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12. 연중1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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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5:19-34
  • 시편 – 119:105-112
  • 독서 – 로마 8:1-11
  • 복음서 – 마태 13:1-9,18-23

연중 1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우리 마음에 생명의 말씀을 심으시고 결실되게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이사악과 리브가의 가정에 쌍둥이를 선물로 주신 축복의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1독서로 《창세기》를 묵상해 왔습니다. 특히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가정을 중심으로 한 가족사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영웅들의 가정은 ‘완벽했을 것’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가정처럼 결함도 많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자녀로 둔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떠올려 보십시오(창세 4:1-12).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가정(창세 9:20-27), ‘엘리’ 제사장이나(1사무 2:12-17,22-25,29-36; 3:12-14; 4:11,18-22) ‘사무엘’의 가정(1사무 8:1-5), 예수님의 조상이라 불리는 ‘다윗의 가정’은 또 어떻습니까? 하나같이 ‘자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모든 인류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가정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던 ‘모리야 산’ 사건 이후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사악은 서로 떨어져 살았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의 말년조차도 떨어져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황혼이혼’ 또는 ‘졸혼’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믿음의 가정’이라 불리는 데 어째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삭악의 가정은 어땠습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이사악의 가정도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은 이사악이 60이 다 되도록 자식하나 점지해 주지 않았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그때까지도 아브라함은 살아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산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25:7). 그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그 약속(창세 12:2), ‘하늘의 별처럼 불어날 것’이라는 그 약속(창세 15:5)은 어찌된 것일까요?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약속은 파기되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사악은 하느님께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한번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자기 아버지처럼 ‘우회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창세 16:3), 기도하며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리브가’는 임신을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임을 나타냅니다. 복음이야기처럼 하느님께서 그 가정에 ‘새 생명의 씨앗’을 심으신 셈입니다. 리브가는 달이 갈수록 태중의 ‘요동’이 심해서 괴로워합니다. 하느님께 이유를 물으러 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 창세 25:23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축복이 두 배입니다. 리브가는 ‘하느님의 계획’(목적)을 듣습니다. 복음이야기와 연결하자면 태중에 심긴 두 씨앗은 훗날 ‘두 민족’이 될 정도로 ‘풍성히 결실’되어갈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태중’에서부터 두 아이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사실 태중에서 시작된 두 아이의 ‘다툼’(경쟁, 싸움)은 그들의 생애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이어서 리브가는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선택’을 듣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축복입니다.

 

이 이야기는 훗날 ‘이스라엘’(유대인)과 ‘에돔인’(오늘날의 요르단 지역, 예수님이 태어날 때 유다의 왕이었던 헤로데 대왕이 에돔 출신입니다) 사이의 ‘적개심’을 설명해 주는 원천적 자료입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두 민족들 사이에 싸움이 생겨난 이유는 형이 동생을 섬기도록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중 된 자를 먼저 된 자로 삼으시려는 ‘하느님의 계획(목적)과 선택’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전통적인 질서를 하느님께서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쌍둥이가 ‘에사오’와 ‘야곱’입니다.

드디어 《창세기》에 기록된 족장들의 이야기가 ‘야곱’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출산 과정과 성향 묘사가 재밌습니다. 선둥이는 살결이 ‘붉고’(붉다는 히브리어 ‘에돔’과 같은 어근입니다), ‘털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에사오’(עֵשָׂו)입니다. 이 이름은 그의 후손들의 영토가 될 ‘세일’(세이르 שֵׂעִיר)과 연결되는 데(창세 33:14,16; 민수 24:18; 신명 2:2-6,8,12), ‘세일’은 히브리어로 ‘털이 많은’이란 뜻인 ‘세아르’(שֵׂעָר)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후둥이 ‘야곱’은 에사오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아케브’(עָקֵב)는 ‘발꿈치’(heel)이기에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 강탈자, 모사꾼’(얌체)이라는 뜻입니다.

‘에사오’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만큼 ‘외향적’이고 ‘활달’합니다. 반면에 ‘야곱’은 천막에 머물러 살 정도로 ‘내향적’이고 ‘차분’(조용한)합니다. 이사악은 형 ‘에사오’를, 리브가는 동생 ‘야곱’을 각각 더 사랑했습니다. ‘편애’(偏愛)입니다. 부모는 자녀 양육에 실패한 셈입니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느님께서 야곱을 ‘약속의 상속자’로 삼으셨다는 계획과 선택이 이 가정의 불완전한 모습, 즉 ‘편애’를 정당화해 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부모의 이런 태도가 형제를 ‘원수’로 만들어 떨어져 살게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계보’ 맨 위에 있는 가정들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점은 참 많은 생각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모든 가정들과 마찬가지로 그 가정들도 자신들만의 실패와 투쟁의 몫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들을 통해 그 가정들은 ‘하느님의 임재’가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깨달아 갔습니다. 그 ‘임재’는 인생의 어려운 시기(혼돈, 혼란, 어둠, 고달픈 눈물), 통과의례인 고통스러운 전이(轉移)의 시기에 가장 분명하게 알려졌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이것은 진실입니다.

