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9. 부활 2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이를 복되다고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의심을 버리고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14상, 22-32
  • 시편 – 16
  • 2독서 – 1베드 1:3-9
  • 복음서 – 요한 20:19-31

 

부활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우리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사람으로 창조하시는 부활(생명)의 주님’입니다.

《요한복음》은 수난이야기 앞에 ‘7개의 기적(표징)이야기’를 선별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징(2:1-11),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징(4:46-54), 베짜타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징(5:1-9),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6:1-13), 물 위를 걸으신 표징(6:16-21),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신 표징(9:1-7),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11:1-44)입니다. 이들 7개의 기적이야기는 ‘진정한 표징’(標徵)인 ‘제 8의 기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활과 제자들에게 발현(發顯)하신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 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7개의 기적이야기를 넘어 이 ‘진정한 기적(표징)’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주님’께서 무엇을 목적하시기에 닫힌 문이나 벽에 구애받지 않고 제자들 한 가운데 서시며 ‘평화의 인사’를 하십니까? 무엇을 목적하시기에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십니까? 무엇을 목적하시기에 제자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니까? 무엇을 목적하시기에 재차 발현하시어 불신앙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토마에게 ‘상처를 만져보라’고까지 하십니까?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 20:31

그렇습니다. 모든 기적이야기는 이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증언하려는 목적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이름 예수 증언하려는 목적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 베드로의 증언처럼, 자신의 증언을 통해 사람들 속에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믿음이 창조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 8의 기적이야기를 통해 사람들 속에믿음 창조되고, 믿음을 통해생명을 얻은 사람들 창조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책의 모든 기적이야기와 가르침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목적 이외에 자기 나름의 다른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 책에 주목하는 것은 《요한복음》 기자의 의도로부터 지나친 셈입니다.

특히 ‘주님의 부활과 발현이야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령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닫힌 문과 벽에 구애받지 않는 시공을 초월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신령한 몸’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은 ‘발현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 기자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불안과 두려움과 죄책감의 포로였던 제자들이 마침내 ‘심리적인 평안’을 얻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평안’으로만 초점을 맞추는 일은 ‘발현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 기자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십자가의 상처는 몸을 갖지 않고 영적으로만 부활했다는 ‘가현설’을 반박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손과 옆구리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은 ‘발현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 기자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의 행복을 말씀하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토마의 의심과 불신앙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은 ‘발현이야기’를 기록한 《요한복음》 기자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분명 주님의 부활과 발현이야기는 그런 지엽적 차원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하려는 목적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이름 예수를 증언하려는 목적입니다. 자신의 증언을 읽은 사람들 속에 그들을 살리는 믿음이 창조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어도’ 자신이 선포하는복음을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이미 주어졌음을 증언하려는 목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처럼 죽어 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그들을’ 살려주시는 창조주이심을 증언하려는 목적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죽은 사람인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발현하셨습니다. ‘그들을’ 새로 창조하시기 위해 발현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을 새로 창조하시기 위해서 발현하셨습니다.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계약의 공동체’인 ‘교회’로 창조하시기 위해 발현하셨습니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처럼, 세상에 ‘죄 용서와 평화’를 가져오는 ‘사랑의 사도들’, 즉 ‘산 희망의 증거자들인 사목자’로 세우기(창조하시고 파송하시기) 위해서 발현하셨습니다.

