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5. 연중 1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3:34-38,42-49,58-67
  • 시편 – 45:10-17
  • 2독서 – 로마 7:15-25상
  • 복음서 – 마태 11:16-19,25-30

연중 1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마음의 쉼 –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 마음을 배워 섬기는 제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성삼위일체대축일’ 이래로 우리는 《창세기》를 1독서 말씀으로 낭독하고 있습니다. ‘혼돈’으로부터의 ‘창조’, 하느님의 사랑받는 ‘공동체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꽤 긴 여정(旅程)입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함께 그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가족에게 ‘미래의 빛’(기쁨)을 가져다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창세 18:1-15). 어머니와 자식의 추방과 혼란을 목격했습니다(창세 21:8-21). 아버지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던 위험천만한 장면을 보며 가슴을 졸였습니다(창세 22:1-14). 그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통의 눈물)의 순간들마다 그들 가운데 현현하시어 빛, 질서, 평화, 생명, 사랑, 희망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믿음의 선조들에게 뿐 아니라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성삼위일체대축일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온 ‘복음’(福音, 기쁜 소식)입니다. ‘평화의 비둘기’가 나는 하늘 아래를 지나든, ‘시련의 먹구름’ 아래를 지나든 ‘하느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이사악과 리브가의 ‘혼사’(婚事)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무거운 짐’처럼 작용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들의 ‘혼사’(婚事)입니다. 40이 되도록 짝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노인의 출발로부터입니다. 그의 이름은 ‘엘리에젤’일수도 있습니다(창세 15:2). 그는 아브라함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나이 많은 종’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품위 있는 청지기’(심복지인, 心腹之人)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원문의 뜻에 가깝습니다. 그에게서 복음이야기에 등장하는 ‘주님의 심부름꾼’이었던 ‘세례자 요한’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토록 ‘충직한 마음’으로 주인을 ‘섬겨’ 온 그 ‘종’(청지기)에게 마지막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옛 고향’으로(창세 11:27-32) 가서, 친척들 중에서 ‘아들의 신붓감을 골라오라’는 ‘명령’입니다(창세 24:4).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께서(창세 12:1-3) 종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 ‘격려’합니다(창세 24:7,40,42). ‘약속의 아들’을 주신 하느님께서 ‘큰 민족’이 되게 하신다는 ‘처음의 약속’(창세 12:1-3)을 꼭 완성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명령’은 《창세기》에 기록된 ‘마지막 말’입니다. 일종의 ‘유언’(遺言)인 셈입니다. 유언이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라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습니까? 아브라함처럼 “나를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서 너희의 앞길도 인도해 주실 것이니 꼭 믿음으로 살아라.”(창세 24:7)고 유언할 수 있다면 잘 살아 온 인생입니다.

그 종(노인, 심복, 청지기)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함께 떠날 ‘원정대’를 꾸립니다. ‘원정대’가 가야할 곳은 메소포타미아 상류에 있는 ‘하란’(아람나하라임을 거쳐서 도달하는 나홀이 사는 성)입니다(창세 24:10).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에서 약 740km 떨어진 거리입니다. 그 거리를 다녀오려면 모두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원정대의 어깨에는 완수해야 할 ‘사명의 멍에’(책임과 의무)가 얹어져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란 젊은 세대는 ‘멍에’를 실물로 본적이 없을 것입니다.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도록 ‘소’의 잔등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 기구입니다. 농부는 ‘쟁기’로 밭을 갈기 전에 항상 ‘소’에게 ‘멍에’를 멥니다. 이런 이유로 ‘멍에’는 ‘책임과 의무’, ‘힘든 일’(苦役), 고통을 주는 ‘부담거리’, 벗어날 수 없는 ‘속박’, ‘억압’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출생의 멍에가 그를 괴롭혔다”거나 “패전투수의 멍에를 썼다”란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 ‘심복’(心腹)은 자기 주인인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하듯이 ‘충직한 소’처럼 평생토록 ‘온유하고 겸손하게’ 주인을 섬겨왔습니다. 그렇게 충직하게 주인을 섬겨온 그의 태도, 즉 그가 메어 온 ‘멍에’(책무)는 아브라함이 집안의 모든 살림을 맡길 정도로 ‘명예’가 되어 주었습니다. 어쩌면 이번 ‘섬김’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마지막 섬김’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는 기꺼이 ‘사명의 멍에’(책무)를 메고 ‘하느님의 약속’(주인 아들의 신붓감)이라는 ‘짐’을 데려오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사막을 횡단하는 먼 여행을 출발합니다. 온갖 귀한 선물을 낙타 열 마리에 싣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원정대는 길을 떠났습니다. 두어 달여에 이르는 여행 끝에 목적지인 ‘나홀의 성’ 입구에 도착합니다.

