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28. 연중 1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2:1-14
  • 시편 – 13
  • 2독서 – 로마 6:12-23
  • 복음서 – 마태 10:40-42

연중 1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영원한 생명, 우리 존재와 행동의 근거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야기’입니다. 흔히 ‘엘로힘’ 문서(모세오경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가 아닌 ‘엘로힘’(Elohim)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붙여진 문서 가설)에 속하는 ‘아브라함의 제사’라고 불립니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또 묵상할 주제들을 제공해 주는 좀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여러 층으로 겹쳐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그 일이 일어난 장소라 말해지는 ‘모리야 산’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가 ‘신성하게 여기는 곳’입니다. 이 세 종교 전통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벌써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의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는 ‘구약의 골고타(갈보리) 사건’이라 부릅니다. 그들 뿐 아니라 오래도록 유명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천재적인 ‘영감’(靈感)으로 기록된 문자 너머의 그 오묘한 찰나(刹那)를 포착해 냈습니다. 그들 중에서 ‘빛과 어둠의 화가’로 알려진 ‘렘브란트’의 작품은 단연 으뜸입니다. 그는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이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큰 그림으로 보면 그는 아브라함의 눈물까지 잡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너무나 ‘극적’(劇的)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 손꼽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온 아브라함 삶의 최정점(climax)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우리 뿐 아니라 《야고보서》 기자도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믿음’에 주목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 야고 2:21-22

《야고보서》의 해석처럼 대부분의 신자들은 ‘아브라함의 행동’에 초점을 맞춥니다. ‘순종’의 ‘궁극적 실증’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보인 그의 ‘행동하는 믿음’에 감동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봅시다. 정말 이 이야기가 감동스러운가요? 이야기의 초점을 ‘아브라함의 행동’에 맞추다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믿음’을 ‘실증’하기 위해 ‘자식을 제물로 희생하는 일’은 결코 찬양받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요구하시는 ‘반(反)윤리적인 하느님’을 우리가 믿는 ‘사랑의 하느님’이라 부르기에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삼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이야기가 말하려는 진짜 초점은 ‘아브라함의 행동’보다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말씀 나눔이 좀 길겁니다. 특히 1독서 《창세기》에 대한 나눔이 길겁니다. 그 ‘이야기의 초점’을 찾는 일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고맙게도 복음이야기는 짧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간직한 ‘믿음의 위대성’을 《야고보서》 기자와 달리 다른 데서 찾은 사람이 이미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의인론’(義認論)의 가장 중요한 출처인 《로마서》에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성서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로마 4:3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 로마 4:18-21

그는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믿음’이 보여준 ‘위대성’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의 제사’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 아들을 기꺼이 봉헌했던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믿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많은 나이에도 아브라함이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가 간직한 믿음의 위대성을 ‘아브라함의 제사’ 보다 더 앞으로 가져간 셈입니다(로마 4:1-12; 갈라 3:6-9).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이 보인 ‘극단적인 충성과 열정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그를 부르시어 ‘언약’(言約)을 주신 ‘은총의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언약’(言約)을 이루어 가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로는 인간에게 ‘제물’(祭物)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로도 ‘인신공희’(人身供犧)로 비쳐질 수 있는 ‘아브라함 제사’ 이야기를 불편하게 여겼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결정적인 기초들을 바울로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에게는 미안하지만(야고보서 기자가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은 ‘인간의 극단적인 충성과 열정적인 행동’에 주목하던 눈을 잠시 거두겠습니다. ‘구원의 언약’을 주신 하느님께서 그것을 끝까지 이루어 가실 줄 ‘믿었던 아브라함의 신앙’에 더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다가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더 초점하여 묵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그 땅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후손을 선사하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그 ‘언약’(言約)을 ‘믿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떠났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사악은 그에게 있어서 ‘미래’였습니다. 늙어간다는 것이 아쉬울 뿐 모든 일이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은 모를 일입니다. ‘브엘세바’에 거주하던 어느 날 밤, 그는 갑작스레 ‘하느님이 원하시는 한 가지’를 듣습니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 주는 산에 올라 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 창세 22:2

청천벽력(靑天霹靂)입니다. 그 ‘한 가지’는 그가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자신의 미래’였습니다. 그에게 주신 ‘약속의 선물’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달라는 요구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주신 것을 가지고 ‘예배하라’는 요구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미래를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인생 최대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한 가지’의 성격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고 자기 명의(名義)로 등록하는 일처럼, 우리의 권리 주장에 의해 보장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 ‘한 가지’, 즉 ‘약속의 선물’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절대 자유’, ‘절대 의지’, ‘절대 주권’에 근거해 ‘먼저’ 주어진 ‘은총의 선물’입니다. 시작과 진행과 마지막마저도 ‘하느님께만’ 권리 주장이 있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선물’, 즉 ‘은총의 선물’과 결코 분리될 없는 관계입니다.

