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6. 부활 3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부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감사성찬례, 마음의 감수성이 되살아나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사랑과 은총의 시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희망을 잃고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동행해 주십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빵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참된 희망이신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도록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도 성찬례를 통해 마음의 감각이 되살아나 잘못된 생각이 바로잡히고, 참된 희망의 사람으로 눈뜨기를 기도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죄로 잃어버린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시어 담대히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선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14상, 36-41
  • 시편 – 116:1-4, 12-19
  • 2독서 – 1베드 1:17-23
  • 복음서 – 루가 24:13-35

부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감사성찬례, 마음의 감수성이 되살아나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사랑과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 고전소설 중에 《춘향전》이 있습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몽룡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나타납니다. 자신과 춘향을 위해 ‘치성’(致誠)을 드리던 ‘월매’에게 찾아가지만 푸대접을 받습니다. 자신 때문에 옥살이 하던 ‘춘향’이에게도 찾아갑니다. 다들 그의 ‘남루한 행색’(行色) 때문에 ‘어사’(御使)란 사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내일 아침’이면 좋은 일이 있을 터이니 ‘희망’을 가지라 했지만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소설 끝에 ‘변사또’로부터 춘향이를 구해낸 이몽룡은 ‘가락지’를 전해주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춘향은 얼굴을 들어 나를 보라.” 너무나 ‘친숙한’ 목소립니다. 고개를 들던 춘향이는 마음이 활짝 열려 소리칩니다. “서방님!” 해피엔딩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의 엠마오의 동행’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의 위대한 ‘동반자’이신 부활의 주님을 그림처럼 증언하는 사랑스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복음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을 매료시킨 주제였습니다. ‘루가’의 의도를 세밀하게 담아낸 영감 받은 작품 한 점이 어쭙잖은 설교들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이 사랑스럽고 연민 가득한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춘향전》이 떠오릅니다.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임이 그 ‘행색’으로 나타나자 모녀는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모녀는 자신들이 믿었고 기대했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그 상실감과 절망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복음이야기의 두 제자도 그랬습니다. 세상을 바꾸어버린 주님의 부활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그들은 ‘부부’였을 것입니다. 충격과 슬픔, 상실과 절망, 근심과 허무에 휩싸여 그들은 ‘엠마오’까지의 내리막 여정을 시작합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몰고 온 비극처럼 모든 일이 정말 갑작스럽게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이 사랑했던 분과 작별 인사도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마음껏 애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불행에 휘말린 그들에게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당혹스러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과 나흘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이젠 다 물거품이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주신 분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희망이신 예수님이 무참히 처형당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지난 사흘은 그들 삶에서 가장 슬프고 충격적인 기간이었습니다. 오늘 집을 향해 출발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예언자’였을지는 몰라도 ‘메시아는 아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신들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린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루속히 멀어지고 싶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이 그토록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의 죽음에 어째서 침묵하셨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픈데 세상은 어떻습니까?

‘스키터 데이비스’(Skeeter Davis)가 불러 히트한 “The end of the world”라는 올드 팝송이 있습니다. 아마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전체 가사는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지만,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자신에게 세상은 끝이 났다”는 짧지만 애절한 사랑 노래입니다. ‘실비아 디’(Sylvia Dee)는 이 곡을 쓰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전해집니다. 스키터 데이비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린 그 표현 못할 슬픔을 담담하면서도 감성어린 목소리로 담고자 했습니다.

이 노래가 부부의 마음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엄청난 충격과 슬픔, 상실과 절망, 근심과 허무에 휩싸여 있건만 여전히 해는 뜨고, 새들은 노래합니다. 오후가 되자 저 멀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도 보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멀쩡히 돌아간다는 것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글레오파(명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의 아내’는 오늘 아침, 다른 여인들이 전해 준 말을 남편에게 들려줍니다. 천사들이 전해준 ‘엉터리 희망’ 때문에 한 바탕 일어났던 소동 말입니다. 남편도 다른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아내에게 전해줍니다. 그들 역시 무덤에서 주님의 시체를 보지 못했답니다. 그들은 오로지 ‘빈무덤’과 ‘잃어버린 시신’에만 집중해 있었습니다.

