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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6. 사순 35일(월요일)

본기도

창조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깨달아, 그 크신 겸손을 본받게 하시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2:1-9
  • 성시 – 시편 36:5-11
  • 2독서 – 히브 9:11-15
  • 복음서 – 요한 12:1-11

사순 35일입니다. 성주간의 월요일입니다. 복음이야기 그 유명한 ‘도유(塗油)사화’입니다. 베다니아의 ‘마리아’는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최선의 사랑과 믿음’을 예수께 바침으로 ‘장례일’을 미리 준비했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선처럼, 마리아의 행동은 반복될 수 있는 그런 ‘헌신’이 아닙니다.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단 한 번의 ‘결정적 예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임박한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헌신’을 ‘실존적 결단’으로 행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두 번에 걸쳐 값비싼 ‘선물’(봉헌)을 받으신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 번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을 때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발아래 예물로 드렸습니다(마태 2:11). 나머지 한 번은 ‘십자가 죽음’을 코앞에 둔 때입니다. ‘베다니아’에 살던 ‘마리아’가 예수께 ‘순 나르드 향유 한 근’(1리트라)을 발에 ‘예물’로 부었습니다. 어째서 ‘성주간의 첫 날인 오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 복음이야기를 읽도록 배정했을까요?

‘사(四)복음서’에는 ‘도유(塗油)사화’, 즉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각각 한 편씩 전해집니다(마르 14:3-9; 마태 26:6-13; 루가 7:36-50; 요한 12:1-8). 공통점도 발견되고, 세부적인 면에서 많은 차이점도 발견됩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에 주목해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학자들은 <마르코복음>, <마태오복음>, <요한복음>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같은’ 사건으로 보고 ‘평행본문’으로 배치합니다. 이야기의 ‘초점’이 일치하고, 일어난 ‘시기’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세 복음서 기자는 그 여인의 행동에 담긴 ‘의도’, 즉 ‘왜’를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이 전해 줍니다. ‘십자가 죽음’(수난의 길), 즉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했다고 밝혀주십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도 ‘공생애 마지막 무렵’(과월절 이틀 전과 엿새 전)입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평행본문’인데도 <마르코복음>이나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요한복음>을 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인의 이름’까지 밝히고 있는 <요한복음>을 이 전승의 ‘최종 편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이야기가 ‘성주간의 첫 날인 오늘’ 선정된 이유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승의 최초 형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을 기억하라”입니다(마르 14:9). “이 여인이 한 일을 기억(기념)”하는데 있어서 ‘오늘’ 만큼 적당한 날은 없습니다.

말씀 나눔은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합니다. 특히 <요한복음>과 평행본문이자 ‘원(原) 자료’라 할 수 있는 <마르코복음>을 참고해서 진행합니다. <마르코, 마태오, 요한복음>은 ‘도유사화’가 ‘과월절’을 앞두고 일어났다고 시기를 특정합니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은 이틀 전, <요한복음>은 엿새를 앞두고 일어났습니다. ‘과월절’(히브리어로는 ‘페사흐’, 아람어로는 ‘파스하’, 그리스어로는 ‘파스카’라고 합니다)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이스라엘의 최대 명절입니다. 본래 ‘과월절’(passover, 넘어가심)은 그 날에 먹는 ‘식사’와 관련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와 고기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그들의 생명이 죽음으로부터 구원되고, 이집트 종살이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음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출애 12:3, 13-14, 27). 이처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과 해방’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기뻐하고 기념하며, 약속의 땅에서 누리게 될(후대에는 메시아가 오시어 이루실 왕국에서 누릴) 축복을 고대하며 지키는 최대 축제일입니다.

