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8. 사순 37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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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창조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깨달아, 그 크신 겸손을 본받게 하시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0:4-9상
  • 성시 – 시편 70
  • 2독서 – 히브 12:1-3
  • 복음서 – 요한 13:21-32

사순 37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마지막으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사랑’이 주제인 《요한복음》 13장에는 유다의 배반만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할 일도 예언됩니다. 이 모든 예언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최후만찬 자리’에서 있었습니다. 누가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복음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기에 그 설명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가장 유명합니다. 기다란 식탁을 앞에 두고 예수께서 가운데 의자에 앉아계시고 양쪽에 제자들이 6명씩 배치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자리배치는 예수님 시대가 아니라 중세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기에 틀렸다고 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의자에 앉아 식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 식사했습니다. 빵과 적실 국물을 담은 큰 그릇 주위에 모여서 먹는 것이 일상적인 식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루만은 예외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1년에 1끼는 ‘부자들의 연회’(宴會)처럼 먹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날이 바로 ‘과월절 식사’입니다.

부자들의 ‘연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로마 사람들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림에서 보듯이 ‘디귿’(ㄷ)자 형태의 식탁이 마련된 방에서 ‘연회’를 했습니다. 하인들은 식탁의 가운데 빈 공간으로 다니며 음식을 마련했고, 손님들에게 필요한 일들을 했습니다. 식탁 바깥쪽으로는 두툼한 쿠션이 깔리고 손님들은 그 쿠션에 비스듬히 기대어 왼쪽 팔꿈치로 몸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습니다. 수저를 사용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불편해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거드름’을 피울 수 있는 최상의 자세였습니다. 이렇게 비스듬히 기대면 모두가 한 방향을 보게 되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의 머리가 왼쪽 사람의 ‘품’에 위치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부자들도 이 방식으로 ‘연회’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실 때 일어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루가 7:36-39). 그 여인은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립니다.” 우리 식사자리에서는 이해 안 가는 자세이지만 이런 ‘디귿’(ㄷ)자 형태의 식탁을 가진 연회 배경과 식사 자세를 알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복음이야기의 배경인 ‘최후의 식사’는 ‘과월절 만찬’이기에 이 방식을 따랐습니다. ‘연회’이기에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식사를 하려면 특별히 준비된 방과 가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과월절 만찬’을 준비하게 하십니다(루가 22:7-13). 특히 과월절 기간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오기에 숙소와 음식과 물이 문제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적어도 10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양 한 마리’로 식사를 하도록 했고, 포도주는 적어도 4잔 이상을 마시도록 가르쳤습니다.

만찬 자리의 ‘윗자리’(上席)는 어디일까요? 사실 ‘윗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유다인들에게 ‘명예’와 관련되기에 무척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위선자들이라 일컬으시면서 그들이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하고, ‘회당’에서도 ‘제일 높은 자리’를 찾는다고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23:6).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지만(루가 14:8-9) 제자들 역시 ‘최후만찬’ 자리에서까지 누가 제일 높은 지를 두고 다투기까지 했습니다(루가 22:24).

최후만찬 식탁이 ‘디귿’(ㄷ)자 형태이기에 우리식으로 생각하면 가운데 자리인 7번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과월절 만찬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셨기에 그 ‘식탁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은 초대한 손님들의 자리를 미리 배정합니다. 일반적으로 ‘연회’의 주인은 ‘최상석’에 해당하는 ‘디귿’(ㄷ)자의 1, 2, 3번 중 2번을 차지합니다. 주인 다음 가는 ‘가장 영예로운 손님의 자리’는 주인의 왼쪽인 ‘3번’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손님의 자리는 주인의 오른쪽인 1번입니다. 네 번째로 중요한 손님의 자리는 가장 영예로운 손님의 왼쪽인 4번입니다.

이런 식으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자리가 배정되기에 연회 자리에 13명이 있다면 13번 자리가 초대된 손님 중에서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하인이 없을 경우 13번 자리를 차지하는 손님이 가장 먼저 입장해서 1번부터 차례로 들어오는 손님의 손에 물을 부어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손님들은 차례로 입장하여 손을 씻은 다음 자신이 배정된 자리에 앉습니다.

