 ‘은밀히’ 우리를 집어넣으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일어날 ‘세상의 변화’를 지금도 기대하시고 믿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설계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목적’을 가지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밭’(세상)에 의도적으로 심겨졌습니다. 우리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복음’으로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라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세상’ 속으로 ‘은밀히’ 들여보내졌습니다.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고 큰 나무가 되기를 기대하는(설계하는) 남자처럼, 밀가루 서 말 속에 그 적은 양의 누룩을 집어넣고 부풀기를 기대하는(설계하는) 여자처럼, 완전히 어리석은 행동을 감행하신 하느님의 ‘은혜’ 덕택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 머리로는 유력한 1인자들, 강한 자들을 놔두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연약한 우리, 미약한 우리, 꼴찌인 우리를 목적을 가지고 당신의 밭에 심으시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으로 집어넣으신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납득되지 않는 하느님의 행동(예정, 개입)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나라’입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의 비유’는 또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곳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부자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항아리에 ‘보물’을 넣어 ‘밭’에 감추고 피난을 가곤 했습니다. 인생사 알 수 없다고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릅니다. 분명 ‘보물’이 ‘그 밭’에, ‘한 지점’에 오랜 동안 숨겨져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월이 흘러 그 밭은 옆 마을의 다른 부자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잡풀이 우거진 그 밭을 부자는 그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에게 소작(小作)으로 주었습니다. 그 밭을 소작(小作)하게 된 농부[본문에는 ‘농부’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안쓰로포스’(ἄνθρωπος)가 쓰였습니다)는 ‘밭’을 갈다 ‘우연히’,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했는데 ‘보물 항아리’를 발견합니다.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횡재(橫財)입니다. 처음에는 몰래 하나씩 옮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항아리 수가 많았습니다. 남이 볼세라 얼른 다시 묻어둡니다. ‘보물 항아리’가 있는 ‘그 지점’을 잘 표시해 둡니다.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기 시작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설계합니다.

며칠 후에 그는 옆 마을의 밭주인을 찾아갑니다. 보물 항아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밭’을 자신에게 팔라고 설득합니다. 밭주인은 처음에는 안 판다고 했다가 농부가 ‘큰돈’을 지불한다는 말에 얼른 팔아버립니다. 농부는 합법적으로 그 밭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그 밭의 가치를 부여한 ‘보물 항아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밭주인에게 알리지 않은 그를 비도덕적이라 비난하고 싶겠지만, 비유가 말하려는 초점은 따로 있습니다. 다시 못 올 기회를 잡은 것처럼 그는 ‘신속히 행동’했습니다. 비유의 초점은 거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의 ‘신속한 행동이 현명했다’는 뜻입니다. 그 농부는 밭의 가치보다 훨씬 큰 가치의 보물을 소유하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팔았던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팔아버린 것보다 훨씬 큰 가치(보물)를 소유한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우의적 해석’을 해봅니다. 그 밭을 산 농부는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밭’은 ‘세상’, ‘보물’은 ‘하늘나라’(하늘나라의 가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물’은 밭 전부가 아니라 ‘한 지점’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밭 전부’를 샀습니다. 그 밭의 ‘가치’를 ‘부여’하고, ‘큰돈’을 ‘지불’할 ‘가치가 있음’을 ‘결정’한 것은 ‘밭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한 지점’에 묻혀 있던 ‘보물’(하늘나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이 그 밭의 가치를 부여했고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보물’은 ‘세상’에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전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넓은 세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아직 세상에 숨겨져 있는 ‘보물’, 즉 ‘하늘나라’(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숨겨져 있는 ‘하늘나라’(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겁니다. 그 ‘보물’(하늘나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을 손에 넣기 위해 “있는 것을 다 파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영원토록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세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게하고, 더 큰 눈을 뜨고 세상을 살게 하는 ‘하늘나라’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합니다. 이것이 비유에 명백히 드러난 예수님의 명령, 즉 ‘법’입니다.

‘진주 장사꾼의 비유’는 어떻습니까? ‘장사꾼’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엠포로스’(ἔμπορος)입니다. ‘장사꾼’(상인)이란 뜻도 있지만 ‘배를 타고 가는 승객’, ‘여행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저기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의 비유는 밭의 ‘한 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우연히’ 발견합니다. ‘진주 장사꾼 비유’는 범위도 훨씬 넓고,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요즘이야 ‘진주’(pearl)가 양식되지만 고대에는 희귀한 보석이었습니다. 때로는 ‘금’보다 더 가치 있는 보석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 전통에서 “진주는 천사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천사가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이 바다에 떨어져서 ‘진주’가 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 비유에 진주를 등장시킨 것도 그만큼 귀중하고 희귀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진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마가리타스’(μαργαρίτας)입니다. ‘영세명’(Christian name) 중에 ‘마가렛’(Margaret, 마거릿)이 있습니다. ‘마가리타스’(μαργαρίτας)를 ‘영어’로 옮긴 이름입니다.

