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21. 연중1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1:8-21
  • 시편 – 86:1-10,16-17
  • 2독서 – 로마 6:1-11
  • 복음서 – 마태 10:24-39

연중 1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억하시오, 세례 한 우리는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실린 <풀꽃 1>이란 ‘시’(詩)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몇 년 전에 성요한 신부님이 우리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이 ‘시’(詩)에 곡을 붙인 노래 선물을 전해 주었습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참 좋아했지요. 특별한 이름도 없이 그저 ‘풀꽃’이라 불린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존재 자체로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하느님은 풀꽃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고 보살피십니다. 특히 ‘엄마’는 그런 눈의 소유자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기’가 엄마를 그렇게 만듭니다.

누구나 엄마가 되면 ‘신’(神)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처럼 곱고, 세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엄마는 젖먹이를 품에 안고 자장자장 노래합니다. 젖먹이가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 엄마는 ‘배냇머리’를 셀 정도입니다. 걱정도, 슬픈 눈물도 없는 좋은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엄마는 기도합니다. 한 때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빛나는 존재였고, 엄마의 그런 기도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잠시 유아(幼兒)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머니의 ‘수태고지’(태몽)는 무엇이었다고 하던가요? 몇 살 때 젖을 떼셨다고 들었습니까? 초등학교 시절 가장 걱정스럽고 슬프던 날은 언제였습니까?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저는 늦게야 젖을 뗐다고 합니다. 아마 떼쓰는 저 때문에 ‘쓴 약’을 발랐을지도 모릅니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걱정스럽고 슬프던 날은 부모님이 ‘불화’(不和)하신 날입니다. 그런 날이면 이유가 저 때문인 것 같아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어딘가 진짜 부모님이 계시다가 데리러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동경(憧憬)을 갖기도 했습니다. 자녀 앞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부부싸움’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아기’로 상징되는 ‘가련한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곱고, 세심한 마음을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배냇머리’를 셀 정도로 예쁘고 사랑스럽게 아기를 대하는 엄마처럼 하느님이 우리를 그렇게 ‘품에 안고 보살피신다.’고 교훈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자세히, 오래 보아오신 어지신 분임을 교훈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교훈합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엄마의 기도처럼 그 ‘좋은 나라’, 즉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자고 초대합니다. 오늘은 그런 말씀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1독서 《창세기》는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느님께서 돌보아주신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에는 ‘이유기’(離乳期)와 ‘부부싸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대략 3살 무렵이면 젖을 뗐습니다(마카베오하 7:27). 새로운 ‘발달 시기’로 들어가기에 가정마다 ‘큰 잔치’를 베푸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또 다른 가족이 있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그들은 ‘모자’(母子)입니다. 모자이지만 하늘과 땅만큼의 ‘신분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갈’은 이집트 노예출신으로 ‘사라’라는 주인을 오래도록 섬겨왔습니다. ‘이스마엘’은 언젠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상속을 받아 ‘차세대 주인’이 될 인물입니다. 한 가족이지만 신분 차이가 존재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족과 함께 자기 삶의 근거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불임’이었습니다. 당시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저주’였습니다. 사라는 불임을 이집트 출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 ‘우회적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창세 16:2). 그만큼 하갈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사라는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겼습니다. 하느님이 ‘사라’를 통해서만 ‘아들’을 주신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사라는 자신이 생각해 낸 우회적인 방법, 즉 ‘그 얕고 불신앙적인 방법’이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입에 올리기 민망한 말이지만 하갈은 이제 ‘소실’(小室), 즉 ‘첩’(妾)이 되었습니다. 고대근동에서 첩(妾)의 역할은 ‘아들 상속자’를 낳는 일입니다. 비록 첩이 낳았다 하더라도 아들은 ‘합법적’으로 ‘정실(正室)의 상속자’가 되던 시절입니다. ‘하갈’은 ‘태기’(胎氣)를 느끼자 ‘사라’를 ‘업신여기는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창세 16:4).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몸종’이면서 ‘주인’ 행세하는 ‘교만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뜻이고, 좋게 말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소연’ 합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몸종’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남편에게서 힘을 얻은 사라가 이번에는 하갈을 ‘박대’(학대)합니다. 견디다 못한 ‘하갈’은 집에서 도망칩니다(창세 16:6).