세상에, 누구도 주님을 보지 못했다니 어쩌면 좋을까….

그의 이런 탄식 소리를 들은 아내가 잠시 쉬어가자며 팔을 끕니다. 그들은 길가에 짐을 내려놓고 약간의 물을 마시면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잠시 후 몸을 일으키려던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자신들이 좀 더 일찍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아했지만 갈 길이 급했습니다.

걸어가면서 그들은 또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들은 ‘어사’의 참 모습을 보기 전까지의 월매나 춘향이처럼, 자신들과 동행하는 그 ‘낯선 나그네’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진실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루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 루가 24:16a

《마르코복음》은 ‘눈이 가려져서’가 무슨 뜻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 마르 16:12

‘마르코’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이 다른 모습, 즉 ‘나그네 행색’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체’이기에 모습 변화가 가능했나 봅니다. 마르코의 그 같은 서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더 좋은 깨달음이 있다면 제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루가가 말하는 ‘눈이 가려져서’는 무슨 뜻일까요?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마음을 반영한다.’는 뜻인데 ‘뇌과학’에 따르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뇌과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보편 상식이 된 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뇌과학’에서는 ‘마음을 몸의 추상화’라고까지 말합니다. 실제로 신체언어(몸짓, 자세, 태도, 얼굴표정, 호흡 등)와 청각언어(목소리 높낮이, 속도, 크기 등)를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뇌과학 상식을 동원하자면 ‘눈’은 ‘마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가려져서’로 번역한 그리스어(크라테오)는 ‘꽉 붙잡다’, ‘통제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눈’(마음)이 ‘뭔가에 힘 있게 계속해서 붙잡혀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없습니까?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 “돈에 눈이 멀었다.”, “권력에 눈이 멀었다.” 사랑에, 돈에, 권력에 ‘마음(눈)이 꽉 붙잡혀있다’는 뜻입니다.

남 이야기 할 때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자신에게도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는 ‘마음’(눈)이 뭔가에 붙잡혀(가려져) 있기에 함께 살아가는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족이, 친구가, 교우가 말입니다. 아마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두 달여를 지낸 교회공동체는 이번 기회로 확실히 ‘눈’(마음)이 열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에 그들의 ‘눈’(마음)은 ‘뭔가에 꽉 붙잡혀 있어서’ 자신들과 동행해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엇에 붙잡혀 있었습니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실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마음은 ‘과거의 그 날’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십자가 죽음’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걸어가면서 남편인 ‘글레오파’는 자꾸 뒤가 신경 쓰입니다. 그 ‘낯선 분’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나 잘 따라 걷는지 조금 놀랐습니다. 한마디 하려고 글레오파가 잠시 멈춥니다. 그러자 그 ‘낯선 분’이 오히려 ‘먼저’ 말을 겁니다.

이보세요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가십니까?

마치 ‘어사’임을 숨기고 월매나 춘향이에게 찾아간 이몽룡처럼 목소리에 약간의 재미가 배어납니다. 글레오파는 아래위로 그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이내 경계를 풉니다.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묻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 루가 24:18

그 낯선 분은 천연덕스럽게 묻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 루가 24:19a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 루가 24:19b

그들은 자신들이 급히 도망가는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십자가 처형’에 관해 찬찬히 설명해 줍니다. 그 분처럼 훌륭하고, 선한 일을 한 예언자가 없는데 살해당했다는 설명입니다. 그 낯선 분은 그들과 나란히 걸으며 조용히 듣기만 합니다. 아내가 끼어듭니다.

하지만 오늘 새벽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데요. 우리 동료들이 무덤에 갔는데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세상에나!

