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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9. 성목요일(성찬제정일)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성체성사를 세우시어 구원의 신비를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새 계명을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2:1-4(5-10), 11-14
  • 성시 – 시편 116:1-2, 12-19
  • 2독서 – 1고린 11:23-26
  • 복음서 – 요한 13:1-17, 31하-35

성주간성삼일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그동안 지켜온 사순절 여정이 종착지에 이르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현장으로 한 발씩 더 깊이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그 사랑의 섬김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세족례 목요일’(Maundy Thursda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어 구원의 신비를 나타내셨음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성찬제정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 오늘 우리는 새로 축성한 성체를 모시고 ‘성체수직’을 합니다. 인간적인 고뇌와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결단하시는 ‘게쎄마니 기도’에 동참합니다. 《요한복음》은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고, ‘사랑의 섬김’이라고 전해줍니다.

올해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성당에서 함께 ‘성삼일 전례’를 봉헌하지 않습니다. 교구 모든 성직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성유축복 성찬례도 대성당에서 봉헌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성삼일에 담긴 사랑과 구원과 소명과 일치의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습니다. 성삼일이 완성되는 그 시간 우리에게서도 그 크신 은총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제 사순 37에 오늘 복음이야기의 전반적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자기를 소외’(疏外)시키고, ‘비본래적인 존재’로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 내 현존재인 인간에게 ‘성삼일’이 갖는 전체적인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말씀 나눔을 대신합니다.

 

‘성삼일’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이며 우리 자신을 위한 시간입니다. 인류역사에서 한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이토록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만큼 그 ‘마지막 시간’, ‘마지막 사건’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수성과 보편성, 역사성과 현재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계 안에서 우리는 ‘본래적인 나’가 아닌 ‘그들’로 평균적으로 살면서 괴로워합니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일상에서 행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과 기준을 의식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불안해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익숙한 길과 다른 길을 가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세상과 타인의 지배’아래 두고 ‘평균적’으로 ‘익숙하게’ 살아가면서 ‘안정감’을 느끼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나서 잡담, 상식, 정보를 쏟아놓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어떤 분야에 권위 있다는 전문가의 말과 해석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런 삶, ‘자기 이해’, ‘자기 해석’, ‘자기 결정’이 없는 삶에서 얻는 ‘안정감’은 ‘거짓 위안’이 주는 ‘착각’입니다. 자신을 점점 ‘소외’시켜 ‘그들’로 만들 뿐입니다. 그것은 ‘비본래적인 삶’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을 따라, 타인의 지배 아래 살아가기에 어떤 일이 잘못되어도 자신의 ‘책임성’조차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이 그 많은 사건 속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고귀한 영혼을 지닌 인간, 즉 자기 초월성을 간직한 인간은 결코 그런 나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자기 세계를 창조’하도록 피조 된 ‘영혼’은 자기를 잃어가는 일을 끔찍이 싫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이해와 해석을 쫓고, 세상과 타인의 결정과 지배아래 사는 우리는 더 괴로운 ‘기분’에 빠지고 맙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거짓 위안과 익숙함, 안정감과 편안함이 주는 ‘착각’에서 깨어나 자기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결정하는 일입니다. 재산, 권력, 명예처럼 ‘수단’에 불과한 것을 ‘목적’으로 여겼던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결정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할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방식을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하고 있는 그 일과, 지금 걷고 있는 그 길과,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가 진정으로 실존적이고, 신앙적인 고민의 결과일까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익숙하고 편해서라는 것이 솔직하지 않습니까?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사는 일도 쉽지 않다고 항변하면서도 정작 ‘괴로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 정직합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거룩한 시간’이 또 다시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성삼일’이 주어졌습니다. ‘본래적 자기’로 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자기 세계를 창조’하는 ‘영혼의 본성’처럼 ‘본래적 자기’를 ‘선택’하며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성삼일’이 주어졌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되고자 하는 자신’, ‘가능한 자신’을 선택하고, 결단하기 위해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우리에게 ‘성삼일’이 주어졌습니다.

 

이 ‘거룩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생명이 돋아나는 봄을 예찬하지만, ‘지금 여기’ 침투해 있는 ‘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합니다. ‘소유’와 ‘명예’와 ‘권력’을 자랑하지만 ‘죽음의 독침’인 ‘죄’의 종노릇하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나’입니다(1고린 15:55-56).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잊고 살아온 ‘나’를 마주하게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살아온 우리 자신이 그 ‘올가미’와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이렇게 그 ‘죽음의 불안’은 언젠가 그 있던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우리의 ‘유한한 삶’을 자각시키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각성’시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나의 고유한 삶’인지를 ‘자각’하게 합니다. 그 ‘죽음의 불안’은 타인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시간’을 살도록 합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 존재로 자신을 놓아 보내지 않고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주목하게 합니다. 그 ‘죽음의 불안’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존재를 껴안고, 나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미래’로 ‘다가가게’ 합니다. ‘자기 존재의 가능성’ 아래서 나의 ‘미래’를 계획하며 적극적으로 나의 ‘현재’를 살도록 합니다. 한번 뿐인 나, 내가 걷는 나의 길, 내 존재의 삶을 책임지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삼일’은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살던 우리를 깨우는 ‘결정적인 시간’입니다. 그런 삶이 편하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우리의 영혼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도록 돕는 ‘궁극적 변화의 시간’입니다. ‘본래적 존재의 의미’를 묻는 현존재인 우리 자신에게 ‘궁극적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주는 ‘구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사건에서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파악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여주는 세상과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가정에서 기도로 지키는 이 성삼일의 전례 속에서 우리도 사랑으로 살아가는 일이 가능한 나를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존재의 진정한 의미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길을 보고, 그 실현으로 뛰어 들어가는 현재의 용기를 주님으로부터 얻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제나처럼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시편》 시인처럼 기도로 들어갑니다.

저를 제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시려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시는 사랑의 주님, 저는 다만 주님의 이름을 감사로 부를 뿐입니다. 제게 베푸신 그 크신 은혜에 저 역시 사랑으로 보답하며 용기 있게 살다가 제 인생이 가장 아름답게 여물은 그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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