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3. 부활4주일(가정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부활 4주일이자 가정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십자가, 착한 목자께서 목숨을 바쳐 열어주신 영생의 문’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구원, 즉 생명은 유일한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 문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생명을 바쳐 세워주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덕택에 죄를 용서받고 구원 얻은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잘 따라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이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가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의 거룩하신 자취를 따라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42-47
  • 시편 – 23
  • 2독서 – 1베드 2:19-25
  • 복음서 – 요한 10:1-10

부활 4주일이자 가정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십자가, 착한 목자께서 목숨을 바쳐 열어주신 영생의 문’입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부활 4주일은 ‘착한 목자 주일’로 불립니다. <전례독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우리’(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봄 속에 있는 우리, ‘영생의 문’이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통해 하느님의 가족으로 들어온 ‘교회’(양우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래 우리는 ‘그리스도의 우리’(교회)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며 ‘도둑’과 ‘강도’의 위협 아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찾아와 주시어 착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 이름을 불러 당신 몸인 ‘교회’(양우리)로 데려오셨습니다. 양들인 우리가 ‘교회’(양우리)로 들어오는 ‘은총의 문’은 ‘세례성사’입니다. 그 ‘양우리’(교회)로 드나드는 착한 목자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문’은 ‘십자가’입니다.

 

이제 우리는 ‘양의 문’이신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덕택에 ‘한 목자’ 아래 살아가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아시고 불러내주시는 착한 목자를 뒤따르며 ‘좋은 풀’을 먹습니다.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아래 살면서 ‘풍성한 생명’(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이렇게 주님과 우리가 하나로 연합된 ‘친밀한 관계’를 ‘목자와 양의 수수께끼’로 들려주는 <전례독서> 배정입니다.