 

어느 날 에사오는 허기진 배로 사냥에서 돌아옵니다. 야곱이 ‘붉은 죽’을 끓이는 모습을 봅니다. 그것이 야곱이 놓은 ‘교활한 덫’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과장합니다. “배고파 죽겠다.” 그의 이런 어리석음을 야곱은 포착해냅니다. 그는 형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합니다. ‘장자’는 형제 중에서 가장 높다는 뜻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아버지의 권위를 계승하고, 재산도 다른 형제들보다 두 몫을 받습니다(신명 21:15-17). 이처럼 장자는 선천적으로 아버지의 권위와 영광의 상속자(창세 27:29)가 됩니다. 한마디로 ‘장자의 상속권’은 ‘하느님의 신성한 약속’(말씀, 축복)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에사오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대꾸합니다. 야곱은 먼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쳐 요구합니다. 에사오는 ‘장자의 상속권’을 소홀히 했고, 야곱은 ‘사모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사오는 ‘죽 한 그릇’에 ‘장자 상속권’을 팔아먹습니다. 아뿔싸! 어리석고 불경스러운 사람입니다(히브 12:16-17).

그는 야곱의 교활한 조작에 넘어가 영원히 후회할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태중에 있을 때 ‘말씀’하셨던 ‘하느님의 계획과 선택’, 즉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축복이 ‘장자 상속권의 교환’을 통해 ‘정당하게’ 성취될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신비하신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 상속권’을 정당하게 넘겨받아서, 그의 새 이름인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될 ‘상속인의 자리’에 자신을 세웠습니다. 결국 1독서 《창세기》는 강자인 형 에사오에 대한 약자인 야곱의 승리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1독서 《창세기》의 진짜 초점은 이사악과 리브가의 가정에 ‘말씀’(약속)하시고, 신비한 방식으로 그 ‘말씀’(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신성한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똑똑히 보고 배웁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고, 그 ‘말씀을 성취해 가시는 분’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도 이것을 증언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 이사 55:11

 

하느님은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사오는 ‘장자’이고 ‘활달한’ 사람이기에 하느님께서 그와 그의 후손을 선택하실 것 같았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선택하신 사람은 야곱과 그의 후손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약자’인 동생, 즉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운명이 아닌 ‘위상’(位相)이 낮은 이를 편드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마리아의 찬가처럼,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시는 하느님”(루가 1:52)을 이미 《창세기》에서 발견합니다. 하느님은 약한 이들을 옹호하시고, 그들을 ‘상상’(想像) 이상으로 높여주시는 자비하신 분입니다.

야곱이 그토록 애타게 ‘사모’했던 ‘장자의 상속권’, 즉 ‘하느님의 신성한 약속’(말씀, 법, 축복)은 표현만 달리했지 다른 <전례독서>에도 똑같이 등장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19편>에서는 ‘하느님의 말씀’(하느님의 법, 법령들, 언약, 뜻)으로, 2독서 《로마서》에서는 ‘성령의 법’(영적인 것)으로, 《마태오복음》에서는 결실되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말입니다.

 

《창세기》를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이 ‘야곱’인지 아니면 ‘에사오’인지 돌아봅니다. ‘쌍둥이’이지만 둘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장자 상속권(하느님의 신성한 법칙), 즉 ‘하느님의 말씀’, ‘영적인 것’(성령의 법), ‘결실되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복음의 씨)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 밭’,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 쏟아 ‘하느님의 말씀’(언약, 계명, 법)을 사모합니까?(시편 119:10)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그네 인생길’(시편 119:19)을 걸어가고 있는 “내 발에 ‘등불’로 삼고 있습니까?”(시편 119:105a) 가야할 ‘방향’(목적)에 대해 분명히 알려주는 우리의 길에 ‘빛’, 즉 ‘이정표’로 삼고 있습니까?(시편 119:105b) 우리는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영원하신 하느님의 언약과 축복에 관심합니까?(시편 119:14,111)