본문에 사용된 ‘사랑하다’(아하브)는 동사는 《창세기》에 기록된 ‘사랑’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언급입니다. 그 언급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이 점은 인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책인 《성경》 전체의 진리와 연결됩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외아들의 희생봉헌’이어야 한다는 점은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만듭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그렇게 분부하신 이유는 ‘시험’(נִסָּ֖ה, test)해 보시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시험의 주체’는 하느님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시험하지 않으신다.”(야고 1:13)고 했는데, 《창세기》는 그렇게 밝혔습니다. 예수님도 ‘주의기도’에서 시험의 주체는 항상 하느님이심을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13).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하느님께서 갑자기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셔야 했습니까? 그 ‘약속의 선물’을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 인정하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셔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무엇이 그에게 ‘하느님의 시험’을 불러온 것입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받는 ‘시험’은 항상 그가 살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온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한 평생을 보낸 고대근동은 ‘신(神)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모든 일을 ‘신(神)들’이 주관한다.’고 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신’(神)에 대한 ‘충성’이 개인뿐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전쟁도 ‘신(神)들의 싸움’이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정착한 ‘가나안’ 지역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자기 민족의 ‘신’을 섬겼습니다. <구약성경>도 그 땅의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적’으로 자기 민족의 신(바알, 아세라, 몰렉,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을 섬겼는지 기록할 정도입니다(레위 18:21; 20:1-2; 신명 18:10; 1열왕 11:5,7,33; 18:28; 2열왕 3:27; 16:3; 23:4-13; 예레 7:31; 32:35; 에제 16:20-21). 대표적인 행위가 몸에 상처를 내는 ‘자기상해’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人身供犧)입니다. 그야말로 악랄한 제사법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보일만큼 자신들의 신앙을 ‘열광적’으로 ‘신’(神)에게 표출하던 환경에 아브라함은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 같지만, 생각보다 훨씬 ‘환경’에 휘둘리는 존재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상황에 지배당하는 존재’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환경에 노출되다보니 아브라함은 자신과 그들의 신앙을 ‘비교’해 보곤 했습니다. ‘자기 신앙’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섬기는 ‘신’과 자신이 섬기는 ‘하느님’을 비교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사실 그가 섬기는 하느님은 ‘열광적인 신앙 행위’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부르시더니 삶의 터전을 떠나라 하시며 ‘땅과 후손의 복’을 ‘언약’(言約)하신 하느님입니다(창세 12:1-4). 그는 ‘하느님의 언약’(言約)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출발할 정도로 ‘믿음’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계약’을 맺기 위해 요구하신 것은 ‘가축 제물’(祭物) 정도였습니다(창세 15:9). 하기야 몸에 상처를 내는 ‘할례’를 요구하신 적이 있기는 합니다(창세 17:10장). 하지만 ‘할례’는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열광주의’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연은 있었어도 하느님께서 마침내 ‘약속을 성취’하실 정도로 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이만하면 ‘믿음’으로 많은 성취를 이룬 축복된 인생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아브라함의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스스로가 그토록 자신(自信)하던 ‘믿음’이었습니다.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열광적인 믿음과 ‘비교’할 때 자신의 믿음은 ‘열정’도 없고, ‘초라한 것’ 같은 ‘회의’(懷疑)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부르신 야훼 하느님께서 그 신들처럼 ‘자신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해 오신다면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본래 자신이 관계하는 것과의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런 법입니다. 할 수 있다는 ‘신앙의 자아’와 할 수 없다는 ‘불신앙의 자아’가 마음에서 투쟁했습니다. 《야고보서》 말씀처럼 그는 점점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야고 1:14)

그 때만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마음의 투쟁’, 즉 ‘신앙적 질문과 고민’이 그에게 ‘하느님의 시험’을 가져온 ‘궁극적인 실체’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 생각까지 보신다’(시편 33:15; 잠언 21:2; 1데살 2:4)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고민과 내적투쟁’이 그로 하여금 전 존재를 던져야 하는 ‘위대한 모험’으로 들어서게 만들었던 셈입니다.

‘그 밤’에, 자기 고민(내적투쟁)처럼 하느님께서 정말로 자신을 ‘시험’해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 있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어서 말씀하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준비되어 있다”는 응답이었지만 이어지는 하느님의 ‘특별한 요구’는 단 한 순간에 그를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통의 눈물)에 빠뜨렸습니다. 자신의 후계자요, 상속자요, 미래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약성경> 곳곳에서 그토록 싫어하신다고 경고하시던 ‘인신공희’(人身供犧)가 그에게 ‘현실’로 다가왔습니다(레위 18:21; 20:1-2; 신명 18:10; 1열왕 11:5,7,33; 18:28; 2열왕 3:27; 16:3; 23:4-13; 예레 7:31; 32:35; 에제 16:20-21). ‘번제’(燔祭)는 불로 태워서 제물을 바치는 제사입니다(레위 1:3-9). 다른 것도 아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이 번제물이어야만 합니다.

《창세기》를 잘 살펴보면, 한 인간의 ‘믿음’과 ‘충실성 알아보려는 하느님의 ‘교육적인 시험’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전에도 아브라함은 시험들을 거쳐 왔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너 자신을 위해) 가거라. – 창세 12:1

이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는 이미 첫 번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시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분명 그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시험’ 이야기는 그 외에도 연달아 등장합니다. 한 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이집트 땅에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창세 12:10-20). 하느님께서 지시하지도 않았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가나안을 떠났습니다. 이 일은 그가 통과하지 못한 ‘시험’ 중 하나였습니다. 또 세 명의 신적 존재들이 아브라함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창세 18:1-15). 이것도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사라는 ‘웃음’으로써 ‘불신앙’을 보였지만, 아브라함은 ‘침묵’과 ‘경청’으로써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제사’가 이전 시험들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이 분부가 ‘시험’이라는 말로 명백히 제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의도’와 ‘목적’과 ‘계획’을 갖고 하시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창세기》 기자는 하느님께서 정말로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첫머리’부터 명백히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고대근동의 신들처럼 ‘사람 제물’을 원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험’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임을 알 길이 없는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을 파괴할 정도로 냉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더욱이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신앙과 비교하던 ‘자기 내면의 신앙적 투쟁과 질문’이 그런 ‘시험’을 불러왔을 줄은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교훈하듯이 마음에 품는 생각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야고 1:13-14).