원정대가 도착한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성 밖에 있는 ‘샘터’에서 잠시 낙타를 쉬게 합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저녁 무렵에는 여자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 혼기가 찬 ‘아가씨’(소녀)를 이사악의 신붓감으로 선택할 참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첫 번째 한 일은 무엇입니까?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훼여! 오늘 일이 모두 뜻대로 잘 되게 해주십시오. 하느님의 심복 아브라함에게 신의를 지켜주십시오. – 창세 24:12

‘기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감’(直感)이나 ‘안목’(眼目), ‘경험’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거나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느님을 ‘신뢰’합니다. 자기 주인을 ‘심복’으로 두신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주인의 하느님은 자신의 하느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구체적인 징표(徵標)’까지 요청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항아리를 내려 물을 마시게 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저에게 물을 마시게 해 줄 뿐 아니라, 제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게 해 주겠다고 나서는 아가씨가 있으면 그가 바로 하느님의 심복 이사악의 아내감으로 정해 주신 여자라고 알겠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제 주인에게 신의를 지키시는 줄 제가 알겠습니다. – 창세 24:14

그가 ‘인도하심의 징표’로 구한 ‘아가씨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마음이 ‘친절’(온유)하고, ‘너그러우며’, ‘자기 주도적 섬김’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그는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무엇을 통해 사람을 살펴야 할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결국 ‘속마음의 드러남’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표현’이 ‘행동’이며, ‘속마음의 자연스런 결과’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달리 생각하신다면 아직도 삶의 진실을 보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 ‘행동’(몸)을 근거로 우리는 한 사람의 ‘평소 마음씨’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노인은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을 이사악의 신붓감으로 점지해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창세 24:18-20). 그 ‘행동’을 보고서 어떤 아가씨가 타인을 향한 ‘친절(온유)한 마음’, 낙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열 마리 낙타에게 물을 먹일 정도로 자기 주도적인 ‘봉사’와 적극적인 ‘섬김의 마음’을 가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고 기준을 정했습니다. 어째서 그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을 ‘점지’해 달라고 기도한 것일까요? 이야기 끝에서 밝혀지지만 그런 ‘마음의 소유자’여야만이 어머니를 잃은 이사악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24:67).

그렇습니다. ‘약속의 하느님’께서 그 성취를 위해 은밀히 역사하시는 첫 번째 영역은 언제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은밀히 성취되는 첫 번째 영역은 우리 ‘바깥’이 아니라 항상 ‘내면’입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끝납니까? ‘신뢰와 의탁’에서 나온 그의 ‘기도’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기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점지하신 아가씨는 누구였습니까? ‘리브가’입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친절(온유)하고, 너그러우며, 봉사와 섬김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낙타들이 물을 마시게 할 정도로 힘도 세고, 자기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1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자신의 미래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변화시킨 위대한 용기를 간직한 사람으로 밝혀집니다(창세 24:58).

모든 일이 노인이 기도한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섭리) 속에 ‘만사형통’을 경험합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그를 압도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멍에’(책무)는 편했고, ‘짐’은 가벼웠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앞길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주인(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두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종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보다 앞서서 행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연결된 ‘기도의 힘’을 믿었던 ‘지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께 여쭙고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걷는 ‘삶의 방향’이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져 있는지 묻고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에게 맞추지 않고 ‘하느님께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아갑니다. 맡은 일들과 과제들에 압도되어 쫓기듯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린이 집에 다니는 유아부터 질풍노도의 청소년, 미래를 잃어버린 청년, 노후가 불안한 어른 세대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일들에 압도되어 쫓기듯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감’(안목)과 ‘경험’에만 의지해 결정을 내리거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들을 완수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기도가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진실을 믿으며 살고 있습니까? 날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일상의 모든 일들을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만 하느님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결정’조차도 ‘하느님을 초대’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만 하느님을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하느님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하느님을 포함시킨다면 분명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제보다 오늘 ‘변화와 성숙’이 일어났음을 가족이나 이웃이 먼저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에 숨겨진 ‘빛나는 보석’을 찾으러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심복’(노인)에게는 모든 일이 은혜롭게 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한 사람이 소홀히 되고 있습니다. ‘리브가’입니다. 잘 성찰해 보십시오. 어떻게 ‘리브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노인’의 말을 ‘믿고’, 아버지의 집과 문화가 주는 익숙함과 안전함을 떠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그의 말’을 ‘믿고’, 40살 무렵의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떠날 수 있었을까요? 자그마치 740km나 되는 그 먼 길을 냄새 나는 낙타를 타고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가 이 은혜로운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이나 심복이 가진 ‘믿음과 섬김’만 주목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입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 친절(온유)하고 너그러운 사람, 봉사와 섬김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 자기 주도적으로 용기 있게 자신의 권리를 선택한 사람인 ‘리브가’ 역시 주목받아야 합니다. 그런 점이 무시된다면 이 이야기는 ‘복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가련한 여성(10대 소녀)에게 가족들이 짊어지라고 강요하는 ‘멍에’, 즉 ‘억압’, ‘고역’(苦役), 학대’로도 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부장적인 고대 사회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은 남성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남성과 동등한 권리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가족들은 10대의 ‘리브가’를 통해 자신들이 얻게 될 ‘이득’에 더 흥분했는지도 모릅니다(창세 24:32,35,53). 금은 패물과 옷가지의 선물, 그리고 아브라함의 재산에 더 주목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좀 나아졌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종교적으로는 어떻습니까? 로마카톨릭이나 보수 개신교회는 여성들의 ‘성직 서품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건강(피임, 낙태)에 관한 권리도 주로 대다수의 남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결정해 온 역사도 있었습니다.

