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7. 부활 8일부 금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4:1-12
  • 성시 – 시편 118:1-4, 22-26
  • 복음서 – 요한 21:1-14

부활 8일부 금요일입니다. <전례독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패배감과 무력감과 피곤함에 시달리는 몸과 마음을 ‘치유’하시는 어지신 주님, 공허함과 외로움과 불안함에서 ‘구원’하시는 사랑 영원하신 ‘주님’을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상의 ‘사목자’로 세우셨음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실패하고, 공허하며, 무기력에 빠진 상처투성이 세상에 ‘성령의 권능’으로 ‘구원의 이름 예수’를 전하는 사목자(사명자)들이 우리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산헤드린’(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최고법정이자 의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된 두 사도는 나면서부터 장애인이었던(우리 인생을 상징하는) 사람을 ‘나자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사도 3:1-10). 사도들이 전하는 부활의 설교를 듣고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성전 사제들과 수위대장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두 사도를 체포하여 ‘옥’에 가둡니다. ‘산헤드린’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소집됩니다. ‘산헤드린’이 ‘위기감’을 느낀 이유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단죄하고 십자가형에 넘기는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이 두 사도에게 ‘심문’합니다.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 사도 4:7

그 때 “성령으로 가득 찬 베드로”가 증언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표현은 ‘산헤드린’이 심문했던 ‘무슨 권한’에 대한 대답입니다. 동시에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베드로가 해야 할 말을 하도록 돕고 계시다’는 뜻입니다(루가 12:11-12).

베드로는 자신들이 행한 기적이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된 일”이라 명백히 증언합니다.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시편 118:22-23),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버렸지만, 예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라 증언합니다. ‘주님이신 예수 이름으로만’(시편 118:26) 구원받을 수 있다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그 ‘담대함’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성취’입니다(루가 12:11-12).

그렇습니다. ‘성령’과 ‘예수의 이름으로’가 자신들을 심문하던 ‘산헤드린’을 향한 사도들의 대답이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탄생한 교회’인 우리는 사도들의 대답을 마음에 잘 간직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증언처럼 ‘예수의 이름’을 제외하고 ‘성령으로 탄생한 교회’가 궁극적으로 ‘세상’(행동의 자유가 없는 장애인과 같은 인류)에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교회’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깁니다.

“교회는 구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입니다(에페 1:22-23; 5:23; 골로 1:18). “교회는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이름인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한 몸”입니다(1고린 12:3; 요한 14:17). 그 고백의 표시인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신자들은(갈라 4:6)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1고린 12:27). ‘교회’는 결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새 계약의 공동체’로서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 왕의 사제들,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백성”으로 불립니다(1베드 2:9).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말씀하여 오신 ‘성령’은 오늘날도 당신을 통해 탄생한 교회 안에 활동하십니다.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식별하도록 이끄십니다(1고린 2:10-13; 요한 14:17). 교회 안에 항상 현존하시는 ‘성령’은 신자들이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사명(사목)인 ‘하느님 나라의 일’을 수행할 ‘능력’을 주십니다(사도 1:8). 참으로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새로운 ‘생명의 원리’인 ‘사랑의 삶’(사랑의 사목)을 살도록 이끄시는 ‘참된 힘’이십니다(1고린 13). 신자들이 ‘사랑의 친교’를 통해 서로 ‘연합’하고, 세상에 ‘파송’되어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명’(사목, 선교), 즉 화해와 일치, 용서와 연합, 정의와 평화, 생명과 나눔의 일(사목)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안에 현존하시고 이끄시는 ‘성령의 능력’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성공회는 이 모든 하느님 나라의 일을 ‘사목’(선교)이라고 표현합니다. ‘성직자’ 뿐 아니라 ‘평신도들’도 ‘사목자’라고 고백합니다. 둘 다 하느님의 교회와 세상을 섬기도록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의 사제들’입니다(1베드 2:9). 우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와 세상을 위한 ‘사목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돈이나 지식, 자기 경험에 의지해 수행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목’에서 ‘성령’과 ‘예수의 이름으로’를 빼면 교회는 세상의 다른 조직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 교회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의 지체인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1고린 12:28-30). 성직자는 우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한 사람의 평신도로 출발합니다. 그가 받은 ‘성소’의 열망은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식별’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식별의 과정 후에는 교회 공동체(지역 교회와 교무구)로부터 ‘성직희망청원자’로 교구에 추천됩니다.

교구 추천으로 신학교에 입학하면 그는 공동체 생활을 하며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습니다. 그 후 지역 교회 현장에서 수련과 수습기간을 거치면서 좀 더 심도 있게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자기 소명’을 점검합니다. 그 식별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성직고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습니다.

