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7. 사순 36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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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창조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깨달아, 그 크신 겸손을 본받게 하시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9:1-7
  • 성시 – 시편 71:1-14
  • 2독서 – 1고린 1:18-31
  • 복음서 – 요한 12:20-36

사순 36일입니다. 성주간의 화요일입니다. <전례독서>를 묵상하는 동안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詩)가 떠올랐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의 ‘시’(詩)가 <전례독서>의 어느 구절과 연결되기에 인용하고 있을까요? 이미 <전례독서>를 읽으셨다면 다시 천천히 낭독하며 찾아보십시오.

1독서 《이사야》는 야훼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야훼 종’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이사 49:4a, 7a) 줄기를 곧게 세울 것이고, 바람과 비에 젖으면서도 마침내 ‘사명’을 꽃피울 것입니다(이사 49:6, 7b). 야훼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71편>은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오랜 믿음(그는 1독서 야훼의 종처럼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의지했습니다)을 지켜온 ‘노인의 탄원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시편》의 숱한 구절들을 빌려다가 기도를 바칩니다. 그는 ‘바람과 비’라는 ‘질병의 고난’으로 흔들리고 젖었으면서도 오직 ‘피난처’이신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의 근거를 둡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하느님의 힘과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언합니다(1고린 1:24).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려고 흔들리면서 피어난 꽃임을 증언합니다(1고린 1:30). 하느님께서는 어리석고 약하며,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택하시어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1고린 1:27-28). 우리도 세상에서 바람과 비에 젖지만 결국 예수처럼 사명을 완수한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루살렘 입성 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제 우리는 예루살렘 입성 전에 있었던 ‘마리아의 도유(塗油)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도유 이야기’ 다음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본문은 그 입성 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두 단락을 배정했습니다. 전반부(20-26절)는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간청하는 이야기입니다. 후반부(27-36절)는 《요한복음》의 ‘게쎄마니’라고 불리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뵙고자 했던 ‘그리스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과월절 순례를 왔다가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뵙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했던 말을 성취합니다.

자, 이제는 다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따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 요한 12:19

그들이 걱정하며 내뱉었던 “모든 사람”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원문에 따르면 ‘온 세상’(코스모스)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들도 ‘가야파’의 경우처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한 셈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들처럼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필립’을 찾아 간청합니다.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 – 요한 12:20

‘필립’의 고향은 ‘베싸이다’였습니다. 그 지방은 그리스 식민지였던 ‘데카폴리스’(그리스어로 10개의 도시라는 뜻) 가까이 있었기에 ‘그리스어’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필립’은 같은 고향사람이자 자기처럼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안드레아’와 상의하고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 청원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 요한 12:23

“큰 영광”은 십자가 수난과 부활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리스사람들과 제자들, 즉 온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듣도록 짤막한 비유를 하나 드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 12:24

마땅하고 옳은 바입니다. 밀알 하나가 ‘많은 열매’(부활)를 맺으려면 먼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자연의 모든 생명은 ‘죽음을 통해 더 많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영적 생명의 섭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 온 세상에 ‘영원한 생명’(구원의 열매)을 가져올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수난이야말로 온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결실’을 풍성히 가져오는 궁극적 원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아담의 범죄로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이들을 ‘대속’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곧 있게 될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의미와 결과를 온 인류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 영적 생명의 섭리는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 요한 12:25

분명 예수께서는 영적 생명의 섭리를 말씀하신 후 온 세상이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자기 목숨이란 일시적인 ‘육체적 수명’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목숨을 아낍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기적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육체적 수명’을 사랑하고 ‘자기’에만 몰두하는 그런 삶은 도리어 자기 목숨을 잃게 만듭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바에 따르면 신앙이란 결국 ‘자기’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인간이 그 본성상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면 그 ‘나’를 확장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 방법이기도 합니다. 자기피부 안으로만 ‘자기’라 규정하던 삶에서, 가족, 이웃, 공동체, 민족, 타민족, 인류, 다른 종(種), 심지어 지구 전체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남’을 ‘내 몸’처럼 여기고, 섬기며 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지구 살기’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가치, 더 큰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가장 첫 자리에 두는 삶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이롭게 하며,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선로로 추락한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씨처럼, 빈자의 어머니였던 ‘마더 테레사’처럼,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밀알 하나처럼 자기중심적인 목숨, 일시적인 육체적 수명을 포기하고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갔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이렇게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 요한 12:26a

‘제자의 삶’이란 밀알처럼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을 본받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마태 10:38; 16:24). 사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려면 자기중심적인 목숨, 일시적인 육체적 수명을 포기하고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자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가신 길을 걸어야 하며, 스승이 계신 곳에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 요한 12:26a

아버지가 주시는 ‘영광’입니다. 스승이신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예수님을 섬기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간 이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억할 점은 이것입니다. ‘영광’은 ‘고난 없이’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주간에 묵상해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에 이르렀습니다.