‘좋은 진주’(아름다운 진주)를 찾아다니는 어떤 장사꾼이 있었습니다. ‘좋은 진주’는 그가 평생토록 찾고 원하던 ‘삶의 최고 가치’를 뜻합니다. 어느 날 그는 ‘값진 진주’를 만납니다. 기쁨으로 눈이 반짝입니다. 다시 못 올 기회를 잡은 것처럼 그는 ‘신속히 행동’합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신속히’ 그 진주를 삽니다. 그 ‘신속한 행위’가 ‘현명했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 그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 ‘진주’가 바로 ‘하늘나라’(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자신이 찾고 원하던 최고의 가치, 즉 ‘하늘나라’를 사기 위해 ‘신속히’ 모든 것을 동원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가치’(궁극적으로는 당신 자신)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더라도 결코 아깝지 않다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비유에 명백히 드러난 예수님의 명령, 즉 ‘법’입니다.

이처럼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진주 장사꾼의 비유’는 둘 다 무엇인가의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하며,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모두 것을 판” ‘신속한 행동’이 돋보입니다. 다시 못 올 기회를 잡은 것처럼 그들은 ‘신속히’ 행동(헌신)합니다. ‘지혜롭게 행동했다’는 것이 ‘눈이 열려’ 발견해야 할 행간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우주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한 이들, ‘예수님’을 자기 삶의 ‘가장 소중한 보물’과 ‘가장 값진 진주’로 발견한 이들, 자기 삶의 ‘최고 가치’로 발견한 이들은 ‘기뻐’하며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신속히’ 동원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신속히’ 거기에 ‘투신’(헌신)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희생’마저도 ‘기쁘게’ 감내합니다. 우리 영혼을 황폐하게 하는 세상적인 관계를 제거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온통 ‘하늘나라’에 맞추며 삽니다. 오로지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예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삶을 어리석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이 열린 이들은 그런 ‘투신’(헌신)이야말로 참된 ‘믿음’임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믿음’이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명’과 동의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 반드시 실현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명령, 즉 ‘하느님의 목소리’가 ‘사명’입니다. 그 목소리(명령, 사명)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고요히 귀를 기울 때야 만이 비로소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부차적인 것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욕심만을 따라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은총의 시간이 찾아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삶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은 슬픔의 눈물이 대전환점처럼 작용하는 이들 말입니다. 그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은 슬픔의 눈물 속에서 그들은 문득 ‘자신을 향해 질문’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 나섭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그렇게 질문하고 찾고 듣고자 하는 이들이 ‘등불’처럼 ‘의지’할 수 있는 ‘교회의 선물’이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등불’처럼 ‘의지’하고 ‘묵상’해 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내면에 말을 걸어오시는 ‘침묵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든 것을, 보다 정확히는 자기 자신을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바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이 설계하신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고 가야 합니다. 그날 어쩔 수 없이 내려놓고 가기보다 자발적으로 그것들을 ‘내려놓을’ 기회를 찾으십시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획득해야 할 ‘가치’, 즉 ‘그 밭의 보물’과 ‘값진 진주’를 찾아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하늘나라)라는 그 ‘보물’, 그 ‘진주’야 말로 ‘가장 가치 있음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십시오.

예수께서는 당신을 소유하려면 우리의 모든 삶을 ‘지불’(투신, 헌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신의 보물이요, 진주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헌신(지불하신, 내어놓으신)하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듯이 하늘보좌를 버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5-8).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 났고, 위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그 은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를 보물처럼, 진주처럼 여기신 그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았던 예수님의 ‘명령’에 신속히 헌신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마지막 비유는 ‘그물의 비유’입니다. 지난주에 들었던 가라지의 비유처럼 ‘종말론’적인 내용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물에 비유된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완성 될 때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골라낼 때처럼(레위 11:10-12, 신명 14:9-10), 선한 이와 악한 이를 ‘분리’시키는 ‘심판’이 일어납니다. 가려내기 전에는 그물 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를 분리시키는 ‘심판의 날’이옵니다.

