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12. 부활대축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어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영생의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10:34-43
  • 시편 – 118:1-2,14-24
  • 2독서 – 골로 3:1-4
  • 복음서 – 요한 20:1-18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오늘 우리는 기쁘게 ‘알렐루야!’(Alleluia)를 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 부활축하 ‘계응’(啓應)으로써 우리가 주님께 선택받은 부활의 자녀임을 선포합니다. 이 ‘기쁨의 환호’로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즐거움을 지금 여기서부터 미리 맛봅니다(묵시 19:1, 3, 4, 6). 방금 환호한 ‘알렐루야’(Alleluia)와 ‘할렐루야’(Hallelujah)는 같은 뜻입니다. 히브리어 ‘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를 그리스어(알릴루이야)와 라틴어(알렐루야)로 ‘음차’(音借)하면서 강하게 발음해야하는 ‘ㅎ’ 문자 없어서 생긴 차이일 뿐입니다. 개신교는 원어 그대로 ‘할렐루야’를, 그리스어가 전례용어인 정교회는 ‘알릴루이야’를, 성공회는 로마가톨릭처럼 ‘알렐루야’를 전례용어로 사용합니다.

우리 기뻐합시다. 우리가 지금 어느 곳에 있든지 기뻐합시다. 부활대축일입니다. 슬픔의 사흘이 끝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셨습니다. ‘과월절 희생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아담의 죗값’이 치러졌습니다. 그 ‘참혹한 죽음’이 인류를 ‘죄의 속박’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저주의 십자가’가 우리의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온 세상에 ‘대속’과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1독서 《사도행전》이 증언하듯이 하느님께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신 그 분을 사흘 만에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10:36-40). 분명 그리스도께서는 무덤으로 내려가셨으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성취된 날이 오늘입니다. 오늘이 다른 종교와 다른 그리스도교의 버팀목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죽음’과 ‘지옥의 올가미’에 걸린 인류를 풀어 주시고 ‘하늘 문’을 활짝 열어젖히셨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속박’에서 풀어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처럼, 인류를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죽음에서 생명의 세계로, 지상에서 하늘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인류에게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첫날’입니다. 생명의 창조주께서 극악한 ‘죽음의 권세’를 부수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신 날입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왕께서 인류의 적인 ‘마귀’를 영원히 패배시키시고 사흘 만에 승리자로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영원한 승리자’로 무덤에서 나오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입니다. 시체를 지키려고 무덤 문을 ‘돌’로 막고, ‘봉인’까지 하여 지켰어도 만물에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를 결코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연기가 바람에 날려가듯이 무덤의 돌은 약속의 날이 되자 무게 값도 못했습니다.

 