아브라함은 ‘밤’에 이 명령을 들었습니다. ‘밤’이 갖는 상징은 ‘혼돈’, ‘무질서’, ‘어둠’, ‘고통’입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내면’, 즉 그의 ‘감정’에 대해 아무런 묘사도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밤’이라는 말 속에 그의 모든 ‘감정’이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과는 ‘모순’이라면서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선물’로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와 가져가시겠다는 것인지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분명 ‘하느님이 주신 약속을 죽이라’는 명령이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라’는 명령인데도 말입니다.

더욱이 소돔과 고모라를 대신해서 끈질기게 빌던 그입니다(창세 18:1-33). 그랬던 그가 “아들 대신 자신이 제물이 되겠다.”고 어째서 야곱처럼 하느님과 씨름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고민’하던 대로 올 것이 왔기 때문일까요? 인간의 양심을 거스르는 ‘하느님의 반(反)윤리적인 명령’을 과연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가 믿어온 하느님도 고대근동의 신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까? 이 중대한 신앙적 투쟁과 질문의 답을 그는 어디서 얻어야 할까요?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전 존재를 건 ‘위대한 신앙의 승부’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마 밤을 꼬박 새웠을 것입니다. 종들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나귀에게 안장을 얹은 다음, 장작을 쪼갭니다. 그 일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해냅니다. 하느님과 연결된 일이기에 그 일들은 하찮지 않고 거룩합니다. 그 때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쪼갠 장작으로 사랑하는 외아들을 번제로 드릴 것입니다. ‘채비’(差備)를 마친 아브라함은 두 종과 아들 이사악과 함께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납니다.”

“서둘러 떠났다”는 말은 ‘이중적’입니다. 우선 ‘순종’하려는 그의 ‘의지’(믿음)와 ‘결단’이 그만큼 ‘확고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전 존재를 던져 자신을 차지해 온 그 ‘신앙적 투쟁과 질문의 대답’을 얻을 참입니다. 그는 ‘사라’와 의논하거나 조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순종’은 우리의 ‘머리’(이성)로 동의되지 않고, ‘가슴’(감정)으로 공감되지 않는다하더라도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위대한 본보기’입니다. 그는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믿음’으로 서둘러 떠났던 인물입니다. 그의 비장한 태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절대 주권자이시고, 아브라함은 단지 따라야할 인간일 뿐입니다.

다른 한편 “서둘러 떠났다”는 행동 묘사는 그의 ‘정신적 동요’(動搖)가 너무나 심했다는 ‘반증’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야기에는 아브라함의 감정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감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 전 존재를 건 ‘신앙의 결단과 승부’에 직면했는데 어떻게 감정이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감정의 동요’가 너무나 심하게 차오르면 일단 추억의 장소부터 얼른 피하고픈 것이 인간의 ‘성정’(性情)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감정의 동요’를 수십 년 전에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들었던 ‘이스마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창세 22:8-14).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면서 아브라함은 ‘간접 죽음’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오늘처럼 ‘끔찍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는 ‘죽음 같은 이별’, 즉 ‘내려놓기’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 일을 통해서 아마 그를 훈련시키신 셈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목적지인 ‘모리야 땅’에 다다릅니다. ‘사흘’이면 긴 시간입니다. 얼마든지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간입니다. 그 사흘 동안의 아브라함의 심정이 오늘 《시편》으로 노래한 <13편>에 녹아져 있습니다(1-2절). 위대한 ‘신앙의 승부’를 결단했지만, 눌러도 솟아오르려는 물속의 ‘비치볼’처럼 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귀를 타고가면서 수도 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탄원’했습니다. ‘밤’은 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하느님은 무수히 빛나는 별빛 아래서 그에게 자손들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 15:5). 촘촘히 빛나는 별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별빛을 받으며 쓰라리고 아픈 마음을 토로합니다. ‘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그 중대한 ‘신앙의 질문’을 던지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침묵하십니다. 밤낮없이 그 사흘 동안 수도 없이 하느님께 ‘속으로’ 묻고 물으며, 하느님과 ‘투쟁’합니다. 자신이 믿어온 하느님이 정말 고대근동의 신들과 다를 바 없는 분인지 그 ‘신앙적 질문’을 던지며 절규했습니다. 정말이지 ‘모리야 땅’을 향해 가던 그 참혹한 사흘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사흘’ 동안 ‘이사악’과 어떤 대화와 감정 교류가 있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아무런 단서도 없다는 점이 읽는 이를 더 깊은 ‘상념’(想念)에 잠기게 합니다. 어떤 감정과 대화들로 이 장면을 채우고 싶습니까? ‘렘브란트’의 판화 <아브라함의 제사>처럼, 슬픔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에게 하느님의 명령을 전달했을까요? 무엇을 채워 넣든 그것은 우리 내면세계의 반영이자 투사입니다. 중요한 진실은 아브라함이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그 ‘죽음 같은 참혹한 시련의 사흘’을 온전히 견디어냈다는 점입니다.