우리는 ‘영적인 것’(성령의 법)에 마음을 쓰는 ‘야곱’으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로마 8:5-6) 아니면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에사오’로 살고 있습니까? ‘성령을 따라 사는’ 야곱입니까? 아니면 육체를 따라 사는 ‘에사오’입니까? 우리는 열매 맺는 ‘좋은 땅’입니까?(마태 13:8) 아니면 열매 없는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난 땅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누립니까? 아니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한 약속’(장자 상속권, 법)이 상징하는 ‘결실되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영적인 것’(성령의 법)을 ‘야곱’처럼 사모하고 소중히 여기는 ‘좋은 땅’이어야 합니다. 물론 야곱은 그 당시 형의 약점을 이용한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축복’(신성한 약속, 법칙, 말씀)을 간절히 사모한 사람이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그를 고생시키기는 했지만 사랑해 주셨습니다. ‘에사오’처럼 믿음의 축복과 신성한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는 사도 바울로가 경고하듯이 ‘영원한 죽음’을 맞습니다(로마 8:6). 더욱이 우리 자신과 교회가 ‘약자 편’인 하느님을 닮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편이 되어 주어야 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일상에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시편》으로 노래한 <119편>은 ‘하느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토라 시’(詩)라고 불립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시편》의 ‘백미’(白眉)라 불립니다. 이유는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순서를 따라 ‘첫 문장을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8절(행, 行)을 ‘1연’(聯)으로 묶어 총 22개의 연으로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 176절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1연’(聯)은 ‘가’로 첫머리를 시작하는 문장(행, 行)이 연속해서 8개 나오고, 마지막 ‘연’(聯)은 ‘하’로 첫머리를 시작하는 문장(행, 行)이 연속해서 8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런 형식이다 보니 내용의 짜임새나 각 ‘연’(聯)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도 약합니다. 하지만 《시편》 <1편>처럼(시편 1편의 확대판이라는 별칭도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율법)의 중요성을 높인다는 점, 즉 ‘토라’를 사랑(묵상)하는 ‘찬양시’라는 점에서 ‘통일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122절과 123절을 빼놓고 모든 절에 ‘율법’을 가리키는 10가지 다른 단어들(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룹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쓰인 그 10가지 단어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토라’(율법, 법), ‘에다’(언약, 증거), ‘미슈파트’(결정, 판단, 법규), ‘미츠와’(명령, 계명), ‘후컴’(법령, 율례, 뜻), ‘피쿠딤’(계명들), ‘다바르’(말씀), ‘이므라’(약속, 언약, 말씀), ‘데레크’(길, 뜻), ‘오라흐’(길, 방법, 법도, 계명). 공동번역과 개역개정판 성경은 이 원어를 문맥에 맞게 여러 뜻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번역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렇게 다양한 표현들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율법’ 그 이상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삶이 괴로움과 곤경, 박해와 시련 속에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위로와 기쁨’, ‘희망과 구원’, ‘생명과 빛’, ‘자유와 해방’, ‘지혜와 진리’의 ‘원천’이자 ‘근거’임을 시인은 깨우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율법)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들려지거나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적용되고 내적으로 그 의미가 깊이 음미되며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9절, 11-12절, 15-16절, 23-24절, 26-27절, 34절, 40절, 43절, 47-48절, 52절, 64절, 68절, 70절, 73절, 77-78절, 92-93절, 97절, 99절, 103-104절, 105절, 112절, 123절, 130절, 140-141절, 148절, 174절).

사실 《시편》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그 ‘힘’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시인 뿐 아니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삶의 지침’과 ‘위안’이 됩니다. 수천 년의 시간 간극을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기도’가 됩니다.

오른쪽 숫자 옆 빨간색으로 밑줄이 그어진 글자가 ‘눈’으로 발음하는 알파벳입니다.

오늘 우리가 찬미한 105-112절은 히브리어 알파벳 14번째 글자인 ‘눈’(נ)을 각 절의 첫머리에 써서 지은 ‘시’(詩)입니다. ‘눈’(נ)이라고 읽는 이 글자를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할 때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눈’(נ)은 ‘물고기’ 또는 ‘생명’을 의미하고 숫자 값은 ‘50’입니다. 제목은 ‘말씀의 빛’이라 붙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 쓰인 ‘말씀’, ‘결정’, ‘법’, ‘법령들’, ‘언약’, ‘뜻’은 ‘율법’과 동의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토라)을 찬양하기 위해 ‘시’(詩)에 사용된 주요 은유는 ‘등불’과 ‘빛’입니다(105절). 우리는 그 은유를 통해 시인이 처한 상황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등불’과 ‘빛’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그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등’(燈, lamp)이라는 단어는 ‘네르’(ר󰗽)입니다. ‘눈’과 ‘레쉬’(ר)라는 글자로 되어있습니다. ‘레쉬’는 ‘사람의 머리’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글자대로 하자면 ‘등불’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등불’이고, 그것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비유하실 때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도 이것과 연결됩니다(마태 25:1-13; 잠언 13:9).

 

시인은 ‘고난’ 속에 있는 자신의 ‘내면의 실상’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습니다(107절). 한 번 맹세하였기에 고난 속에 있다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결정, 법, 법령, 뜻)을 따르고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106절). 악한 자들이 자신을 해하려고 올가미를 쳤어도 자신은 하느님의 ‘법령들’을 온 마음을 기울여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109,112절). 오직 하느님의 ‘언약’만이 자신이 차지할 유산이며 마음의 기쁨이라고 찬송합니다(111절). 이렇게 그는 하느님의 높으심을 찬송하면서 도우심을 전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107절).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장’(章)이지만 천천히 <119편> 전체를 ‘음미’해 보십시오. 시인처럼 기도하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은총을 부어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이 시인처럼, ‘하느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희망’을 발견합니까? 인생의 ‘어둠’ 속을 지날 때 ‘등불’(생명)이 되는 ‘한 말씀’이 있습니까? ‘밤’을 지날 때 ‘빛’이 되는 ‘한 말씀’이 있습니까? 삶의 무게로 지치고 허덕일 때 ‘힘’이 되는 ‘한 말씀’이 있습니까? 마음에서 암송되고, 적용되는 ‘지침’ 같은 ‘한 말씀’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언약과 축복에 관심합니까?