‘하갈’이라는 이름은 ‘도주하다, 탈출하다, 방황하다’는 뜻입니다. ‘미성숙한’ 처신 때문에 자신의 이름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고난에 찬 눈물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보았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이 ‘하갈’에게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감정 묘사 없이 ‘도망쳤다’로 처리된 행동묘사에서 임신한 하갈의 가련한 눈물과 서러움이 더 실감납니다. 도망친 ‘하갈’은 자기 고향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도망자’ 하갈의 뒤를 쫓는 분이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고통당하는 하갈을 찾아가셨습니다. 이 찾아가심은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고통당하는 이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당신의 천사를 보내신 최초의 사건입니다. 주님의 천사, 즉 하느님께서 ‘빈들’(광야)에 있는 ‘샘’에서 ‘도망자’ 하갈을 만납니다(창세 16:7). 그 ‘샘’은 ‘수르 광야’로 가는 길가에 있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만나고 있는 분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립니다. 대화가 시작됩니다. 미성숙한 그를 하느님이 빚어 가시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질문하십니다. 그 질문은 영적으로 미성숙한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하갈처럼 슬픈 눈물을 흘리며, 고난의 시절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몰린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체 진실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우리에게 한 줄기 ‘빛’처럼 찾아오시어 말을 걸어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 창세 16:8

이 말씀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담긴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디서 왔는가?”라는 과거이고,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라는 현재이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미래를 가리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 물음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숨어든 ‘아담’을 떠올립니다.

너 어디 있느냐? – 창세 3:9

하느님은 지금 아담이나 하와에게 ‘주소지’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 질문’이 여기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인생이 몇이나 될까요? 오늘도 이 질문의 답을 얻고자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산중에서 수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춘천교회에서 사목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지인 중에 한 분이 춘천 불교방송 PD를 소개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 분도 불교 수행자 출신이었는데, 초대해 성당 텃밭에서 기르던 푸성귀로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대화중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그 분 자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수행자들의 ‘하안거’(夏安居)가 끝났습니다. 자신들의 ‘수행처’로 돌아가는 수행자들의 길을 막고 큰 스님께서 차례로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어디로 가는고?” 어떤 수행자는 “전라도 구례로 갑니다.” 또 어떤 수행자는 “충청도 공주로 갑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대답했답니다. 큰 스님은 혀를 끌끌 차면서 다들 멀었다 꾸짖었습니다. 스님은 ‘행선지’를 물었던 것이 아니지요. ‘화두’(話頭)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리나 성직자로부터 얻는 대답 말고 하느님의 ‘그 질문’에 뭐라 대답할 것입니까?

드디어 하갈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나의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치는 길입니다. – 창세 16:8

하갈의 자기 ‘존재인식’입니다. 하갈은 ‘정직’합니다. 숨김이 없습니다. 자신이 ‘종’임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상 모든 임산부는 정직합니다. 태중의 아기가 거짓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갈의 대답 속에서 어떤 ‘예언자’가 보입니다. 하느님의 눈앞을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하며 ‘다르싯’으로 도망가던 ‘요나’ 말입니다(요나 1:10). 차이점이 있다면 ‘요나’는 스스로 도망자가 되기로 선택했다는 점이고, 하갈은 타인에 의해 그리됐다는 점입니다.

‘요나’에게 따라가신 하느님은 ‘하갈’에게도 따라가시어 말을 거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생명’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갈의 생명 때문일 수도 있고, 태중의 아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 ‘오래도록 자세히 보아오신’ 그 가련한 인생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어쩌면 한 사회의 ‘성숙도’는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소수자를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눈’으로, ‘고운 눈’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보고 있는지 성찰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갈은 하느님(주님의 천사)으로부터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대답’을 듣습니다(창세 16:9-12). 《루가복음》이 전하는 ‘수태고지의 성모 마리아’를 생각나게 합니다. 사라보다도 먼저 ‘수태고지’를 들은 여인이 ‘하갈’이라는 점이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도 인생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속을 헤맬 때, 깊은 물(고달픈 눈물)에 잠길 때, 하갈처럼 주님이 주시는 ‘인생의 대답’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래 ‘대답’이란 질문한 분이 가장 잘 아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엉터리들에게 ‘대답’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을 지으신 분이 질문하셨으니 대답 또한 우리를 가장 잘 아는 하느님께 들어야 합니다. ‘기도’야말로 ‘듣는 길’입니다.