성직고시에 합격하면 그는 ‘총사제’로부터 ‘성직후보자’로 ‘교구(하나의 교회공동체)의 목자인 주교’(사도들의 후예)에게 추천됩니다. 주교는 그를 그리스도의 사목을 이어갈 그리스도의 종(교회의 종), 즉 ‘성사의 전문가’가 되도록 ‘서품’합니다. 흔히 ‘만인 사제’와 대비해 ‘직무 사제’라고 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성직자는 교회 공동체의 권위로 추천되고, 교회 공동체로부터 수련과정과 식별과정을 거치며, 교회 공동체의 기도 속에서 봉헌되고 서품되는 소중한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옵니다.

중요한 것은 ‘성직자’(聖職者)라는 사람 한 개인 그 자체가 거룩하거나 특별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가 고백하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연결된 직무’를 위해 그가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거룩하신 하느님께 가장 직접적인 협조자가 되도록 봉헌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목을 돕던 ‘여인들’처럼 교회 공동체가 그 연약한 종을 향한 기도의 거룩한 책무를 맡겠다는 뜻입니다. 그가 하늘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예수님 곁을 지키던 여인들’처럼 교회 공동체가 동행하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성직자의 직무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목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서품된 성직자는 ‘교구의 사도인 주교’로부터 교회를 감독하는 권한을 나누어 받고 지역으로 파송됩니다. 파송된 성직자는 지역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목자’와 ‘교사’의 직무도 수행합니다. 흔히 ‘관할사제’라고 부릅니다.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목직을 수행하도록 ‘양육하고 가르칠 직무’를 수행하도록 ‘교회 공동체 일치의 상징인 주교’로부터 그 ‘권한’이 ‘위임되었다’는 뜻입니다. 환언하면 사목직을 수행해야 할 신자들이 성령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은사)들을 개발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도록 ‘양육’할 직무를 ‘교회 공동체’로부터 위임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전 생애를 걸고 온전히 응답한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에 ‘전 생애를 걸고 기쁨으로 응답’한 이들이 ‘성직자’(聖職者)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사도들처럼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를 위한 초대에 온 몸으로 헌신하는 ‘일꾼’이 되겠다고 따라나선 이들이 ‘성직자’(聖職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화해와 일치의 사목직’을 ‘세상 속’에서 신자들이 잘 수행하도록 앞장서 섬기고, 돌보며, 가르쳐야 할 직무에 헌신하도록 ‘교회 공동체’가 특별히 세운 이들이 ‘성직자’(聖職者)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의 능력’과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와 세상 속에서 사목해야 할 ‘신자들의 사목자’가 ‘성직자’입니다.

이렇게 그 ‘거룩한 직무’에 대한 ‘성직자’의 ‘영적 권위’는 항상 ‘성령으로 탄생한 교회 공동체’로부터 나오며, 교회 공동체의 머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군림하려 드는 성직자나 성직자를 무시하는 평신도는 적어도 성공회 안에는, 아니 우리 교회 안에는 없습니다.

복음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티베리아(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피곤하고 지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발현’(發現)하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분명 더 많이 발현하셨습니다. ‘세 번’이라는 말이 갖는 상징은 ‘충분히’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복음이야기에는 <복음서>에 기록된 몇 개의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베드로가 끌어올린 ‘물고기 153마리’는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받던 ‘첫 제자들의 고기잡이 기적’의 반복처럼 보입니다(루가 5:1-11). 주님이 ‘물고기와 빵’으로 차리신 아침식사는 ‘오병이어 기적’의 반복처럼 보입니다(요한 6:1-13). 사실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곳도 ‘티베리아(갈릴래아) 호숫가’였습니다. 아침식사를 차리신 주님은 “와서 아침을 들어라”고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주시고 ‘생선’도 집어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고 말씀하신 ‘최후만찬’ 때의 반복처럼 보입니다(마르 14:22-25).

전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작은 공동체에게 충분히 반복적으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도들에게 하느님 나라 사명(사목)을 지속할 새 힘과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은(우리들은) 스승이 더 이상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형태로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아갈 바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돕고 계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사목)을 감당하는 사도인 우리들을 단 한순간도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메시지입니다.