이 진실을 잘 새겨두십시오. 우리는 결코스스로 새로 창조할 없습니다. 오늘 2독서 《베드로전서》가 교훈하듯이(1베드 1:3,8-9)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향한 ‘산 희망’(사랑, 믿음, 기쁨, 구원)을 스스로 창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계약의 공동체인 ‘생명의 교회’를 ‘스스로’ 창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죄 용서와 평화’를 가져오는 ‘사랑의 사도들’로 ‘스스로’를 세우거나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새 사람인 나, 그리스도인, 그 믿음(희망, 사랑, 기쁨, 구원), 그 생명의 교회, 그 사랑의 사도들은 우리 ‘스스로’가 결코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부활하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 생명을 주시는주님의 성령 우리를 이런 행복한 인생으로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진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 1고린 12:3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 2고린 5:17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 로마 8:15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희망)을 갖는 일도, 그 믿음을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도, ‘새 사람’이 되는 일도, 새 계약의 공동체인 ‘교회’로 창조되는 일도, 부활을 증언하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는 일도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생명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주제가 전례독서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믿음’(사람이 새롭게 되는 일)이 쉬운 일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 선택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믿음’을 갖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말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일이 쉬운 일인 것처럼 말합니다. 착각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제 말을 못 믿겠다면 복음이야기의 제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제자들은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라다녔습니다. 영혼에 ‘맑은 울림’을 주는 가르침과 수많은 기적들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스승으로부터 ‘산상수훈’을 들었습니다(마태 5-7장). 스승으로부터 ‘기도’를 배웠습니다(마태 6:9-13). 《요한복음》 기자가 선별한 ‘7개의 기적’을 다 목격했습니다. 참으로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들’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의 수난예고와 부활을 믿었습니까?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가르침과 기적들은 허사처럼 보였습니다.

한 때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며 우쭐 했습니다(마태 16:16-19). 하지만 수난을 예고하시는 스승을 말리려다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스승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마르 9:33-37). 심지어 ‘최후만찬’ 자리에서 조차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 했습니다(루가 22:24-27). 스승께서 친히 가장 낮은 종이 되어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는데도 말입니다(요한 13:1-17).

‘올리브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나같이 장담 했습니다(마태 26:33-35). 하지만 주님이 유다의 배반으로 잡혀가실 때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모두 유다처럼 배반하고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스승이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들도 잡혀갈까봐 두려워 숨죽이며 숨어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주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믿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참으로 《요한복음》 기자가 의도한 ‘믿음’, 즉 ‘부활의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갖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 즉 창조의 주님께서는 그런 ‘불신앙의 우리’를 반복해서 찾아오십니다. 오시어 그 ‘창조의 일’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그러니까 ‘안식일 다음날 저녁’ 제자들은 스승과 최후만찬을 나누던 ‘그 집’에 모여 있습니다. 물론 그 모임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피의자’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칭 하느님의 아들)과 ‘정치범’(국사범,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칭함)으로 고발했습니다. 실제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한 ‘죄목’은 로마제국에 반역을 꾀하는 ‘정치범’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 죄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제국에 반역하는 이들에 대한 최악의 처형 도구가 십자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엔 누구 차례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처럼 자신들도 체포되어 죽음에 처해질까봐 두려워서 숨어 있습니다. “문을 모두 닫아걸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처럼 숨죽이고 죽은 것처럼 있습니다.

그날 저녁, ‘새 창조의 첫 날’을 뜻하는 ‘안식일 다음 날’ 저녁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닫혀 있는 문이나 벽에 전혀 장애 받지 않으시고 ‘그 집’으로 들어오시어 그들 ‘한가운데’ 서십니다. ‘한가운데 서셨다’는 것은 그들과 우리 존재의 중심이 그분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그들과 우리에게 말을 거신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목적하시어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교회 공동체) 한가운데 서시고, 그들에게 말을 거십니까?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들을 ‘새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부활의 주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을 새로 창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새 창조의 첫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요한 20:19a

