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19. 연중1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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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에게 진실한 마음과 뜻을 주시어 주님을 예배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8:10-19a
  • 시편 – 139:1-12,23-24
  • 독서 – 로마 8:12-25
  • 복음서 – 마태 13:24-30,36-43

연중 1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배, 성취될 영광의 때(추수)를 고대하며 성령 안에서 오늘을 인내하는 이의 숭고한 행동’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도망자 야곱이 베델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야곱의 ‘소명체험’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과 장소에서 그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살피고 계신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에는 형제 사이의 ‘속임수’와 ‘적대’와 ‘음모’가 녹아있습니다. 그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가정은 기도 끝에 ‘약속의 선물’을 받습니다(창세 25:21).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둘은 태중에 있을 때부터 경쟁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이미 ‘약속의 후사’를 점지하셨습니다. 그 점지 사실을 하느님은 ‘리브가’에게만 알려주셨습니다(창세 25:23). 선둥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 몸이 ‘털투성’이여서 이름을 ‘에사오’라 지었습니다. 후둥이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이름을 ‘발꿈치를 잡은 자, 강탈자, 모사꾼, 얌체’라는 뜻의 ‘야곱’이라 지었습니다.

자라서 에사오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이사악은 그런 에사오를 ‘편애’(偏愛)했습니다. 이사악은 재산 상속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에사오에게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야곱은 성질이 ‘차분’(조용)하여 늘 천막에 머물며 어머니 리브가를 따랐습니다. 이사악은 그런 야곱이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리브가는 달랐습니다. 제멋대로인 에사오보다는 천막에 머물며 자신을 도와주는 야곱에게 더 마음이 갔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에게는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가족 안에서의 지위, 즉 자신이 ‘장자’(1등)가 아니라 ‘작은 아들’(2등)이라는 ‘수치심’이 괴로움의 원천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오는 하느님의 신성한 약속, 즉 ‘장자 상속권’을 불콩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렸습니다(창세 25:33). 그는 ‘장자’라는 자신의 ‘본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더욱이 1등이 될 기회를 엿보던 야곱은 자신을 편애하던 어머니와 ‘음모’를 꾸밉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까지 속여가면서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창세 27:1-30,35). 이 일 때문에 화가 난 형은 아버지가 죽고 나면 동생을 없애버릴 마음을 먹었습니다(창세 27:41).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작은 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친정집’으로 야곱을 피신시키기로 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에사오처럼 헷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일이 싫다고 이사악에게 호소합니다(창세 27:46). 이사악은 야곱을 축복하고 아내의 친정인 ‘하란’(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으로 보내기로 합니다. 거기서 라반 아저씨의 딸 하나를 아내로 삼도록 명령합니다(창세 28:2). 모든 일이 리브가의 계획대로 되었습니다(창세 27:45).

하지만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있는 ‘하란’을 떠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 12:1-3). 그 ‘믿음의 여정’과는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속임수와 조치의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습니다. 그 날 이후 어머니 리브가와 작은 아들 야곱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가 1독서 《창세기》 이야기의 전(前) 배경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28:5). 사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한 ‘도망’입니다. ‘불확실한 미래’(혼돈, 혼란, 어둠, 고통의 눈물) 속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야곱’은 어떤 이의 상징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2인자였던 야곱은 자기존재에 대한 ‘수치심’과 ‘열등감’을 가진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기회만 엿보다가 2등을 모면할 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고대 영성 전통이라 불리는 ‘에니어그램’에 따르면, 야곱은 3유형의 전형입니다. ‘성공’(지위)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편법’과 ‘속임수’를 써서라도 경쟁에서 이기고, 맨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사기꾼’의 상징입니다. ‘자기이득’에 잽싼 전형적인 ‘이기주의자’의 상징입니다. 더 확장하자면 자신의 일에 ‘너무나 바빠서’(일 중독) 가족이나 이웃을 위한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고 ‘자기 보기’가 안 된 사람의 상징입니다. 수치심과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열성으로 너무나 바빠서 ‘하느님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만 살다가 그만 ‘부서진 인간관계’에 놓인 사람의 상징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이 필요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동안 숨어계시면서 모든 것을 살펴 오신 하느님께서 그런 그의 삶에 ‘극적’(劇的)으로 개입하십니다. 야곱은 자신이 자초한 문제들로부터 달아나고 있습니다. 도망자 야곱은 우연히 찾아들게 된 한 장소에서 ‘밤’을 묵어야 했습니다. 임시로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제법 큰 돌 하나를 굴려 베개 삼고 ‘잠’을 청합니다. 머리 아래에는 딱딱한 ‘돌’이 있고, 머리 위에는 ‘열린 하늘’입니다. 그 돌(석상, 기념비)이 갖는 의미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무수한 별빛 아래 노숙자(난민)가 된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기만 합니다.