후반부(27-36절)는 《요한복음》의 ‘게쎄마니’라고 불리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은 이제 곧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셔야 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밀알처럼 자기 목숨을 버릴 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때의 심정을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 요한 12:27a

《요한복음》 기자는 이 짧은 문장으로 <공관복음>에 기록된 ‘게쎄마니의 기도’를 함축합니다( 마르 14:32-42; 마태 26:36-46; 루가 22:39-46). 예수께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픈 마음’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 사이에서 느끼는 심각한 ‘갈등’과 ‘괴로움’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 요한 12:27b

예수님은 그 심각한 갈등과 괴로움을 극복하시고 자신이 세상에 성육신 하신 목적과 사명에 충실하기로 다시 마음을 올곧게 세우십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을 노래한 도종환의 시는 예수님께 가장 잘 어울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를 ‘게쎄마니의 기도’를 이어가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 요한 12:28a

예수님은 목숨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기도했습니다. 사실 공생애를 살아가신 예수님의 목적은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일이었습니다(마태 6:9-10). 이런 예수님의 기도에 감동하신 아버지는 하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 요한 12:28b

그 자리에서 그 음성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 이었습니다(요한 12:29). ‘천둥이 울린’ 물리적 현상이라 생각한 믿음 없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의 음성’으로 생각한 다소 ‘종교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속합니까? 예수께서는 천둥소리나 천사의 음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음성’이라고 알려주십니다. 더욱이 그 음성이 과월절을 맞아 세계 도처에서 순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들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요한 12:30). 그렇게 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의 때가 ‘마귀’(어둠)에게 속해 있던 ‘세상이 심판’을 받는 때이고, 이 ‘세상의 통치자’인 ‘악마’(마귀, 사탄)가 쫓겨날 때임을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오늘 2독서 《고린토전서》의 말씀처럼(1고린 1:22-23),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이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되고, ‘세상 통치자’인 ‘마귀’에 대해서는 ‘궁극적 승리’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온 세상 사람을 당신께로 이끌어 ‘구원’하실 것입니다(요한 12:32).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어둠에 속한 세상에 대한 ‘심판’이고, 세상의 통치자인 마귀에 대한 ‘추방’이며,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치며 ‘정치적 메시아’로 환호했던 군중들에게는 ‘수난의 메시아’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자신들 눈앞에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모셔두고서도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그 때에 군중이 “우리는 율법서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 요한 12:34-35

그 질문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눈먼 사람들임을 증명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임을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선입견과 편견, 민족적 우월감이 눈을 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더 이상 논쟁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다만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 – 요한 12:35-36a

그들이나 우리나 필요한 일은 한 가지입니다. ‘회개하고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미워’하며 ‘가까이 오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악마에 속한 자식들임을 스스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기회를 놓쳤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꽃들은 피는 시기가 다 다릅니다. 성내천을 곱게 물들였던 벚꽃이 어느새 ‘꽃비’가 되어 나립니다. 오금공원을 장식했던 개나리와 진달래도 조팝나무들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내주고 있습니다. 올해 성주간은 성당에서 바치는 전례가 없기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도 쓸쓸해서 화원에 들러 꽃나무를 사올 생각입니다. 화원에 들리면 저마다 눈길을 사로잡으려 빛을 뽐내는 녀석들 때문에 미소가 번집니다. 그리되기까지 그들도 무수한 날들을 견디어냈겠지요.

하느님이 보시는 우리 인생도 그렇겠지요. 각자 피어나는 시기는 다릅니다. 우리는 바람과 비에 젖고 흔들립니다. 예수님처럼 거절당할 때도 있고, 오해받을 때도 있으며,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1독서 《이사야》의 ‘야훼의 종’처럼, 《시편》 시인처럼, 다시금 신앙의 줄기를 곧게 세우고 저마다의 시간에,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따라 ‘사랑’으로 피어나는 일은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예수님도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수난’에 나서실 때 몹시 흔들리셨습니다. 바람과 비에 몹시 젖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시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사랑의 꽃잎을, 사명의 꽃임을 따뜻하게 피워내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밀알 하나가 되시어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찬미한 《시편》 시인처럼,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흔들리는 꽃대들을 보호하시는 주님께 희망을 두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코로나19로 몹시 흔들리는 인류를 위한 기도로 들어갑니다.

희망의 주님, 구해줄 자 하나 없는 인류로부터 멀리 서 계시지 마시고 빨리 오시어 도와주서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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