더불어 착한 목자의 보호 속에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불의한 사회구조 속에 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들려줍니다. 불의한 현실을 다 바꾸어낼 수 없더라도 ‘우주의 참된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삶을 의탁하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겸손을 들려줍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정의의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궁극적 희망’을 두라는 복음의 정수들이 <전례독서>로 배정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각각의 <전례독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세례’를 통해 ‘참된 목자의 보호 속’에 들어온 ‘교회’(신도들의 모임)의 ‘역동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세례’를 통해 착한 목자의 양떼가 된 신도들이 영혼의 눈을 뜨고,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물질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일컬어지는 ‘시간’을 함께 공유합니다. 그들은 함께 영혼의 집을 지어간 한 몸, 새 가족 공동체였습니다. 그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 가족은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주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다윗은 양을 치던 목동 출신입니다.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사울의 뒤를 잇는 왕으로 세웠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명성만큼이나 허물도 많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죄악을 ‘회개’할 줄 아는 ‘겸손한’ 왕이었습니다.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을 끝까지 믿었던 왕이었습니다. 평생토록 주님만을 ‘유일한 목자’로 믿고 따랐습니다. 연약한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랑해 주시는 목자이신 주님과 평생토록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분에 넘치는 ‘은총의 연속’임을 온전히 깨달은 왕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다윗을 예수님의 조상으로까지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이미지를 ‘목자’로 떠올릴 때면 누구나 ‘다윗의 시’를 노래할 정도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다윗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2독서 《베드로전서》는 ‘세례’를 통해 ‘참된 목자의 보호 속’에 들어 온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단락(1베드 2:11-4:11)에 속합니다. 사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박해와 고난의 시절을 살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1베드 1:17). 저자는 그들에게 당시의 불의한 사회 구조와 조건을 바꾸려하기보다 그 제도에 적응하면서 ‘선’(착한 일)을 행하기를 권면합니다. 오늘날처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고, 인권 탄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가 듣기에는 당혹스런 말씀도 나옵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본문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그들이 당하는 박해와 고난을 어떤 마음으로 궁극적으로 이겨낼 것인지를 교훈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착한 일’(선)을 행하시다가 반대자들로부터 모욕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욕으로 되갚거나 위협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그 전능하신 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모든 일을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겸손과 인내와 믿음의 발자취’는 모든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할 본보기입니다. 특히 불의한 세상 속에서 박해와 고난을 당하지만 당당히 하늘나라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그들에게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자 ‘미가’의 말씀처럼(미가 2:12-13), 서로 다른 우리를 ‘한 가족’으로 불러 모아 ‘한 우리’에 모아주신 ‘목자’이신 주님, ‘보호자’이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발자취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본문이 전하려는 교훈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저자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해(이사 53:4-7, 9, 12)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 보이신 인내의 본보기와 그 고난을 통해 이루신 ‘구원과 부활의 은총’(영원한 생명, 義)을 요약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정의의 심판관’이신 하느님께 마지막 ‘산 희망’을 두라는 권면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목자와 양’의 신비스러운 ‘수수께끼’를 전하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배정했습니다. 특히 ‘부활 4주일’에는 《요한복음》 10장이 <복음서> 본문으로 해마다 배정됩니다. 참고로 해마다 배정되는 <복음서> 본문은 ‘가’해 1-10절, ‘나’해 11-18절, ‘다’해 22-30절입니다. 예수님은 이 ‘신비스러운 수수께끼’를 통해 ‘그 목자와 양’이 누구인지 알아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아쉽게도 ‘가’해처럼(요한 10:1-10) <복음서> 본문을 배정한 경우 이 수수께끼 본래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선언’도 ‘나’해에 배정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해 본문에도 “나는 문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이 나옵니다. 하지만 대다수 신자들은 ‘나’해 본문이 ‘목자와 양’의 수수께끼 본래 핵심과 더 어울려 보인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일상에서도 “나는 문이다”보다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를 더 자주 떠올립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은 10장 전체를 염두에 두고 말씀나눔을 진행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만큼 “나는 문이다”라는 자기선언도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난 ‘사순절’ 동안 ‘세례교육’을 받던 ‘예비신자들’은 은유적으로 말하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문’ 근처에 있었던 셈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성체’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전야’가 되면 그들은 ‘세례성사’라는 ‘문’을 통해 비로소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됩니다. 서로 다르나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를 나눕니다. 주님의 몸인 ‘영성체’를 나눕니다. 오랜 동안 ‘교회 문’ 밖에 있다가 ‘영원한 친교 안’으로 들어 온 그들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는 다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제 ‘교회 문 안’으로 들어온 새신자들은 ‘착한 목자’이신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좋은 풀’과 ‘풍성한 생명’을 얻는 ‘양’이 됩니다. 주님의 음성에 ‘친숙해’ 지는 법을 교회 안에서 배워갑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정체성과 새 삶의 목적을 교회 안에서 배워갑니다. 그 기간이 바로 ‘부활절기’입니다. 실제로 부활대축일 이래로 주일 감사성찬례 <복음서>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봄’, ‘알아차림’과 관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예수님이 내시는 ‘목자와 양’, ‘문’이라는 신비스러운 수수께끼를 ‘깨닫는 이의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두운 눈’과 ‘닫혔던 귀’가 열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 뜸’(열림)의 이야기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도록 계속해서 ‘빛’을 비추시는 이야기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영접하는 ‘구원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밝혀주는 이야기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풀’을 먹도록 항상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계시하는 이야기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 ‘좋은 풀’을 세상의 성공이나 부귀영화쯤으로 축소시켜 보려는 우리의 눈높이를 높여주시는 이야기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의 고귀함’을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지혜가 그리스도교입니다. 흠이 많은 우리를 용납하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 은혜와 자유의 삶을 얻게 하시는 착한 목자께로 인도하는 수수께끼가 그리스도교입니다.

예수님이 내주신 이 수수께끼를 듣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무슨 뜻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잘 깨닫는 은총 속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분의 돌봄 속에 있는 축복된 ‘양우리’(교회)임을 ‘알아듣기를’ 축복합니다. ‘양떼’인 우리에게 있어서 ‘착한 목자’는 예수님뿐임을 온전히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와 함께 이제 한발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거리를 걷다보면 외벽에 ‘목자와 양’ 그림을 장식한 교회 건물을 보게 됩니다. 쳐다보는 이들에게 잠시라도 위안을 주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양’이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흔히 “양은 순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양띠들은 성격이 온순하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선언’(자기고백)을 하자면 ‘양’은 순할지 몰라도 “양띠가 온순하다”는 말은 착각입니다. 아주 잘 아는 사람 중에 ‘양띠’가 있는데, 엄청 사나운 ‘이리 띠’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저’ 말입니다.