어느 순간 야곱은 ‘깊은 잠’에 빠집니다. 분명 이전의 일상적인 잠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바꾸는 ‘특별한 꿈’을 꿉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을 통해 하느님이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층계’(히브리말로 ‘술람’(סֻלָּם), 흔히 말해지는 ‘사다리’보다는 ‘경사진 계단’이 더 정확한 뜻)가 있습니다. 층계가 땅에서 하늘까지 닿았다는 것은 땅과 하늘이 이어진 곳, 즉 땅과 하늘이 ‘하나’라는 은유입니다.

고대인의 세계관에 따르면, ‘지상’의 어떤 곳은 ‘신성’(神聖)합니다. 신(神)이 ‘현현’(顯現, theophany)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이곳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신의 명령’을 수행하거나 세상을 감시합니다. 이처럼 야곱이 누워 잠든 곳은 초라한 땅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주지인 하늘과 이어진 ‘성소’(聖所)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하늘의 역사, 즉 천사들의 활동을 눈으로 직접 보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십니다. 왕이나 제사장도 아닌 볼품없는 도망자 ‘야곱의 옆’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느님은 야곱이 ‘약속의 상속자’가 될 것임을 ‘언약’(言約)하십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즉 ‘땅’과 ‘후손’과 ‘임마누엘의 복’을 되풀이하십니다. 집을 떠나기 전 아버지 ‘이사악’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확인입니다(창세 28:3-4). 야곱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언약은 놀랍습니다. 분명 야곱은 ‘자신만’을 위해 형이 차지할 ‘복’을 도둑질했습니다. 형을 눈물 흘리게 했고(창세 27:38), 가정에 갈등과 위기를 가져왔습니다(창세 27:41,45). 종국에는 가정을 파괴시키는 그의 ‘탐욕’(육체를 따라 사는 삶, 로마 8:13)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가정에 일어난 그 비극적 사건을 변화시킵니다. 한 사람만 누리고 독식하는 ‘제한된 복’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복’으로 확장시키고 계십니다(창세 28:14). 우리도 그 확장된 복의 덕을 입고 있으며, ‘하느님의 복’을 널리 퍼뜨리는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이 언약은 야곱이 ‘소명’(召命)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 ‘소명체험’은 자기존재에 대한 ‘수치심’과 ‘열등감’에 붙잡혀 ‘속이는 자’로 살아온 야곱을 한순간에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험한 세상에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진실을 깨우쳤습니다. 자기 삶이 더 큰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처음으로’ 깨우쳤습니다. 자기 삶에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사명’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약속의 상속자’가 될 운명임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자아’가 사라지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하는 순간입니다. 삶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삶의 길’이 그 앞에 열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소명체험’은 뭔가 ‘숭고한 감정’, 즉 ‘두려움’(경외심)을 그에게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이 있던 ‘그 장소’에 대한 발견 때문입니다. 사실 새로운 삶의 단계로 진입하는 모든 순간에는 ‘자신이 현재 서 있는 자리’(지금 여기)에 대한 ‘재인식’이 일어납니다. 그는 그 곳(지금 여기)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깨닫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외칩니다.