‘과월절 만찬’이기에 식탁에는 ‘양고기’, ‘누룩 없는 빵’, ‘빵을 찍어먹는 국물’, ‘포도주’가 차려져 있었습니다. 아마 자리 배치를 보고 베드로는 깜짝 놀랐을 수 있습니다. 《루가복음》에 따르면(루가 22:7-13) 과월절 만찬을 준비한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십여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의 과월절 만찬을 위해 그렇게 수고했고, 또 나이도 연장자이기에 아마 ‘가장 영예로운 손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김칫국부터 마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수제자’(首弟子)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맨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완전히 한 방 먹은 기분이었습니다. 자신이 하인 역할을 하도록 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좌우편 자리는 누구에게 배정되었을까요? 너무 성급히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늘 복음이야기를 근거로 천천히 추측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만 식사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줍니다.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 요한 13:4-5

제자들은 너무나 황송했습니다. 13번 자리를 차지한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인 줄 알았지만 예수님이 몸소 하인처럼 행동하셨습니다. 1번 자리에 앉은 제로로부터 시작해서 3번, 4번, 5번 이렇게 차례로 씻어주신 다음 13번에 있는 베드로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가 ‘만류’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의 섬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자들 모두의 발을 씻겨 주신 후에 예수께서는 겉옷을 입고 다시 식탁에 자리하십니다. 그 섬김의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고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이제 너희는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다.- 요한 13:15-17

이 말씀 후에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제자들의 교제에 들 수 없는 유다의 배반을 한 번 더 예고하십니다(요한 13:18). 그의 배반을 한 번 더 예고하신 이유는 그 일이 일어날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요한 13:19). 사실 이러한 배반 예고가 있기 전 예수께서는 ‘유다’를 ‘악마’라고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한 6:70). 또 방금 전 베드로가 발 씻김을 만류했을 때도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요한 13:10-11).

이렇게 예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처음부터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를 제자로 선택하시어 돈주머니를 맡기셨습니다. 돈주머니를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게 ‘신뢰’와 ‘애정’을 갖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를 당신 다음가는 ‘가장 영예로운 손님’ 자리에 앉히시고, 그의 발까지 씻어주셨습니다. 그만큼 유다가 악마의 하수인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여러 차례 주신 셈입니다. 그러나 끝내 유다는 돌이키지 않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러한 유다를 상대하여 마지막으로 그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이전의 배반 예고가 다소 ‘막연한 암시’였다면, 여기서는 그 ‘방법’까지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몹시 번민하시며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 가운데 나를 팔아넘길 사람이 하나 있다.” 하고 내놓고 말씀하셨다. – 요한 13:21

유다의 배반을 “내놓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몹시 괴로우셨습니다. ‘몹시 번민하셨다’는 말씀은 온 몸으로 영혼의 고통을 견디시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라자로의 무덤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던 장면에서 이런 표현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당신으로부터 끝내 떨어져 나가는 유다를 향한 연민과 고통이 그대로 묻어나 있습니다. 지난 3년여를 스승과 제자로 함께 지낸 사이입니다. 온갖 사랑을 쏟으며 그의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도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그는 돌이키지 않았고, 악마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가 선택한 ‘배반의 방법’은 돈을 받고 스승을 ‘팔아넘기는 일’입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은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정적이 흐릅니다.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몸을 돌려 서로 눈길만 주고받습니다. 그 때 예수님 품에 기대어있던 사랑받는 제자, 즉 그 만찬자리에서 ‘가장 영예로운 손님’ 다음으로 중요한 자리인 1번에 있던 제자와 13번 자리에 있던 시몬 베드로의 눈길이 서로 마주쳤습니다.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보라는 듯 베드로가 고개 짓을 합니다. 쿠션에 기댄 채 예수님 품에 있던 1번 자리의 제자가 얼굴을 아예 예수님 품으로 돌리며 귓속말로 조용히 여쭈어봅니다.

주님, 그게 누굽니까? – 요한 13:25

오른손으로 빵을 집고 계셨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 요한 13:26

그 말씀을 하신 후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빵을 적셔서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 요한 13:27

예수께서 식탁에 있는 ‘국물’에 빵을 적시어 건네줄 거리라면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합니까? 예수님 바로 ‘왼편’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전체 만찬 자리에서 ‘가장 영예로운 손님’ 자리인 3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배반 예고를 내놓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의 머리가 유다의 품에 위치했기에 그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 다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요한의 대화를 모두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잔치 자리의 주인은 ‘가장 영예로운 손님’에게 직접 빵을 적시어 먹여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빵을 적시어 유다에게 건네는 예수님의 행동을 다른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를 각별하게 대접하는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3장의 주제인 ‘사랑’처럼,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고 감싸 안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유다가 그 빵을 받아먹자마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 요한 13:27a