우리가 성찬례에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여기서 기원합니다. 그 ‘음성’, 즉 ‘생명의 말씀’이 그들의 ‘어두운 내면’에 한 줄기 ‘빛’이 되는 순간입니다. 분명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입니다. 화들짝 놀라 몸을 피하려던 그들이 멈칫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불신과 두려움의 어둠’이 한 순간에 걷힙니다. 정말이지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화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주님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선물된 ‘평화의 근거’입니다. 그 ‘생명의 말씀’이 그들 자신을, 그들의 믿음(희망, 사랑, 기쁨, 구원)을 ‘창조’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멀찍이서 보았던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참히 처형당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일그러지고 살점이 뜯겨 나간 채 피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분명 그들의 주님은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는 주님은 어떻습니까? 자신들의 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광채가 뿜어져’ 나옵니다. 이 표현은 <복음서>에 없지만 부활의 표지인 ‘변화산 사건’을(마태 17:1-2) 통한 제 상상력입니다. 불편하시다면 이 표현을 지우셔도 됩니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해 있습니다. 너무 놀라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부활의 주님이 ‘손’을 펼쳐 보이십니다.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세상에! 정말 ‘주님’이십니다.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불신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입니다. ‘유령’이 아닙니다. 닫힌 문과 벽에 장애받지 않지만 분명 ‘몸’이 있습니다.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데’ 몸에 십자가의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제히 일어나 주님을 붙잡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마치 시장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다시 만난 아이들 같습니다. 너무 기쁜 데 자꾸 눈물이, 탄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살아있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죽어있던 그들을 향한 ‘부활의 주님’이 행하시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새 사람’으로 만드시는 창조, 부활의 주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희망, 사랑, 기쁨, 구원)을 지금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의 ‘새 창조’, 즉 ‘사람이 새로워지는 일과 부활을 믿는 믿음’(희망, 사랑, 기쁨, 구원)은 우리 자신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그 창조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점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계약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누구로부터 ‘기원’(유래)하고, 누구를 통해 ‘탄생’했으며, 어떤 ‘권한’을 갖고, 어떤 ‘일’을 하라고 세상에 존재하고 파송되는지를 들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원(原)자료’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복음이야기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무려 ‘세 번’이나 제자들을 향해 이 ‘생명의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세 번’이 갖는 상징은 ‘충분히’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진정한 평화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한 처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때처럼, 그 ‘생명의 말씀’으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를 주시고, 그들(믿음, 희망, 사랑, 기쁨)을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반복적으로 들려지는 이 ‘생명의 말씀’에서 제외된 제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토마’마저도 주님의 평화를 누리고, 죽은 것 같던 그의 믿음도(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자신도) 새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그 ‘생명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언제나 진실입니다. 정말이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생명의 말씀’이 2독서 《베드로전서》의 교훈처럼,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의 혼돈과 시련에 빠진 우리의 ‘믿음’(산 희망)을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읽고 묵상하는 《성경》의 그 ‘한 말씀’이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이렇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신 후 주님은 그 ‘생명의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요한 20:21b

이 말씀으로 부활의 주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계약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누구로부터 ‘기원’(유래)하는지 명백히 선언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기원’(근거)은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당신의 자녀로 빚으시고,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보냄 받은 이는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언제나 보내신 분의 분부를 충실히 실행합니다(요한 3:34).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분부를 실행하도록 이 세상 속으로 파송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분부하신 일’, 즉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고, ‘세례성사’가 베풀어지며, ‘성체성사’가 봉헌되고, ‘사랑의 친교’가 일어나며, ‘하느님 나라의 선교’가 펼쳐지는 바로 그 곳입니다. ‘우리’ 서로 말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던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 요한 20:22

부활의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숨’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으십니다. 자신들을 세상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단절’시킨 그들이었습니다. 서로를 경계하며 스스로를 ‘인질’처럼 가두어둔 그들이었습니다. 무덤에 있던 스승의 시신처럼 죽은 그들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런 그들을 서로 한 몸인 ‘교회’로 창조하십니다.