 

2독서 《로마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라 사는 이의 삶을 교훈합니다. 반지의 보석처럼 빛나는 첫머리입니다(로마 8:1-2). 죄와 죽음의 종으로서, 그 죄와 죽음의 법(율법)에 사로잡혀 고뇌하던 칠흑 같은 밤길을 걷던 바울로였습니다(로마 7:7-25). 그러던 그가 다른 사도들처럼 어느 날 ‘영적 오순절’을 경험하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들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아침 해’(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동터오는 ‘해방의 새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단죄’(정죄) 받는 일이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연약하여 이룰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하느님께서 ‘한 사건’을 통해 스스로 이루셨습니다(로마 8:3). 하느님께 불순종한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로마 3:23).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타락했습니다(로마 3:10-18).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원수가 되어 단죄와 진노와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로마 2:1-3,5-6,8,12,15-16).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정의의 하느님께서 오래도록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3:25)

 

‘때가 되자’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로마 3:26).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신 하느님의 구속의 방법, 하느님이 올바르시다는 가장 완벽한 정의의 방법(로마 3:25-26)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동시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은총의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로마 3:22,24-25; 7:25; 8:3). 하느님의 단죄와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는 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로마 5:9-11)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이 정의를 드러내시고 인간이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의 길까지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 3:21-28).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를 인간들은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인(로마 5:8) 그리스도 십자가를 인간들은 거부했습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신 하느님의 구속의 방법, 가장 완벽한 정의의 방법(로마 3:25-26)을 인간들은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는 하느님 자신을 향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마련하신 ‘은총의 방법’,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자기 힘으로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비참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습니다(로마 7:24). 그의 고백은 모든 인간의 처지를 대변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구원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자기 인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에 ‘하늘의 빛’이 찾아들었습니다(사도 9:1-9). 자신을 향해 오래 참고 기다려주신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기도 중에 영적 어둠과 무지에서 벗어납니다(사도 9:11-19).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갈라 1:12-17). 새로운 통찰이 일어났습니다. 그 계시와 통찰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바울로는 지금까지 밝혀왔습니다. 비참한 처지의 인간이 하느님의 단죄와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나는 ‘은총의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인 ‘구속의 십자가’를 믿고, 예수와 연합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믿음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참한 처지, 즉 ‘죄와 죽음의 종’에서 해방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해방과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해방과 구원을 우리에게, 우리 안에 성취하는 분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을 우리 안에 궁극적으로 성취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원리, 법칙, 권능)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너)를 해방시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시작하신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실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인 ‘죄’를 이길 힘까지 주시는 ‘협조자’이십니다. 참으로 인간의 해방과 구원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오신(1고린 15:45)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인격적인 연합과 교통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된 일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믿음을 통하여’ 성령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심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로마 8:3).

바울로는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계속해서 같이 나열합니다. ‘육체적인 것’이란 ‘육신의 일’입니다. 육신의 원리를 따라 육신(죄악된 본능)을 만족시키려는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행동을 뜻합니다. 바울로의 통찰에 따르면, ‘육체를 따라’ 사는 인간의 처지는 비극적입니다(로마 7:24).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게 하는 ‘인간의 욕망’은 결국 ‘자기 파멸’로 이어집니다. 또한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좌절시키는 이들과 ‘원수’가 되게 합니다. 심지어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라면 ‘하느님과도 원수’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로마 8:7-8). 정말이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인간의 길은 ‘죄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영적인 것’이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신성한 약속(법칙),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게 하는 ‘성령의 법’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상에서 ‘해방’시키고, ‘생명과 평화’로 인도합니다(로마 8:6). 성령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세상’, ‘사랑의 세상’으로 날마다 우리를 인도하는 협조자이십니다. 우리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 속한 ‘부활의 사람’으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이고, 성령을 보내주신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질서(법칙)를 누리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라 살도록 교회로 초대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죽이는 길에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서는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르심과 초대에 수많은 신자들이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점점 힘을 잃어갑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성찬례에 참여하거나 교회 안에 있을 때는 대부분 믿음 깊은 신자의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교회 문 밖만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가 돌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육체적인 것’을 따라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이중적 삶의 태도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걱정거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사는 일을 방해하는 내 안의 이기적 욕망들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로가 표현한 대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사시는)” 은총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구체적인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 오늘 복음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복음이야기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해설’인 《마태오복음》입니다. 《마태오복음》의 문학적 구조는 ‘5묶음의 설교’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관련설교는 2020. 6.21. 연중 12주일의 복음이야기를 보십시오). 오늘 복음이야기는 ‘세 번째 설교묶음’에 해당합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7개의 하늘나라 비유’ 중에서 ‘첫 번째’이며,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비유’입니다.

