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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14. 연중11주일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8:1-15
  • 시편 – 116:1-2,12-19
  • 2독서 – 로마 5:1-8
  • 복음서 – 마태 9:35-10:8

연중 1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고달픈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 측은지심으로 무슨 일이라도 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입니다.

우리는 교회력으로 ‘연중시기’ 여정(旅程) 중에 있습니다. 주일을 기준으로 하자면 ‘연중 1주일’(주의세례)부터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전 주일’까지가 ‘1차 연중시기’였습니다. 사순절기와 부활절기를 지나, ‘성삼위일체주일’부터 ‘왕이신 그리스도주일’까지가 ‘2차 연중시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2차 연중시기 여정의 초입에 들어섰습니다. 이 여정을 <전례독서>라는 나침반과 함께 합니다. <전례독서>에 배정된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갑니다. 1차와 2차 연중시기의 차이점 중 하나는 <주일감사성찬례 전례독서> 배정에 있습니다. 2004년 발행된 <성공회기도서>는 ‘주일감사성찬례’에서 사용하는 <전례독서(성서정과)>로 ‘개정정과표’(RCL, Revised Common Lectionary)를 사용합니다. ‘개정정과표’에 따르면, 2차 연중시기 <주일감사성찬례 전례독서> 배정은, ‘성삼위일체주일’만 예외로 하고, 1독서 <구약>과 《시편》이 매 주일 두 세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령 2020년 6월 14일인 오늘, 즉 가해(Year A) ‘연중 11주일’인 오늘은 <구약성경> 1독서로 《창세기 18:1-15》와 《시편 116:1-2,12-19》을 선택하거나 《출애 19:2-8상》와 《시편 100》을 선택하도록 배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쪽이든 2독서 <서신>과 <복음서>는 동일합니다. 처음 <성공회기도서>를 사용하는 신자들은 어째서 <전례독서> 배정이 이런 차이를 보이는지, 그리고 설교자는 이런 경우 어떻게 <전례독서>를 선택하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우선 ‘앞’에 안내된 <전례독서> 배정(창세 18:1-15와 시편 116:1-2,12-19)을 ‘계속 독서’(Semicontinuous)라 합니다. ‘계속 독서’(Semicontinuous)는 말 그대로 《성경》을 ‘앞에서부터 차례로(순차적으로) 읽어나가도록 배정했다’는 뜻입니다. 흔히 ‘개신교 전통’이라 합니다. 이 경우 <구약성경>(1독서와 시편)은 ‘복음이야기’를 위한 ‘배경’(보충하는) 역할을 거의 하지 않거나 ‘주제’와도 ‘조화’(상보적인)를 이루지 않습니다. 가해 동안 배정되는 계속 독서 구약성경은 주로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과의 계약 이야기, 여호수아와 약속의 땅 정착이야기입니다.