《루가복음》 기자는 후속 편인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교회가 탄생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부활하신 그 날’ 주님께서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주시자” 교회가 탄생한 것으로 소개합니다. 교회의 탄생, 교회의 창조, 교회의 기원을 어느 날로 잡든지 ‘성령을 통해서’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계약의 공동체’, 즉 ‘생명의 교회’로 그들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로운 몸인 교회는 ‘성령을 통해 창조’(출발, 탄생)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탄생한 교회가 세상에 파송되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부활의 주님께서 발현하시어 그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교회로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 요한 20:23

‘교회를 창조하시고 파송하시는 분의 말씀’(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34). 다시 말해 세상에 ‘죄 용서와 평화’를 가져오는 일입니다. 간단히 ‘화해’입니다. 세상은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서로 ‘화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만이 세상에 ‘죄 용서와 평화’를 가져옵니다. 부활의 주님이 창조하시고 파송하신 교회가 그 거룩한 권한과 책무를 갖습니다. ‘죄 용서와 평화의 일’을 통해 교회는 1독서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듯이 ‘사랑의 사도들’, 즉 ‘희망의 증거자들인 사목자’가 됩니다.

더욱이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하는 그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는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용서’, 즉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희생제물을 반복해서 드려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런 특정한 장소와 희생제물을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들었습니다(히브 9:23-10:18). 십자가을 믿는 이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완전한 희생’으로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그 대속의 십자가, 그 용서의 복음, 그 화해의 말씀을 선포하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죄를 ‘용서’ 받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에페 2:11-17).

사실 교회를 탄생시킨 ‘성령’께서 하시는 일도 ‘회개와 용서와 평화’입니다(요한 16:8-11).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성령께서는 항상 예수님의 일을 이어가시기 때문입니다(요한 3:34; 16:13-15). 성령께서는 자신에 대해 증언하지 않고 항상 우리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항상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우리에게 증언하십니다(요한 16:13-15). 물론 성자께서는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덕택에 우리를 하느님과 분리시키는 모든 ‘죄’가 씻어졌습니다. 십자가 덕택에 우리는 우리 서로와, 그리고 하느님과 ‘평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에페 2:11-17). 교회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일’(말씀)인 ‘죄 용서와 평화의 일’, 즉 십자가에 나타난 ‘희망의 증거’를 위해 존재합니다. 여러분과 저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광스러운 교회는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죄 용서와 평화’라는 ‘거룩한 권한’을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 해서 우쭐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란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교회는 스스로를 권력을 가진 집단처럼 여겨서는 큰일 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주의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이렇게 덧붙이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 6:15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아버지의 일(말씀)인 ‘죄 용서와 평화’가 자신들에게 효력을 발휘하도록 적극적으로 세상에서 ‘죄 용서와 평화의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 이들을 교회는 항상 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고백하려 들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필요로 하는 ‘구원받아야 할 죄인’으로 스스로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선포하는 교회를 불편해 합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면 잃을 것이 너무나 많은 것처럼 여깁니다. 정반대인데도 말입니다. 그리하여 손 안에 들어 온 용서의 기회를, 평화를, 기쁨을, 구원을, 영생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토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발현하신 날 ‘그 집’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정치범으로 처형당했기에 제자들은 ‘피의자’로 수배 중이었습니다. 그는 함께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겼습니다. 동료들과 거리를 두고 상황을 살피다 멀리 도망가는 것이 ‘상책’(上策)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빠져나가기에는 아직 경계가 삼엄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있은 지 이제 겨우 사흘째이고, 갑자기 성 안을 돌아다니는 군인들의 수도 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과월절 축제를 지키러 온 순례자들이 아직 많기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순례자인 척 그들 사이에 끼였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누군가의 시체를 도둑맞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체를 찾기 위해 군인들 수가 갑자기 늘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시체를 말하는 것인지 좀 더 가까이 순례자들 속으로 가서 귀를 기울여보았습니다. 귀를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였습니다. 경비병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시체를 훔쳐가는 일이 발생했답니다. 그는 매수(買收)된 경비병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마태 28:11-15). 더욱이 제자들이 ‘예수가 살아났다’는 ‘조작된 소문’까지 퍼뜨리고 다닌다고 했습니다(마태 27:62-66). 순간 토마의 머리에 스쳐가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가슴 뜨거운 ‘베드로’라면 그 일을 추진하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칼을 차고 다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대사제의 종인 ‘말코스’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릴 정도로 용맹심을 발휘했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8:10). 가슴 뜨겁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동료들처럼 집에 숨어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기보다는 예루살렘을 활보하는 쪽을 택한 활동적인 사람입니다.