 

재밌게도 대화말미에 하느님과 하갈은 서로에게 ‘이름’을 붙여줍니다(창세 16:11-14).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질서’, ‘평화’, ‘빛’, ‘특별한 권리가 주어짐’, ‘약속’(계약)을 뜻합니다.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이 그치는 셈입니다. 하느님은 하갈이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갈은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을 ‘엘 로이’(나를 주의를 기울여 보시는 하느님, 보살피시는 하느님, 돌보시는 하느님)라 이름 붙입니다(창세 16:7-14). 하갈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때부터 그 ‘샘’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라고 불립니다. “나를 돌보아주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샘”(well of the Living One seeing me)이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이스마엘’(Ishmael)은 ‘하느님이 들으신다’(God hears), ‘엘’(el)은 ‘하느님’(God), ‘브에르’(Beer)는 ‘우물, 샘’(well), ‘라하이’(Lahai)는 ‘살아계신 분’(the living One), ‘로이’(Roi)는 ‘봄(돌봄, 보살핌, looking, seeing, sight)’이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인생의 ‘당당함’입니다. ‘광야’라는 말이 갖는 상징처럼 ‘하갈’은 ‘미성숙한 사람’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계약의 은총’을 입고 집으로 돌아간 하갈은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살아갑니다. 사라를 업신여기기 보다는 자신을 낮춥니다. 지혜롭게 처신합니다. 고생을 참고 견딥니다. 변화된 한 사람 때문에 가정에 평화가 찾아듭니다. 마침내 하갈은 ‘천사의 수태고지’(하느님의 약속)처럼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창세 16:15-16).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해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의 수태고지처럼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으신다, God hears)이라 짓도록 당당히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다르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합니다. ‘이스마엘’은 몸종 하갈의 아들이 아니라 사라의 ‘합법적인 아들’이 되어 성장합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갈의 눈으로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는 아니었습니다. ‘사라’가 하느님의 약속대로 ‘이사악’을 낳자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입니다. 분명 이스마엘은 ‘합법적인 아들’이지만, 이사악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 사라는 느꼈습니다. 해가 갈수록 연장자인 이스마엘은 이사악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입니다. 결국 유산을 함께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새 이스마엘은 사라에게 있어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보였습니다. 모두가 사라가 만들어낸 일입니다. 자신의 친아들과 종의 아들을 서로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라는 이스마엘과 하갈을 추방할 구실을 찾아야했습니다.

그 날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이사악의 젖을 떼던 잔칫날이 지나자 드디어 구실(口實)을 잡았습니다. 이스마엘은 15–17살이 되었습니다. 사라는 대뜸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해달라고 아브라함을 조릅니다. 경멸적으로 “계집종”이라는 호칭을 씁니다(10절). 하갈과 이스마엘 입장에서는 올 것이 왔습니다. 추방의 구실이란 무엇입니까?

에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 창세 21:9

좀 의아스럽습니다. 단지 “함께 노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새번역성경과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이스마엘이 이사악을 놀리는 것(성적인 희롱)을 보고”라고도 번역합니다. 사실 본문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 ‘차하크’(이사악의 이름이 여기서 왔다고 지난주에 설명했습니다)는 ‘드러내놓고 크게 웃다’, ‘조롱하다’, ‘놀리다’, ‘놀다’, ‘애무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장면을 더 극단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다. – 갈라 4:29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로는 ‘이스마엘’을 “인간적인 육정으로 난 소생”, ‘이사악’을 “성령으로 난 약속 상속자”로 우선 해석합니다(갈라 4:23). 그런 다음 ‘이스마엘’이 ‘이사악’을 박해한 ‘원수’라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사도 바울로가 ‘옛 계약’인 ‘율법’과 ‘새 계약’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한 믿음’을 비교하려는 자신의 메시지에 맞추어 1독서 《창세기》를 해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함께 논 일”을 꼭 ‘나쁜 짓’(특히 성적인 희롱)이나 ‘박해’로만 보아야 하겠습니까? 다시 말해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할 수밖에 없었던 구실을 꼭 그때의 장면에서만 찾아야겠습니까? 오히려 《창세기》 16장에서 본 것처럼, ‘질투’하고 ‘분노’하는 사라의 ‘샘’ 많은 ‘미성숙한 태도’에서 찾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또 앞으로 사라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내쫓아야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이 이집트 출신이기에 그곳으로 돌려보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스마엘이 자기 혈육이라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할례’를 베풀고 자신의 후계자가 되는 과정을 이미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창세 17:24-25). 그 날 천막 안에서는 사라와 아브라함 사이에 다소 길고 심한 ‘부부싸움’이 있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천막을 뚫고 새어나오는 ‘말다툼’을 숨죽이며 듣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사라’가 너무합니다.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정말 어려운 상황입니다. 불임, 질투와 분노 외에도 박해, 노예제도, 사회문화적 억압이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창세 21:11)는 이 짧은 표현에 담긴 배경입니다. 《창세기》 1장 첫 이야기처럼 아브라함도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에 빠졌습니다. 그가 ‘괴로웠다’는 것은 사라의 요구를 거절하고자 하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찌 풀어야 합니까? 이야기에는 그들 말고도 이 상황을 오래도록 지켜보아온 또 한 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입니다. 고대의 관습을 아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사라가 아니라 아브라함 편을 들게 되리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합법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어찌 전개됩니까? 예상대로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사실 ‘문제’를 일으키는 쪽은 언제나 인간이고, ‘수습’(收拾)은 언제나 하느님이 하신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입니다. ‘혼돈’ 속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지시하십니다.