‘과월절’은 어느 달에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정하는 방법이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해가 뜨는 아침이 하루의 시작이지만, 이스라엘은 해가 지는 저녁이 하루의 시작입니다(창세 1:5,8,13,19,23,31). 과월절도 ‘아빕(Abib)월’ 14일 해가 지고 난 저녁부터 15일 해가 질 때까지의 ‘하루’입니다(출애 13:4-5; 신명 16:1). ‘아빕’은 ‘봄’이라는 뜻이고, ‘아빕월’(현대 월력으로 3,4월)은 나중에 ‘니산(Nisan)월’로 불립니다. 같은 달이지만 ‘아빕월’은 바빌론 포로기 이전 ‘가나안 땅의 농사 절기’에 따라 불리던 이름이고, ‘니산월’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 불리게 된 ‘바빌론식’ 이름으로 유대력(종교력)으로는 정월, 즉 ‘첫 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그 ‘니산월 과월절’의 ‘준비일’입니다. 그 해는 ‘과월절’과 ‘안식일’이 겹쳤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광복절과 토요일이 겹친 날입니다. 그 과월절 준비일(니산월 14일 해가 지기 전까지 시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또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숨을 거둔 시간도 과월절 준비일 ‘오후 3시경’입니다. 유대인들이 ‘과월절 희생양’을 잡는 시간입니다.

<마르코, 마태오, 요한복음>은 그 사건이 ‘베다니아’에서 일어났다고 장소를 특정합니다. ‘베다니아’는 신약성경에 두 군데 나옵니다. 한 곳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첫 제자들을 선택하시며, 활동하셨던 곳으로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요한 1:19-51; 3:22-26; 4:1-2; 10:40-42). 다른 한 곳은 ‘예루살렘 성벽’에서 동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올리브산 동쪽 중턱 경사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정구역상으로는 ‘예루살렘’에 속하지만 ‘성 밖’에 위치합니다.

지명의 유래는 어떻게 될까요? 몇 가지 설(說) 중에서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둘 다 어원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스 식 이름인 ‘베다니아’를 히브리어로 되돌리면 ‘벹 아니’와 ‘벹 아나니야’입니다. 둘 다 ‘벹’(Bet)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로 ‘벹’(Bet)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많이 들어보신 ‘베델’(하느님의 집)이나 ‘베들레헴’(빵집)에도 ‘벹’(Bet)이 쓰였습니다. ‘아니’(ani)는 ‘가난하다, 비참하다’는 뜻입니다. ‘아나니야’는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이 지역(원문에는 ‘아난야’)에 정착한 ‘베냐민’ 지파의 후손 이름입니다(느헤 11:32). 따라서 두 단어의 합성어인 ‘베다니아’는 ‘가난한(고난당하는, 슬픔으로 가득 찬) 이들의 집(마을)’, 또는 ‘아나니야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지명에 담긴 이러한 ‘역사성’에 주목하면서 마을의 유래를 ‘한센병자들’(나병환자들)과 연결 짓습니다. 지금은 인식이 개선되었지만, 고대에는 ‘한센병’(Hansen病)을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겼습니다. ‘한센병자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병의 고통’ 뿐 아니라 ‘가난’과 ‘슬픔’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레위 13-14장). 역사기록에는 ‘예루살렘 성문 동편 밖’에 ‘한센병’ 의심을 받는 이들의 ‘격리 지역’(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베다니아’가 행정구역상으로도(율법에는 안식일에 빵을 들고 걸을 수 있는 거리에 해당) ‘예루살렘’에 속할 뿐 아니라 ‘성문 동편 밖’(거의 유대 광야의 시작 지점)에 위치합니다.

종합하면 고대로부터 ‘베다니아’는 오늘날의 음성나환자촌처럼, ‘한센병’ 의심을 받는 이들이 격리되는 곳이고, 그 때문에 사회로부터 차별받던 이들의 후손들이 사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빈민촌’입니다. 그 유래를 생각한다면 별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저주, 격리, 차별의 그림자가 여전히 예수님 당시까지 드리워져 있던 마을입니다.

그런데 불과 ‘한 달여’ 만에 이 빈민촌은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유다 광야의 오아시스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옆 동네 ‘벳파게’를 지나 반드시 거쳐 가야하는 마을이긴 했습니다. 참고로 ‘벳파게’는 ‘작은(설익은)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작은 열매를 맺는 품종(品種)이 많은 지역이라는 뜻입니다(무화과를 건기와 우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벳파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목적지인 ‘예루살렘’이 불과 3km 앞이었기에 발길을 재촉해 ‘베다니아’를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사연은 복음이야기 첫 줄에 나와 있습니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 요한 12:1

이것이 불과 한 달여 만에 ‘베다니아’, 즉 ‘가난한(고난당하는, 슬픔으로 가득 찬) 이들의 집(마을)’이 ‘유명세’를 치르게 된 이유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라자로’ 덕택에 ‘빈민촌 베다니아’가 유명해졌습니다.