지난 4월 15일,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악한’, ‘나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후보자들이 당선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국민들이 그런 후보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의식’을 주님께서 선물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추악한 발을 ‘민의의 전당’에 더 이상 디딜 수 없도록 하여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선거 결과가 나온 지 벌써 20여일이 되어갑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말로 그런 ‘악하고, 나쁜 이리 같은 후보자들’이 잘 걸러졌습니까?

며칠 사이 몇몇 당선인들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당선인은 ‘김정은 사망관련 가짜뉴스’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더불어시민당’의 한 비례대표 당선인은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제명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두가 졸속으로 만들어진 위성정당의 허술한 검증이 발단입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선거운동은 ‘코로나19’ 여파로 비교적 조용히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거리마다 엄청난 양의 ‘선거현수막’이 내걸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같이 자신이야말로 지역과 나라를 살릴 최적임자라고 거창하게 홍보하고 다녔습니다. 현수막에 적힌 ‘선거표어’는 다른 후보자와 자신을, 혹은 다른 정당과 자신의 정당을 차별화시키려는 ‘자기선언(自己宣言)’, ‘자기정의(自己定義)’, ‘자기정체성(自己正體性, self-identity)’ 전략에서 나왔습니다.

그 ‘선거표어’를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기선언’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코로나19의 충격’과 ‘상실의 아픔’을 겪는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기선언’을 요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해보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해 ‘자기선언의 요청’은 “너의 행동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하라”는 요청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백 마디 자기선언보다 마스크 한 장 나누는 행동이 진정한 자기선언입니다. 현수막에 적힌 선거표어처럼, 말뿐인 자기선언이 아니라 듣는 이들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런 삶의 내용이 담긴 자기선언이라면 잘 살아온 인생이겠지요.

사실 《성서》를 보면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서도 감히 ‘자기선언’을 요구했습니다. 하느님은 “불붙은 떨기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그 소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어라. – 출애 3:10

그 소명 앞에서 모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 출애 3:13

감히 하느님을 향해 ‘스스로를 정의해 보라’는 ‘자기선언의 요청’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곧 나다. – 출애 3:14

히브리어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Ehyeh asher Ehyeh, I am who I am)라는 ‘이름’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의 자기선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신’(神)들은 다른 ‘신’(神)들과 구별하기 위해 ‘고유명사’(이름)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어떻습니까? ‘이름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하며, 유일한 참 ‘신’(神)이시기에 ‘상대적 관계’임을 보여주는 ‘고유명사’마저 필요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과 달리 ‘원인’과 ‘결과’라는 ‘상대성’과 ‘의존성’을 벗어난 존재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나다’라고 칭하시지만 우리는 ‘그분’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요한복음》에도 예수님의 ‘자기선언 7개’가 전해집니다. 그리스어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이다)로 시작합니다. 하나같이 예수님이 ‘정체성’을 밝혀주시는(계시하시는) ‘자기선언문’입니다. 신학자들은 ‘에고 에이미’가 하느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는 하느님의 이름처럼, 예수님을 ‘창조주 하느님과 동일시’했던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7개의 자기선언은 각각의 선언(약속)을 성취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과 맺는 개인적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또한 주님과 무조건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줍니다. 더욱이 선언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우리 서로를 통일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7개의 자기선언문은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 관한 것이고 동시에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것입니다. 7개의 자기선언문에 사용된 이미지와 은유를 간단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 요한 6:35,4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양식’이시기에 제자도란 ‘식탁 주위에 함께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 요한 8:12,9:5

예수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의 참 빛’이시기에 제자도란 ‘우리 내면의 어두운 구석에서 나와 소통을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 요한 10:7,9

예수 그리스도는 양이 안전하게 드나드는 ‘진정한 문’이시기에 제자도란 ‘유일한(공인된) 구원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 드나들며 생명의 꼴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 요한 10:11,14

예수 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존재하는 ‘착한 목자’이시기에 제자도란 ‘예수님의 돌봄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행복을 찾는 양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요한 11:25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제자도란 ‘영원한 여정을 향한 순례’임을 의미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6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제자도란 ‘따라야 할 길(진리, 생명)을 공동체가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 요한 15:1,5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이시기에 제자도란 ‘가지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열매 맺는 삶’을 의미합니다.