그 애와 네 계집종을 걱정하여 마음 아파하지 마라.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에게서 난 자식이라야 네 혈통을 이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계집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 창세 21:12-13

외견상으로는 사라의 뜻대로 된 것 같습니다.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라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진행’됩니다. 사라는 단지 자기 아들의 미래만을 내다 볼 뿐이었다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더 먼 미래까지 가 닿아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에 따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새겨야할 메시지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개인의 성격적 결함, 즉 질투나 분노나 완고함을 통해서도 ‘실현’됩니다. 사회제도나 문화적 억압마저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결코 막아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그 어떤 행위 속에서도 당신의 위대한 구원 계획을 홀로 이루심을 믿으십시오.

Image: "Hargar and Ishmael Driven Away" by Fredrick Goodall (1822-1904)

‘가혹한 대우’를 받으며 오랜 세월동안 ‘몸종과 첩’으로 살았던 하갈과 10대 아들 이스마엘은 쫓겨납니다. 그들이 ‘자유인’이 되는 길은 그런 식으로 주어졌습니다. 비정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입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 아니 ‘추방’당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야했던 그들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15-17년 전 ‘하갈’이 스스로 도망쳐 나올 때하고는 양상이 다릅니다. 지금은 주인에게서 쫓겨났습니다. 다시는 돌아 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양식과 물 한 부대를 가졌을 뿐입니다. 살아가기에 턱없이 모자란 양입니다. 그들의 감정은 본문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침묵이 역설적이게도 읽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에 더욱 공감하게 만듭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으신다, God hears)이 그런 이름을 갖게 된 연유가 16장에 이어 좀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학자들은 《창세기》 16장과 21장이 다른 전승을 갖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들었던 것처럼, ‘이사악(사람들이 크게 웃는다)’이 그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언어 유희’(이름풀이)를 통해 밝혀주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집에서 추방당한 그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먹고 살 방법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길을 잃고 ‘빈들’(광야)을 헤맵니다. 본문은 사건이 일어난 그 ‘광야’를 ‘브엘세바’(באר שבע)라고 기록했습니다. ‘브엘세바’는 ‘우물, 샘’(well)을 뜻하는 ‘브에르’(Beer), ‘일곱’(seven)을 뜻하는 ‘셰바’(sheba)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well of seven)을 가리키며, 보다 정확히는 ‘일곱 양의 우물’(well of seven lambs)이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일곱’이라는 뜻의 ‘셰바’(sheba)는 ‘맹세하다’(swear)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샤바’(shaba)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well of oath)이라는 뜻도 됩니다. 이름의 유래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있던 ‘맹세’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어린 암양 ‘일곱’ 마리를 거기 있던 ‘우물’을 자기가 팠기에 자기 것임을 ‘맹세’로써 인정받습니다(창세 21:22-34; 26:33).