과연 이런 ‘차별’과 ‘불평등’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겠습니까? ‘우주의 질서’일 수 있겠습니까? 남성과 여성은 신체의 차이는 있어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예수께서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인간’이 ‘차별’받지 않는 ‘그 좋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행동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며, 하느님의 자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성’을 간직한 존재라고 가르치고 행동하시다 반대자들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예수의 정신을 따랐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여성과 남성, 노예와 자유인, 이방인과 유대인의 삶 모두를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쳤습니다.(갈라 3:28).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 즉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모든 차별을 철폐하신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사도 바울로의 후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알고(믿는) 있는 일과 행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간 ‘리브가’는 주목받아 마땅합니다. 용기 있게 ‘자기 권리를 선택’한 ‘리브가’는 주목받아 마땅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런’ 리브가에게 주목하다가 눈이 번쩍 뜨입니다. 이야기 속에 숨겨진 빛나는 보석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해 오신 ‘삼위일체 하느님’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는 ‘성부’, 이사악에게서는 ‘성자’, 그 노인에게서는 ‘성령’의 면모를 발견합니다(물론 노인에게서는 성령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의 모습도 보입니다). 지금부터 이것을 풀어가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각 문화권에서 ‘노인’은 ‘지혜자’의 표상입니다. ‘살아있는 도서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자를 모르는 아주 예쁜 처녀’(창세 24:16) ‘리브가’는 누구를 나타냅니까? 그녀는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자신’의 표상입니다. 이렇게 보면 1독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불러 구원하시려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발견이 이야기를 훨씬 아름답고 풍요롭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 찾아든 ‘혼사’(婚事)로 ‘리브가’는 ‘혼돈’에 빠집니다. 자신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남성) 가족들은 벌써 저녁 식사 자리에서 ‘결정’을 해 버렸습니다(창세 24:50-51). 그들은 “어서, 데려가라”며 좋아합니다. 그럴수록 그녀의 내면은 ‘무질서’(혼란)를 겪습니다. ‘그 밤’이 깊어갈수록 더 깊은 ‘어둠’ 속을 지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그런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 속에 있을 때 리브가로 하여금 ‘용기와 믿음’을 발휘하게 한 ‘힘’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리브가의 ‘평소 마음가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노인’을 알아보는 ‘지혜’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 그런 지혜를 간직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리브가의 ‘평소 마음가짐’부터 보겠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리브가의 평소 마음가짐, 즉 ‘삶의 태도’가 어땠다고 전합니까?

‘할아버지, 어서 물을 마시십시오.’ 하며 항아리를 내려 손에 받쳐 들고 마시게 해주었다. 이렇게 물을 마시게 해주고 나서 낙타들에게도 실컷 마시게 물을 길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에 남아있는 물을 얼른 구유에 붓고는 물을 길으러 샘터로 달려가서 낙타들도 모두 마시게 물을 길어다 주었다. – 창세 24:18-20

이 구절은 《창세기》에 기록된 리브가의 첫 번째 목소리와 행동입니다. 그 목소리와 행동에서 우리는 그녀의 ‘마음씨’와 소중히 여겨 온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 행동에서는 ‘친절(온유)한 마음’, ‘측은지심’(너그러운 마음), ‘봉사와 섬김의 마음’이 표출됩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기주도적인 태도’를 발견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자 행동입니다.

이런 ‘마음’(성품)과 ‘행동’, 즉 그녀가 간직한 ‘삶의 가치’는 어느 날 갑자기 순간적인 충동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생각’만으로 하는 ‘묵상’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몸’(육체)으로 하는 ‘훈련’이나 ‘수행’을 통해 ‘자신을 꾸준히 가꾸어 온 사람’에게서 발휘됩니다. 자신 안의 ‘동물적 본능’이 ‘몸’으로 하는 ‘훈련’을 통해 다듬어지고, ‘몸’으로 하는 ‘수행’을 통해 자신 안의 ‘신성’에 가 닿은 사람에게서 표출됩니다. ‘몸’과 ‘마음’이 ‘습관처럼 그렇게 살아온 이들’만이 그런 ‘자동적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리브가가 그런 ‘훈련’과 ‘수행’을 한 사람이라는 정보는 《창세기》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이 ‘습관처럼’ 그렇게 살아온 이들에게서 나오는 ‘자동적 반응’이라는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느님께서 돕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은 ‘그 밤’에 리브가의 ‘마음’에 ‘빛’을 비추십니다.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 속에 있던 리브가의 마음에 하느님의 평화와 질서가 찾아듭니다. 그녀는 아침이 밝아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즉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할 ‘그 순간’에 아브라함의 심복을 따라가기로 ‘결단’합니다(창세 24:58). 대단한 ‘믿음’과 ‘용기’입니다. 친절(온유), 측은지심, 봉사와 섬김으로 살아온 그녀의 ‘마음’이 ‘올바른 행동’(선택)을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 속에 있을 때 리브가로 하여금 ‘용기와 믿음’을 발휘하게 한 다른 한 가지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노인’에게 힘입은 바가 큽니다. 저는 ‘리브가’가 노인의 말을 ‘믿고’, ‘용기’를 내어 따라가기로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들에 대해 좀 더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노인’(지혜자)에게 있습니다. 리브가는 처음 볼 때부터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고 행동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알던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가족들로부터 느껴보지 못한 ‘품위’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녀를 감동시킨 점은 ‘노인(지혜자)’이 자신보다 더 큰 세계와의 연결 속에서 늘 말하고 행동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영성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주인이 맡긴 ‘사명’(책무)에 ‘충실한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품위 있는 노인’, ‘믿음 깊고 신실한 노인’, ‘자기 사명에 충실한 섬김의 사람’이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먼 여정(旅程)을 감행했습니다.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의 파견이었습니다. 노인은 주인과 주인 아들에 대해 리브가에게 자세히 알려줍니다. 그녀의 마음에 이런 노인이 ‘중매하려는 신랑감’이라면 ‘신뢰해도 좋겠다’는 감정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따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여행을 감행해도 좋겠다는 끌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날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모든 일이 ‘하느님(성부)의 섭리’ 속에 일어난 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는 알게 되었습니다. 전체 상황이 ‘웃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신랑감에게 자신이 매혹당하도록 ‘하느님께서 모든 일을 예정해 놓으셨다’는 진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사악과 리브가의 ‘혼사’(婚事) 이야기가 가리키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인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풍부한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며느릿감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품위 있고, 믿음 깊고, 자기 사명에 충실한 섬김의 사람을 원정대의 총 책임자로 파견했습니다. ‘성령’께서도 리브가인 우리를 ‘참 기쁨’(웃음)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협조자’입니다(요한 14:26; 16:7-15).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시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협조자이신 ‘성령’ 덕택에 ‘진리’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닫게 되었습니다(요한 16:13). 성령의 도우심 덕택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믿음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지금도 세상에서 역사하십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인 ‘리브가’는 자신이 따라가야 할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감동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우리도 ‘지혜자’라고 말한다면 지나칠까요?