일순간 그녀의 목소리는 격앙되었습니다. 말을 계속하려다 잠시 머뭇거리며 주위를 살핍니다. 한편으로는 들뜨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기도 한 말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 글쎄. 제 동료들이 거기서 천사들을 봤답니다. 천사들은 ‘그분이 살아 계시다’고 일러주더랍니다.

잠시 격앙되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헛것을 보았을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이내 맥없이 잦아들었습니다. 무덤에서 나오신 분이 자신들 옆에 계신데도 그들은 여전히 ‘빈무덤’과 ‘잃어버린 시신’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참 어리석군요! – 루가 24:25a

갑자기 그 낯선 분이 나무랍니다. 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렵습니까?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루가 24:25b-26

그 낯선 분으로부터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치 춘향이에게 찾아간 이몽룡처럼, 그분의 ‘목소리’는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서》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 즉 ‘고난’을 겪고 나서야 ‘영광’을 차지하시는 자신에 관한 ‘기사’(記事)를 예로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쉽게, 은혜롭게, 따스하게 말입니다. 사제가 ‘감사성찬례’ 때마다 반복하는 ‘거룩한 독서’의 원형을 그들에게 선보인 셈입니다.

사실 그 낯선 분은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색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추상적인 관념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실제적이었습니다. 그분은 철학을 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이고,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이 전해져야 하는지를 당당히 말할 뿐이었습니다. 관념가가 아니라 보는 자로서, 믿는 자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그들에게 당당히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예언자쯤’으로 여긴 그들의 잘못된 지식과 희망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고난을 겪지 않는 ‘영광의 그리스도’만 신앙하던 그들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성서》의 그 모든 기록이 자신들이 사랑했던 분에 대한 이야기처럼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 뜨거운 감동(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어느새 그들의 ‘침통한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스승의 죽음조차도 하느님의 계획일지 모른다는 믿음이 막 생겨났습니다. 가슴 속에 희망의 불꽃이 다시 점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면에서 희망의 불꽃이 꺼져버린 이들은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 속에 ‘희망의 불’을 다시 댕기시려 나타나 동행하신 것입니다. 어찌나 그 낯선 분의 매력에 깊이 빠졌던지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 단숨에 ‘엠마오’까지 걸었습니다. 저 멀리 집들이 보이고 벌써 땅거미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작별 인사를 하고 더 멀리까지 가려 하셨습니다. 글레오파의 상냥한 아내가 그 낯선 분의 ‘마음’을 얼른 붙잡았습니다.

선생님, 이제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가십시오.

남편도 그 낯선 분의 팔을 붙잡으며 강하게 간청했습니다. 그 낯선 분이 주님임을 여전히 알아보진 못했지만 함께 머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 낯선 분, 아니 이제는 왠지 ‘친숙해진 분’이 ‘환대’를 받으며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귀’가 열려 ‘내면’에 ‘희망의 불’이 댕겨졌기에 그러한 ‘사귐’이 가능했습니다. 내면에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이들은 누구와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식탁 없이 바닥에 앉아 식사했습니다. 그 집에 ‘식탁’이 있는 것을 보면 좀 사는 집이었나 봅니다. 아내는 급히 상차림을 시작하고 그 ‘친숙해 진 분’을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등잔불이 켜 있고, 갓 구워낸 빵 몇 개와 함께 포도주가 차려 있습니다. 그 ‘친숙해 진 분’의 편안한 미소가 등잔불보다 밝게 고요히 방안을 채우고 있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방식대로 글레오파가 그 ‘친숙해 진 분’께 식사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 분이 빵을 집어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아!…

그들은 소리쳤습니다. ‘눈’이 ‘확’ 열렸습니다. ‘마음의 감각’(감수성)이 살아났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충격과 슬픔, 상실과 절망, 근심과 허무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오신 사랑하는 분의 그 ‘익숙한 손짓’ 덕택에 그들은 “눈(마음)이 열려” ‘완전히’ 알아차렸습니다. ‘최후만찬’에서의 ‘주님’입니다. 그 손짓은 자신들이 잊고 있던 ‘부활의 약속’을 회상시켰습니다. 그들의 감탄과 함께 주님은 사라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동행하시며 해 주셔야 할 일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서 목격했다는 증언이 헛소리가 아니라 결국 진실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기쁨’을 이기진 못했습니다. ‘글레오파’는 아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 루가 24:32