다음으로 ‘뒤’에 안내된 것(출애 19:2-8상반절과 시편 100)을 ‘선택 독서’(Complementary)라 합니다. ‘계속 독서’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본문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 <구약성경>(1독서와 시편)은 복음이야기의 ‘배경(보충하는) 역할’을 하거나 주제와 ‘조화’(상보적인)를 이루는 본문이 배정됩니다. 또는 복음이야기에서 더 발전될 내용의 예시나 암시가 나올 때 배정됩니다. 간단히 ‘복음이야기의 내용과 주제에 맞추어 낭독하도록 한 배정’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가톨릭 전통’이라 합니다. 따라서 말씀나눔을 하는 사제 입장에서는 당일 복음이야기와 동일한 주제를 가진 <구약>과 《시편》을 설교하고 싶다면, ‘선택 독서’를 선택하는 것이 더 수월합니다. 설교자 입장에서는 어떤 선택을 하던지 둘 다 장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2독서 <서신>의 배정은 어떻게 될까요? 2차 연중시기에 낭독하는 <서신>은 항상 ‘계속 독서’(Semicontinuous)이기에 복음이야기 주제와의 연결성이 없습니다. 아니, 희박하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서>나 다른 <전례독서>와 무리하게 연결하기 보다는 별도의 교훈으로 해석하는 식으로 말씀 나눔을 합니다. 물론 ‘계속 독서’(Semicontinuous)라 하더라도 ‘개정정과표’(RCL, Revised Common Lectionary)를 만든 신학자들이 최대한 <복음서>나 <구약성경>과의 ‘상호연관’을 의식해서 배정한 부분도 제법 많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주제를 잘 연결시켜야할 ‘책무’가 사제에게 있습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계속 독서’이기 때문에 <서신>은 <복음서> 뿐 아니라 다른 <전례독서>와의 주제 연결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시편》은 항상 1독서로 낭독하는 <구약>과의 관련 속에서 채택되고 배정됩니다. 감사성찬례에서 신자들이(또는 성가대가) 1독서 낭독 후에 ‘성시’를 바치듯이, 낭독한 1독서에 대한 ‘회중의 응답’과 더 깊은 ‘묵상’을 위해 배정된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해 2차 연중시기 여정을 걸어가면서 ‘말씀 나눔’을 위한 <전례독서>로 저는 ‘계속 독서’ 전통을 따를 것입니다. 아무래도 《성경》을 ‘순차적’으로 읽게 한 <전례독서> 배정 의도이기에 1독서 <구약>, 성시 《시편》, 2독서 <서신>과 <복음서>와의 연결성이 다소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독서’가 갖는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네 개의 구슬’을 ‘한 주제로 꿰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물된 하느님의 구원의 복음’이라는 ‘대(大)주제’가 관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물을 홈페이지에 올려보겠습니다. 사제의 ‘구슬 꿰는 솜씨’가 신통치 않다고 여겨지는 분은 해당 주일의 ‘선택 독서’ <구약>과 《시편》을 참고하시면 다소라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공회기도서>가 없는 분들은 우리교회 홈페이지 첫 대문에서 <전례독서>를 클릭하시면 ‘계속 독서’와 ‘선택 독서’ 본문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구슬 꿰기 시작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그런 ‘이름’을 갖게 된 ‘유래’(由來)입니다(창세 17:19). ‘이사악’은 ‘드러내놓고 크게 웃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차하크’에서 왔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부모들조차 ‘불가능하다’고 드러내놓고 비웃었습니다(창세 17:17; 18:12). 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크게 웃게 만든’ 아들이 ‘이사악’입니다(창세 21:6-7). 참고로 ‘이사악’은 라틴어 발음이고, 히브리어 발음은 ‘이츠하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전에도 몇 차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마다 아들을 ‘약속’해 주셨습니다(12:2,7; 13:16; 15:18). 이런 반복된 ‘현현’(顯現)에도 불구하고 ‘약속 성취의 문’은 오래도록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그 ‘약속’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시련’(시험)을 통과하는 중이었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旅程)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75세’라는 나이에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 ‘나이’와 ‘희망’은 서로 친구할 수 없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이 있던 삶의 터전을 떠났습니다(창세 12:1). ‘하란’을 떠나 하느님이 보여주신 ‘가나안 땅’에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두려움보다는 ‘희망’ 쪽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낯선 땅에서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분명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음성에 순종했음에도 말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경험하는 ‘혼돈’의 세월도 있었습니다(창세 12:9-10). ‘흉년’ 때문에 이집트로 가서 몸 붙여 살기도 했습니다(창세 12:14-20). 약속은 성취되지 않고 ‘사라’는 세월이 지날수록 ‘출산 능력이 없음’이 확고해졌습니다.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 약속된 ‘상속자’를 얻는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창세 16:2). 아브라함도 동의합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창세 16:15-16). 하느님은 그 방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즉 ‘믿음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창세 17:19). 우리도 자신이 선택한 방법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의 꼼수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덧 그는 ‘99세’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야말로 ‘노년’을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의 성취는 ‘완전히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희망’의 끈을 놓는 게 ‘합리적’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고달픈 ‘인생 여정’을 회상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중 어떤 분은 한 때 특별한 ‘신적 체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그리는 ‘인생 청사진’으로 눈이 빛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청사진’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생’(生)이라는 글자는 “소(牛)가 외나무다리(一)를 건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말해집니다. 그냥 건너기도 힘든데 ‘무거운 짐’까지 싣고 건너야 했습니다. 외나무다리가 흔들리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외나무다리를 건너다보니 어느새 ‘눈빛’은 흐릿해 지고 인생이라는 ‘신발’이 다닳아갑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기쁜 날은 단 6일뿐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다른 날들은 ‘혼돈’, ‘무질서’, ‘어둠’, ‘고달픈 눈물’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앞으로의 여생(餘生)이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과연 ‘노인’과 ‘희망’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일까요? 모름지기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 합니다.

