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3. 부활 8일부 월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2:14, 22-32
  • 성시 – 시편 16:1-2, 6-11
  • 복음서 – 마태 28:8-15

부활 8일부 월요일입니다.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에 있어서 여성들이 감당해 온 역할은 결정적입니다. 복음서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복음서 모두 부활의 첫 증인(들)이 여성이었다고 명백히 합니다. 더욱이 부활의 복음을 알리는 첫 선포자도 여성들이었다고 밝혀줍니다. 참으로 여성들은 그리스도교 버팀목인 ‘부활의 복음 선포’에 있어서 중심을 차지해 왔습니다.

제 8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그날, 두 편의 사람들이 그 엄청난 광경을 보았습니다(마태 28:1-3). 한 편은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었고, 다른 한 편은 예수님을 사랑해 온 여성들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봉인된 돌을 굴려버릴 때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떨다가 모두 까무러쳤습니다. 무섭기는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온 여성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과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야기는 거기에 이어집니다.

여자들은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고 무덤을 떠나 급히 달려갔다. – 마태 28:8

마태오는 그 때의 심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무서우면서도 기쁨에 넘치는 정서’란 어떤 것일까요? 겨우 추정해 본다면 해산해 본 여성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정서 상태 속에서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무섭고도 기쁜 정서는 더욱 증폭됩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분명 사랑하며 살아 온 예수님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기쁩니다. 하지만 무섭습니다. 주님은 분명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셨고 무덤에 내려가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이 모든 일의 목격자들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성육신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려 오신 분임을 믿습니다. 주님이 전하신 ‘평화의 복음’과 ‘착한 일들’을 행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인들처럼 주님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주님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여인들은 이전부터 예수님을 본 적이 있어서 금방 알 수 있었다고 친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무엇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상대방이 주님임을 알 수 있을까요?

초등학생일 때는 그런 상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께 질문을 하면 이런 대답을 해 주곤 하셨습니다.

네가 보고 있는 분이 예수님인지 아닌지는 손바닥을 보여 달라고 하면 된단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그럴 듯합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는 굳이 손바닥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토마처럼 옆구리를 보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단지 주님이 저를 바라보는 그 다정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눈빛’은 항상 가장 강력하게 상대방의 ‘영혼’에 자신을 새겨주기 때문입니다.

여인들도 그랬습니다. 뜻밖에도 자신들을 만나러 오시어 인사를 건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평안하냐?”는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 ‘상냥한 목소리’를 배경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 ‘다정한 눈빛’ 때문에 무서움을 떨쳐내고 기쁘게 다가가서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부활절기가 시작되었으니 좀 우수개 소리를 하자면 갈릴래아에서 ‘동창회’가 있을 것이니 알리라는 전갈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 마태 28:10

다른 한편 까무러쳤던 ‘경비병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본 일을 대사제들에게 낱낱이 보고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큰 지진과 천사와 돌이 굴러가는 모습만 보았을 뿐입니다. 대사제들은 원로들과 상의한 끝에 ‘입막음’을 시도합니다. ‘거짓말을 하라’입니다(마태 28:13). 그 대가는 ‘돈’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받고 기꺼이 ‘거짓의 편’에 섭니다. 그들은 ‘돈’에 조종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리옷 사람 유다처럼 ‘돈에 대한 탐욕’으로 ‘진실을 배반’했습니다.

이러한 배반은 단지 복음이야기에만 등장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네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으로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잠깐 동안은 돈 때문에 즐거움을 누릴지 몰라도 그들의 마지막은 유다처럼 수치와 자기 파멸일 뿐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이 이전에 알던 그 분임을 그 목소리와 그 눈빛을 통해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을, 예수님을 ‘일상’에서 ‘사랑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살아서 뿐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품에 안겼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이별하는 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을 바로 알아보기 위하여 일상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져 가고 있는지 깊이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사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주어진 기회입니다. 매일, 혹은 매주일 봉헌되는 성찬례는 일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위한 바로 그 연습입니다.

일상에서 전혀 그런 연습이 안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진실을 배반’한 경비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사제들의 ‘입막음’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군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한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진실을 배반하는 길로 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잠든 사이에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증언자’의 길로 갔습니다. 진실의 증언자로 살아간 복음이야기의 여성들, 목숨을 걸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간 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입니까? 자신은 결코 돈을 사랑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속단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빚어가지 않는 한 우리도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주님의 부활을 예언으로 찬미한 《시편》 시인처럼(시편 16:10) 기도합니다.

주님, 제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말씀을, 주님만을 사모합니다. 제가 당신 품에 잠드는 그 날까지 부활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진실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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