‘비유’(比喩)는 예수님이 사용하신 주된 ‘교수법’입니다. 어떤 것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비슷한 것을 빌려다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어로는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고 합니다.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명확히 하려고 “옆에 던져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일상의 친근한 것을 가지고 친근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비유’입니다.

 

대부분의 복음서 연구가들은 《마태오복음》이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제시하고자 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신명기》는 가나안 입성을 앞 둔 출애굽 2세대들에게 ‘계약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와 자세를 가르친 모세의 고별설교 양식으로 되어 있는 책입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도 예수님을 ‘하늘나라’(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통치)를 가져오신 ‘메시아’,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신(설교하신) ‘스승’(교사)으로 묘사합니다.

예수께서는 선포의 주제인 ‘하늘나라’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신적도 있지만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청중이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의 말로 ‘초월적인 하느님’을 설명하기가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사물을 묘사하기 위해서 고안된 ‘평범한 언설’(言說)로는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표현 불가능한 분을 말해야 하는 ‘한계’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비유’를 유형별로 정리하면 대략 5가지 정도입니다. 일반비유, 특례비유, 은유, 예화, 우화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복음은 ‘일반비유’에 속합니다. ‘일반비유’는 일상(日常)에서 ‘흔히 있는 일’을 가지고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일상’을 반영하는 이야기라서 청중은 금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일반비유’ 중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시와 지금의 ‘생활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시에는 자연스러웠던 비유가 ‘전승’이나 ‘편집 과정’을 거치면서 ‘변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는 신학 분야를 ‘역사비평학’이라 합니다.

‘역사비평학’에 따르면 비유를 풀이할 때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최초의 자연스러운 형태나 예수님의 의도, 전승 과정에서의 추가, <복음서> 기자의 추가나 해석입니다. 이런 충실한 연구 과정과 배경이해를 통해 비로소 우리 자신의 해석과 이해를 시도해야 합니다. 이 과정 없이 ‘영적해석’이나 ‘비유풀이를 한다’는 이들의 자랑은 ‘지적 사유’(知的 思惟)를 게을리 한 이들이 벌이는 ‘농간’(弄奸)입니다. 소위 비유풀이로 사람을 미혹한다는 신천지 이단들이 하는 짓거리입니다.

이런 간략한 비유 개념 이해와 더불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해설’인 복음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9절)는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신상발언’(자기선언)이고, 후반부(18-23절)는 《마태오복음》 기자가 추가한 ‘비유설명’입니다.

전반부(1-9절)부터 보겠습니다. 비유의 배경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식 농사법에서 보자면 비유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참 한심한 농부입니다. 유실될 것을 알면서도 딱딱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농사법’을 이해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농사법’과 관련한 이야기가 하나 나왔었는데 기억하십니까? ‘멍에’를 메고 밭갈이하는 ‘겨릿소’ 말입니다.

 

작년 10월 중순에 성경의 땅을 다녀왔습니다. 그 시기는 ‘건기’(乾期)에서 ‘우기’(雨期)로 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몸으로 체험해서 그런지 그 땅의 ‘건기’와 ‘우기’를 잊어버릴 일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4-10월은 ‘건기’입니다. 그 기간 동안 무려 7개월이나 ‘휴경지’(休耕地)로 있던 밭에 ‘잡풀’(가시덤불)이 자라납니다. 사람들이 가로질러 다녀서 ‘지름길’이 나기도 하고 밭가에 ‘길’이 생깁니다. 대략 10월 중순이나 11월부터 ‘우기’가 시작됩니다. 이때 내리는 비가 ‘가을 비’(이른 비)고,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듭니다. 참고로 이스라엘의 강우량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납니다. ‘우기’에 해당하는 11월부터 3월 사이에 주로 내리며 1, 2월에 집중적으로 내립니다.

《성경》에서는 ‘가을 비’를 축복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비를 언급할 때도 꼭 ‘가을 비’(이른 비)를 ‘봄 비’(늦은 비, 3-4월 사이 추수를 앞두고 내리는 비) 보다 먼저 언급합니다.

그리하면 그가 너희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에 맞게 내려주시어, 밀과 술과 기름을 거두게 해주시고 – 신명 11:14

메마른 골짜기를 지나갈 적에 거기에서 샘이 터지고 ‘이른비’가 복을 내려 주리라. – 시편 84:6

소나기, ‘가을비’, ‘봄비’를 철 따라 내리시고 추수 때를 어김없이 지켜주시는 우리 하느님 야훼를 공경하자고 하여야 할 터인데 그럴 생각조차 없구나. – 예레 5:24

너희 하느님께서 ‘가을비’를 흠뻑 주시고 ‘겨울비’도 내려주시고 ‘봄비’도 전처럼 내려주시리니 – 요엘 2:23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농부는 땅이 귀중한 소출을 낼 때까지 끈기 있게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 야고 5:7

 