참말 주님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 창세 28:16-17

그는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가 살던 곳에만 거주하는 ‘부족 신’(神)으로 알았습니다. 지금 여기에도 현존하실 줄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처럼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느님’(無所不在)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시편 139:8-10).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만날 것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하실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오직 형으로부터 달아나는 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야할 곳에 대한 생각으로만 마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그의 ‘자아도취 세계’에 놀라운 방법으로 ‘개입’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는 자신의 세계(마음)를 닫아놓았는데도 하느님은 야곱에게 자신의 세계를 열어 보이셨습니다. 야곱을 통해 성취하실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를 ‘가라지’에서 ‘밀알’로 빚어 가시기 위해 침입해 오셨습니다. ‘은혜의 사건’입니다.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 즉 ‘기념비’로 삼습니다. 고대근동의 고고학 발견에 따르면 석상의 크기는 대체로 2m 남짓이라고 합니다. 그는 기념비를 혼자서 세울 만큼 힘센 장사였습니다(창세 29:10, 32:26).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히브리어로 ‘베델’(בית אל 하느님의 집), 즉 ‘하느님이 계신 곳’이라 명명합니다. 어제까지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층계의 첫 칸’에 첫 발을 올려놓습니다. 평생 남의 눈치만 보며 2인자로 살아온 인생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당당한 새 출발을 시작합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베델 이야기’에 함축된 더 깊은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곱과 같은 우리에게 은총으로 선물된 ‘구원의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야곱에게서처럼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에게도 ‘무조건적임’을 깨닫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웁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에게 빌지도 않던 자의 청까지도 나는 들어주었고, 나를 찾지도 않던 자 또한 만나주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해 주었다. – 이사 65:1

야곱이 체험한 것처럼 하느님은 진정 놀라움으로 가득한 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 《시편》 말씀처럼 우리가 하느님 앞을 떠나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시편 139:7b).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에 ‘개입’하실 수 있는 하느님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개입하셨던 인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어느 날 그는 장인의 양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습니다(출애 3:1-12). 거기서 ‘떨기 가운데서 이는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거기서, 즉 그 ‘일상’(日常)의 장소에서 하느님을 만나리라고 그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만나는 일에 관심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거기서’ 그를 만나주시고,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다마스쿠스를 향해 갈 때만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 옳음으로 꽉 찬 사람이었습니다. 갑자기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사도 9:3-8). 전혀 그가 예상하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기대하던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을 만나리라고는 꿈조차 꾸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반을 일군 한 위대한 사도의 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한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놀라운 방식으로 개입하신 일이 많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상’에 개입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때로는 작은 방식으로, 때로는 큰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개입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꼭 맞는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일상’에도 오시지만 ‘꿈속’에도 오실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성찬례에도 오시지만,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우리가 있을 때조차도 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도 오시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도 오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위기와 우울의 시기에 있을 때도 오시지만, 고요와 침묵의 때에도 오십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때조차도 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야곱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관심’(생각)이 많으십니다. 오늘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의 생각을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시편 139:7a).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실 만큼 충분히 ‘관심’(생각)이 많으시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하느님께서 ‘관심’(생각)을 가지시기에는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말을 새겨들으십시오. 우리가 돈에, 부동산에, 자녀교육에, 건강에, 권력에, 복지에, 노후에 ‘관심’(생각)이 많듯이 하느님은 ‘우리 자신’에게 ‘관심’(생각)이 많으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시편》 말씀처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길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꿈’에서 야곱은 자신이 본 ‘층계’를 올라가려는 엄두를 못 냅니다. 그는 단지 ‘오르락내리락’ 하는 천사들을 지켜 볼 뿐입니다. 천사들의 오르내림은 하느님께서 ‘먼저’ 그에게 찾아오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은 결코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먼저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천사들의 모습은 항상 먼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는 분이라는 ‘은유’(隱喩)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교훈합니다.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 로마 3:11

《성경》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만남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라 증언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항상 하느님께서 먼저입니다. 이것은 ‘사랑’에 있어서도 진실입니다(1요한 4:10-11). 그날 밤 하느님은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시어 ‘하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항상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데, 어째서 우리는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차리지 못합니까?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주님이 나타나주시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길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자신의 시간, 방식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풀꽃’ 속에서도 우리는 찾아오신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지금도 하느님은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자연과 ‘작전’을 짜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끌기 위해 무엇을 사용하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마음 문의 열쇠’를 하느님께 내어드릴 때까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우리의 세계에 개입하시는 방식들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마음 문의 열쇠’를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자신을 개방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고 싶은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 묵시 3:20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 문’이 열리면 ‘베델’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베델’로 변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며,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일 중독자처럼 자기만을 위해 뛰어다니던 삶을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야곱이 한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다는 말이 그 뜻입니다(창세 28:11). 인생의 ‘어둔 밤’은 주님이 우리에게 ‘멈춤’이 필요하다고, ‘묵상’이 필요하다고 보내주시는 ‘은총의 신호’입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멈추어 묵상하면 분명 야곱처럼 살 길이 열립니다.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신만의 ‘베델’이 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베델, 소명체험)에 대한 해답일 순 없습니다. 해답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 ‘속’(마음)에 말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렇게 교훈한 바 있습니다.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마라…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 로마 10:6,8