분명 ‘하늘나라’는 누구든지 다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에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종말이 오면 하느님께서 친히 선한 이들과 악한 자들을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직 그 날이 안 되었기에 ‘회개의 기회’가 있습니다. 마지막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물을 널리 펼치는 일을 할 뿐입니다. 기억할 것은 세상 끝날 불구덩이에 처넣어지지 않으려면 하느님이 선한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살리고 선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보물과 진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알아들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예”라고 대답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도 이 비유들의 참된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비유의 결어를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 마태 13:52

이 결어는 제자란 누구이고 어디까지 성장해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고대 이스라엘 회당은 두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한쪽은 사람들이 예배와 행사를 하는 공간이고, 다른 한 쪽은 ‘토라’(율법)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토라가 있던 공간의 관리는 학식이 뛰어난 율법학자들이 맡았습니다. 예배 중에 토라를 낭독하는 데 율법학자들은 어느 곳에 해당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적절하게 꺼내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의 율법학자의 역할에 빗대어 제자들을 추켜세우십니다. 다만 딱딱하고 근엄해 보이는, 혹은 재미없어 보이는 율법학자 이미지가 싫으셨습니다. 그래서 ‘곳간’에 ‘포도주’를 보관하고 있는 집주인으로 바꾸어놓습니다. 집주인은 어느 행사에 ‘새 포도주’가 필요하고 어느 행사에 ‘묵은 포도주’가 필요한지 잘 알고 꺼내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으로부터 하늘나라 교육을 받은 제자들은 각각의 상황과 사람에 맞게(유연성) 하늘나라를 적절히 가르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름지기 제자는 그 정도 수준까지 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하느님은 구원의 역사(하늘나라)를 ‘설계’하시고 ‘성취’해 가십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설계’ 속에 있던 ‘야곱’, ‘레아’, ‘라헬’, ‘질바’, ‘빌하’라는 이름을 들었습니다(오늘 본문에는 ‘빌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설계하신 하느님은 그들 삶에 ‘개입’하시어 차별과 불공정에 새 길을 열어주시고 소망을 간직하게 해 주셨습니다. 특히 차별과 불공정에 한숨짓는 ‘레아’의 삶에 개입하시고, 편드시는 은혜의 하느님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시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선민의식과 계약’을 살펴보았습니다. ‘약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계약을 충실히 성취해 가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은혜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2독서 《로마서》에서 우리는 교회를 향한 ‘구원의 역사’를 오래 전에 ‘설계’하시고, ‘성취’해 가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강자가 아니라 약자인 우리를 오래 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영광스런 자녀로 삼으신 사랑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교회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승리의 확신을 성령 안에서 갖게 되었습니다.

《마태오복음》을 통해 하느님이 설계하시고 성취해 가시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들었습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겨자씨’ 같이 미미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불러주시어 ‘세상’이라는 ‘당신의 밭’에 ‘의도적’(목적을 가지고 일부러)으로 심어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레아’처럼 이웃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큰 나무’가 되기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대감’에 차서 바라보십니다.

‘누룩’ 같이 미약한 우리를 ‘선택’하시어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키신 ‘은총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누룩같이 미약한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시어 ‘복음’으로 온통 부풀게 하라고 ‘세상’ 속에 ‘은밀히’ 집어넣으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를 통해 일어날 ‘세상의 변화’를 지금도 기대하시고 믿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은혜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통해 이 세상에 구원의 역사를 펼쳐가시기로 설계(계획)하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자녀로 성장하고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믿어주시는 은총의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보물을, 진주를 찾아낸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나라를,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신속히’ 소유하는 지혜의 사람이 되라고 배웠습니다. 보물의 가치를, 진주의 가치를 알아보고 ‘신속히’ 행동한 사람처럼 하늘나라를 소유한 지혜의 사람으로 날마다 빚어 가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우리를 보물로, 진주로 삼으신 주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선한 이와 악한 자를 갈라내실 ‘심판의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잘 선용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이’로 살라고 배웠습니다. 끝으로 ‘진리의 스승’이신 예수께 배우는 제자답게 상황과 사람에 맞게 하늘나라를 살아내는 ‘지혜로운 사람’이 우리여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일이 신앙의 목표임을 배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의 설계와 성취’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그 구원 역사의 설계와 성취가 궁극적으로는 ‘하늘나라’임을 명백히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시작하신 그 하늘나라 운동을 교회가 세상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어 하늘나라 소망을 간직하게 하시며, 교회가 그 ‘구원 역사를 성취’해 가도록 날마다 인도하십니다.

오래 전에 우리를 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 상속자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올바로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대의 약한 이들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을, 하느님 사랑을 나누는 교회로 오늘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들을 귀’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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