‘약속의 날’이 되자 뜨거운 불길에 초가 녹듯이 인류를 사로잡았던 두려움은 삽시간에 녹아내렸습니다. ‘평화’ 주시려는 그리스도의 햇빛을 죄의 어두운 겨울날은 결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 부활하시어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혔던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들에게 ‘진정한 평화’(샬롬)를 주셨습니다. 무덤에 있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과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인류가 갈망하던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신 제 8일, 즉 ‘새로운 창조의 첫 날’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주의 시작인 ‘빅뱅’처럼 단 한번만 일어난 ‘사랑의 사건’입니다. 인류가 꿈꾸어 오던 부활을 선물해 주신 ‘시초의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다르지만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죽음을 완전히 정복한 최초의 사건’, ‘제 8일’을 소리 높여 기념할 수 있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께서 어둠을 몰아내시고 빛나신 날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들의 슬픔과 눈물이 기쁨과 환호로, 수치심과 죄책감이 용서와 평화로, 걱정과 두려움이 찬미와 희망으로, 불화와 단절이 화해와 연합으로 바뀐 날입니다. ‘참 빛’을 숨기고, 가둬두며, 단절시키려는 어둠의 세상에서 돌을 굴려 버리셨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그 무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못하도록 ‘큰 돌’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습니다(마태 27:62-66).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흘’이라는 기간까지 정하며 ‘경비병’을 세워 그 무덤을 단단히 지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참 빛’이신 예수께서 ‘평화의 복음’을 전하실 때는 죽일 음모를 꾸밀 만큼 시기하고 미워하더니,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는 ‘경비병’까지 세워 그 ‘시체’를 소중히 여깁니다. 물론 사랑해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계속해서 죽어있어야, 그 몸을 붙들고 있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했고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흘 동안 사도들도 ‘모든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집’에 가두어 두었습니다(요한 20:19a). 무덤처럼 그 ‘집’도 단단히 닫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도 사도들도 모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경비병들, 사도들이 했던 일은 모두 허사였습니다. 봉인된 돌은 굴려졌고 그리스도께서는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문들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인질’처럼 안에 가두어 둔 사도들 한 가운데 서시며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요한 20:19b). 오직 주님만이 영광의 빛에 싸여 무덤을 나서셨고, 닫힌 문을 통과해 들어가 사도들에게 사랑이 담긴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승리와 정복은 ‘철학’, ‘법학’, ‘과학’, ‘의학’, ‘심리학’이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정치학’이 해낸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승리와 정복은 오직 우리의 전능하신 임금님, 영원한 승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승리와 정복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차지였습니다. 우리는 승리자이신 주님을 향해 기뻐하며 소리 높여 찬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승리와 정복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 분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받아 누릴 영원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 어떤 죽음의 세력보다 강력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모든 놀라운 승리와 정복은 오늘 《시편》 노래처럼 주님께서 그 오른손으로 ‘혼자서’ 완성하셨습니다(시편 118:16).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사랑’이 그 모든 승리와 정복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밀알처럼, 무덤을 뚫고 땅에서 솟아올라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생명들을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지는 오늘부터 그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생명이 활성화된 그 첫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였고, 베드로였고, 요한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사랑’이 우주에 존재하는 ‘진정한 힘’임을 처음부터 증언합니다. 우주를 ‘창조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홀로 할 수 없습니다.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우주와 아담을 창조한 원동력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몸의 구성 요소인 ‘원자’를 주신 분도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천문학자들도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별’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 별을 누가 창조하셨습니까?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었고 움직이게 했습니다. 창조 이래로 인류의 역사는 아담의 타락과 그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중단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진실로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힘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생동’하게 합니다.

 

복음이야기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무덤을 찾았습니다. 왜 무덤을 찾았습니까?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찾아간다 한들 주님을 만날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분명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도 사랑이 마리아를 무덤으로 이끌었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아리마태아 사람인 부자 요셉은 바위를 파서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시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놓고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마리아와 함께 무덤 맞은편에 앉아 이 모든 일을 지켜보았습니다(마태 27:57-61). 두 사람 이상이 그 장례과정 전체를 보았으니까 주님은 분명 죽어서 무덤에 내려가셨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그 무덤은 ‘봉인’까지 되어있었습니다(마태 27:62-66).