우리가 자신의 ‘베델’을 갖기 위해 잠시 멈추고 묵상하면, 주님은 우리 ‘마음’(옆)에 당신의 ‘층계’를 내려놓으십니다. 우리와 ‘친밀히’ 관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스스로 바깥 어딘가에 그 ‘층계’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주님께 도달하는 그 ‘길’을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성소에 ‘층계’를 내려놓는 주도권은 항상 주님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서 멈추고 묵상할 때라는 은총의 신호를 보내고 찾아오시어 말씀하실 때 겸손히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베델 이야기는 신앙의 신비를 보여주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이기에 <복음서>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은 ‘나타나엘’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지상에 있는 ‘하느님의 집’, 즉 ‘메시아’이심을 확인해 주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요한 1:41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거주지인 하늘과 연결된 ‘성소’(聖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집’이고, ‘하늘 문’이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요한 14:6

우리가 하늘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연결된 ‘집’이고, ‘하늘 문’이며, ‘하늘 층계’를 우리에게 가져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 마음(옆)에 당신의 영으로 지금 들어와 계십니다. 그러니 멀리 헤매고 다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도 야곱처럼 자기존재가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형처럼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신이 싫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생각’(수치심)으로 어둠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감정’(열등감)으로 우울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판단’하고 혼란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 자신이 싫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픈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판단’에 속지 마십시오. 정말 중요한 일은 자신과의 ‘내면 대화’나 ‘감정’이나 ‘판단’이 아니라 야곱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실 만큼 우리 전존재가 소중하다고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얼마나 지었느냐 하는 것도 ‘우리 자신’보다 예수님께는 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책감을 없애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2독서 《로마서》 말씀처럼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로마 8:14-17). 우리를 자신과 함께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입니다. 이것을 믿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야곱처럼 달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가족들로부터, 골치 아픈 문제들로부터, 또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이 그야말로 풍랑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야곱처럼 부서진 관계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분명코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실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도 주님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주님에게서 멀어 질 수 없습니다. 주님은 늘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9편>도 이 진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어둠보고 이 몸 가려달라고 해보아도,
빛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 달라 해보아도,
당신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
– 시편 139:7-12

 

그날 밤 베델에 있었던 야곱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자기보다 자신을 더 잘 아시는 하느님을 향한 찬미입니다. 우리와 모든 것 안에 현존해 계시는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향한 찬미입니다. 시인은 야곱처럼 삶의 어떤 위기 속에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아시는 주님께서 그 위기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라 고백합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관심’(생각)하십니다.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그 주님 앞을 떠나 숨을 방법이 없습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습니다. 야곱처럼 깨어나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아차리고 ‘예배’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예배 받으실 제단, 즉 주님이 활동하실 수 있는 성전으로 세우십시오. ‘하느님의 집’, ‘하늘 문’, ‘하늘 층계’이신 주님과 둘도 없는 하나가 되십시오.

 

혹시 우리 중에 자신은 야곱처럼 ‘베델’에 가 본적이 없다고 ‘위축’되는 분이 있습니까? ‘베델’과 같은 ‘소명체험’이 없어서 ‘기’(氣)를 펴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까? 여전히 ‘베델’을 찾아 헤매십니까? 들을 귀가 있는 분은 알아들으십시오. 우리는 이미 저마다의 ‘베델’에 가 본적이 있고, 주님의 언약을 들은 ‘소명체험’이 있습니다. 제 말을 신뢰해도 좋습니다. 성찬례가 봉헌되는 지금 여기가 ‘베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드높여 주님께로 향하는 이 순간이 ‘베델’입니다. ‘세례성사’한 모든 이는 하느님께서 ‘임마누엘의 음성’을 들려주시는(마태 3:17) 그 베델과 소명체험을 가졌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더욱이 그 ‘베델’은 더 이상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늘 문’이신 주님이 계시고, 우리 ‘존재의 중심’(하늘)에로 이끄는 ‘하늘 층계’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가 올라(내려)갈 수 있게 하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으로 층계를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눈이 열린다면, 혼돈과 혼란과 어둠의 잠에서 깨어난 야곱처럼 고백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참말 주님께서 여기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 창세 28:16-17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의 집’, ‘하늘 문’, ‘하늘 층계’입니다. 2독서 《로마서》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마음(옆)에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로, 우리 존재의 진정한 중심에로 올라(내려)오기를 원하십니다.