흔히 이스라엘 영토를 말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른다”(판관 20:1; 사무상 3:20; 사무하 3:10)고 합니다. 통일왕국시대에는 이스라엘 북쪽 경계가 ‘단’이었고, 남쪽 경계는 ‘브엘세바’였습니다(사무하 17:11; 24:2; 열왕상 5:5). 성경 지리 연구자들은 그 ‘브엘세바 빈들’을 하갈이 하느님을 처음 만났던 ‘브에르 라하이 로이’(나를 돌보아 주시는 살아계신 분의 샘)라고 여깁니다(창세 16:7-14). 그러니까 그들이 ‘이집트’로 향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물마저 떨어지자 그들은 ‘죽음’에 직면합니다. 《창세기》 1장 첫머리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이 그들 모자(母子)에게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감정에 대해 침묵하던 《창세기》 기자도 갑자기 하갈로 하여금 감정을 쏟아내게 합니다.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어머니의 처절한 심정이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이스마엘도 울고, 하갈도 웁니다. 아마 아브라함도 모자를 떠나보내면서 간접 죽음을 경험하며 울었을 것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86편> 첫머리의 애원이 이야기에 그대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소서. 야훼여, 대답하소서. 불쌍하고 가련한 이 몸이옵니다. – 시편 86:1

주저앉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하갈은 자신이 ‘브에르 라하이 로이’에서 만났던 ‘엘 로이’, 즉 “나를 주의를 기울여 보시는 하느님, 보살피시는 하느님, 돌보시는 하느님”(창세 16:7-14)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수태고지의 하느님’께서 하갈을 찾아오십니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당신의 천사를 시켜 하늘에서 하갈을 불러 이르셨다. – 창세 21:17a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이들을 그냥 보아 넘기시지 못하고 항상 찾아오십니다. 하갈이 처음 도망 나왔을 때 그 울부짖음을 들어주신 하느님께서 이번에는 ‘이스마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란 말에서 ‘이스마엘’의 이름이 유래합니다. 그 이름의 어근인 히브리어 동사 ‘샤마’(shama)는 ‘듣다’(hear)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 본 ‘쉐마 이스라엘’(들어라, 이스라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샤마’에 ‘하느님’(God)을 뜻하는 ‘엘’(el)이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들으신다.”(God hears)입니다. 본래 누군가의 울부짖음을 “듣는다.”는 것은 “관심을 보인다.”, “주의를 기울인다.”, “돌본다.”는 의미입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서 네 아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어서 가서 아이를 안아 일으켜주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 창세 21:17b-18

하갈은 ‘아들’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에게 위대한 일을 의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하느님은 친 어머니조차도 포기해 버린 아이를 장차 ‘큰 민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갈도 사라 못지않은 ‘큰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창세 25:12-18). 모두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하느님 덕택입니다.

《이사야》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엽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 이사 49:15

정말이지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이 많으십니다. 복음이야기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다. – 마태 10:30

나태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하느님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우리를 “자세히, 오래 보아오신” 어지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여 섬세하게 ‘돌보시는’(들으시는, 관심하시는) 분입니다. 하갈은 ‘돌보시는 하느님’(엘 로이) 덕택에 자신과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샘’(우물)을 발견합니다. ‘브에르 라하이 로이’에서는 하느님께서 ‘샘터’에서 하갈을 만나주셨는데, 이번에는 하갈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러자 하갈은 이미 자기 곁에 있었는데도 보지 못했던 ‘생명의 물’, 즉 ‘삶의 진실’을 봅니다. ‘깨달음’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갈의 “눈이 열려 샘을 보았다”는 사실은 그가 ‘삶의 또 다른 차원으로 옮아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찾아와 말씀하시는 순간, 인간의 모든 비극은 단숨에 끝납니다(창세 21:19-20). 하느님께서 우리의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에 말씀하시는 순간 ‘빛’이, ‘희망’이, ‘생명’이 생겨납니다. 이제 깨달은 이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던 인생에서 자기 길을 걸어가는 당당함입니다. 복음이야기의 말씀처럼 “제자가 스승만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는 경지”입니다(마태 10:25). 이후로도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은 계속됩니다.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1독서 《창세기》에 나오는 ‘이유기’(離乳期)는 ‘이사악’의 경우처럼 단지 ‘발달단계’만으로 축소해서 볼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경우처럼 의존적인 긴밀한 ‘유대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돼야 할 ‘전환(轉換) 시기의 도래’에 대한 ‘은유’입니다. 사실 누구나 ‘독립적’이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새로운 발달단계로 편입되는 ‘전환(轉換), 전이(轉移) 시기’가 도래하면 피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환 시기’는 예외 없이 ‘시련’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이 젖을 떼자, 하갈과 이스마엘도 강제로 ‘이유’(離乳)로 내몰립니다. 긴밀한 의존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돼야 할 ‘전환(轉換) 시기’ 속으로 내몰립니다. 그들의 ‘이유’(離乳), 즉 가족으로부터 분리는 건강하고, 사랑스럽고, 지지 받는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혹하고 억압적인 추방이었고, 시련 속으로의 던져짐이었습니다. 사실 ‘박대’(학대) 받던 관계에서 ‘탈출한’ 많은 사람들의 경우, 출발이 반드시 더 나은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돈도, 거할 곳도, 인맥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신과 자녀를 부양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새로운 발달단계로 편입된 이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이라는 ’시련‘에 처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전환(轉換) 과정’에서 ‘혼돈’(시련)에 던져집니다. 그 ‘전환 과정’은 복음이야기의 선포처럼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 형제 사이에 작용해온 그간의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젠가 삶의 모든 종류의 관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놓아야 하는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유기’(離乳期)는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상관없이 골치 아픈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빛’이 찾아듭니다. 지난 2주간 우리는 1독서 《창세기》 말씀을 통해 무엇을 알아들었습니까? 삶이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 속에 있을 때 하느님을 찾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신호’를 알아들으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은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또 하나의 ‘기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더 높은 단계로 이끄시려는 ‘이유’(離乳), 즉 ‘전환’(轉換), ‘전이(轉移) 시기’로의 편입입니다.