유다는 받아먹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그는 ‘회개의 기회’를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연히 예수님의 손에서 빵을 입으로 받아먹었습니다. 그 순간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예수께서도 유다가 받아먹지 않기를 원했을 수 있습니다. 그가 받아먹자마자 사랑 가득하신 예수님의 손도 그만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도 체념하신 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 요한 13:27b

그러나 누구도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요한 13:28). 심지어 예수님 품에 있던 ‘요한’마저도 그랬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았다면 유다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을 시키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요한 13:29). 그만큼 유다가 다른 제자들에게 철저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치밀하게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과 유다의 관계가 제자들이 보기에 신뢰 할만 했다는 뜻입니다.

유다가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밖으로 나간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빛’이신 주님과 함께 있지만 그는 ‘어둠’을 향해 걸어 들어갔습니다. ‘밤’은 ‘악마의 세계’이며, ‘파멸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떠나갈 때 기다리고 있는 일은 언제나 ‘영혼의 파멸’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고별설교의 시작’입니다(요한 13:31-16:33). 예수님은 유다가 나간 뒤에 십자가 수난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하십니다. 분명 ‘십자가 수난’은 인간적인 견지에서는 어리석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1고린 1:18,23). 하지만 ‘십자가 수난’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최고의 계시’가 될 것이기에 ‘아들에게는 영광’입니다. 또한 ‘아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아버지도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히 하나이시며, 십자가의 영광과 부활의 영광도 하나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성주간 수요일을 맞으며 ‘유다의 배반’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그의 배반 이야기를 묵상하도록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자신은 결코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을 향한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훨씬 다양한 형태로 관계 속에서 자기 이익과 안전을 위해 ‘가리옷 사람 유다’가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제자로 ‘선택’하셨고, 그에게 돈주머니를 맡길 만큼 ‘신뢰’하셨습니다. 최후 만찬자리에서 가장 영예로운 손님의 자리에까지 앉히며 마지막까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위해 그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깼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런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깬 적이 없습니까? 나를 신뢰하고 사랑해 준 누군가를 속이고, 배반한 적은 없습니까?

유다는 예수님께 끌렸습니다. 사람들을 차별 없이, 세리와 창녀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수용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예수님의 방식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이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 그 ‘새로운 세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수난과 부활’을 발설하셨을 때 그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자신이, 그리고 민족이 원하는 ‘정치적 메시아’의 방향으로 가시지 않고 ‘수난의 길’을 가시려는 스승께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경우는 제각각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도 참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갈수록 우리는 갈등합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좋고, 그 가르침에 공감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의 ‘희생’이 요청될 때, 나의 ‘고통’이 요청될 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세상의 변화를 원하지만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일에 나로부터의 ‘혁신’이 요구될 때 갈등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불편해 지는 일이 싫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개선하는 일에 나서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지내는 일이 좋기에 ‘진실’을 말해야 할 때 당당하게 말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불의’가 저질러지고 있음을 알지만 ‘저항’이, ‘투쟁’이 생활을 불편하게 한다고 여기기에 나서고 싶지 않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면 지금처럼 편안하게 살 수 없기에 애써 외면합니다. ‘나눔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는 공감하지만 내 돈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은 싫습니다. 세상에 그토록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만 여전히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바로 ‘가리옷 사람 유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거동락 했지만 결국 ‘하느님 나라’가 요구하는 ‘자기부인’, ‘자기죽음’, ‘자기봉헌’이 요구될 때 우리도 ‘가리옷 사람 유다’가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유다처럼 선택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지 아니면 예수님처럼 선택하고 빛의 세계로 들어갈지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너무 자신하진 마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유다처럼 자신의 욕망대로 선택하기 쉽습니다. 육체의 생명과 안락, 세상적인 출세와 성공, 권력과 명예를 갖는 일 등등.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나의 이기심과 탐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선택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선택을 하셨습니다. ‘자기부인’, ‘자기죽음’, ‘자기봉헌’의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왔습니다.

《시편》 기자처럼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유다처럼 살아온 우리지만 끝까지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보다 ‘자기부인’, ‘자기죽음’, ‘자기봉헌’으로 이루신 ‘주님의 사랑’이 크십니다.

주님, 제 영혼은 유다처럼 가난하고 불쌍합니다. 저희의 구원자, 도움이신 주님, 뉘우치는 저희를 받아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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