햇볕이 몹시 내리쬐던 어느 여름 날, 우리보다 훨씬 ‘인생 선배’인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나그네(손님) 형상’으로 나타나십니다. 교부들은 나그네가 ‘셋’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삼위일체’를 봤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그런 주장을 ‘지양’(止揚)합니다. 아브라함은 앞이 트인 A자 모양의 천막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나그네들을 보자마자 단번에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내면의 이끌림’을 받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내면의 감동’을 경험할 때가 있지요. 어떻게 그런 특별한 알아차림의 능력이 그에게서 발휘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생의 경륜’(經綸)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육체의 눈은 흐릿해져도 ‘영혼의 눈’은 더욱 밝아진다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환대’를 제공합니다. 그들이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을 듭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360-1427/1430)는 이 장면을 ‘삼위일체 이콘’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환대’가 이야기 전체의 진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짜 ‘환대’를 받은 이는 오히려 아브라함 자신임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직 이 거룩한 이야기를 온전히 꿰뚫지 못하신 겁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환대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을 최선으로 환대하신 하느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책’이 <성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를 ‘찾아오신 볼일’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전에도 하신 적이 있기에 새로울 것도 없습니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 창세 18:10

천막 문어귀에서 이 ‘신성한 대화’를 엿듣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내인 ‘사라’였습니다.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손님대접을 위해 부산을 떠는 남편을 보고 좀 특별한 이들임을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누구라서 그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식탁에서 들려오는 그 ‘신성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웃고’ 말았습니다. 자칫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올 뻔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 창세 18:12

‘생물학적’(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가능성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사라는 그들에게 ‘냉소’를 보냅니다. 환대에 대한 ‘사탕발림’ 치고는 과하다고 노골적으로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속마음을 그만 들키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 – 창세 18:14

그렇습니다. 그들을 찾아오신 나그네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보여주는 ‘전능성’의 표현입니다. 1독서 《창세기》의 핵심일 뿐 아니라 <전례독서> 모두를 아우르는 핵심이 이 말씀에 집약됩니다. 모든 대화중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입니다. 더욱이 ‘구원의지의 전능성’을 보여주는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말씀은 ‘이사악의 탄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참으로 가리키고자 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분명 <복음서>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신 예수님의 공생애’도 소중합니다. ‘십자가 수난’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놀라운 은총이 있었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말씀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인식’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이 ‘거룩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 민족의 ‘시작’(기원)이 하느님의 ‘전능성’과 ‘창조력’에 전적으로 힘입고 있음을 후손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들의 ‘기원’을 ‘하느님께 연결’하는 민족을 통해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1베드 2:9-10).

비로소 ‘사라’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습니다. 남편이 그토록 의지하던 ‘하느님’이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혼란에 빠졌습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자신이 ‘비웃었다’는 사실을 잡아떼려했지만 벌써 실패했습니다. 이런 ‘사라’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우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는 이러저런 이유를 대며 자신의 ‘의심’을 ‘정당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라보다도 더 ‘의심’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갖다 붙이기도 합니다.

신부님, 지금은 성경의 사람들이 살던 고대와 달리 과학시대입니다.

우리시대 사람들은 ‘과학’을 모든 것의 ‘기준’처럼 사용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우리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전능한 분’임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인생길에 “시달리고 허덕이는” 우리의 ‘애원’에 하느님이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자비하신 분’임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비이성적인 사람이라 냉대하며 찬웃음을 짓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학’은 ‘해석학’입니다. <성경>을 읽는 그 누구라도 ‘해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문자주의’로 대변되는 ‘근본주의’ <성경> 해석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과학주의’에 물든 ‘이성’ 일변도의 <성경> 해석도 경계해야 합니다. ‘문자주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우상화’하고 ‘시적(詩的) 상상력’을 신앙에서 차단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종교화된 ‘이성주의’(과학주의) <성경> 해석은 지나친 ‘엘리트주의’에 빠져 이성으로는 결코 다 담아낼 수 없는 감성, 정서, 느낌, 체험의 영역(영적인 차원이나 내면세계)을 신앙에서 제거해 버리기 쉽습니다. 지나친 ‘삭제’이지요.