물론 7개의 자기선언문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서 통일됩니다. 만일 ‘십자가’가 없었다면 이들 자기선언문 중 어느 것도 진실이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자기선언문을 ‘수렴’하며, 우리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완전한 전환점입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복음이야기에 등장하는 “나는 문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을 다룰 수 있는 기초를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복음이야기의 ‘수수께끼’는 어떤 배경에서 나왔습니까? 《요한복음》에 기록된 여섯 번째 표징, 즉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주신 기적이야기를 둘러싼 논쟁 때문입니다(요한 9:1-41). 유대인들(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로 대변되는 종교지도자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에’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고, ‘세상의 빛’이심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불신앙의 대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여섯 번째 표징을 통해 영적으로 눈 먼 그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온전한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대제사장들, 율법교사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불신앙’ 때문에 ‘영적으로 눈먼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여기에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불신앙에 빠진 그들의 태도를 책망하시며 ‘두 개’(요한 10:1~5, 7~18)의 신비스러운 ‘수수께끼’를 이야기 하십니다. 이 수수께끼는 예수님 공생애 당시의 상황이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세대에 걸쳐 예수님과 교회(제자)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1차적으로는 로마제국의 박해시절을 살던 1세기 가정교회를 향한 위로와 용기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교회를 위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전반부(1~5절) 수수께끼부터 보겠습니다. ‘양우리’에 있는 양들을 두고 합법적이고 정당한 지도력이 있는 ‘목자’와 ‘도둑(강도)’이 대비됩니다. 둘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간다. – 요한 10:1-2

그 기준은 ‘문’입니다. ‘문’은 ‘양우리’에 접근하는 ‘공인된 유일한 통로’입니다. 어째서 양들을 넣어두는 ‘양우리’가 필요했을까요? 고대 근동에서 목자들은 집을 나서면 며칠씩 양떼를 몰고 다녔습니다. 식량으로 빵, 말린 무화과, 치즈 같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대부분은 혼자서 양떼를 돌보았습니다. 피리나 단순한 악기를 만들어 갖고 다니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포식자나 비바람을 피할 ‘동굴’을 찾아 ‘방목’(放牧)하던 양떼를 피신시키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목자가 입구를 지키는 ‘문’ 역할도 하면서 양떼를 지켰습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목자는 근처 마을로 양떼를 몰고 와 ‘공동 우리’에 넣어둡니다. ‘공동 우리’는 양떼들에게는 피난처이고, 목자들에게는 휴식처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 ‘도둑’이 들어올 수 있었기에 ‘공동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목자는 ‘문지기’에게 양떼를 잠시 맡기고 여관에 들러 먹을 것을 보충하거나, 밤을 쉬었습니다. 이렇게 ‘양우리’는 영원한 거처가 아니라 잠시 넣어두는 곳입니다. 비바람이나 포식자, 도둑이나 강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잠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날이 밝으면 ‘목자’는 ‘공동 우리’로 갑니다. 자신이 양떼를 맡긴 정당하고 합법적인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문지기’는 양을 맡긴 ‘목자’인지만 확인하고 ‘문’을 열어줍니다. ‘목자’가 몇 마리를 데려왔는지 ‘문지기’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 목자’만 좇아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양들이 ‘자기 목자’를 알고 좇아갈까요? 멀리서도 목자의 얼굴이나 차림새를 알기 때문일까요? 양은 시력이 매우 약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력보다는 다른 감각을 이용한다는 뜻이겠지요.

동물학자들에 따르면 “양은 똑똑하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이 자기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이 감각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시력은 나쁘지만 ‘올바른(친숙한) 음성’만을 따를 정도로 충분한 ‘분별력’을 양은 갖고 있습니다. 결코 아무 음성이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사실 자기 보호 능력이 거의 없어서 언제나 위험에 노출된 양들이기에 ‘분별력’ 있는 ‘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실제로 양들은 목자가 ‘문’으로 들어가서 ‘피리’를 불거나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목소리’를 내면 그 ‘익숙한 소리들’을 알아듣고 밖으로 나와 뒤따라갔습니다. 자기 양떼인데 따라 나오지 않으면 목자는 다시 가서 ‘이름’을 부르거나 ‘소리’를 냈습니다. 양들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아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이 신비스러운 수수께끼에서 ‘문’으로 버젓이 들어가는 ‘목자’는 예수님입니다(요한 10:2-3).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십니다(요한 10:11). 반면에 딴 데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강도)은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 즉 눈이 잘 보인다고 말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요한 10:1). 그들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책망한 ‘나쁜 목자들’(예레 23:1-2), 다른 말로 하면 ‘삯꾼’입니다(요한 10:12). 동시에 그 ‘도둑’(강도)은 초대교회를 침략하고 파괴하려 했던 1세기 ‘로마제국’입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양우리’가 ‘교회’라면, ‘도둑과 강도’는 이단들(사이비 가르침)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 요한 10:10a