‘일러주신 그 땅’은 이 위대한 이야기를 위해 하느님께서 신중하게 고르신 곳입니다. 은혜로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모리야 땅’을 말씀 나눔 첫머리에 언급한 것처럼, ‘예루살렘’과 동일시합니다. 실제로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 ‘3일’ 정도 거리(약 75km)에 있습니다. 또 ‘일러 주신 산’을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성전산’과 동일시합니다(2역대 3:1). 그러니까 ‘희생’이 일어나야 할 ‘산’은 솔로몬 이후 유대인들이(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온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희생’이 일어나야 할 ‘산’을 예루살렘 성전과 ‘동일시’하는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성전 근처에 있는 ‘언덕’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신 ‘골고타(갈보리) 언덕’ 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敍事)지만 ‘그 땅과 산’(언덕)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그 곳이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산’이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러주었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특별히 ‘구별했다’는 뜻입니다. ‘그 산’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기 위해 ‘구별하신 장소’, 즉 ‘성소’(聖所)입니다(창세 22:15-18).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그 ‘산’에서 시험하시는 하느님의 ‘신성한 의지’와 ‘목적’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창세 22:14).

따라서 그 ‘산’은 지상의 어떤 곳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섭니다. 아브라함 같은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고 도달해야만 하는 ‘영적인 성소’나 ‘하느님의 의지’와 ‘목적’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나타내는 ‘상징’(은유)입니다. 그 ‘영적인 성소’에서, ‘특별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과연 자신이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서 선택하실만한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결코 아무나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드리고 오겠다. – 창세 22:5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는 종들에게 그럴 듯한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심하게 들린다면 ‘핑계’라고 해 두겠습니다. 단 둘이 있을 때만 자신의 ‘의도’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 했던 ‘이전의 거짓말’이나 ‘핑계들’과는 차원이 많이 다릅니다(창세 12:10-20; 20:11-16).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의 말은 일종의 ‘예언’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가 말한 대로 ‘그들에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거짓말’(핑계)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말’에 가깝습니다. 정말 아브라함의 말은 ‘믿음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나왔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히브 11:17-19). 아브라함은 이사악이 하느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아들임을 확신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번제로 바치더라도 하느님께서 죽었던 아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복’(창세 15:4-5; 17:2-8)이 ‘이사악’을 통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21:12). 말하자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갖고 있었고,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웁니다. ‘약속의 아들’은 기꺼이 장작을 집니다.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떠올릴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사악처럼 기꺼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자신이 희생당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사악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될 것을 몰랐다는 점이고, 예수님은 알면서도 그렇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불씨’와 ‘칼’을 챙겨듭니다. 종들과 헤어지려는 순간, 이사악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이 간결한 물음을 통해 그들이 가려는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 창세 22:7

우리의 연민을 자아내는 너무나 순진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곤혹스럽습니다. 아버지는 이 질문을 ‘회피’합니다. 참고로 이슬람교 신자들은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제단에 올린 아들을 ‘이스마엘’이라고 믿습니다.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 창세 22:8

그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이제 곧 자식의 목을 따야 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목을 따서 바치고픈 심정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전혀 희망을 예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비록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부활신앙’을 간직한 ‘믿음’의 사람으로 해석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만일 어떤 희망을 예견하고서 아브라함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온전한 시험’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처럼,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의 예언’을 한 셈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인 ‘자신은 불가능’하지만 ‘이사악’이 존재하도록 ‘생명’을 주신 하느님, 그의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께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엘로힘 이레)는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께 드릴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는 그의 순진한 물음은 이사악만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 때까지 계속해서 물어져 왔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 ‘어린 양’을 제공하실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도 가장 긴장감 넘치는 장면에 도달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여기서부터의 상황은 느린 속도로 ‘상세히’ 그의 동작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습니다. 그 위에 장작을 얹어 놓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봤다면 ‘캠프파이어’를 준비하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그 다음 이사악을 묶습니다. 그를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습니다. 묶을 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제단에 데려갔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에 대한 ‘이사악’의 ‘위대한 복종’이 고요히 흐를 뿐입니다.

‘이사악’은 장작을 지고 올라갔으니 어린이는 아닙니다. 본문에 쓰인 히브리어 ‘나아르’는 어린 아이란 뜻도 있지만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건장한 청년’(young man)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그렇다면 실제 나이는 20살~30살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몸부림쳤다면 아브라함이 제압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 걸어오던 그 ‘사흘’ 동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아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결심’했을까요? 물론 우리의 경전인 《성경》에는 없지만,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 제 37장 사파트 102절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꾸란>처럼 우리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야기의 초점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사악’에게로 급속하게 옮겨집니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희생강요’가 아니라 ‘이사악의 결단과 순종’으로 말입니다. 그럴 경우 이사악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예표(豫表)로 급부상합니다. 도대체 그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상상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아브라함은 급하게 손을 뻗쳐 칼을 잡습니다. 정말로 실행에 옮길 참입니다. 하늘도 땅도 그만 숨을 멈춥니다. 칼이 허공에 올라가서 내려오려는 그 ‘찰나’에 하느님의 천사, 즉 하느님이 큰 소리로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창세 22:11