얼마 전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려 “다시 유다로 돌아가자”고 하실 때(요한 11:7) 다른 동료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자!”고 열렬히 선동한 사람도 자신이었습니다(요한 11:16). 며칠 후 그의 말처럼 예수님은 처형당하셨고, 자신은 생사를 같이하기는커녕 비겁한 배신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씁쓸하지만 이것이 자신이 직면해야 하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는 사태의 진상을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비밀 모임 장소인 ‘그 집’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과 ‘최후만찬’을 가졌던 ‘그 집’입니다. 스승을 배반하고 ‘그 집’으로 들어선다는 ‘죄책감’이 한발씩 내딛으며 올라갈 때마다 가중됩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립니다. 한 참이 지나서 문이 열립니다. 가장 나이 어린 ‘요한’이 문을 열어 줍니다. 다른 제자들이 들어오는 그의 손을 붙잡고 반갑게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 요한 20:25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는 그들의 말에 반가운 기색은커녕 베드로부터 찾습니다. 주님의 시체를 어디다 두었느냐고 물어볼 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역시 짐작이 들어맞았다고 여깁니다. 다른 제자들이 재차 그에게 주님이 자신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다는 ‘부활의 소식’을 알립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면 자신에게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만 좀 하라며 손사래를 칩니다.

어쩌면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 치러야하는 ‘배반의 죄값’이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누구나 나중에 오는 ‘용서의 은총’보다 먼저 해야 하는 ‘죄의 고백’을 두려워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다른 제자들의 설득이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교회사에서 자신을 ‘오명’(汚名)의 주인공으로 만든 그 유명한 말을 퉁명스럽게 내뱉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 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 요한 20:15

그는 동료들이 베드로와 함께 스승의 시체를 어딘가에 숨기고 자신까지 속이려 든다고 여겼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까지 가담시켜 스승이 부활하신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이 지고 있는 ‘배반의 죄값’에 무게를 더하는 ‘조작의 죄책감’마저 더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조작’에 가담시키지 말라고 경고하는 중입니다.

그가 이렇게 반응한데는 경비병들이 퍼뜨린 소문 말고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활이 ‘조작’이 아니고 ‘사실’이라면 동료들은 지금 그렇게 겁쟁이처럼 ‘그 집’에 숨어있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엄청난 사건을 체험했으면서도 여전히 비활성화 상태라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이 정도의 영향력 밖에 끼치지 않는 스승의 부활 사건이라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들을 쏘아붙이며 ‘특별한 증거’를 원합니다. 직접 보고 만지기를 원합니다.

그의 이러한 합리적 이유는 우리를 향합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과연 우리의 행동은 그 믿음과 일치합니까? 사람들은 우리 행동을 보고 우리가 믿는 것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정말이지 우리 행동에 나타나는 증거보다 우리가 믿는 것을 증명하는 더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말을 비교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부활을 믿는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말뿐인 가짜 그리스도인인지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전히 ‘그 집’에 숨어있는 다른 제자들을 놔두고 토마에게만 ‘불신앙의 사람’이라든지, ‘의심 많은 사람’이라든지 하는 ‘오명’을 덧씌우는 일은 지나칩니다. 그뿐 아니라 제자들 중 누구도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처음부터 순순히 믿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부질없는 헛소리’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루가 24:11).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들에게 발현하시기 전까지 믿지 않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드레 후, 즉 ‘제 8일’에 제자들이 모두 그 집에 모여 있을 때 주님이 또 발현하십니다. 《요한복음》은 분명 ‘숫자 8’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계속해서 부여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후 다음날에 해당하는 제 8일은 새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문을 닫아걸고 별 변화 없이 살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을’(그들의 믿음을) 새로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 그들을 ‘교회’로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들이 ‘죄 용서와 평화의 일’을 수행할 ‘사랑의 사도들’로 파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물론 《루가복음》 기자는 그 완전한 변화와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시기를 ‘부활절기를 완성’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미루어둡니다.