예수님은 ‘그 문’이 아니라 ‘딴 데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과 강도’를 조심해야 함을 명백히 경고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경고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도둑(강도)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교회로부터 양들을 훔쳐가고, 양들의 목숨을 없애는 일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코로나19 대확산의 기폭제였던 31번째 확진자가 속한 ‘신천지 이단’에서 그 실체가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세상에는 ‘목자의 탈을 쓴 이리’,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도둑들, 즉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인들과 거짓 교사들은 ‘양우리’(교회) 밖으로 나오라고 신자를 꼬드깁니다. 우리의 ‘교회’(양우리)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기에 어서 떠나 자기들에게 합류해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믿음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건전한 믿음’을 공격합니다. 어떤 사이비 종교인들은 ‘부활 신앙’이나 ‘재림’에 대한 희망은 ‘맹목적 믿음’이라고 공격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지막 말은 ‘죽음’일 뿐이라고 속삭입니다. 그 꼬드김과 유혹,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면 ‘영혼의 멸망’뿐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이단과 사이비들로 인해 관계가 파괴되고,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욱이 밖이 아니라 우리 속으로부터 그런 유혹과 꼬드김이 시작될 때도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들’ 말입니다.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꼭 좋은 결과”를 이루는 것은(로마 8:28) 아닐 수도 있다는 ‘불신앙의 생각’이 우리를 꼬드깁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는 것은(로마 8:29-30) 아니라는 ‘교만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면서 더 푸르른 목초지를 끊임없이 탐색하고자 하는 ‘허탄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목자의 음성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라는 감정들이 일어납니다. 꾸준한 기도생활 말고 더 쉽고 편안한 길이 있는 것처럼 ‘그릇된 희망’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유혹과 꼬드김에 속아 넘어가 스스로 잘난 체 하게 되면 우리는 정말로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사실 한 때 우리도, 2독서 《베드로전서》의 교훈처럼, 길 잃은 양처럼 살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맸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영적 감각을 잃고 헤맸습니다. 우리 영혼을 훔쳐가고 죽이는 거짓된 가르침들에 빠져 살기도 했습니다. 이러저런 ‘도둑과 강도들’에게 시달림을 겪기도 했습니다. 바깥세상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 때문에 시달림을 겪기도 했습니다. 성시로 노래한 다윗의 시처럼, 우리는 주님이 돌보시는 ‘양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요한 10:16a).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그 ‘양우리’로 데려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요한 10:16b). 때가 되자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착한 목자’이신 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하셨습니다(요한 10:16c).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고 어느 날 삶의 방향을 돌이켰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들어와 ‘한 목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참된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충분한 ‘분별력’을 갖고 지금은 건강한 ‘양우리’에 살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 온 우리의 생명, 즉 ‘양우리’에 있는 양들의 생명은 자신을 ‘찾아온 목자의 음성’(소리)을 ‘잘 알아듣는’ 데서 결정됩니다. 《성경》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구원’이란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기 양들을 찾아오시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데려가시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자기 양이 아닌 이들에게는 찾아가시지도 않으며, 주님의 양이 아닌 이들은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미리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정하신 때에 그 계획을 완벽히 이루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이사 43:1-7, 요한 6:37).

이처럼 ‘구원의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언제나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부르셨음을 찬미하고 감사하기 위해 오늘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길을 잃고 울던 우리를 주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성실하게 우리와 관계하신다는 이야기가 《성경》의 증언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작하시고, 진행하시며, 완성하신다는 가르침이 《성경》입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자라난다는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교입니다.