두 번째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노인’(성령)이 건넨 ‘엄청난 선물들’입니다. ‘선물들’이라는 말에 붙잡혀 리브가를 ‘속물’이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선물들’은 그녀가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중요한 근거였기 때문입니다. 리브가(우리 자신, 교회)로 밝혀질 신붓감을 찾아 나선 ‘원정대’는 엄청난 양의 ‘재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지참금’입니다. 그녀가 꿈에서나 누릴 수 있는 온갖 재물들이 낙타들에 실려 있었습니다(창세 24:10). ‘노인’은 금코고리, 금팔찌, 금은 패물과 옷가지, 다른 많은 선물들을 보여주었습니다(창세 24:53). 그 선물들은 노인의 말이 ‘진실’임을(창세 24:35-44) 믿을 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그 선물들을 통해 그녀가 마음에 받은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 지금, ‘종’이라는 이 노인이 나와 가족에게 이렇게 값비싼 재물을 선물한다. 선물로 주면서도 이것들이 하찮은 것처럼 여기지 않는가? 또 그와 함께 떠나면 나의 미래는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울 것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정말 그분의 신부일 때 나는 ‘보물창고’의 열쇠를 직접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혼사’(婚事) 이야기는 ‘교회인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풍부한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리브가가 받은 그 선물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진정한 ‘행복의 맛보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장하신 그 영원한 나라에서 누릴 ‘생명’에 비하면 하찮은 것들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베풀고 계시는 삶의 선물들(은혜)은 소중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받은 삶의 선물로도 감탄하며 감동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남들이 받은 선물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주님과 함께 그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에 비하면 그 선물들은 작은 것들에 불과합니다. 이 땅의 선물들은 그 좋은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풍부한 보화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고자 하시는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세상살이가 ‘멍에’를 멘 것처럼 부담스럽고 고생스럽습니까? 조금만 더 참고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 손에 건네질 ‘열쇠’를 들고 ‘보물창고의 손잡이’를 마주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보물창고의 손잡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 보물창고의 손잡이를 돌려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로운 기쁨이 그 손잡이 너머에 있다고 《성경》을 들려줍니다.

세 번째는 ‘미래의 신랑과 펼쳐갈 꿈’입니다. 노인은 리브가의 가족을 만나 하느님의 꿈, 즉 이사악을 통해 하느님이 이루실 ‘위대한 미래’(자손)를 영화처럼 생생하게 말해 주었습니다(창세 24:7). 이사악이 리브가와 얼마나 잘 어울리고, 얼마나 멋진 남성인지, 그와 함께 한다면 어떤 꿈의 미래가 펼쳐질지 온유한 태도로 설명합니다. 그 미래는 가족들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이렇게 이사악과 리브가의 ‘혼사’(婚事) 이야기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풍부한 상징으로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라고 부릅니다(2고린 11:2; 에페 5:21-33; 묵시 19:5-8; 21:9,). 교회는 미래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희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 재림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2천년이 흘렀다 하더라도 ‘재림의 약속’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믿음과 소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드디어 원정대는 리브가와 함께 ‘나홀의 성’을 떠납니다. 무수한 별들 아래 사막 여행을 하며 귀향하는 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인을 따라나선 리브가는 많은 것들을 물어봅니다.

그분의 외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주세요.
그분은 어떤 것에 관심이 많습니까?
그분이 함께하고 싶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저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외에도 수많은 질문들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노인은 친절(온유)하게 대답해 줍니다. 신앙여정을 감행한 우리에게도 이점이 중요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가 ‘경청’하는 마음으로 묻는다면 성령께서는 《성경》의 모든 장면들 속에서 우리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느 덧 수개월이 지났습니다. 원정대는 이사악이 살던 ‘라하이 로이’에 거의 다다랐습니다(창세 24:62). 아브라함이 살던 ‘브엘세바’, 즉 원정대의 첫 출발지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입니다. 그 ‘노인’은 리브가를 아브라함에게 데려가지 않습니다. 며느리 감으로 평가받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데려가지 않았다는 점은 그만큼 아브라함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 ‘심복’이라는 뜻입니다. 노인을 향한 아브라함의 사랑과 신뢰가 그의 ‘순종과 섬김’으로 완전히 보답 받는 순간입니다.