‘휴경지’(休耕地)에 ‘가을비’가 내리면 농부는 밭에 나가 ‘밀’이나 ‘보리’를 먼저 흩뿌립니다. ‘길바닥’이나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먼저 밭을 갈고 이랑에 씨를 심는 우리의 농사법과는 정반대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의 형편도 이스라엘의 토양을 이해하면 자연스럽습니다. 갈릴래아 평야는 ‘석회암’이 변하여 형성된 ‘테라로사’(Terra rossa) 토양으로 짙은 붉은 색을 띠며, 아주 비옥해서 많은 농산물을 수확합니다. 갈릴래아 평야와 해안 평야지대를 뺀 나머지 대부분의 땅은 ‘석회암’ 지대입니다. 흙인 줄 알고 뿌렸지만 나중에 밭을 갈 때 보면 온통 그 밑이 ‘돌’인 경우입니다. 이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비유가 이스라엘 상황에서는 모두 정상입니다. 더욱이 ‘좋은 땅’(沃土)에 떨어진 씨앗에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의도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씨 뿌리는 농부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비유 주제는 ‘하늘나라’(하느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중에는 하늘나라 운동을 하시는 예수님의 ‘신상발언’, 즉 ‘자신의 자세’(태도)를 밝힌 것도 있습니다(마태 13:47-50, 루가 10:29-37). 오늘 복음이야기가 거기에 해당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신상발언’입니다. 씨 뿌리는 농부는 예수님이고, 자신이 하시고 있는 일을 농부의 희망에 비추어 발설하신 비유입니다. 어째서 이런 신상발언을 하시게 된 것일까요?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하늘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치고, 치유하고, 전도하시며 그 좋은 하늘나라의 씨앗(기쁜 소식)을 부지런히 뿌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 곁으로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며 공생애 초기만 하더라도 인기가 치솟았습니다(마태 4:23-25). 예수님은 거침없이 자신만의 ‘율법해석’을 내놓았고 군중들은 매료되었습니다(마태 7:28-29). 심지어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마태 12:9-13).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좋아한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중심의 기득권자들(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성전사제들)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모함했습니다(마태 12:14).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귀 두목(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있다고 모함했습니다(마태 9:34; 12:22-24).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마귀 들렸다는 뜻입니다. ‘먹보’에 ‘술꾼’이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 즉 그들과 ‘한통속’이라고 모함하고 다녔습니다(마태 11:19).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걱정이 되었는지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데려가려고 찾아올 정도였습니다(마태 12:46-50). ‘오병이어의 표적’ 뒤에는(마태 14:13-21) 본격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이탈자들이 생겨나며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 요한 6:66

 

예수께서 시작하신 ‘그 좋은 하늘나라’ 운동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점점 인기가 떨어지며 고립되기 시작한 예수님을 향해 ‘반대자들’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아마 ‘하늘나라 운동’일랑 집어치우고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나 돌보라며 비아냥댔을 것입니다. ‘비유’는 그 상황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처지에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희망 속에서 씨를 뿌리는 친근한 농부를 끌어다 자신의 ‘신상발언’을 하십니다.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자기선언’입니다.

저 농부를 보시오. 그가 씨를 뿌릴 때마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박토(薄土)에 떨어져 유실될 ‘씨’도 많습니다. 하지만 ‘좋은 땅’(沃土)에 떨어져 풍성한 소출을 가져다 줄 ‘씨’도 있는 법입니다. 나 역시 지금 실패와 고립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나는 결코 하늘나라 운동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온 천지에 ‘하느님의 통치’가 가득한 세상 말입니다. 나는 다가오는 그 좋은 하늘나라에 엄청난 ‘희망’을 걸고 삽니다. 내 인생의 사전에 결코 절망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어떤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하늘나라 운동에 절대적 희망을 두고 걸어가시는 예수님 자신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비유가 제시하려는 본래 의도입니다. 어떤 농부나 씨를 뿌리면 거둔다는 ‘자연 법칙’을 신뢰합니다. 다가올 봄철 수확 때를 희망하며 씨를 뿌리는 그런 농부를 ‘옆에 두고’(παραβολη)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가온 하늘나라에 희망을 걸고 사시는 ‘자신의 자세’를 비유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뿌려지는 씨처럼 여러 어려움에 직면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좋은 땅’을 만납니다.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썩어서 깊이 뿌리를 내리면 100배, 60배, 30배의 풍성한 결실을 가져옵니다. 자연 법칙을 따르는 씨앗처럼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복음의 씨앗’도 분명 풍성히 결실됩니다. 이 ‘희망’이 예수님을 그 좋은 하늘나라 농부처럼 ‘믿음’으로 일어서게 한다는 신상발언입니다.

후반부(18-23절)는 복음서 기자가 추가한 ‘비유 설명’입니다. 사실 비유는 원칙적으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비유가 말해지는 상황을 청중들이 다 알기에 쉽게 알아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비유 설명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복음서 학자들은 이 후반부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설명이라고 봅니다. 초대교회 전도자들도 열심히 ‘말씀’(ὁ λόγος, 이 단어는 ‘복음’이라는 말 대신 초대교회가 자주 쓰던 전문어입니다)을 전해 보지만 실패를 거듭합니다. 교회의 초창기이니만큼 여러 면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부실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초대교회의 ‘충실한 말씀 전도자들’을 격려하고, ‘부실한 신자들’을 ‘각성’시키려는 목적으로 ‘전승자’(복음서 기자)가 비유 설명을 추가했다는 주장입니다.