다른 한편 ‘양우리’가 갖는 상징은 ‘교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의 세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11장에 기록된 ‘라자로’에게 하신 것처럼, ‘죽음의 무덤’에 있던 우리에게 찾아오시어 ‘이름’을 불러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데리고 나가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여기서 ‘교회’란 말의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밖으로 불러내다)의 뜻이 밝혀집니다.

이제 ‘교회’인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죽음의 세상’에 보내신 영혼의 ‘유일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아는 이들’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아는’ 이들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친밀히 아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이 ‘죽음의 세상’으로부터 불러내 ‘영원한 하늘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아차리게 하는 내면 깊은 곳에서 들리는 그 ‘유일하고 익숙한 음성’을 ‘잘 경청’하는데 달려 있습니다.

날마다 ‘수행’하는 규칙적인 ‘성경묵상’과 ‘기도’가 그 경청의 기술을 향상시켜 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수행’처럼 이어가는 꾸준한 ‘성경묵상’과 ‘기도’는 우리를 ‘순전한 양’으로 변화시켜내는 ‘맑은 힘’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은 양으로 빚어가는 ‘창조의 힘’이 있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일이 그 ‘알아들음(알아봄)의 수행’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이 내신 전반부 수수께끼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설자는 전해줍니다(6절).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과 교회(제자)의 관계를 묘사하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내십니다. 그것이 후반부에 이어집니다.

후반부(7-10절) 수수께끼는 ‘문’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양들이 안전하게 마음대로(자유롭게)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는 ‘문’이라는 자기선언입니다(요한 10:7,9).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 요한 10:7

‘문’이라는 이미지를 다시 사용하여 전반부와 연결시킵니다. ‘문’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목자가 누구인지 식별하는 기능을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양 입장에서 보자면 ‘문’은 ‘안전한 양우리’, 즉 ‘피난처’(구원)로 들어가는 ‘공인된’ 통로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생명) 먹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요한 10:9).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문’은 문지기인 하느님 아버지께서 승인하시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처럼 ‘문’을 통하지 않고 어떤 목자도 양들을 만날 수 없고, 양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셈입니다.

우선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고, 유일한 기초라는 뜻입니다(요한 14:6). 유대인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이미 ‘구원’ 얻은 존재로 여겼고, 메시아가 오시어 자신들의 ‘구원을 현실화’시킬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선민사상(選民思想)’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기존의 ‘희생제사 중심의 성전체제’가 유일한 ‘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선민’(選民)이라는 그들의 특권의식과 교만한 믿음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낡아빠진 ‘성전체제’라는 방법으로 ‘양우리’에 들어가려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 역시 구원이 필요한 가련한 민족일 뿐입니다. ‘구원’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요한 1:13; 3:6).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이 ‘성육신’하실 필요도 없었고, 십자가도 필요 없었으며, 부활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낡아빠진 성전체제가 아니라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고, 유일한 기초입니다. 간단히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문지기’인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 신자 중에도 이 진리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신자라면서도 이런 믿음을 말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향해 ‘속 좁은 근본주의자’라고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또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잘 사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구원과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초대교회는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 다른 방법은 거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구원’, 즉 ‘영원한 생명’은 ‘유일한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사도 4:12). 왜냐하면 그 ‘문’은 2독서 《베드로전서》가 교훈하듯이 예수님이 생명을 바쳐 세워놓으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도덕적 삶이나 윤리적 삶, 과학과 철학, 심리학이나 경제학, 명상이나 사회제도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즉 속죄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값을 그 ‘십자가’에서 다 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신’(神)이 인간을 위해,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수수께끼 말미에 이 진리를 명백히 들려주십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 요한 10:10

이 선언 속에 ‘착한 목자’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명백히 증언됩니다. 일반적으로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원해서 양들을 기릅니까? 다시 말해 목축업자들에게 있어서 ‘양들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돈’입니다. 양들은 주인에게 있어서 ‘수익’을 위한 수단입니다. 양들은 ‘자기 주인을 위해’ 존재합니다. 양들은 주인을 위해 팔려갑니다. 양들은 주인을 위해 죽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반대의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와 양’의 은유(수수께끼)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차용될 때는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특별히 예수님께 ‘착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 요한 10:11

놀랍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희생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착한 목자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양’을 위해서입니다. 양으로부터 자기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양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이가 ‘착한 목자’입니다. 이런 ‘목자’는 세상에 없을 뿐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저 같은 양띠 사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예수님이 그 불가능을 해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저주요,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평화’를 누립니다. 착한 목자이신 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불순종의 상처로부터 ‘나음’을 입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분의 죽음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알렐루야!