멀리 이사악의 천막이 보입니다. 그들은 들을 가로질러 오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리브가는 직감적으로 그가 사막 여행 동안 자신에게 설명해 준 ‘웃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랑’임을 알아차립니다. 그 짧은 순간 이런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재미있는 사람’일거야… 하지만 나 없이는 불완전해!… 그의 삶의 목적은 나를 통해 완전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어…

리브가는 낙타에서 내려 노인에게 묻습니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시는 저분은 누구십니까? 종이 대답하였다, 제 주인입니다. – 창세 24:65

그 말을 듣고 리브가는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립니다.” 유대인들 혼인식에서 신부가 베일을 가리는 전통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원정대’는 걸음을 멈춥니다. 노인은 자기 주인 이사악에게 그 동안의 경위를 낱낱이 보고합니다. 평생토록 ‘온유’(친절)하게 주인을 섬겨온 노인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마지막 섬김’을 충실히 완수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함께 이루어 갈 ‘신붓감’이라는 ‘짐’을 ‘겸손히’ 자기 주인(이사악)에게 데려왔습니다. 자기 주인(아브라함)이 하느님께 하듯이 ‘충직한 소’처럼 ‘종의 멍에’를 매고 주인에게 ‘순종’과 ‘헌신’과 ‘섬김’을 다했습니다. 그는 ‘섬김의 가치’를 평생토록 수행한 훌륭한 ‘본보기’로 남아 있습니다. ‘자기 주인과 함께’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의 멍에’를 충실히 짊어진 ‘섬김의 종’으로 말입니다.

물론 그가 ‘섬김의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기까지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의 ‘멍에’(책임과 의무)는 편했고, ‘짐’은 가벼웠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주인에게 ‘순종’과 ‘섬김’과 ‘헌신’을 다했던 노인은 마침내 ‘멍에’(책무)를 벗고 ‘쉼’을 찾습니다. 동시에 아브라함도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작용해 온 일에서 벗어나 ‘쉼’을 찾습니다. ‘순종과 섬김과 헌신의 진정한 모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훈하는 오늘 복음이야기의 축소판이기도 한 아름답고 감동스런 ‘혼사’(婚事) 이야기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사악은 리브가를 천막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습니다. 오늘 《시편》으로 노래한 <45>편처럼 그들은 ‘결혼 관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사악도 아버지의 일을 맡아 진행한 ‘노인’을 온전히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인 지혜자’, 즉 ‘성령’은 성부의 일을 맡아서 그것을 우리에게 현실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교회인 우리는 성령이 소개하시는 신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저항할 수 없습니다. 교회인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여정 속에 있습니다.

Isaac & Rebecca(oil on canvas) by Solomon, Simeon (1840-1905)

이야기의 심오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들어갑니다. 저는 이 마지막 구절이 대단히 인간적이고 심오하며 감동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관계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사악은 아내를 사랑하며 어머니 잃은 슬픔을 달랬다. – 창세 24:67

무슨 뜻입니까? 영성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리브가는 ‘마음의 치유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녀를 통해 어머니 잃은 이사악의 슬픔, 우울, 고통이 치유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친절(온유)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봉사와 섬김의 마음씨 뿐 아니라 ‘치유하는 마음씨’도 간직한 ‘신부’였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속박을 끊고 자신을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줄 사람(노인)을 알아보는 ‘지혜’의 소유자였습니다. 복음이야기처럼 ‘리브가’는 ‘쉼’(안식, 치유)을 주는 이사악의 구세주였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45편>은 ‘왕의 결혼노래’입니다.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1독서 《창세기》의 이사악과 리브가의 결혼관계를 염두에 두고 선택된 본문입니다. 시인은 새 삶의 시작을 향해 떠나는 ‘자기 민족의 어머니 리브가’를 향해 이렇게 위로합니다. 어쩌면 홀로 고향을 떠나 ‘삶의 멍에’(책임과 의무)를 져야 하는 이 가련한 아가씨(소녀)에게 가족들이 이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내 딸아, 들어라. 잘 보고 귀를 기울여라. 네 겨레와 아비의 집은 잊어버려라. 너의 낭군, 너의 임금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리라. 그는 너의 주님이시니 그 앞에 꿇어 절하여라. – 시편 45:10-11

그렇습니다. 가족들 곁을 떠나는 ‘리브가의 마음’을 향한 ‘훈계’입니다. 결혼은 ‘새 삶의 시작’을 뜻합니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마음’에서 겨레와 아비의 집을 ‘잊어야’ 합니다(10절). ‘마음’으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11절). 이 둘은 리브가가 메야 할 ‘멍에’(책임과 의무)입니다. 그러나 《시편》에 따르면 그 남편은 ‘임금’을 뜻함으로 그 ‘멍에’를 멘 신부에게는 영화와 권세라는 축복이 약속됩니다(12절).

어떤 분들은 이런 구절이야말로 전형적인 ‘가부장적 문화’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습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고대의 그들은 ‘가부장적 사회’를 당연시했고, 《성경》 역시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한계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경》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특별한 권위’를 갖습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의 ‘맥락’을 찾아내고, 오늘의 상황 속에서 ‘재해석’하여 이야기의 ‘참 의미’를 살아내는 일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이 《시편》을 신랑 신부(이사악과 리브가) 둘 다를 향한 훈계(의무)와 축복으로 알아차릴 것입니다.