잘 묵상해 보면, 비유의 초점도 옮겨갑니다. 전반부 비유의 핵심은 분명히 ‘씨 뿌리는 사람’, 즉 예수님의 자세를 언급한 신상발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 ‘하늘나라 일’에 관한 것입니다. 반면에 후반부 비유 설명은 ‘씨앗’과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네 종류의 땅’으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전반부 비유의 핵심은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반면에 후반부 비유 설명은 등장하는 소재(素材)들 하나하나를 초대교회의 전도체험 및 신앙생활과 연결시켜 여러 뜻으로 늘어놓습니다. 이렇게 하는 비유 풀이를 ‘우의적’(寓意的, Allegory) 해설이라 합니다. 비유 설명에 따르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부실한’ 부류가 ‘셋’이고, 성공하는 ‘충실한’ 부류가 ‘하나’입니다.

 

차례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당연히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말씀’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참고로 ‘농부’를 ‘하느님’으로 ‘씨’를 ‘예수님’(말씀이신 분)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네 종류의 땅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인간의 네 가지 상태를 나타냅니다. ‘길바닥’ 같은 사람은 ‘말씀’(복음)을 듣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굶주린 ‘새들’처럼 덤비는 ‘사탄’에게 ‘말씀의 씨앗’을 빼앗깁니다. ‘돌밭’ 같은 사람은 ‘말씀’(복음)을 듣지만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신앙을 내버립니다. ‘가시덤불’ 같은 사람은 ‘말씀’(복음)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욕심)에 휩쓸립니다.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풍성한 구원의 결실”을 맺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인생살이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습니다. 몸부림치며 애써보지만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일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고립’ 속에서 우리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선택하기 쉽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양극화와 치솟는 집값 문제, 가난의 대물림, 세대와 사회 간 갈등과 여러 구조적인 문제가 맞물려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래도록 기득권층은 인간적 한계나 실패, 가난을 ‘개인의 책임’(탓)으로 몰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뿌리 깊이 자리합니다. 이 구조적인 문제,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교회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그 좋은 나라’를 위한 법과 시스템을 만들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좋은 나라의 도래’를 위해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희망’이 아니라 ‘절망’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었습니까?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실패와 고립을 기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실패와 고립에 굴하지 않고 삶을 대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기억하십시오. ‘태도’는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속마음, 즉 ‘믿음’과 ‘가치’입니다. 그가 어떤 ‘믿음’과 ‘가치’를 가지고 사는지를 보여줍니다. 우선 ‘믿음’이란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찾고, 찾아낸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가치’란 “나에게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그 무엇”입니다. 예수께서 ‘광야 시험’에서 찾아내신 가장 소중한 ‘가치’는 ‘그 좋은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에 모든 것을 거셨습니다. 오롯이 그 좋은 나라를 향한 ‘희망’과 ‘믿음’으로 일어서신 불굴의 예수님, 인내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코로나19로 외롭고 힘든 시절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진짜 힘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버지 세대들은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면서 열심히 나라 경제를 일구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젊은 세대들로부터 ‘태극기’라고 조롱당합니다. 청년 세대들은 노는 것도 잊은 채 하루 20시간 가까이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했지만 정작 취업할 곳이 없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서로가 열심히 고생하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람도 없이 세대 간 갈등과 불신의 벽만 높아갑니다. 열심히 살았고, 또 열심히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제의 눈으로 진단하자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즉 가장 소중한 ‘가치’를 묻지 않은 채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짜 목적(희망)도 없이, 방향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사회가 그렇게 하니까 덩달아 따라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세대들도, 청년 세대들도 예외 없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개인이나 가정만의 책임이고 학교와 교회, 사회와 정부는 책임이 없습니까? 분명 학교와 교회, 사회와 정부의 책임이 더 큽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일이 가치 있는 삶인지, 어디가 옳은 방향인지 참된 정보를 주면서, 바른 길잡이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그런 역할을 소홀히 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교회는 참회하고 ‘착한 이웃’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믿음의 예수님’처럼 지금이라도 삶의 소중한 것을 먼저 찾는 ‘묵상’(성찰)부터 하자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을 찾자고 말입니다. 그 일이 우리가 예수님처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진정으로 그 길을 찾아낸 이는 ‘씨앗’처럼 ‘인내의 시간’을 보냅니다.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희망의 예수님’처럼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자신이 찾아낸 그 목적(희망), 그 방향을 향해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비교와 경쟁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나’ 자신임을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내 속에서 자기가 찾아낸 ‘믿음과 가치의 길’을 오롯이 걷는 이들은 분명코 그 믿음과 가치를 성취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비유 설명’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실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말씀 전도자들처럼 우리도 ‘복음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전도자’로 살아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전도’하지만 별 수확을 못 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낙담하지 말고 그 귀하고 소중한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만 골라서 뿌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땅’에 뿌렸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나 성전제사장에게만 ‘하늘나라 복음’을 뿌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남자에게만 ‘하늘나라 복음’을 뿌리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에게만 ‘하늘나라 복음’을 뿌리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여성, 이방인에게도 ‘하늘나라 복음’을 뿌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기득권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만(자기민족만) ‘하늘나라’를 차지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을 만나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 말씀을 듣고 깨달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좋은 땅’도 만나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뿌려진 씨앗이 다 유실되는 것 같아도 여러분과 저처럼 반드시 결실되는 ‘땅’도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처럼 희망을 갖고 복음 말씀의 씨앗을 심으면 하느님께서는 결실되도록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하느님의 말씀’(복음)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완전히 실패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파하고 결실케 하시는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더욱이 씨앗이 풍성히 결실되는 그 ‘좋은 땅’이 우리이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중 누구도 근본적으로는 그 ‘연약한 씨앗’이 자라나 결실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씨앗이 자라고 결실되는데 필요한 햇빛과 비(물)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성령)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의 씨앗’이 심기는 자신의 ‘마음 밭’만은 준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마음 밭’(좋은 땅)의 가장 좋은 모본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수태고지의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예수님)이 자기 안에 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였습니다. 씨앗이 심겨질 땅이 필요하듯이 자신을 ‘성육신의 밭’(땅)으로 제공한 성모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공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희망으로 바라보신 그 ‘좋은 땅’이 우리여야 합니다. 나 자신의 마음부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은혜로 심어주신 ‘구원의 말씀’이 풍성히 결실되도록 우리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돌보고 지켜가야 합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처럼 ‘희망’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돌보지 않으면’ 1독서 《창세기》가 전하는 ‘에사오’처럼 ‘은총’으로 얻은 ‘하늘나라의 상속권’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 ‘연약한 씨앗’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강함’을 자랑하는 분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을 말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희망 속에 뿌려지는 그 작고 연약한 씨앗처럼 땅에 떨어져 덥혔습니다. 반대자들은과 심지어 제자들마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씨앗은 언제나 땅에 묻혀서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의 진짜 일을 시작하는 법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역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심으로써 인류에게 풍성한 구원의 결실을 가져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신비롭게 해내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말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불굴의 용기로 일어서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답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가장 값진 삶입니다. ‘성공회의 선교정신’도 이것을 말해줍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위해 새신자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며 양육합니다. 하늘나라를 일구기 위해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해 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는 약자들의 편에서 정의와 평화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생태계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에 교회는 헌신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합니다.