우리는 <성경>이 하느님과의 ‘전인격적 관계’ 속에 있던 이들의 ‘증언’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은 분명 ‘이성적 존재’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이성이라는 주체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감성’, ‘정서’, ‘느낌’, ‘체험’까지 포함한 ‘의지적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자연과 우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이어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실 인간의 ‘영적인 차원’이나 ‘심오한 내면세계’는 ‘이성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라와 달리 ‘아브라함’은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그는 말없이 ‘경청’하고 ‘침묵’합니다. 그의 ‘경청’과 ‘침묵’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랐던 그 역시 한 때 ‘사라’처럼, ‘생물학적 근거’를 더 중시했던 ‘불신앙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 창세 17:17

그도 분명 “속으로 웃던 불신앙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하느님’은 그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믿음의 자리’로 불러 세우기 위해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찾아오신 하느님 덕택에 “그 약속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로마 4:21)는 ‘온전한 믿음’을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힘’이자 ‘구원의 근거’라는 말은 언제나 진실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창세기》가 전하는 이 ‘거룩한 이야기’를 ‘해석’해서 들려주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한 권은 오늘 2독서로 낭독한 《로마서》이고, 또 한 권은 《히브리서》입니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서》는 사라와 아브라함 둘 다를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히브 11:11). ‘좌충우돌’했던 아브라함과 사라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물학적인 제한’, 즉 ‘과학’(자연법칙)마저도 ‘초월’하여 인간에게 ‘개입’해 오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선택’한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습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시는 하느님”,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증언하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조’로 살아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처럼,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우리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증언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증언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구원의 하느님을 증언한다고 믿습니다.

반면에 ‘세상’은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을 제시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의심’하게 하는 ‘불행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에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제한하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을 제한하는 그럴 듯한 ‘과학적 정보’와 ‘이유들’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성경>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생물학적(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세상’이 주는 ‘과학적 정보’(이성적 이유)를 선택하고 ‘믿음’을 거기서 멈출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하느님께서 “지금도 우리 삶에 개입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믿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객관적(과학적인, 생물학적인, 수치적인, 수량적인) 정보’를 더 신뢰하고 ‘믿음’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고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갈등하는 우리를 측은히 여기십니다. ‘의심’과 ‘믿음’ 사이를 왕래하는 우리의 마음에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찾아오시고 개입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도 이 ‘거룩한 집’으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들 마음마다 찾아오시어 우리의 발걸음을 ‘거룩한 시간’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거룩한 집과 시간으로 들어오는 모두를 위해 ‘사제’를 시켜 ‘성찬’이라는 ‘환대의 식탁’을 차리게 하시고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식탁에 모여 ‘살아있는 말씀’을 ‘경청’합니다. 선포되는 ‘생명의 말씀’을 듣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믿음’으로 돌아섭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찾아오시어 말씀하시는 주님’ 덕분에 다시 ‘조율’(調律)됩니다. ‘영성체’를 통해 ‘희망’을 ‘양육’ 받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순간 ‘의심의 어둠’이 찾아들었던 마음에는 ‘빛’이 환하게 다시 밝혀집니다.

이렇게 ‘생명의 식탁’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대화하고, 먹고 마시는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희망을 낳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런 은총과 복이 ‘지금 여기’를 채우고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그런 ‘최선의 환대’가 보이는데 여러분도 보이십니까? 참으로 ‘성찬례’는 ‘의심’과 ‘불신앙’에 빠진 우리가 ‘온전한 믿음’으로 깨어나는 ‘자각의 장’(場)입니다. ‘성찬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온전히’ 바라보도록 가리키는 ‘거대한 손가락’입니다.