 

2독서 《로마서》는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할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특권, 현재의 고난과 장차 올 영광스러운 승리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모든 인간이 ‘어떤 힘’의 지배 아래 살고 있다고 정의합니다. 하나는 ‘죄와 죽음의 법’입니다. 이 힘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육체의 영역’에서 살아갑니다. 육체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맺는 일의 열매는 분명합니다.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 수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갈라 5:19-21; 참고 마태 15:19). 육체를 따라 사는 일, 즉 이기적 욕망과 탐욕은 야곱처럼 우리 삶에 갈등과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종국에는 죽음을 결과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힘의 다스림을 받는 이들은 ‘성령의 영역’, 즉 ‘은혜’ 아래 살아갑니다. 성령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맺는 열매도 분명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누구도 이런 신성한 삶을 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따라 사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차지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성령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로마 8:14-1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나누어 받을 영광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로마 8:17). 그러나 ‘상속자’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서 우리에게서 ‘고난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연결됩니다. 그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누리신 ‘부활의 영광’에로 장차 우리를 ‘들어 올리는’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고난의 순간들’을 견디어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종국에는 성취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영광의 약속’도 장차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불멸’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이 성취(구원의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을 견디도록 바울로는 권고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일종의 ‘중간 상태’를 살고 있습니다(로마 8:18-25).

 

복음이야기는 ‘하늘나라를 추수(심판)에 비유’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흔히 말하듯이 ‘가라지의 비유’가 아닙니다. 의인들을 향한 격려이자 악인들을 향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는 것처럼, ‘종말’에 있을 ‘구원의 완성’을 고대하면서 이 중간 상태를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전반부(24-30절)부터 보겠습니다. ‘밀밭’을 가진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종들에게 씨앗을 뿌리도록 했습니다. 주인에게는 원수가 있었습니다. 원수는 밤에 몰래 와서 밭에다 ‘앙갚음’을 하고 갔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다음 해 이삭이 팼을 무렵, 밭에 ‘가라지’도 드러났습니다. 그때야 주인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들은 ‘얼른’ 솎아내서 최소한의 피해만 보자고 주인에게 제안합니다. 주인은 종들의 성급한 ‘판단’을 말립니다. 다 자란 ‘밀’이 뽑힐까 염려되니 ‘추수’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자고 ‘관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우리 농사법에서 보자면 비유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주인의 ‘처사’(處事)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농촌에서는 ‘밭’에 씨를 뿌린 후에 ‘수시’로 돌보며 ‘김매기’를 합니다. 이삭이 팼을 때까지 자라나 있을 ‘잡초’란 거의 없습니다. 설령 그 때까지 살아남은 ‘잡초’가 있다 하더라도 발견 즉시 뽑아버립니다. 그러나 만일 이삭이 패기 전까지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떨까요?

공동번역 <성서>에 ‘가라지’로 번역된 말은 잘못입니다. 본래 ‘가라지’는 ‘조밭’에 자라는 잡초이고, ‘밀밭’에는 ‘독보리’가 자랍니다. ‘독보리’는 밀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고 씨앗으로서도 ‘식별’이 어렵다고 합니다. 결국 이삭이 패기 전, 밀밭에서 ‘독보리’를 가려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독보리’(잡초)는 인위적인 농작물과 달리 뿌리가 강해서 좀체 잘 뽑히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김매기도 불가능하고, 이삭이 팼더라도 뿌리가 주변의 밀과 뒤엉켜있어서 같이 뽑혀 나올 가능성도 큽니다. 얄밉지만 ‘추수’ 때까지 ‘독보리’를 ‘밀과 함께’ 놓아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주인의 ‘관대한 결정’은 이제 보니 자연스럽습니다.

