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8. 부활 8일부 토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4:13-21
  • 성시 – 시편 118:1-4, 14-21
  • 복음서 – 마르 16:9-15

부활 8일부 토요일입니다. <전례독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죽음의 고통’에서 풀려나 인간으로 살아야할 존재의 의미와 삶의 희망을 발견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산헤드린’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용기’를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성령’ 덕택에 자신들이 믿는 바를 논리 있게 명확히 대답합니다. 그들의 대답에 ‘산헤드린’은 깜짝 놀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 옆에 기적의 증거인 사람이 서 있었고, 그들의 입술에 성령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은 하는 수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는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합니다. 그들은 진실보다는 자신들의 교권과 안전에만 관심하던 ‘위선적이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양심’을 향해 호소하는 아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사도 4:19

자신들은 ‘산헤드린’ 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신 하느님께서 말하라고 명령하셨기에 그에 따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만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산헤드린’은 사도들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이 두려워서 재차 사도들을 경고하면서 놓아줍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양심이 죽은 불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이 배반자요, 도망자였던 사도들, 그 의심 많고, 겁 많던 불신앙의 사도들을 이렇게 담대한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시켰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부활의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께서 그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사의 두 기둥이며,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교 선교의 핵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다시 말해 ‘과월절 희생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의 보혈로 아담의 죄 값을 치르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지지 않는 샛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지옥의 사슬을 끊고, 영화롭게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만일 부활 사건 없이 십자가 사건만 있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단지 비극적이고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기억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십자가의 비극과 수치스러움은 종식되었습니다. 인류에게 영원한 소망이 선물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구원의 시작이고, 부활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성령을 통하여 온 세상에 퍼져갑니다.

복음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 두 제자, 열한 제자에게 발현하시어 그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복음이야기로 배정된 본문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난해한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이 오늘 본문 바로 전에(마르 16:1-8) 끝났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나머지는(마르 16:9-20) 초대교회가 후대에 다른 <복음서>를 참고하여 첨가하였을 것이라 봅니다. 이유는 앞 단락의 부활 이야기(마르 16:1-8)와 다르고, 문체도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뉘는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열한 제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첫 단락(마르 16:9-11)은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첫 목격자와 증언자로 소개합니다(참고 요한 20:11-18). 마리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습니다. 그녀가 부자동네 ‘막달라’ 출신이라는 정보 외에도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신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부활의 주님을 첫 번째로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있는 집으로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제자들은 그런 것일까요?

두 번째 단락(마르 16:12-13)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이야기의 요약처럼 보입니다(루가 24:13-35). 《요한복음》 부활이야기의 ‘막달라 마리아’나 《루가복음》에 기록된 ‘엠마오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발현’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신령한 몸)은 분명 부활 전과 연속성이 있기는 했지만 달랐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나중에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루가 24:31).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가서 이 소식을 전했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였던 반응처럼 그 말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제자들은 그런 것일까요?

세 번째 단락(마르 16:14-15)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발현하시고 사명을 주시는 이야기입니다(루가 24:36-49; 요한 20:19-23; 마태 28:16-20). 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두 제자의 간증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요? 그들이 깊은 ‘실의’와 ‘절망’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하기에는 설명이 안 되는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그 점에 주목해서 말씀 나눔을 좀 더 진행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고 싶습니까? 어머니입니까? 부인입니까? 자녀들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성모’라고 부르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따라다녔던 열한 명의 남성 제자들에게도 먼저 발현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당신이 “일곱 마귀를 내쫓아 주신”(루가 8:1-3)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흔히 오해하듯이 행실이 나쁜 매춘부가 아닙니다. ‘일곱 마귀’가 상징하듯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겪던 사람입니다. 이 불의와 불공정과 불평등의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희망 없는 인간의 대명사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 말입니다. 잘 이해가 안 간다면 일제 강점기 고통당하던 이 땅의 ‘소녀들’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특히 ‘막달라’가 있는 갈릴래아 지역은 유다인들로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 고통 속에 있던 그녀, 희망 없던 그녀를 예수께서는 ‘마귀들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를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통해 고통에서 풀려나 인간으로 살아야할 ‘존재의 의미’와 ‘삶의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녀를 희망의 증거가 되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녀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바쳐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더욱이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낸 4명 중 한 사람으로 남았습니다(요한 19:2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런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자신을 발현하셨습니다(마르 16:9; 요한 20:11-16). 부활을 증언하는 첫 사도로 삼으셨습니다(마르 16:10; 요한 20:17-18).

이처럼 열한 명의 남성 제자들은 부활의 첫 목격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첫 번째 목격자가 아니어서 그랬던 것일까요? 자신들을 제외하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이들이 먼저 그런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시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열한 제자는 자신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그런 ‘특권의식’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은 1독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산헤드린’과 비슷합니다. ‘의회원들’도 ‘특권의식’으로 꽉 찬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특권의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의회원들’도 사도들로부터 부활의 복음을 들었지만 “마음이 완고하여”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시편》으로 노래한 것처럼 ‘인애’(仁愛)하신 주님, 즉 ‘어지시고 사랑이 영원하신’ 주님이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심각할 정도로 ‘불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분명 예수께서 수난과 부활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음에도 십자가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고, 부활이란 현실 차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집의 ‘문’을 닫아거는 일보다 더 위험한 일은 ‘안’에만 손잡이가 있는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일입니다.

사실 ‘죽음’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예정된 일이기에 삶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마음 문을 닫아 건 그들만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를 한다는 오늘의 우리 지성이 가 닿을 수 있는 현세 차원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부활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의 ‘실의와 절망의 상태’, ‘특권의식’을 탓하기 전에 그 점을 겸손히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인애’(仁愛)하신 부활의 주님이 그들을 포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 16:15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이 현세 차원을 초월하는 분임을 그 자리에서 체험으로 확신시켜 주시고, 다시금 기회를 주십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더 이상 민족적 차별이나 지역적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의 사목자로 세워주십니다. 그 명령처럼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히 받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 1:8; 2:1-4). 1독서 《사도행전》은 그 출발 장면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시편》은 주님을 ‘인애’하신 분으로 찬미합니다(1-4절). 우리의 힘과 노래와 구원이신 분으로 찬미합니다(14절). 왜냐하면 수난하신 주님은 분명히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17-18절). 이제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통해 ‘죽음의 고통’에서 풀려나 인간으로 살아야할 ‘존재의 의미’와 ‘삶의 희망’을 발견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부활의 주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우리 마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특권의식’이 없습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그런 교만한 마음 말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이 증언하듯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들은 ‘자기 안위’와 ‘특권의식’에 빠진 ‘산헤드린’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한 때는 그들도 그런 잘못된 생각에 빠졌었지만 두 번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삼독(三毒), 즉 탐(貪), 진(瞋), 치(癡)에 빠진 ‘중생들’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위선적인’ 산헤드린이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현세 차원에서 ‘이기적 자기’를 버리고 이미 그 세계에 들어간 이들을 부활의 증인, 즉 ‘사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영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실의와 절망, 불신앙에 빠진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복해서 주님은 찾아가시고 발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평화와 승리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평화와 샘솟는 기쁨을 주십니다. 사도들처럼 용기를 갖고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시편》 시인처럼 기도로 들어갑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저도 사도들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놀라운 일을 담대히 선포하기를 원하나이다. 겸손히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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