잠시 복음이야기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몇 주 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격은 천하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어느새 그 감격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처럼 다 사라졌습니다. ‘외로운 섬’처럼 ‘주님의 부재’(不在)를 힘들어 하는 자신들만 남겨졌습니다. 두 번씩이나 발현하신 살아계신 주님은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살다보면 우리에게도 주님이 부재(不在)하신 것처럼 느껴져서 영적으로 공허하고, 허전하며, 외롭고, 무기력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확신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초조하고, 불안하며, 피곤한 그런 심리 상태 말입니다. 그런 심리 상태 속에서 7명의(7이라는 숫자는 옛 창조의 완성이고, 이제 그들과 함께 계신 주님을 합쳐 새 창조의 첫날을 가리키는 8이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돌아왔습니다. 좀체 안정되질 않는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때 ‘행동하는’ 사람의 전형인 시몬 베드로가 한 마디 내뱉었습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 요한 21:3

그의 말은 행동으로써 불안과 초조, 영적 공허와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같이 가겠다.”라고 따라나섰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실패의 밤이 지나고 어느새 날이 밝아옵니다. 영적 공허와 외로움, 피곤이 더 깊어진 순간, 부활의 주님께서 세 번째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을 때처럼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비로소 그들은 호숫가에서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신 그 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육지에 올라와보니 ‘숯불’이 피어있고, ‘생선과 빵’으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엄마가 아이들의 아침밥을 챙겨주시듯 그들을 식사 자리로 모아주십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고 책망도 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노래처럼, ‘어지시고 무한한 사랑’(시편 118:1-4)으로 밤새 지치고 피곤한 그들을 살갑게 돌보실 뿐입니다. 그들 중 아무도 더 이상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사랑하던 주님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해 세상을 ‘사목’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양육되어 파송됩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사목자’로 부름 받은 자신의 거룩한 책무를 잊고 ‘고기잡이’가 상징하는 것처럼 세상의 가치로 다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사도들처럼 실패합니다. 세상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공허함은 깊어집니다. 우리는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정말 주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일까요?

악마의 속삭임에 속지 마십시오. 자기 내면의 비판자(심판관)나 율법교사에게 속지 마십시오. 《시편》으로 노래하는 것처럼(시편 118:1-4), 주님은 항상 어지시고, 사랑이 많으신(영원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거나 버리시지 않고, 제자들의 경우처럼 반복해서 만나주시고 함께 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를 만나주시는 주님이 사용하시는 몇 가지 재료(材料)들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경우는 ‘식사’(오병이어, 최후만찬)였고, 제배대오의 아들들의 경우는 ‘식사’와 ‘물고기’였으며, 베드로의 경우는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숯불’입니다. 전부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아픈 실패를 떠올리게 하는 재료들입니다.

베드로는 많은 그가 잡은 ‘물고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는 ‘부르심’에서 벗어나 다시 옛날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최후만찬 후 올리브산으로 가는 길에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한 바 있었습니다(마태 26:33). 특히 ‘숯불’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죄책감’과 ‘아픈 기억’의 재료입니다. 그는 ‘숯불’ 앞에서 예수님을 두 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8:15-27). 그 ‘숯불’을 피워놓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방금 잡은 ‘물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라고 시키십니다. 그의 죄책감과 아픈 기억, 즉 ‘불편한 진실’에 ‘직면’시키신 셈입니다. 진정한 치유의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로 읽지는 않았지만 아침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세 번이나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숯불’ 앞에서 있었던 그의 배신의 상처를 싸매어주시고, 그를 사목자로 다시 세워주십니다. 물론 그가 진정한 사목자로 거듭나게 되는 순간은 오순절 ‘성령의 불’을 통해서입니다. 베드로가 식사자리에서 보았던 그 ‘숯불’은 우리를 ‘성령강림대축일’까지 데려가고 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교회가 이 세상(행동의 자유가 없는 장애인과 같은 무기력한 인류)에 누구를 선물해야 하는지를 명백히 합니다. 그것은 ‘구원의 이름 예수’입니다. 공허하고, 허전하며, 외롭고, 무기력한 세상은 간절히 ‘구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진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마태 16:16), 때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우리를 ‘사목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지만 어느 순간 ‘주님의 부재’(不在)를 느끼며 공허함과 무기력감, 외로움과 피곤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그런 실패의 상처와 영적 공허감을 스스로 치유하거나 정화할 수 없습니다. ‘한 없이 어지시고 사랑 많으신 구원자’ 예수님만이 그런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의 실패와 상처를 치유하시고, 공허함과 무력감과 외로움과 피곤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권능’만이 우리를 교회와 세상 속에서 화해와 일치, 용서와 연합, 정의와 평화, 생명과 나눔의 일(사목)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알렐루야!

오늘도 《시편》 시인처럼 부활의 주님께 감사노래를 부르며,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우리를 구원과 승리로 초대하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그 어지시고, 사랑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때로 저는 공허함과 무력감과 외로움과 피곤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저를 떠나시지 않고 함께 해 주시는 부활의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이름 영원히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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