 

후반부(36-43절)는 ‘비유 설명’입니다. 마태오는 ‘가라지의 비유’에 나오는 ‘일곱 낱말’의 의미를 밝히고 아울러 ‘종말심판’을 묘사합니다. ‘좋은 씨를 뿌린 이는 사람의 아들’, ‘밭은 세상’,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그리스도)과 악마, 둘 다가 이 세상에 씨를 부렸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하늘나라’와 ‘악마의 나라’ 둘이 경쟁하는 곳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 날’, ‘추수꾼은 천사들’입니다. 이렇게 하는 비유 풀이를 ‘우의적’(寓意的, allegory) 해설이라 한다고 지난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전체적으로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여 ‘하늘나라의 자녀’는 구원하시고, ‘악한 자의 자녀’, 즉 악마의 나라에 속한 이들은 멸망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원해서 이 비유를 발설하셨을까요? 다음주일에 우리가 듣게 될 ‘그물의 비유’(마태 13:44-52)처럼 ‘종말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하느님 나라)를 ‘씨 뿌리는 사람’의 형편이 아니라 ‘추수’에 비유하십니다. 하늘나라와 추수의 유사점은 ‘식별하여 갈라냄’입니다. ‘추수’ 때가 오면 익은 밀과 독보리를 완전히 ‘식별’하여 ‘갈라’내듯이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면 그런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하늘나라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가 함께 한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세상을 참기가 힘듭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하늘나라 자녀’라고 자부합니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나쁜 사람’이라고 ‘앞질러 판단’(심판)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고 경고하셨는데도 말입니다(마태 7:1).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얼른 뽑아버리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성급한 ‘판단’을 내린 이들이 있었습니다(루가 9:51-56).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시려다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처럼 자기 기준을 따라 성급하게 ‘판단’하는 일은 거부됩니다. 오히려 ‘추수’ 때까지 ‘인내’할 필요성이 오늘 비유에서 명령됩니다. 왜 우리는 ‘앞질러 판단’을 내리기보다 시간을 갖고 ‘기다리며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우리는 ‘완전한 식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관계에서 누가 ‘선인’(善人)이고, ‘악인’(惡人)인지 쉽게 확정할 수 없습니다. 독보리와 밀은 씨앗부터 혼동할 만큼 비슷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삭이 패기 전까진 구별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의 자녀도 하늘나라 자녀 사이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이의 마음을 환히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물론 복음이야기의 종들처럼 이삭이 팼을 때쯤에는 둘을 식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보리를 뽑다가 자칫 밀까지 뽑아버리는 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뒀다가 추수 때 확실하게 추려내는 일이 ‘상책’(上策)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렇게 교훈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 1고린 4:5

 

그렇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9편>처럼 오로지 하느님만이 인간을 환히 아시고, 모든 생각을 속속들이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아시고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 시편 139:1-4

 

둘째, 하느님께서 ‘추수’ 때를 정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더디 가는 것 같아도 기한이 차면 ‘밀’은 누렇게 익습니다. 익은 밀의 머리는 독보리와 명백히 구별됩니다. 알찬 열매 때문에 고개를 숙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추수’를 명하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자녀들은 악한 자들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그 추수 때가 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추수’ 때인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오고, 그 날 ‘식별하여 갈라내는 일’이 있다고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분명 ‘악’이 존재합니다. 욕심, 미움, 속임수, 증오, 분노, 착취, 가난, 폭력, 질병, 고통, 테러, 환경파괴, 평화를 잃은 세상을 보며 우리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무의미해 보이는 ‘악’을 ‘허용’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을 향해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마음’에도 가끔씩 욕심, 미움, 거짓, 시기, 질투, 분노, 교만, 우울이 작동하기도 합니다. 눈앞에서 버젓이 작동하는 ‘악’을 두고서 성 어거스틴처럼 ‘악은 선의 부재’일뿐이라며 뒷짐만 지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성급히 판단하거나 앞질러 심판할 일이 아닙니다. 밀과 독보리가 ‘얼마 동안’ 세상에 섞여 있다 해도 우리는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판단과 심판은 ‘주인의 권한’입니다. 우리는 판단과 심판의 마음을 내려놓고, 인내하며, 은총 안에서 스스로 익어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시간이 찰 때까지 우리는 ‘믿음’과 ‘인내’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가라지’(독보리)처럼 보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발꿈치를 잡은 자, 강탈자, 모사꾼, 얌체’라 불리는 ‘야곱’이라는 사람입니다. 교활한 방법으로 복을 차지하려다 도망자 신세가 된 그에게 하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를 밀알로 빚어 가시기 위해 침입해 오신 하느님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만나고 ‘가라지’(독보리) 같은 삶에서 세상에 복을 가져오는 ‘밀알’로 변화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에 앞에는 자신이 ‘가라지’인지 아니면 ‘밀알’인지 증명해 가야할 ‘성장과 변화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은 베델 이전과 이후 두 명으로 존재합니다.