《시편》으로 찬미한 <116편>은 ‘죽을병’에서 ‘치유된’ 시인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구원의 기도입니다. ‘죽을병’이라는 ‘시련’을 통과한 후 시인의 ‘믿음’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합니다. ‘애원’(기도)을 들으시고 ‘환대’해 주신 하느님, 그 기도를 들으시고 ‘찾아오시어’ 치유와 해방(구원)을 베푸신 하느님께 감사 찬미를 바칩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 나의 애원하는 소리를 들어주셨다. 내가 부르짖을 때마다 귀를 기울여주셨다. – 시편 116:1-2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오늘날처럼 ‘의학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보다는 ‘병원’을 더 ‘신뢰’하기 쉽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의사’보다도 ‘기계’(과학)장비를 더 믿습니다. 감기만 걸려도 사람들이 대학병원을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동네 의원보다도 훨씬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진실은 아닙니다. 분명, 더 최신의 의료장비와 기술은 질병 치료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손길’을 간과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보다도 의사와 의료기계를 더 ‘신뢰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시편》 기자는 교훈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 삶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임재를 기억하라”고 말입니다(시편 116:2,7). ‘질병’이라는 ‘시련’과 ‘고난’ 속에 있을 때, ‘걱정’이라는 ‘어둠’ 속에 있을 때, ‘불안’이라는 ‘무질서’ 속에 있을 때, ‘슬픔’이라는 ‘혼돈’ 속에 있을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함께 계신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말입니다(시편 116:3). ‘생물학적인 정보’와 그 ‘한계만’을 생각하면서 좌절하기 보다는, 어려워 보이는 ‘환경’ 때문에 낙심하기 보다는, “기도로 인내하며 ‘믿음으로’ 하느님께 부르짖으라.”고 교훈합니다.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주시는 자비하신 주님을 기억하라”고 교훈합니다(시편 116:4,7).

시인은 실제로 그렇게 했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오시어 개입’하시고, ‘치유와 해방’(구원)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바쳐 올립니다(시편 116:6,8-9,12-13,17). 우리도 시인처럼, ‘시련’과 ‘어둠’ 속에 있을 때, ‘기도’로 ‘인내’하며 ‘믿음’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 《로마서》의 교훈처럼, ‘고통’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축복합니다. 마침내 그 끈기 속에서 품었던 ‘희망’이 이루어져 하느님께 강력한 ‘감사’를 바쳐 올리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분명 ‘의료인’이나 ‘과학자’도 하느님이 만드셨으니 인생을 살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는 일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 이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무슨 일이든 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먼저 기억’하십시오. ‘기도’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먼저’ 발휘하십시오. 병원을 찾더라도 의사나 간호사의 손길, 그 기계장치들을 사용하시어 우리 삶에 ‘찾아오시고 개입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꼭 간직하십시오.

2독서 《로마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실제적인 ‘유익’(有益)을 교훈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승리의 장’(章)이기도 합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묵상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결 됩니다(로마 4장).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써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 4:18). ‘하느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기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로마 4:20-22). 우리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우리가 누리는, 또 누리게 될 실제적인 ‘유익’(有益)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지금 ‘하느님과 평화’(화해)를 누리고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간은 죄를 지었습니다(로마 3:23). 그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진노’ 아래 있었고 하느님의 ‘원수’였습니다(로마 5:9-10). 더욱이 죄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 3:24).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용서와 은총을 가져온 ‘평화의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정의’가 만족되었습니다(로마 3:25-26). 그 십자가 죽음 덕택에 죄를 용서받고 다시 사는 은총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가는 길’입니다. 아담 이후로 불순종한 인간의 모든 ‘죄 값’은 ‘십자가’에서 지불되었고, 인류는 죄에서 해방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차별 없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고, 지금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로마 3:21-24).

둘째,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아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누리는 지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하느님은 지금 우리를 ‘진노’가 아니라 ‘은총과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분명 우리는 ‘죄성’을 간직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용납하시고, 무한히 은총과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 자신이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증명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종종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으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로는 우리의 ‘믿음이면 충분하다’는 확신을 오늘 줍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조차도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다고 강조합니다(로마 5:6-8). 그렇습니다. 은총과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선행보다 우선이고, 우리가 실천하는 모든 ‘선행’은 자신이 받은 그 은총과 사랑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결코 하느님께 은총과 사랑을 받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이미 베풀어진 은총과 사랑, 즉 구원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우리의 ‘선행’입니다.

날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은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 살아갑니다. 참으로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길이며,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아래 살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으로부터 결코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이것이 진실입니다.