분명 그들은 길에서 ‘뜨거운 감동’을 느꼈었지만 그 뜨거운 감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 ‘낯선(친숙해진)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내면)의 감각’을 알아차렸습니다. 마음의 감수성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부활’했습니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낮 동안 걷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즉시 돌이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동료들을 남겨두고 떠났던 바로 ‘그 집’으로 향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들의 발걸음은 사슴처럼 가볍고 날랬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끝에 그들의 진짜 ‘목적지’는 재조정 됩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처음 세운 목표나 목적지를 재조정해야 할 때가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곳을 참된 목적지라 말할 수 있습니까? 희망을 잃어버린 그들을 자리에서 일어서게(부활하게) 했던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비록 나중에 명확히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주님이 풀어주시는 ‘성서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빛이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주님이심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어둡던 ‘마음’이 밝아지고 그들의 ‘내면’이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잊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의 감수성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 체험 덕택에 피로감을 느낄 새도 없이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목표나 목적지를 재설정하게 하는 ‘참된 희망’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이들에게서 일어납니다. ‘마음’(내면)에서 ‘말씀의 빛’이 깨어나고,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었던 것’(부활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 또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을 다시 ‘기억’하는 이들 말입니다. ‘마음의 감각’(감수성)이 살아나는 이들 말입니다. 오늘날 그러한 체험은 우리의 ‘감사성찬례’를 통해 결정적으로 일어난다고 저는 믿습니다.

교회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감사성찬례를 지켜왔습니다. 교회가 이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여정과 건강을 위해 똑같이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성찬례는 사랑이신 하느님,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도록 잘 짜인 일종의 ‘각본’(脚本)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됩니다. 그들처럼 희망을 잃고 낙담하던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성가를 통해, 독서를 통해, 가슴이 뜨거워짐을 체험합니다. 마음의 감수성이 되살려집니다. 설교를 들으며 잊었던 것(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또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을 다시 ‘깨우침’ 받습니다.

우리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감사예물로 드립니다. 성령께서는 그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으로 축성하시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특히 우리는 빵이 쪼개어질 때에 ‘눈’(마음)이 열려 여기 현존하시는 주님을 알아봅니다. 마음의 감수성이 완전히 되살아납니다. 새로운 결심으로 제단에 나아옵니다. 나누어지는 성체와 보혈을 통해 사랑과 은총의 실체를 체험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서로와 더불어 ‘조화’를 체험합니다. 획일적인 하나가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희망’으로 일어섭니다. ‘영혼의 잃어버린 감각’(감수성)과 삶의 의미를 되찾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자신임을 되찾습니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의 정체성과 평화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재발견합니다. 바로 이런 일이 감사성찬례에서 일어납니다.

‘최후만찬’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그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으로 다시 만납니다. 한밤중인데도 ‘그 집’ 안의 모든 이들은 함께 깨어나 자신들이 ‘체험한’ 복음(good news)을 나누며 기뻐합니다. 열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답니다. – 루가 24:34

이 증언이 오늘날 우리가 나누는 부활축하 후렴 인사가 되었습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그러자 그 부부도 자신들의 부활 체험을 그들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길에서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특히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 루가 24:32,35

그들의 증언이 오늘날 우리가 나누는 부활축하 인사 선창이 되었습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 여정의 가장 위대한 동반자이십니다. 복음이야기는 이 ‘임마누엘’의 진실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이 여정을 결코 혼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낯선 분’에게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용기’입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어 머무시기를 간청하는 용기입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간청하면 인생 여정의 창조주이신 주님은 우리와 동행해 주십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든 그렇지 못하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은 분명코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진실을 깨우치도록 《성서》를 통해 말씀하시고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며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을 동원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살가운 친구의 모습일수도 있고, 때로는 전혀 낯선 나그네나 가난한 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마태 25:35-40).