어떻게 이런 불가능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친밀함’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 요한 10:3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 요한 10:14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 요한 10:27

그렇습니다. ‘양들’인 우리에게 있어서 ‘착한 목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양들’인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목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역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그리되었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3편>은 이것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은 많은 허물이 있는 왕이었지만, 평생토록 주님을 ‘착하고, 유일한 목자’로 믿고 따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과 평생토록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는 부활하신 주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우리’(교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봄 속에 있는 우리, ‘영생의 문’이신 부활의 주님을 통해 하느님의 가족으로 들어온 ‘교회’(양우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첫 걸음에는 ‘세례성사’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시키는 ‘세례성사’ 말입니다.

전통적으로 부활절기(부활대축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의 50일간)는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새신자들이 새로운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배워가는 기쁨의 시기입니다. 아시다시피 교회사에서 서기 313년에 있었던 ‘밀라노 칙령’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이 선포되어 비로소 ‘박해’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 칙령이 있기 전까지 초대교회의 개종자들은 최대 3년에 걸쳐 ‘은밀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우며 ‘세례’를 준비했습니다. ‘세례’ 후에야 교회공동체의 친교 속으로 받아들여졌고, ‘영성체’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어느 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박해시절이니 어쩌면 당연합니다. 더욱이 2독서 《베드로전서》가 증언하듯이 그 시절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과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용기’였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고, 그렇게 얻은 그리스도인이란 새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삽니다. 신자교육도 그리 엄격하지 않고, 세례성사를 받는 일도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엄중한 일이 아닙니다. 몇 주나 몇 달 만에 교육을 수료하고 주일성찬례에서 ‘세례성사’를 받습니다. 그 순간부터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친교를 나눕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영향력은 어떻습니까? 초대교회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세례성사’는 축하할 일이 맞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인지는 많은 의문이 남습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신자들에게 진정한 그리스교 공동체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들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냈습니다. 성령을 통해 ‘영혼의 눈을 뜬’ 사람들은 물질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일컬어지는 ‘시간’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영혼의 집을 지어간 새 가족 공동체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입니다. ‘물질’(재산)을 획득하고, 축적하며, 풍부히 소비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움’과 ‘우울’과 ‘허무’에 시달립니다. 어느새 신자들도 그런 ‘병든’ 모습을 따라가느라 예배와 친교, 소통과 나눔을 위한 시간들은 뒷전입니다.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더해 주실 ‘풍성한 생명의 시간’을 교회마저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선물들을 교회 안에서 함께 나누고, 서로를 돌보는 그 ‘생명의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살아낼 때 주님은 구원 얻는 사람들의 수도 늘려주실 것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3편>과 2독서 《베드로전서》와 복음이야기 《요한복음》 10장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친밀한 사랑’을 증언합니다. 주님은 양들의 풍성한 생명을 위해 존재하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또한 주님은 아버지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 즉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영접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문’이시자, 길을 잃은 양들을 인도해 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양우리’에 들지 않은 ‘길 잃은 많은 양들’이 있습니다(요한 10:16). 착한 목자 아래 있지 않은 많은 양들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영접하시는 ‘문’이시자,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그 양들을 위한 ‘구원의 뜻’도 가지고 계십니다.

사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양들인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시려는 이유는 우리만 그 ‘복’을 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양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한 ‘길 잃은 양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도 ‘착한 목자’를 갖지 못한 ‘길 잃은 양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도둑과 강도들에 시달리는 ‘길 잃은 양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두를 ‘한 떼’로 불러 모아 ‘한 목자’ 아래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를 새 생명으로 불러주시는 참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잘 알아듣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감동시켜 주시어 교회를 살리는 ‘생명의 시간’을 더 많이 갖게 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교회를 위해 나누는 결단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사랑으로 허락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잘 따르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교회는 세상에 건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주님은 구원받을 사람을 우리 공동체에 더 붙여주시고, 교회가 예수님처럼 세상을 살리는 착한 목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진정 그리되는 ‘주님의 한 가족’이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