‘그 집’에 들어오신 주님은 그들 한 가운데 서시며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토마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 요한 20:27

토마는 어떻게 합니까? 그가 정말 만졌을까요? 만졌을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의심하는 토마’에서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보는 토마를 그렸습니다. 가장 거룩한 순간을 가장 속되게 표현하고 말았습니다. 예술이 그만 ‘상상력’을 상실하고 무미건조한 과학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과학도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데도 말입니다. 토마는 주님의 그 위대하신 배려 앞에서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요한 20:28

그의 얼굴은 눈물로 정화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마음이 정화되고 있었습니다. 이 고백이 자신을 위해 재차 발현하시어 ‘산 희망’을 안겨 주신 주님의 배려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향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를 새 계약의 공동체인 교회의 지체로, ‘사랑의 사도’로, ‘희망의 증거자인 사목자’로 세우시는 주님의 창조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토마를 넘어 우리 모든 인류를 향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요한 20:29

오늘을 사는 우리도 토마 덕택에 우리가 얼마나 복된 사람인지를 확인 받습니다. 《베드로전서》도 이 행복을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 1베드 1:8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부활의 주님은 시련과 혼돈,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죽은 사람처럼 전혀 활동력이 없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약속처럼 발현하셨습니다. ‘그들을’(그들의 믿음을) 성령의 숨으로 새로 창조하시기 위해 약속처럼 발현하셨습니다.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새 계약의 공동체’인 ‘교회’로 창조하시기 위해 발현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아버지의 일(말씀)인 세상에 ‘죄 용서와 평화’를 가져오는 ‘사랑의 사도들’, 즉 ‘희망의 증거자인 사목자들’로 ‘그들을’ 세우기 위해서 발현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부활의 주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만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성령만이 인생들을 새로 창조하시고, 행복한 인생으로 창조하실 수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은 우리 마음마다 찾아오십니다. 닫힌 마음마다, 단절된 마음마다 찾아오십니다. 제자들에게 행하신 것처럼, 생명의 말씀으로, 성령의 숨으로, 우리의 ‘믿음’(희망, 사랑, 기쁨, 구원)을 지금 여기서 창조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코로나19의 시련과 경제적 압박에 온 지구촌이 시달립니다. 하지만 전염병이나 돈 보다도 ‘더불어’ 살지 않겠다고 마음을 닫고, 소통하지 않겠다고 단절하는 그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죄의 고백’을 미루어두는 그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코로나19도, 경제적 압박도, 다른 인생살이 문제들도 결국 시간차를 두고 지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작용하는 죄의 문제는 자신이 진정으로 고백하기 전까지는, 구원이 필요한 자신을 진실로 인정하기 전까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은 믿음이 필요한 우리, 산 희망이 필요한 우리,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생명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생명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씀처럼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부활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내는 ‘평화의 원천’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유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다시 믿음의 사람, 산 희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창조됩니다.

말씀’을 건네실 것이고, 우리를 또 창조하시고 빚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성찬례는 오직 이 ‘생명의 말씀’이 선포될 것입니다. 사제는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의 이 ‘생명의 말씀’을 증언할 것입니다. 우리의 성서공부는 오직 이 ‘생명의 말씀’을 배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명의 말씀’만이 우리의 믿음(희망, 사랑, 기쁨)을, 우리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하는 참된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 주님만이 그리스도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찬미가 터져 나오게 하는 참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성경》은, 그 안에 있는 그 많은 말씀은,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랑의 주님을 증언하기 위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했어도’ 희망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복음을 믿은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들’로 창조해 주신 주님께 찬미와 경배를 드립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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