특히 이 《시편》에 등장하는 ‘왕’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재해석되고 이해됩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부관계와 같기 때문입니다(이사 54:5, 호세 2:18). <신약성경>도 이 《시편》을 따라 ‘왕’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습니다(시편 45:6,7; 히브 1:8). 교회인 우리도 ‘왕의 신부’처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시편 45:16-17; 히브 2:10, 13). 초대교회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교훈하였습니다(에페 5:21-33).

시인은 자신의 미래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결정을 내리고 떠나는 리브가를 향한 가족들의 ‘축복’에 주목합니다.

누이야, 너는 억조창생(셀 수 없이 많은 세상의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되어라. 네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빼앗아라. – 창세 24:60

이 구절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시(詩)에 녹여내며 마감합니다.

자손들 많이 낳아 조상의 뒤를 이으리니, 그들이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리라. – 시편 45:16

한마디로 ‘백년해로, 만수무강’입니다. 이렇게 《시편》 기자는 모든 결혼이 갖는 책무와 목적을 자신의 노래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결혼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속하게 되는 모든 관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관계는 남편과 아내 둘 다를 변화시킵니다. 부부는 이전에 혼자였던 때처럼,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욕구와 욕망은 서로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정되고 책임지는 관계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행복한 결혼관계를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둘 다 ‘마음’을 다해 ‘순종, 섬김, 헌신의 멍에’(책임과 의무)를 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부부관계는 평생토록 ‘순종, 섬김, 헌신의 멍에’(책임과 의무)를 필요로 합니다. 그 ‘멍에’(책무)를 메고 ‘시간의 시험’을 ‘마음’을 다해 묵묵히 견뎌 내야 지속될 수 있는 ‘이야기들’로 발전해 가는 관계입니다. 종국에는 자녀와 후손들까지 포함하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의 ‘마음’에 ‘기억’되고, 이어질 아름다운 이름이 ‘부부’입니다(시편 45:17).

Rembrandt van Rijn(and Workshop?), The Apostle Paul. 1657

2독서 《로마서》는 ‘마음의 법과 육체(죄)의 법’을 다룹니다. 한마디로 ‘마음의 문제’를 다룹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행동 변화’를 위한 여러 계획을 세우고, 결심을 합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처럼 실패하는 자신을 발견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신앙인들 중에도 ‘영적 진보’의 목표를 세우고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피정이나 영신수련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하느님과 더 멀리 떨어져 있거나 차가워진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가 편안치 못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 많은 피정과 영신 수련이 ‘가슴’까지 가지 못하고 오히려 ‘머리’만 키워놓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도 바울로와 같은 처지가 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로마 7:15

이렇게 ‘무지’(無知)하고, ‘의지력’과 ‘자제력’도 부족한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삶의 멍에’로 괴로워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탄식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 로마 7:24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그 비참한 삶의 멍에를 벗기시는 분을 ‘희망’으로 소개합니다. 복음이야기처럼 우리 마음이 ‘안식을 찾게’ 해 주시는 유일한 희망이신 분 말입니다.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 로마 7:25a

복음이야기 《마태오복음》은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신상발언’입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며 ‘순종과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는 지혜로운 노인이 주인과 주인의 아들에 대해 알려(계시)주었습니다. 복음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하느님의 지혜’이신 자신에 대해 ‘계시’하십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복음) 계시의 중재자’이신 자신의 ‘마음’을 밝히 알려주시며 우리를 ‘제자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이에게 주고자하시는 ‘쉼’으로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단락(16-19절)은 그 세대 사람들(특히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시대 상황’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헌신하시던 예수님의 좌절과 안타까움이 깊이 묻어납니다.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던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 세대를 비유하십니다. 친구들이 함께 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그런 행동 속에는 ‘주님의 심부름꾼’이었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에 ‘무관심’하고 ‘공명’(共鳴)하지 않았던 그 세대 사람들의 행태가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메시지와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사자들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전혀 기쁨으로 ‘공명’(共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심판관’이 되어 제멋대로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비난하고 평가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듣는 귀를 막고 ‘자기 기준’만 앞세우는 이들과는 대화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마저도 어찌해볼 수 없다는 심정이 첫 번째 단락에 녹아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세대가 그렇게 ‘무관심’하고, ‘공명’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의 길을 계속 걸어가시겠다고 이렇게 진술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 마태 11:19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행위(결과)를 보고 사람을 알 수 있다”(마태 7:16)고 가르치셨습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고 교훈하셨습니다. 말이나 주장이 나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열매’에 해당하는 그 ‘행동의 결과’가 이미 스스로를 증명해줍니다. ‘열매’에 해당하는 그 ‘일의 결과’가 이미 스스로를 증명해줍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과 ‘용서’와 ‘치유의 일’이 이미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해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일의 결과’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이미 증명해줍니다. 그렇지만 그 세대 사람들(특히 종교지도자들)은 ‘행동의 결과’를 보고서도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계시’하러 오신 ‘하느님의 지혜’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일의 결과’를 보고서도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기적(능력)을 가장 많이 행하신 동네(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사람들조차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마태 11:20-24). 오늘 복음이야기는 이 부분은 배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 처음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무관심하고 공명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총체적으로 반대에 직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25-27절)은 ‘복음의 계시와 그리스도론적 진술’이 담긴 예수님의 ‘감사기도’(찬양)입니다. 첫 번째 단락과의 연관성에서 보자면 시대 상황에 굴하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신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기도’(찬미)입니다. ‘주의기도’에서 가르치신 것처럼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아람어’(Abba)인 이 단어는 우리식 어감으로 하면 ‘아빠’입니다.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하늘과 땅’, 즉 ‘우주를 주관하신 주권자’시라 부르십니다.