 

이 모든 선교정신이 우리 교회를 통해 구현되고 있는지 성찰해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우리 자신을 ‘참회’하고 하느님께 교회를 의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지체들입니다. 함께 신앙생활하다 보면 ‘충실한’ 신자도 있고 ‘부실한’ 신자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함께 좋은 땅’이 되자고 손을 내미는 일이 필요합니다. 모든 지체가 더욱 공고히 한 몸을 이루어 ‘환난’이나 ‘박해’를 이기도록 서로의 ‘믿음’을 격려해야 합니다. 세상 ‘걱정’에 억눌려 살지 않도록 서로 ‘주님의 평화’를 빌어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곱처럼 참된 ‘부요함’을 사모하도록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시편》 시인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등불과 빛’으로 삼도록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가야할 ‘방향’(목적)에 대해 서로 한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재물’의 유혹(욕심)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 ‘재물의 유혹’은 정말 강력하기 때문에 서로를 더욱 돌보아야합니다. 온유와 친절의 끈으로 서로를 묶고, 사랑과 감사를 포함한 여러 덕행으로 서로 ‘본’(本)을 보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부터’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에사오처럼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일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신성한 약속’(장자 상속권)이 상징하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영적인 것’, ‘복음의 말씀’을 ‘야곱’처럼 날마다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부터 ‘좋은 땅’이 되도록 가장 먼저 보살펴야 합니다.

오늘도 성찬례에서 들은 ‘주님의 말씀’이 마음 밭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기도합니다. 마음에서 걷어내야 할 돌과 가시덤불을 주님께 여쭙습니다. 묻고 듣는 기도를 통해 그것들을 발견해 갑니다. 발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제거하는 일이야말로 주님의 말씀이 자라나는 데 있어서 소중한 일입니다. 우리 힘만으로 되지 않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순종하는 우리를 성령께서는 점점 ‘좋은 밭’으로 변화시켜 갈 것입니다. 종국에는 주님의 기대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심으신 하늘나라의 복음을 풍성히 열매 맺는 삶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일상에서 ‘생명과 평화’를 열매 맺는 삶이야말로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열매 맺는 삶이야말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마음에 생명의 말씀을 심으신 주님께서는 풍성히 결실되도록 책임지실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실패하는 농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하늘나라를 가져오신 주님은 그 씨앗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 결실될 날을 고대하십니다.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실의 계절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오늘도 부름 받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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