셋째, 우리는 언젠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우리가 누릴 영원한 특권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영원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가족이기에 아버지의 빛나는 얼굴을 보며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 세상 그 무엇도 장차 우리가 참여하게 될 이 ‘영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승리의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평화’와 ‘은총’(사랑)과 ‘영광’에 참여함, 이 세 가지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이들에게 선물된 복이자 ‘실제적인 유익’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로가 이렇게 교훈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있던 서신의 ‘수신자들’은 자칫 ‘사라’처럼 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로가 자신들의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사탕발림’을 하고 있다고 ‘찬웃음’을 지으며 비난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으로 소수자들이었습니다. 소수였기에 ‘박해’로 인한 고통과 시련은 그들 삶의 일부였습니다. 따라서 바울로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음’을 밝혀야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제 3자인 ‘구경꾼’의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시련 속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로마 5:3-4

바울로가 이렇게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역시 자신이 전한 ‘십자가 복음’, 즉 ‘믿음’ 때문에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울로는 ‘복음’ 때문에 ‘고난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과 시련을 상세히 적어놓았습니다(2고린 1:3-11; 11:23-33). 그는 자신의 처지를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으며,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고생과 시련’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의 교우들에게 교훈하는 ‘인내’, ‘끈기’, ‘희망’이 진실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실제적 ‘유익’이 결코 ‘사탕발림’이 아님을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교회가 태동하던 1세기 시절의 바울로와 로마에 있던 교우들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들처럼 ‘믿음’ 때문에 ‘시련’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 ‘시련’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까? ‘시련’ 속에 있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을 느꼈습니까? 우리가 지금 ‘코로나19’가 가져온 ‘시련’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변함없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바울로는 이렇게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 로마 5:5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서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 부족하다면 이것은 ‘성령’으로 그의 내면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령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 넘쳐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할수록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신뢰해도 좋은 ‘근거’를 덧붙입니다(로마 5:6-11). 그 근거는 우리 자신에 기반을 두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이유는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고, 당신과 원수였던 때에도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시어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신 분’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평화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영광에 참여시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평화’(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 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합니다(로마 5:9).

이 시간, 사도 바울로의 이 교훈과 함께 잠시 머무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의심’하던 마음이 조금씩 덜어내 집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 있던 로마의 교우들은 바울로의 서신을 들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코로나19로 힘겨운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 안에도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히 부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제자들과 공유하시는 메시아 사역의 성격을 드러내는 《마태오복음》입니다.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9:35-10:4)는 갈릴래아 지역을 대상으로 펼치신 예수님의 3대 사역과 열 두 제자 명단을 전합니다.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며, 가르치고, 선포하며, 치유의 일을 하시도록 만들었습니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셨다. – 마태 9:36