인생길을 걷다보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낭떠러지 끝에 세우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좀체 하느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젖을 뗄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손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을 결코 놓지 않으려 들던 어린 시절의 저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마주하지 않으면 좀체 손에 잡고 있는 ‘그것을’ 절대 놓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고달픈’ 순간들 속에도 하갈이나 이스마엘의 경우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하더라도 인생에는 여전히 시련이 다가옵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혼돈, 무질서(혼란), 어둠, 깊은 물(고달픈 눈물)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임마누엘’의 진실을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서 살아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터민,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족, 가난한 이웃과 사회적 소수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열려야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빛’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눈이 열려 발견하는 ‘샘’(우물)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손 내미는 우리여야지 ‘주의기도’처럼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만이 아니라 하갈과 이스마엘의 하느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갈과 이스마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생기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하느님은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항상’ 막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하느님의 침묵’이 이해하기 몹시 어려운 ‘난제’이자 ‘신비’입니다. ‘이사악’ 탄생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사라가 상황을 처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신뢰하기로 결정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갈을 통해 ‘약속의 상속자’를 갖고자 한 사라의 우회적인 방법을 아브라함이 동의한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약속’에 어긋나는 그 끔찍한 일을 아브라함이 하지 못하도록 하느님이 막지 않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사라가 하갈의 가족을 향한 하느님의 목적과 비전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시기심과 분노에 빠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는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하는 것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동료인 인간, 즉 자신의 가족에게 조차도 비인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하느님은 분명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족이나 이웃에게 ‘해’(害)를 끼치는 방식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하느님이 막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침묵, 용인(容忍)을 접할 때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도무지 헤아릴 길 없고, 모를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저는 그저 입을 다물고, 겸손히 기도할 뿐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질투와 분노와 완고한 ‘사라’에게 보이신 하느님의 지지, 어찌 보면 우유부단한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일방적이고 명백한 지지(支持)’는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에 비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주신 복은 ‘차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어디 <성경>에만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으로 초대된 이 은총을 누가 과연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중 누구도 자신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같이 모순투성이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셔야만 하는 그 까닭을 도무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이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나태주 시인은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실린 <사랑에 답함>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시’(詩)는 ‘복음’의 정신과 닿아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순투성이임에도 항상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족이나 같은 교우들에게 조차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신 방식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우리와 항상 은총으로 함께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하느님은 우리를 격려하도록 “천사들”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주시기까지 합니다. 하느님이 물으시는 그 어려운 질문, 즉 ‘궁극적 질문’에 참여하고, 우리의 죄를 인정하도록 “천사들”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주십니다.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회개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천사들”을 통해 격려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하느님을 더 많이 신뢰하도록 초청하십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넘어지는 것마저도 허락하십니다. 우리에게 ‘항상’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그러한 실수들로부터 배우도록 촉구하시고 다시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기는커녕 때로는 혼란스럽고 듣기에 곤란한 일들을 말씀하시고 행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항상’ 돌보시는 하느님은 마찬가지로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보살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타종교 사람들마저도 ‘항상’ 보살피십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참새하고도 ‘항상’ 함께 하신다고 오늘 복음은 가르쳐줍니다(마태 10:29).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의 이러한 인자하심을 점점 더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눈물 흘리고 있습니까?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인생의 시련을 통과하는 중입니까?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오늘 <전례독서>는 교훈합니다. 오늘도 하갈처럼 눈이 열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이 진실을 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86편>은 시련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애원하며 바치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고난 속에 있는 가련한 몸, 즉 ‘사회적 약자’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해 매일같이 부르짖는 것뿐입니다. 1독서 《창세기》의 하갈과 이스마엘의 울부짖던 기도처럼 들립니다. 시인은 자신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속했고, 하느님만 의지하리라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만 바라는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마감됩니다.