그런 다음 ‘지혜의 전통’에 호소하여 ‘감사’하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하늘나라)는 신비하기만 합니다. 세상 방식으로 하자면 ‘지식인’, ‘권력가’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세상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 스스로에 대해서 “똑똑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이와 경험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감추어버리십니다.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 복음의 진리’를 나타내시고 차지하게 하십니다.

‘철부지 어린아이’는 ‘순수하자’는 문자적인 뜻도 있지만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자기 존재를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를 가리킵니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보잘 것 없는 사람 취급받던 이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이 주된 구성원이었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세상의 기대와 예상을 초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찬양)하는 근거가 됩니다. ‘철부지 어린아이’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여기를 보십시오(2017년 7월 9일 말씀나눔).

우리도 예수님이 감탄하신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수행해야 합니다. 마음이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지 이기적인 자아가 마음에서 너무 커져 있으면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어집니다. 흔히 나이가 들수록 삶에서 감사, 감탄, 순수를 잃어버리기 쉽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몸은 땅에, 영혼은 하늘에 가까워지더라도 감사, 감탄, 순수를 간직한 하느님의 자녀이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계시’, 즉 ‘복음 진리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진술됩니다(27절). 성부와 성자의 ‘인격적인 친교와 일체성’(하나이심)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진술입니다. 인성보다는 자신의 신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넘겨받으셨습니다. ‘전권’(全權)을 맡아 다스리는 분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친밀히 알게’ 해 주시는 ‘계시의 중재자’이십니다. 마태오공동체의 신앙고백입니다.

세 번째 단락(28-30절)은 계시의 중재자이신 예수님께로의 초대입니다. 그 유명한 말씀이 들려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 마태 11:28

예수님이 초대하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허덕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 그들은 ‘안식일 논쟁’(마태 12:1-14)이나 ‘정결례 논쟁’이나 ‘음식규정’에서 들려주듯이(마태 15:1-20) ‘율법의 멍에’로 허덕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613개의 율법조문 뿐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추가된 ‘율법’도 지키도록 강요되었습니다(사도 15:10).

 

그러나 꼭 그들로만 한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짐’을 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떤 짐은 가볍지만 어떤 짐은 견딜 수 없이 무겁기만 합니다. 하나의 짐을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짐이 옆에 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일, 자녀교육, 주택문제, 가정을 돌보는 일, 인간관계, 회사생활, 노후,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일, 수많은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죄책감, 문제들 등등 누구도 ‘인생의 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께로 초대하시어 “편히 쉬게 하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무엇(누구)이 아닌 ‘예수님께로’ 가야합니다. 성찬례는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초대이기에 다른 무엇이 성찬례보다 우선이어서는 안 됩니다. “편히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복음’인지 아니면 ‘사탕발림’인지는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편히 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은유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내리눌러온 모든 ‘멍에’를 벗기신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석회암 돌밭이기에 밭갈이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소나 나귀를 이용하는데,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소나 나귀는 밭을 갑니다. 농부는 한번 씌운 ‘멍에’를 하루 종일 벗기지 않습니다. 완전히 벗길 때는 멍에가 부러졌거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따라서 “편히 쉬게 하리라”’는 약속은 소나 나귀의 몸을 ‘억압’하고 ‘구속’(拘束)하던 ‘멍에’를 벗기듯이 우리에게 ‘해방’과 ‘쉼’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단지 마음의 평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을 ‘구속’(拘束)해 온 ‘멍에’를 벗고 ‘쉼’을 찾게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예수께서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나 “편히 쉬게 하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쉼을 얻기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 마태 11:29

먼저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본래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하는 이가 없는데”(27절),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만 알고 계신 ‘자신’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마음’에 대해 알려주신다는 말씀은 ‘가장 중요한 것’을 ‘숨김없이 가르쳐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알려주십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神)에 대해 갖고 있는 ‘신관’(神觀)이나 ‘이미지’하고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신관’이나 ‘이미지’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강함’을 자랑하는 ‘신’(神)이 아닙니다. 다가가기 어려운 ‘폭군’도 아닙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느님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자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고, 천지만물의 ‘주인’(통치자)이시지만 인간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오신 하느님”입니다(마태 20:28).

이렇게 자신에 대해 소개하신 예수님은 ‘쉼’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예수님은 ‘멍에’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십니다. ‘내 멍에’라는 말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 나라 일을 하고 계심’을 분명히 합니다. 멍에는 분명 ‘억압’과 ‘구속’(拘束)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멍에’는 져야할 ‘짐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멍에를 메고 배우는 일’은 ‘문하’(門下), 즉 ‘사제(師弟) 관계’에 들어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 스승의 제자가 되어 배운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의 초대’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자신을 예수께 바쳐야 합니다. 사실 ‘멍에’라는 뜻의 히브리어 ‘체메드’는 “둘을 하나로 연결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멍에’, 즉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책무’를 통해 스승과 제자가 하나로 연결되는 셈입니다.

‘제자’는 무엇을 ‘의무’로 배워야 합니까?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스승의 마음’을 ‘의무’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마음’이 시작하고, 진행하며, 끝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공부는 본질적으로 ‘예수 스승의 마음(정신, 인품, 가치)을 의무적으로 닮는 일’입니다. 영성의 최고봉이신 예수 스승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고자 하는 일이 제자의 공부입니다. 진정한 제자는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닮고자 하는 이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 스승께 갑니다. 그 마음을 배워 예수 스승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 스승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배우며 하느님 나라 일을 위한 자신의 책무를 감당합니다.