두 번씩이나 불렀다는 것은 하느님마저 당황하시고 놀라실 정도로 몹시 다급했다는 뜻입니다. 진짜로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는 하느님도 예상치 못하신 걸까요? 오늘날도 유대교 랍비들은 이 대목을 읽을 때 ‘강한 악센트’를 넣어 급하게 읽습니다. ‘렘브란트’는 하느님의 천사가 아브라함 손을 붙잡은 것으로 그 다급한 목소리를 대신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사흘 동안 던졌던 ‘신앙적 질문’이 응답되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아라. – 창세 22:12a,b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고통의 눈물에 평화, 질서, 빛, 환희가 찾아드는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생명과 구원의 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인신공희’(人身供犧)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에 ‘다급히’ 개입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고대근동 사람들이 숭배하는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즐기는 ‘신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 절정의 순간에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그가 믿어온, 우리가 믿어온 ‘하느님의 참 모습’입니다. 이 선포야말로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신 일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악랄하고 고약한 풍속’(관습)으로부터(레위 18:21; 20:1-2; 신명 18:10; 1열왕 11:5,7,33; 18:28; 2열왕 3:27; 16:3; 23:4-13; 예레 7:31; 32:35; 에제 16:20-21) 이스라엘을 완전히 ‘단절’시키려는 하느님의 위대한 투쟁이 ‘아브라함의 제사’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고대근동의 신들처럼,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그런 ‘열광적이고 극단적인 종교적 헌신’을 요구하는 ‘신’(神)이 결코 아닙니다.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말 대신에 그 어떤 ‘제물’을 넣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당신이 그런 분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해 그 절체절명의 자리에 하느님은 다급하게 ‘현현’(顯現)하셨고, 아브라함을 만나주셨습니다. ‘사무엘’도 이 하느님을 교훈한 바 있습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 – 1사무 15:22

예언자 ‘호세아’도 이렇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 다오. – 호세 6:6

이 ‘통찰’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의 제사’ 이야기의 본래 초점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 ‘순종의 궁극적 실증’을 보인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믿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퍼져있던 그 ‘악랄하고 역겨운 관습’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직접 ‘종식’(終熄)시켰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은총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기자가 ‘아브라함의 제사’를 그의 ‘믿음’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climax)로 해석하고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해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시험에 통과’했음을 선포하십니다.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 창세 22:12c,d

그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약속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약속을 성취하시고 시험해 보실만한 사람답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한 신앙의 인물로 ‘자기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시험에 통과했다는 ‘자기 증명’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죽었던 아들이 부활한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던 그 사흘 전, 이사악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죽었습니다. 그 죽었던 아들이 하느님의 개입으로 사흘 후에 살아났습니다. 분명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사악은 살아났습니다. 이리하여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임이 다시 증명되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이사악이 살아난 이 장면에서 결정적인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 로마 8:32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님, 즉 하느님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 ‘희생’을 통해 2독서 《로마서》에서 교훈하듯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선물’하셨습니다(로마 6:23). 그 사랑의 사건이 ‘십자가’라고 사도 바울로는 교훈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제사> 그림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예표라고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들은 후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을 발견합니다. 연민을 자아냈던 이사악의 순진한 질문이 대답되는 순간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느님께서 하갈의 ‘눈을 열어 샘’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창세 21:19). 오늘은 아브라함의 ‘눈을 열어 수양’을 보게 해 주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의 눈이 열려 하느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였다, 깨달았다, 만났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닫혔던 눈이 열려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아가는 여정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아들에게 들려주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창세 22:8). 육신의 아버지인 자신은 불가능하지만 이사악이 존재하도록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엘로힘 이레)는 “하느님이 손수 마련하신다.”(엘로힘 이레)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는 ‘곧 가서’ 수양을 잡아다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립니다. 그가 ‘곧 갔다’라는 표현 속에서 아브라함의 ‘되찾은 기쁨’, 즉 ‘되찾은 미래’를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사악’ 대신 희생된 그 ‘수양’을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을 뭐라 이름 붙입니까? 그는 지난 사흘 동안의 쓰라림을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곳을 ‘시련의 산’이라든지, ‘고뇌의 산’이라든지, ‘복종의 산’이라 이름 붙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편>처럼 자신을 건져주신 하느님, 자신에게 은혜 베푸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름을 짓습니다. ‘야훼이레’(Yahweh-yireh). 이것이 아브라함이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만나고 체험한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 즉 ‘절대주권(절대자유, 절대의지)을 가지시고 인간과 사랑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의 신성한 ’의지’와 ‘목적’에 대한 표현입니다. 후대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라 부릅니다. 어쩌면 그 이름은 ‘서사’(敍事)를 좋아하는 이들이 주장하듯이 하느님께서 이 산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마련’해 주실 ‘궁극적 희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견하고 지었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레’라는 동사는 ‘보다’(see)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고, ‘나타나다’(appear), ‘미리 준비하다’. ‘공급하다’(provide)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본문에서는 ‘야훼이레’가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지 엄밀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만일 ‘이레’를 ‘보다’로 해석한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보셨다는 뜻일까요? 아브라함(이사악)의 순종을 보셨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아브라함(이사악)이 큰 곤경에 빠져 있음을 보셨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참된 제물’(이사악일 수도 있고, 숫양일 수도 있습니다)을 바라보셨다는 뜻일까요? 이것들도 아니라면 인간(아브라함, 이사악)에게 필요한 어떤 것(생명, 구원)을 보셨다는 뜻일까요?