막달라 마리아는 걱정했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몸에 발라드릴 향료를 사서 그 무덤으로 가던 여인들이 막달라 마리아 말고 또 있었습니다(마르 16:1-3). 그들이 무덤을 찾아간 이유도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할 때쯤 날이 이미 저물어 안식일이 시작되었기에 그들은 제대로 된 장례 예절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그들은 향료를 사서 얼른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무덤 입구가 ‘봉인’된 것은 생각지도 못한 채 누가 돌을 굴려내 줄지 ‘걱정’하며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막달라 마리아(그들)의 ‘걱정거리’를 해결하셨습니다. 단지 돌을 굴려버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마리아로 상징되는 인류의 ‘궁극적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하셨습니다. 주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던 여인들은 두 천사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들었고, 기쁨의 찬미를 부르며 사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루가 24:1-10). 주님의 ‘사랑’이,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죽은 것 같은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서 ‘일어나’(부활하여) 생기를 되찾았고 부활을 선포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오늘을 기뻐하십시오. 코로나19는 우리 서로를 떨어뜨려 놓고, 우리를 가두어 두며,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염려 속에 계속 붙잡아두려 합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그 모든 분리와 단절,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염려를 뚫고 우리에게 오시어 다정히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평화의 인사’를 전하십니다. 샬롬! 샬롬!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깊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여인들처럼,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깊이 사랑한 만큼 그들의 고통은 컸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적게 사랑하면 별로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깊이 사랑해 왔기에 우리가 지금 코로나19로 못 만나는 일이 몹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우리가 못 만나는 것이 몹시 고통스러운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수난하시고 죽으셨을 때, 자신들의 온 존재가 무너져 내린 것처럼 큰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큼 내 사랑이 깊지 않다고 ‘죄책감’을 갖진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을 향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 죄책감 안에 자신을 가두어두지 마십시오. 나의 과거가 어쨌든지 상관없습니다. 나의 과거보다, 나의 배반, 배신, 그 모든 죄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언제나 더 크십니다.

 

오늘 이른 새벽 무덤으로 간 막달라 마리아는 ‘빈무덤’을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가서 ‘빈무덤’과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것을 알립니다. ‘그들 모두가 빈무덤을 확인’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이야기가 비록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빈무덤’을 증언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증언했기에 ‘빈무덤’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입니다(신명 19:15). ‘빈무덤’에 대한 증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30-40년 지난 시점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기간은 없던 진실을 있는 것처럼 꾸미기에는 너무나 짧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그들의 ‘사랑’과 ‘간절함’이 빈무덤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합니까?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부활하시어 지금도 살아계시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우리를 주님은 무덤 같은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오시어 다정히 이름을 부르시며 평화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입술로는 부활의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명예를, 권력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슬픈 사실입니다.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훈하는 것과 반대로 많은 신자들이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정말이지 많은 신자들이 그분의 가르침인 ‘사랑’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이토록 많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상당부분 거짓말 같습니다.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 나라는 불의와 불공정과 불평등이 만연할 수 없습니다. 회상하기조차 끔찍한 참사와 적폐와 반칙, 고통스런 일들이 반복돼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대통령만 바뀌었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부활의 예수님과 삶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자기욕심을 따라, 자기이득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일을 감행합니다.

 

금주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6주기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는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화를 이루어냈을까요? 올해 1월 JTBC에서 진행된 “봉인된 세월호 7시간 기록 공개여부”를 두고 벌어진 맞장토론을 시청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호 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참사 당일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 공개 소송 상황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실체적인 진실, 국민의 생명권 보호 차원에서 제기된 정보 공개 소송이 ‘실정법의 한계’에 막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희생자들의 영혼이 안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살아있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생존자들, 그리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유가족들의 하소가 주님의 위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2독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 부활을 약속 받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갑시다. 우리의 말과 삶의 방식을 통해 사랑의 그리스도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눕시다.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우리도 사랑의 막달라 마리아가 됩시다. 베드로가 됩시다, 요한이 됩시다. 아직도 고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이신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우리가 되고, 그들 속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솟아나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마십시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승리의 찬미를 바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그 옛날 믿음 깊은 세 청년을 화덕 속에서 구원하신 주님께서(다니 3:91-94)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수난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불사의 옷’으로(1고린 15:53-54) 감싸주시기 위해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온 생명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의탁합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파스카’(과월절을 히브리어로는 ‘페사흐’, 아람어로는 ‘파스하’, 그리스어로는 ‘파스카’라고 합니다)이시며,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에 참 생명을 얻었고, 모든 이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때문에 ‘평화의 복음’을 온 세상에 힘차게 외칠 수 있습니다. 부활생명을 선물받은 사람답게 현재의 고난을 잘 견디고, 천상의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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