우리가 가슴 뜨겁게 주님을 만난 엠마오의 두 제자이기를 축복합니다. 성공회는 ‘이성’을 신앙의 중요한 기준으로 강조하지만, 그 말이 ‘가슴은 필요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에는 ‘머리’(이성)와 ‘가슴’(감성) 둘 다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손과 발이라는 ‘의지’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가슴’(심장)이 ‘뜨거워지는 체험’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본디 그리스도교는 ‘체험’에서 출발했습니다. ‘성서’나 ‘교리’ 이전에 부활 체험, 성령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체험을 말과 글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말과 글이 자신들의 체험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성의 언어’ 너머에 있는 ‘가슴의 언어’, 즉 ‘은유와 상징’까지도 사용했습니다. 분명히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글 자체, 표현 자체에 매달렸습니다. 글을 분석하고, 표현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처럼 믿지 않으면, 자신들의 분석을 인정하거나 따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글과 표현의 ‘어머니’인 ‘체험’을 추구하는 일은 오히려 ‘위험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오랜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이런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며, 간접적인 ‘지식’을 하늘까지 쌓아 올렸지만 이제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 모든 것을 낳은 ‘어머니’, 즉 ‘가슴 뜨거운 체험’에 초점을 맞춥니다. ‘글은 그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발견했습니다. ‘표현은 그저 우물 안 개구리들이 하늘을 두고 논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차가운 머리(이성) 이상의 것을 갈망’합니다. 바로 ‘가슴(마음)의 언어’, ‘가슴의 감각’, ‘마음의 감수성’ 말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현혹’당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달을 보는 체험’ 말입니다. 우물 안에서 논하는 하늘이 아니라 ‘우물 밖에서 체험하는 하늘’ 말입니다. 그런 체험은 우리 전 존재를 바꿀 만큼,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할 만큼 정말로 감미롭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보다 더 아름답고, 감미로우며, 신성하고, 흠모할만한 일은 없습니다. 저는 이 체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머리’(이성)로 그런 체험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어디까지나 머리에 있는 ‘관념’이고 ‘개념’일 뿐입니다. 마치 ‘커피는 오미(五味)가 느껴진다.’라고 배운 것과 실제로 커피의 오미를 체험하는 일을 비교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언제나 ‘아름다움’은 ‘분석하는 이성’의 차지가 아니라 ‘느끼는 가슴의 차지’입니다. 분명 하느님에 관한 합리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이성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슴’(체험)이 없으면 그런 지식은 추상적이고 차가울 뿐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언제나 실제 체험입니다.

이 성찬례에서 진정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이 일어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면이 깨어나고, 잊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하는 성찬례이기를 소망합니다.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며, 피부가 열리고, 가슴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음의 감수성이 살아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미 우리 내면에 현존하시는 그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을 등불’로 삼으십시오. 우리 밖에서 은총을 구하지 말고 우리 내면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의지’하십시오. 참 빛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생명의 참된 알맹이는 우리 내면에 계신 그리스도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말씀을 듣거나 성가를 부를 때, 우리 가슴(마음)에 뜨거운 감동과 열망이 일어난다면, 그 ‘가슴(마음)의 감각’을 잘 붙잡으십시오. 성체와 보혈을 영하며 마음(심장)에 뜨거운 감동과 열망이 일어난다면, 그 ‘마음의 감각’을 잘 붙잡으십시오. 그 체험들은 모두가 우리 내면에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사랑의 순간입니다. 우리 마음에, 영혼에, 희망의 불을 댕겨주시는 부활의 순간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에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맛보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잘 알아차리고 사랑으로 응답하십시오. 자기 어둠도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이웃이나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부터 먼저 하십시오.

마음의 감수성이 되살아난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사랑의 어둠을 통과한 춘향이처럼, 우리 역시 인생의 어둠을 통과해 신랑이신 주님과 영원토록 해피엔딩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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