본문이 엄밀하게 지칭하지 않으니 마음대로 상상력을 펼치셔도 됩니다. 어디에 주목하든 우리를 아브라함이 깨달은 샘 깊은 묵상으로 이끕니다. 영어권 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인 NRSV는 ‘야훼이레’를 “The Lord will provide.”(의역: 주님께서 스스로 제물을 봐 놓으셨다)로 옮기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하다’, ‘공급하다’에 주목한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나타나다’(appear)에 주목하여 “주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총의 사건의 핵심은 분명 하느님의 ‘자기 현현’(顯現, theophany)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야훼이레’라 명명한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곳은 이제 평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현현(顯現, theophany)하신 장소’로 성별됩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과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그곳은 ‘제사 성소’(聖所)가 됩니다. 이렇게 전체 이야기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충성(믿음과 순종)을 칭찬하시며 그와 맺은 계약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창세 22:16-18). 다시 말해 ‘하느님의 현현(顯現)’, ‘제물의 봉헌’, ‘제사 장소의 이름 부여’로 전체 이야기는 종결됩니다.

이제 지금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탐구해 온 ‘아브라함 제사’ 이야기를 끝낼 때입니다. 질문해 보겠습니다. 이 전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사악이 위대한 믿음의 열정과 순종을 보였으니 우리도 본 받자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기대라는 이야기입니까? 사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면 은근히 그런 ‘압박’을 경험합니다. 그러다 보니 ‘복음’처럼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해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면 전체 이야기의 초점을 빗겨 갔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위대한 믿음의 열정과 순종을 칭송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느님이 어떤 ‘신’(神)인가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묵상할 때 늘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관계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기에 하느님을 알게(만나게) 되면 당연히 마주 서 있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전체 이야기는 하느님을 어떤 ‘신’(神)으로 증언합니까? ‘하느님’으로 증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현현’(顯現)하시어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은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일방적인 은총으로 그를 부르시어 약속을 주시는 일에서든, 약속을 성취하시는 일에서든, 그 약속의 선물을 바치라고 시험을 하시는 일에서든 말입니다. 언제나 ‘절대자유’, ‘절대의지’,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느님’입니다. 아무도 하느님께 오늘 《시편》처럼 “왜 제게 이렇게 하시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빼앗으시는데 누가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며, 왜 이러시느냐? 하고 항거할 수 있겠는가? – 욥기 9:12

땅 위에 사는 사람이 다 무엇이냐? 하늘 군대도 마음대로 부리시는데 하물며 땅 위에 사는 사람이랴! 누가 감히 그를 붙잡고 왜 이러시냐고 항의할 수 있으랴? – 다니 4:32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로마 9:20

아브라함이 철저히 깨닫고 인정해야할 가장 중요한 진실이 이 점(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느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은 바로 이 점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이 ‘시험’을 완전히 이수했기에 더 이상 이러한 종류의 ‘시험’을 불러올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마치 중학교를 졸업한 대학생이 다시 중학교 과정을 배우러 입학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神, God)이시고, 인간은 ‘인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약속의 아들’입니다. 하느님이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모든 것이 그 아들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미래가 보증되어 있는 ‘선물’입니다. 그가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죽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모든 약속, 즉 미래가 사라지는 일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은총의 계약이 파기되는 셈입니다. 아브라함은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왜 제게 이러십니까?”, “왜 저를 이런 곤경에 처하게 만드십니까?”라고 당연히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가당착’(자기모순)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가 시작하신 약속, 즉 구원을 스스로가 제거하는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항변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언제나 ‘절대주권의 하느님’이십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점을 새겨두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진짜 새겨두어야 할 복음의 진실은 아직 완전히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깨달은 ‘야훼이레’에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느님의 참된 모습은 ‘은총과 사랑을 베푸시는 구원의 하느님’이라는 진실입니다. ‘절대주권’(절대자유, 절대의지)을 가지시고 인간과 ‘사랑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의 신성한 ’의지’와 ‘목적’이 ‘아브라함 제사’ 이야기의 참된 핵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막다른 상황에서도 “손수 구원을 마련하시는” ‘가능성의 하느님’이심을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인신공희’(人身供犧)를 반기는 분이 아니라 ‘아들’을 살리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들’ 대신 당신이 마련하신 ‘수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시험’하시지만 종국에는 가련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은총의 하느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생명과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종국에는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은총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제사’ 후에 ‘부자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창세기》는 이 사건 후에 아브라함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창세 22:19; 23:1; 24:62). 혹시 아브라함이 귀가 후에 관계회복에 실패했던 것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같은 시공간 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하더라도 아들 입장에서는 자신을 ‘인신공희’(人身供犧)하려던 무정한 아버지입니다. 아니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것을 ‘종교학’이나 ‘심리학’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일종의 ‘통과의례’ 후의 모습으로 봐야할까요?