 

2독서 《로마서》는 ‘세례성사’의 의미를 교훈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신분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처럼 우리도 과거에는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죄’에 사로잡힌 ‘죄의 종’이었습니다(로마 3:9,23; 6:6,17). 본질상 하느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있었고(로마 1:18; 2:1-8; 3:19; 5:9-10),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로마 5:12-21; 에페 2:1-5).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표시’인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로마 6:3-6,8). 그 믿음과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하갈’처럼 되었습니다. 그 믿음과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풀려나 ‘구원’(영원한 생명) 얻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로마 1:16-17; 3:21-30; 4:3-5,16; 5:1-11, 15-21; 6:6-7). 우리의 ‘옛 사람’은 세례를 받고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는 ‘새 생명’(부활생명,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을 얻은 ‘새 사람’으로 살아나 ‘영생의 길’로 들어섰습니다(로마 6:4,22-23).

 

참으로 ‘세례성사’는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 죄에서 해방된 ‘정의의 종’, ‘하느님의 종’으로 변화시킵니다(로마 6:13,18,22). 우리를 ‘그리스도의 완전한 소유’로 만드는 일이 ‘세례성사’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세례성사’에서 그런 은총이 일어난다고 명백히 교훈합니다.

이제 ‘세례성사’를 통해 ‘새 생명’(영원한 생명, 부활생명, 하느님 나라)을 얻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지 않고 복음이야기에서 교훈하는 것처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로마 6:11-13). 베풀어 주신 은총이 ‘감사’해서라도 마땅히 ‘빛’처럼, ‘생명’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하느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여전히 우리는 아직도 죽지 않은 이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부활하지 않은 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살지 않고 여전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 때도 많습니다(로마 6:11; 마태 10:37). 이런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주님의 눈길이 느껴져 고요히 두 손을 모읍니다.

 

복음이야기는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의 사도 파견 설교’를 전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간직해야 할 ‘잠언’,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요청되는 ‘제자도’를 전합니다. 천천히 묵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삶이 쉬울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힘만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제자의 길을 가게 하는 ‘힘’은 오직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대부분의 복음서 연구가들은 마태오복음이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제시하고자 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신명기》는 가나안 입성을 앞 둔 출애굽 2세대들에게 ‘계약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의무와 자세를 가르친 모세의 고별설교 양식으로 되어 있는 책입니다. 마태오도 예수님을 ‘하늘나라’를 가져오신 ‘메시아’,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신(설교하신) ‘스승’(교사)으로 묘사합니다. 실제로 《마태오복음》의 문학적 구조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여러 측면들을 가르치시는 ‘5묶음의 설교’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설교묶음 후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표현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마태 7:28; 11:1; 13:53; 19:1; 26:1). 간단히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설교묶음은 도래한 하늘나라에 요구되는 삶을 가르치시는 ‘산상수훈’입니다(5-7장). 두 번째 설교묶음은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파견되는 사도들을 위한 ‘파견설교’입니다. 세 번째 설교묶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7개의 하늘나라 비유’입니다(13장). 네 번째 설교묶음은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예수공동체의 삶의 태도를 전하는 ‘교회생활’입니다(18장). 다섯 번째 설교묶음은 하늘나라의 완성을 깨어 기다리라는 ‘종말에 대한 설교’입니다(23-25장).

지난주일 우리는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파견되는 사도들을 위한 ‘파견설교’의 첫 머리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수행할 ‘사명’을 분부하시면서 ‘박해도 각오하라’고 준비시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박해도 각오하라”고 준비시키는 단락에 속합니다.