 

물론 식물인 가라지(독보리)의 ‘운명’(유전자)은 한번 정해지면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가라지’에게 구원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인간은 다릅니다.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사기꾼 야곱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가라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종국에는 온 세상이 그와 그의 후손의 ‘덕’을 입게 하는 ‘복 있는 밀알’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교훈처럼 ‘육체의 영역’에서 살던 자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영역’에서 살게 되는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삽니다. ‘밀’(하늘나라 자녀)과 ‘가라지’(악한 자의 자녀)가 ‘함께’ 섞여 있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충격적이지만 ‘교회 안’에도 밀과 가리지는 ‘함께’ 자랍니다. 한 배에서 야곱과 에사오가 함께 잉태되고, 한 집에서 함께 자라났듯이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우리 마음에도 ‘밀’(강점)과 ‘가라지’(약점)가 ‘함께’ 자랍니다. 우리는 비유의 종들처럼 속히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으면 ‘밀이 물든다.’고 걱정합니다. 마치 청소년기 자녀를 둔 부모가 친구를 사귈 때는 가려 사귀라고 충고하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이런 ‘걱정’과 ‘염려’를 환히 아시는 주님이신데, 어째서 ‘밀’(선)과 ‘가라지’(악)가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십니까? ‘가라지’(악한 자의 자녀)가 ‘밀’(하느님의 자녀)의 ‘영향’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거꾸로 일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지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악한 영향’을 받는다면 잘못되었습니다. 악한 자와 선한 이가 함께 있으면 악한 자가 선한 이의 ‘영향력’을 받고 점차 ‘변화’되는 일이 정상입니다. 이처럼 악한 자의 자녀들에게 ‘회개의 기회’(2베드 3:9)를 주시려는 것이 세상에서 ‘함께’ 자라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의도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은 누구나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에서도 누가 ‘선’(善)이고, ‘악’(惡)인지 쉽게 ‘판단’할 일도 아닙니다. 관계에는 영원한 에사오도, 영원한 야곱도 없는 법입니다. ‘식별’은 중요하지만 최종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대신하려는 어리석음을 멈추어야 합니다. 다만 야곱이 그날 아침 ‘베델’에서 한 것처럼, 나 자신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날마다 ‘예배자’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임재’(臨齋)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어느 곳이나 ‘하느님의 얼굴’ 앞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정말이지 ‘예배’는, 바울로가 교훈하는 것처럼, 성취될 영광의 약속을 기다리는 이가 하느님께 바쳐 올리는 가장 숭고한 행동입니다. ‘성찬례’는, 복음이야기가 교훈하듯이, ‘추수’ 때를 기다리며 성령 안에서 오늘을 ‘인내’하는 이가 하느님께 바쳐 올리는 가장 숭고한 행동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정말 다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자비하십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 마태 5:45

하느님은 ‘기회’를 주시고 기다리십니다. 모든 창조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닮은 자녀답게 자비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원수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 즉 악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마태 5:44). 인내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일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악마의 나라’에 속한 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 그들을 하늘나라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그들이 ‘가라지’에서 ‘밀알’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린 ‘원수의 일’이 완전히 실패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이 ‘인내’ 속에서 온전한 알곡으로 익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것처럼 하느님은 연약한 우리를 잘 아십니다. 우리의 불완전함도 잘 아십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느님입니다. 성령께서 가련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세상에 복을 끼치는 ‘야곱’으로 빚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심으신 하늘나라 알곡임을 증명할 힘 주시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이 하늘나라로 누렇게 익어가는 ‘희망’을 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살면서 우리 자신이 하루하루 ‘하늘나라의 자녀’(밀알)로 변화될 것을 다짐합니다. 야곱처럼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날마다 ‘예배자’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성령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예배자의 삶’이 우리를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을 믿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그 좋은 아버지의 나라를 삽니다. 들을 귀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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