군중을 향한 예수님의 ‘정서’(情緖)입니다. ‘군중’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오클로스’(ὄχλος)입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든 ‘많은 사람’을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쓰입니다(마태 4:25; 5:1; 7:28; 8:1,18; 9:33; 11:7; 12:46; 13:2; 14:13-15,19; 15:10). 이들은 종교권력자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며 ‘죄인’이라 정죄당한 ‘변두리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종교권력자들로부터 추방당한 이들입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부조리한 사회, 정치, 경제, 종교로부터 ‘인간다움을 박탈당하고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반면에 ‘백성’을 지칭하는 ‘라오스’(λαός)라는 단어도 있습니다(마태 15:8).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사실 바라시이파 사람들은 ‘율법해석’을 두고 예수님과 자주 부딪히곤 했습니다. 이처럼 종교권력자들이 자신들 위주로 세워놓은 ‘율법해석’을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 백성’에 속하면 ‘라오스’이고, 하느님 나라 백성의 자리에서 배제 당한 ‘사회적 약자’이면 ‘오클로스’(ὄχλος)입니다. ‘중심 대 변두리’, ‘내부자들 대 가장 바깥사람들’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는 예수님 곁에 모여든 사람들이 ‘라오스’가 아니고 ‘오클로스’라고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 군중(오클로스)이 예수님 눈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다’(연민憐愍, 측은지심惻隱之心)로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이를 보고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공감의 마음’입니다. 흔히 ‘애간장이 탄다’고 합니다. 아마 꼭 맞는 은유가 “아픈 자식을 보고 느끼는 어머니의 감정”일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를 자신처럼 여기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난 속에 있는 이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신속히 그의 삶에 뛰어 들어가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으로 ‘군중’(오클로스)을 대하셨습니다. 인생들이 직면한 문제를 마음 깊이 공감하셨고 결코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보듬어 안는 ‘참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처럼 자기 내면에서 ‘연민’(憐愍)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일깨우고 키워가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돌봄’(치유)과 ‘인도’가 ‘절실히’ 필요한 그들을 가만 두고 보실 수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착한 목자’ 아래 있으면 해결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의 ‘절박함’(절실함) 뿐 아니라 ‘긴급성’에 비추어 볼 때 혼자서 그 일들을 완수하기에는 몸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 마태 9:37-38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느끼신 ‘긴급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시기는 ‘추수’(심판) 때입니다. 하지만 함께 추수에 참여할 일꾼이 충분치 않습니다. 더 많은 일꾼들을 보내주실 것을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상’이라는 ‘추수 밭’에서 ‘지금’ 추수하고 있는 ‘일꾼’으로, 하느님을 그 밭의 ‘주인’이자 일꾼들이 거두어들이는 ‘수확물의 참 주인’이라 비유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군중의 ‘절박함’ 뿐 아니라 추수 때의 ‘긴급성’ 때문에 특별히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십니다. ‘측은지심’을 간직한 당신과 함께 ‘돌봄’과 ‘인도’, ‘추수’를 수행할 일꾼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갈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절박’하고 ‘긴급’하기에 그들에게 당신의 ‘신적 권능’까지 나누어주십니다. 고대에는 ‘질병’으로 대변되는 불행이 그 사람(혹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 때문이라 믿었습니다. 따라서 ‘신적 권능’을 통해 악령이 내쫓기고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은 악령의 지배가 끝나고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도래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선택하시고 파견하신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열 둘’이라는 ‘수’(數)는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합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출신입니다. 그들이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들이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훌륭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유명 ‘신학교’를 다닌 사람도,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명단의 앞에 나오는 ‘네 사람’은 직업이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먹고 사느라 ‘안식일 법을 준수할 수 없었기에 직업상의 죄인’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열 둘 중 한 명은 로마제국의 앞잡이라 불리던 ‘세리’였습니다. 열 둘 중 한 명은 로마제국의 수배자였던 ‘열혈당원’이었습니다. 게다가 ‘배신자’가 될 사람도 열 둘 중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보잘 것 없고, 전혀 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지심을 간직한 당신과 함께 일할 ‘일꾼’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돌봄과 인도’, ‘추수’라는 말이 가리키는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갈 ‘일꾼’으로 말입니다. 그들이 언젠가 위대해 질 것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이야말로 이제부터 자신들이 해야 할 그 일을 ‘절박’하게, ‘긴급’하게, 필요로 했던 인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착한 목자’아래 있을 필요가 있었고,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나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 같은 ‘사제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성직자’가 원하는 만큼 성품이 탁월하거나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일차적으로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이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명 지금의 성직자에게 ‘여러분이 긴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면이 발견되면 그 성직자를 통해 여러분이 깨닫고 성직자를 위해 기도해 주라는 뜻에서 주님께서 여러분 곁에 두셨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위대해지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정말이지 ‘측은지심’으로 성직자를 대하는 신자 수준이 교회의 수준이고, 그것이 그대로 그 교회 성직자의 수준으로 나타납니다. 수준이라는 말에 ‘숫자’를 대입하는 이들은 어리석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숫자’에 속아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제 앞으로 <복음서>를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예수님도 그들의 ‘믿음 부족’ 때문에 종종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러나 점차 그들은 신실한 사람, 즉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 갑니다. 심지어 스승을 배반한 자신들의 과거까지 잊고서 기꺼이 ‘순교’에 이를 정도로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님이 주신 자신들의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는 ‘성직자’가 사도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전반부는 ‘돌봄’과 ‘인도’(지도)를 절박하게,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군중들에 대한 예수님의 ‘측은지심’과 ‘제자들을 선택’하신 이야기입니다.

후반부(10:5-8)는 예수께서 선택하신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사도’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사도’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는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메시아 사역’을 공유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누어주신 그 ‘신적 권능’을 가지고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찾아 가야 합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이 ‘절실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성취하신 후에는 ‘모든 민족’에게로 가야 합니다(마태 28:19).