만일 이사악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스로’ 제물이 된 ‘순종의 사건’이라면, 그는 ‘폭력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그는 일종의 ‘성인식’과 같은 ‘통과의례’를 잘 거쳐서 더 이상 ‘철부지 늦둥이’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존경할만한 ‘신앙의 족장’(族長)으로 성장해 간 셈입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의 제사’가 이사악에게는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였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모든 사람을 위한 단 한번의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로 가기 위한 자기 봉헌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나 긴 1독서 《창세기》 묵상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체 이야기’의 전부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전체 이야기 속에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찾아내도록 숨겨놓은 보화가 여전히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말씀 나눔 첫머리에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또 묵상할 주제들을 제공해 주는 좀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들이 여러 층으로 겹쳐있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보화 중 하나는 ‘이사악’이 품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모두의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아서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자식을 도구로 해서 자신의 믿음과 순종을 칭송받고 싶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처럼 잔인한 아버지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번제물’로 제단에 올라간 이사악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처럼 동일한 무게로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즐기는 무자비한 분으로 하느님을 몰아가게 됩니다. 번제물의 자리에서 놓임을 받은 이사악에게 동일한 조명을 비추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기껏해야 아들에 대한 ‘폭력적인 학대’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느님은 ‘인신공희’(人身供犧)를 절대적으로 금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레위 18:21; 20:1-2; 신명 18:10; 1열왕 11:5,7,33; 18:28; 2열왕 3:27; 16:3; 23:4-13; 예레 7:31; 32:35; 에제 16:20-21).

이사악은 어떤 보화를 품고 있습니까? 그는 자신의 ‘기원’(起源. 시작)을 하느님께 두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 점은 지난 연중 11주일 설교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창세 18:14) 하느님의 구원의지의 ‘전능성’을 보여준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또한 이 구절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인식이 담겨있다고도 말씀 드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작이(존재가) 하느님의 ‘전능성’과 ‘창조력’에 힘입고 있음을 후손들에게 교훈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더욱이 그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살아났습니다. 하느님이 계속 침묵하셨다면 그는 죽었습니다. 오늘 《시편》처럼 하느님이 잊지 않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시편 13:5). 외면하지 않고 굽어 살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이사악이었다면 앞으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우리는 이사악에게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제단 위에 놓여지고, 하느님으로부터만 생명을 돌려받은 이사악에게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2독서 《로마서》를 떠올려보십시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지 않고 계속 침묵하셨다면 우리는 ‘죄의 종’으로 살다 영원히 멸망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자신을 제단 위에 놓으심으로써 우리는 ‘죄의 종’에서 풀려났고, ‘새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덕택에 하느님의 ‘절대자유’, ‘절대의지’, ‘절대주권’으로부터 오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우리에게 그 하느님을 드러내주는 도구들입니다. 특별히 ‘렘브란트’의 작품에서처럼, 내리 누리는 아버지의 손바닥에 얼굴이 가려져 뒤로 한껏 젖혀진 이사악의 그 하얀 목줄기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절대자유’, ‘절대의지’, ‘절대주권’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탁월한 ‘영감’(靈感)이었다고 저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모르는 이 시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존재의 기원’과 ‘근거’를 인간 스스로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유로운 구원 의지’로 이사악을 살게 하셨던 ‘하느님의 절대주권’에서 자기 존재의 기원과 근거를 찾습니다. ‘절대주권’(절대자유, 절대의지)을 가지시고 인간과 ‘사랑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의 신성한 ’의지’와 ‘목적’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행동의 이유’를 찾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점이 1독서 《창세기》의 전체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나 이사악이 위대한 믿음의 열정과 순종을 보였으니 “우리도 본받자”라고 강조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존재의 근거’가 하느님의 ‘절대자유’, ‘절대의지’, ‘절대주권’에 있음을 오늘 철저히 성찰하라는 데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행위를 발견하는 일보다 ‘생명과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이 이야기에서 발견할 때 언제나 ‘복음’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이의 기도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며,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로 연결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던 시인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시’(詩)를 지을 때 무엇이 시인의 영혼을 그토록 괴롭혔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시’의 단순 솔직함과 아름다움은 ‘시련의 시기’, 즉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하느님을 신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탄원’(1-2절), ‘호소’(3-4절), ‘확신’(5-6절)으로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도입부에서(1-2절) 시인은 ‘죽음의 골짜기’(시련, 환난)를 지나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탄원합니다. 그 영혼이 겪고 있던 고통의 실상이 질병인지, 아니면 원수들로부터 오는 박해나 위협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몸의 진(津)이 다 빠지고, 영혼이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래도 그가 의지할 분은 ‘자기 존재의 근거인 하느님’뿐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탄원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자신에게 하느님은 왜 이렇게 무관심하시고, 침묵하시느냐고 절망 속에서 탄원합니다.

중간 부분에서(3-4절) 시인은 자신이 정말 죽을 수도 있음을 ‘호소’합니다. 그가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악의에 찬 원수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고 ‘호소’합니다. 그 ‘호소’ 속에는 자기 존재의 근거이자, 자신을 도와주실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뢰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은 여전히 ‘자기 존재의 근거와 행동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에 소망을 걸고 있다는 ‘믿음의 호소’입니다.