그러면 예수 스승께서는 어떤 ‘멍에’를 메고 ‘하느님 나라의 일’을 하셨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멍에’를 메셨습니다(필립 2:8).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섬김과 헌신의 멍에’를 메셨습니다(마태 20:28). 예수께서는 순종, 섬김, 헌신이라는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하십니다(마태 16:24; 20:26-27). 하느님 나라 일을 하려면 반드시 이 ‘책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는 자신이 ‘예수 스승과 같은 멍에’를 메고 따르고 있는지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그 ‘멍에’를 메지 않으면 배울 수 없습니다. ‘예수 스승과 함께’ 멍에를 메고, 다른 누구가 아니라 ‘예수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있는지’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 스승이 아닌 ‘다른 사람과 멍에’를 메고 있다면 그는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스승과 함께 멍에를 메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빼앗겨서도 안 됩니다. ‘예수의 제자’는 오직 예수 스승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 스승에게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이야말로 ‘영혼(마음)의 안식을 찾는다.’고 명백히 ‘약속’하십니다. 한마디로 진정한 ‘쉼’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는 ‘대가’를 지불해야 주어집니다.

그렇지만 ‘멍에’와 ‘안식’(쉼)은 서로 어울리지 않기에 ‘역설’처럼 들립니다. 소나 나귀에게 멍에를 메게 하는 이유는 ‘쉼’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키려는 의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는 이유도 ‘쉬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배워서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어 일을 할 때 오히려 우리 영혼이 안식을 찾을 것이라”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마태 11:30

예수님은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당신의 ‘짐이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순종의 멍에’, ‘섬김과 헌신의 멍에’가 ‘괴로움’이 아니라 ‘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짐’이 ‘고역’이 아니라 ‘가볍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그 마음을 배운다면 ‘예수님의 멍에’가 ‘율법의 멍에’보다 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책무가 율법의 짐에 비한다면 가볍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 신비는 ‘탁월한 스승’에게 배우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스승의 마음을 배우면 그 말씀이 진실임을 알게 됩니다. 그 신비는 탁월한 ‘스승과 함께’ 멍에를 직접 메 보면 알게 됩니다. 탁월한 스승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하느님께 ‘순종’해 보면 몸소 체험되는 진실입니다. 탁월한 스승처럼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고, 헌신’해 보면 알게 되는 진실입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에서는(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 경험 많고 힘 센 소와 그 보다 못한 소에게 함께 멍에를 메어 한 조가 되어 밭을 경작하게 했습니다. 두 마리가 한 조가 되어 일할 때는 ‘겨릿소’라 하고, 한 마리가 일할 때는 ‘호릿소’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함께 멍에를 메고 있기에 경험 많고 힘세 소가 그 보다 못한 소를 배움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괴로운 진짜 이유는 제자라면서도 스승의 마음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라면서도 스승과 함께 멍에를 메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자기를 버리기보다 고집스럽게 자기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종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주도적으로 헌신하기보다 마지못해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역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시면서 ‘짐’이 없는 삶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져야 할 짐들은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짐들’에 둘러싸인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 마음을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그 ‘짐들’을 기꺼이 질 수 있도록 ‘마음을 지지’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 ‘마음이 변화되도록 깨우침’을 주십니다. 정말이지 마음이 바뀌면, 우리가 관계하는 짐의 무게는 달라집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면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우리는 불평 없이 짐을 집니다. 내가 바뀌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우리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짐 때문에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짐을 잘 아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인생에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사명의 짐’, 즉 ‘하느님 나라와 의’가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33). 그 짐을 기꺼이 짊어지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나머지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교가 복음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고 있던 어떤 짐을 아예 없애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짐’ 말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창세기》를 묵상하며 ‘충직한 마음’으로 자신의 ‘마지막 사명’을 완수하고 ‘쉼’을 찾은 지혜로운 노인과 함께 걸었습니다.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결정을 내린 ‘치유자 리브가’의 ‘아름답고, 지혜롭고, 용기 있는 마음’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 ‘혼사’ 이야기에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발견해냈습니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혼사’(婚事) 이야기는 ‘교회인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풍부한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의 결혼노래’인 《시편》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가 누릴 영광을 살펴보았습니다. 《로마서》를 묵상하며 자신을 ‘구속’하던 마음의 문제를 예수님 안에서 통합해간 사도 바울로의 진솔한 고백을 들었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 나라 운동에 헌신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상황에 굴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십니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께 받은 자신의 ‘전권’을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상속 받을 하느님 나라 일을 함께하자고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함께 순종과 섬김과 헌신의 멍에를 메자고 초대하십니다. 함께 멍에를 메고 배우면 그 많은 짐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쉼’(영원한 나라)을 찾게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마음에서 출발했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아가는 일이 제자에게는 가장 소중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는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일이 별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면 그런 마음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세상에 ‘구원’을 가져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야말로 자신을 제한하는 ‘구속’이자 ‘무거운 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어제의 나보다 오늘 더 온유하고, 겸손해졌습니까? 나는 어제보다 오늘 예수님 마음을 닮은 제자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은 내 마음을 바꾸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은 내 기준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마음은 결국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마음의 반영입니다. 마음의 세계가 밖으로 투사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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