그들이 가서 수행해야 할 일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늘나라가 다가 왔다”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적 권능을 통해 그들의 선포가 진실임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주신 ‘권능’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치유하고, 인도하며, 하느님의 나라로 추수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의’(注意)를 당부합니다.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 즉 ‘사회적 약자들의 필요’를 채워주었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뭔가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대가’(代價)도 요구하지 않고 사도들에게 ‘무상’(無償)으로 ‘신적 권능’을 주신 것처럼, 사도들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대가’(代價)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에게 베푸신 분에 넘치는 사랑과 구원의 ‘대가’(代價)는 ‘무슨 일이라도 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이미 전액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는 ‘고달픈 시련’ 속에 있던 이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세워주시기 위해 찾아오시고, 그들을 ‘최선으로 환대’해 주신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묵상하는 동안 ‘시련’ 속에 있는 이 땅의 고달픈 얼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빈부격차 속에서 사회 가장 자리로 밀려나는 고달픈 인생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위기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지치고 기가 죽은 ‘사회적 약자들’은 ‘돌봄’(치유)과 ‘영적 안내’와 ‘평화’를 너무나 갈망합니다.

우리는 그 갈망들에 예수님처럼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마음은 예수님이 간직하신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시달리고 허덕이는” 군중과 한 마음이 되셨습니다. 그 ‘측은지심’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는 그 마음을 배우고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이 땅에 남기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당신의 권능을 주시어 세상에 파송하신 ‘사도들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성경>은 ‘고달픈 시련’ 속에 있는 사람들, 특히 ‘약자들의 애원’을 들으시고 함께 하신 하느님을 증언합니다. 다음 주일 우리가 1독서로 낭독하게 될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가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창세 21:8-21). 오늘 복음이야기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측은지심’으로 ‘고달픈 얼굴들’과 함께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사도들을 파송하시어 ‘측은지심’ 속에서 당신의 일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돌봄과 치유를 수행하며,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교회 역시 ‘측은지심’을 회복하고 이 ‘거룩한 임무’에 나서야합니다. 예수님처럼 교회는 ‘시달리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고달픈 얼굴들’을 향한 ‘목자’여야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삶이 무엇인지 그 ‘섬김의 삶’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평화’가 이 땅에서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자신을 바치는 ‘평화의 일꾼’이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교회는 ‘학벌의 악령’에 붙잡힌 세상을 끝내는데 앞장 서야 합니다. ‘경제력의 악령’이 대우받는 차별의 세상을 끝내는데 앞장 서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은 산업화, 정보화, 자동화를 넘어 ‘지능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학위를 갖고 지식과 정보로 자신을 채운다 하더라도 ‘인공지능’을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공지능’이 수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것입니다. 이 도도한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구조’를 신속히 만들어내야 합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부의 편중’을 막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능력주의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낡아빠진 사회시스템을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세금’을 덜 내려다 부끄러운 꼴을 당하는 데, 역설적이게도 ‘지능화’의 최상층에 있는 ‘세계의 재력가’들은 ‘세금’을 더 내겠다며 부자 증세를 요구하고 있답니다. 그들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상품을 생산해도 가난 때문에 구매할 소비자가 없으면 그들의 사업도 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영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존중받고 대우받는 하느님 나라가 어서 속히 이 땅에 오게 해야 합니다. 특정 계층만 대우받는 ‘능력주의’ 세상을 넘어 ‘능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의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식탁이 열려있고, 누구나 더 높은 ‘삶의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교회는 앞장 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모으지 않으면 그리스도교는 설 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에는 누구도 꿈꿀 수 없었던 ‘최선의 세상’, 즉 ‘하느님 나라’를 꿈꾸셨고, 세상을 한복판에서 그 나라를 일구는 모습을 ‘온 몸’을 던져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읍니다.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인 ‘측은지심’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이유를 ‘섬김의 삶’을 통해 성취하는 ‘믿음의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몸에 속한 지체들답게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 나라 사명을 수행할 ‘권능’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신 하느님’, ‘무슨 일이든지 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성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속에 있는 우리입니다. 우리 역시 시달리고 허덕이던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신 하느님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데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수행해야할 ‘무슨 일’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의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사랑의 일’을 통해 세상에 ‘희망’을 낳는 우리여야 합니다. 이미 받은 ‘은총과 사랑’, 베푸신 ‘구원’에 감사하는 우리여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마다에서 측은지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믿음의 일꾼’으로 응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2020. 6.14. 연중11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20. 8. 2. 연중 18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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