마지막 부분(5-6절)은 자기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을 향한 확신의 노래입니다. 자신을 불러 은총으로 계약을 맺으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자기 삶에 ‘은혜’(보상)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순종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에 ‘보상’해(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자기 존재의 근거이신 절대 주권의 하느님과 신실히 교제하며 살아온 과거의 인생 체험 속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자신은 ‘하느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확신입니다. 마침내 절망이 기쁨으로, 고통이 환희로, 서글픈 탄원이 즐거운 노래로 바뀌고 있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던 영혼이 감사와 찬미의 언덕으로 끌어올려졌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죽음의 골짜기’라는 ‘시련(환란)의 시기’를 지납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고통의 때가 있습니다. “함께 하신다”는 하느님을 느낄 수 없어서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기도’입니다. 그 마음 그대로 하느님께 토로하십시오. 말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단지 ‘속’으로라도 기도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도하는 이의 고통을, 문제(신앙적 질문)를 자신께로 옮겨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내용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신앙적 질문, 고통)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해결하셔야 할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깊은 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이는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과 연결된 존재입니다.

2독서 《로마서》는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살라고 교훈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로마서》 본문을 통해 ‘세례성사’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세례성사’는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공공연한 ‘고백’이자 ‘표시’입니다. ‘세례의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킵니다. ‘세례의 믿음’은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키며, ‘새 생명’을 선물해 줍니다.

사도 바울로는 당시의 ‘노예제도’(인간사)를 가지고(로마 6:19) 이 모든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세례의 믿음’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자세히 교훈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세례의 믿음’은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 죄에서 해방된 ‘정의의 종’, ‘하느님의 종’으로 변화시킵니다(로마 6:13,18,22). 세례의 믿음으로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례의 믿음’은 우리를 ‘하느님의 소유’로 만드는 성사입니다.

이제 ‘세례성사’를 통해 ‘새 생명’(영원한 생명, 부활생명, 하느님 나라)을 얻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자유분방하게 살도록 죄에서 행방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지 않고 복음이야기에서 교훈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정의의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이 ‘감사’해서라도 마땅히 ‘빛’으로, ‘소금’으로, ‘생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하느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자신을 ‘바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지난 2주간 묵상한 ‘파견 설교’의 마지막입니다. 다른 <전례독서>에서 강조하듯이 우리 존재와 행동의 근거는 하느님이심을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모든 일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느님께 가 닿아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하느님과 연결된 거룩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 마태 10:40

《마태오복음》 10장 첫머리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신적 권능’을 선물로 주시어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십니다. 그들 권능의 근거는 스스로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존재의 권위’를 하느님이 파견하신 ‘자신의 권위’에까지 확장시킵니다. 심지어 ‘하느님 자신’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예수님은 신적 권능을 나누어 받은 사도(우리)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파견’하시면서 박해와 멸시와 조롱마저도 각오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 즉 그들(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생명과 구원과 은총의 하느님, 그들 존재의 근거이자, 절대주권자이신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0:30-31).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이 그들(우리)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파견과 당부는 오늘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요청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 마태 10:37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절대주권’, ‘절대자유’, ‘절대의지’에 대한 ‘믿음이 바로 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전체 그리스도교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면서 별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대다수의 ‘침묵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살던 ‘우주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서 있는 곳이(발밑이) 바로 ‘우주의 중심’입니다. 침묵하면 침묵하는 대로, 행동하면 행동하는 만큼, 우리 존재와 행동의 근거이신 하느님을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마다에서 이미 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해나 멸시나 조롱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충실한 이들은 반드시 ‘보상’(은혜,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그 ‘보상’이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부’나 ‘명예’, ‘권력’이나 ‘출세’,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보상은 ‘의인’에 대한 선물입니다(마태 10:41). 예언자도 옳은 사람도 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소유’가 된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기 존재와 행동의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아간 이들을 최후심판에서 ‘안다’라고 기억하시고 보상하실 것입니다(마태 25:31-40).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좋은 하느님 나라’를 일구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존재의 근거이신 하느님이 주시는 힘, 즉 ‘그리스도의 빛’을 이 세상의 어두운 곳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죽은 후에 천국 가는 ‘보상’이나 ‘선물’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좋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죽은 후에 구원 받을 ‘보상’이나 ‘선물’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 ‘지금 여기서’부터 이미 ‘구원’받은 사람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사악)이 보여주었듯이 ‘지금 여기서’부터 자기 ‘삶의 주인’이 오직 ‘사랑의 하느님’인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시편》 시인처럼 잠시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결코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기도’로 다시 일어나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행동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평화’가 들불처럼 타오르게 만들며,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이 ‘햇빛’처럼 퍼져나가는 그 ‘좋은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을 제물처럼 수단화하고, 기계처럼 부품화 하는 이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가 가르치듯이 무시해도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하느님과 연결된 존재임을 깨달아 가도록 세상을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하느님의 이유입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는 무엇입니까? 성찬례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우리 존재의 근거가 ‘절대자유’, ‘절대의지’, ‘절대주권’의 하느님임을 고백하고, 확인하며, 감사하는 모임이자 예배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과 은총을 마련하시고 베푸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이러한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생명과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이 세상에서 이 진실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삶이 그 ‘좋은 하느님 나라’에 속한 ‘제자의 삶’(제자도)입니다. 성찬례의 매 순서도 그 진실이 우리 모두의 행위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소유이자, 사랑의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이 존재의 진실이 바로 세워지고 실천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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