분명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따르는 삶은 예수께서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길입니다. 하지만 ‘박해와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길입니다. 사실 ‘새 생명’을 얻는 존재로 변화되는 길에 어찌 고난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일도 그렇고, 산모가 새 생명을 출산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이 되는 일도 그렇고,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일도 그렇습니다. 삶의 발달주기에서 새 발달단계로 넘어갈 때처럼,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제자들이 스승인 자신보다 더 나은 대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제자로 따르는 삶은 1독서 《창세기》에서 들었듯이 가족 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제자도’(잠언) 말씀에는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마태오교회가 처해 있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서기 70년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군대가 출동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철저히 파괴시키고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하느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유대인들은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봉헌할 수 없었습니다. 고난의 삶을 살던 그 시기에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주도하여 ‘회당’ 중심의 유대교를 세웁니다. 이렇게 등장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올 때 그리스도인들은 같이 싸우기보다 성 밖으로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들이란 미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야기는 서기 68-70년 무렵 뿐 아니라 마태오복음이 기록되던 서기 80-90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견뎌야했던 박해와 고난을 반영합니다.

 

박해와 고난을 각오하라는 예수님의 ‘파견 설교’를 듣다 보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께 배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비밀스럽게 간직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말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신천지’처럼 몰래 음흉하게 포섭할 것이 아니라 대놓고 큰 소리로 외치라고 촉구하십니다. 더욱이 우리의 신앙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전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할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진짜 두려워하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하느님이 우리를 ‘참으로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들려주시는 중입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돌보시는 인자하신 아버지’를 보여주십니다. 분명 우리도 제자들처럼 ‘제자도’의 길을 가겠다고 ‘세례’를 받고 믿음으로 따라나서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될 박해와 고난이 두렵습니다. 어떤 이는 고난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아버지의 돌보심’을 약속합니다. 참새 한 마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시는 인자하신 하느님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고,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이라고 증언하십니다. 심지어 우리 머리카락에까지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느님을 예수님은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참 별 걸 다 관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대조입니다. 이 대조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제자도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명백히 하십니다. 그 힘은 우리 스스로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그 힘이 옵니다. 성령이야말로 그 힘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오늘도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믿음’ 사이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박해와 고난이 두려워 예수 따르기를 그만 둘 것인지, 아니면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계속 따를 것인지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을 결단하고 매일매일 예수님의 증인으로 걸어가는 삶이 우리의 종말론적인 미래를 결정한다고 똑똑히 약속하십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삶의 우선순위, 삶의 기준이 오직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로 대변되는 나의 ‘과거’가 예수를 따르는 ‘현재의 나’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들이나 딸로 대변되는 나의 ‘미래의 꿈과 계획’ 때문에 현재의 나의 제자도의 삶이 방해받을 수 없다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과거나 미래보다도 ‘오늘’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삶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나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을 최우선의 가치와 기준으로 선택하고 ‘오늘’ 따르는 삶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돈과 권력과 다른 무엇을 최우선의 가치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모든 존재가 자신의 생명을 꽃 피우는 ‘좋은 나라’, 즉 ‘하느님 나라’를 일구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 ‘파견설교’에서 ‘제자도의 삶’이 쉬울 것이라고 결코 교훈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해’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파견설교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1독서 《창세기》가 들려주듯이 하느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연약한 모든 생명에게 찾아가시어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 《시편》 시인의 ‘애원’을 들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과 ‘기도’도 들으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믿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세심하게 돌보신 하느님께서 우리도 ‘세심하게’ 돌보아주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최우선의 가치로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돌보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에서 떼어놓을 수 없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금주간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예쁘게 사랑스럽게 보시는 하느님과 동행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임마누엘. 찬미 받으소서. 주님 위대하시어 놀라운 일 이루시니,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트랙백 & 핑백

  • 2020. 9. 6. 연중23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

    […] 문학적 구조는 ‘5묶음의 설교’로 되어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관련설교는 2020. 6.21. 연중 12주일의 복음 이야기를 보십시오). 오늘과 다음 주일 복음 이야기는 ‘네 번째 설교 묶음’인 <18장>에서 […]

    2 개월 ago
  • 2020. 7.26. 연중 17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

    […] 《마태오복음》에 전해지는 ‘5묶음의 설교’ 중에 세 번째 설교묶음이고(관련설교는 2020. 6.21. 연중 12주일의 복음이야기를 보십시오), 세 번째 설교묶음에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7개의 […]

    3 개월 ago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