그 기적 후에 예수님은 무엇이 그리 급하신지 그 곳에 머물지 않고 곧 마을을 떠나셨습니다. 더욱이 그 기적으로 인해 예수님은 큰 위협에 처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1:46-53). 예수님은 더 이상 유다 지방을 드러나게 나다니실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 광야’ 근처에 있는 지방으로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머물러 계셨습니다(요한 11:54).

약 2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계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리고를 방문하여 그곳에 살던 시각장애인을 치유해 주셨고(루가 19:35-43), 그 유명한 세관장 ‘자캐오’의 집도 방문하셨습니다(루가 19:1-10). 하지만 그렇게 거기에만 계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제 과월절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것처럼 수난의 길을 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밤중에 은밀히 길을 나섰습니다. 이유는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일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발이 빠른 ‘혁명당원 시몬’을 먼저 ‘라자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들리실 참이었습니다. 특히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더라도 밤에는 ‘라자로’의 집에서 머무실 참이었습니다(마르 11:1-11). 지상의 여정을 끝내시기에 앞서 자신이 좋아하는 ‘베다니아’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마지막 ‘쉼’을 취하고 싶으셨습니다(요한 11:3). 베다니아와 라자로의 집이 ‘은신처’인 셈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베다니아’에 도착하신 날은 과월절을 ‘엿새’ 앞 둔 오후였습니다(요한 12:1). 우리식으로 하자면 ‘성주간’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오자 제자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왕’이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당장 ‘하느님의 나라’가 나타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루가 19:11). ‘혁명당원 시몬’을 자신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도 그런 ‘거사(擧事)’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수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예수님 일행의 당도를 누구보다 기다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라자로 삼남매’입니다. 이제야 ‘라자로 삼남매’도 미처 다하지 못한 ‘감사’를 표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그 마을에 계시다는 소식은 어느 새 예루살렘까지 들어갔습니다. 벌써 많은 유대인들이 ‘베다니아’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요한 12:9-11). 예수 뿐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라자로’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다니아’는 예수님으로 인해 ‘라자로’와 떨어질 수 없는 마을로 변해 있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다음날부터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보려고 ‘베다니아’, 즉 그 ‘슬픔의 집(마을)’을 찾곤 했습니다. 격리된 ‘슬픔의 집(빈민촌)’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옴으로 인해 그 마을은 ‘오명’(汚名)에서 벗어나 ‘기쁨의 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서>는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합니다.

‘베다니아’는 특별한 곳이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께는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거나 내려오실 때 ‘베다니아’에 자주 들리셨습니다. 특히 ‘라자로’ 삼남매의 집을 자주 방문하시어 그들과 친교를 나누며 쉬기도 하셨습니다(마르 11:1-25; 루가 10:38-42; 요한 11:1-12:17).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는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신 곳’이기도 합니다(마르 11:1). 또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도 ‘베다니아’입니다(루가 24:50).

이렇게 ‘베다니아’는 인류의 구세주께서 자주 찾으신 곳,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된 곳입니다. 그 빈민촌이 차별과 격리로부터 벗어나 ‘기쁨’을 증언하는 집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가난’과 ‘슬픔’과 ‘고통’에 가득 찬(불교식으로 말하면 고해(苦海)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기쁨의 삶’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에는 그 유명세에 비해 ‘라자로’의 말이 단 한마디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인데 한 마디쯤 기록해 놓을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없습니다. 그 이유를 묵상해 봅니다. 사람들 중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내는 사람이 있다는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라자로’는 자기 존재 자체만으로도 말없이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요한 12:9-11). 복음이야기 첫 머리에 기록된 것처럼, “손님들 사이에 끼여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기만 해도”(요한 12:2)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간 ‘라자로’가 지켰던 ‘그 자리’를 통해 우리가 성찬례 때 앉는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대체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자신만의 ‘고정석’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같은 자리’에서 성찬례를 바칩니다. 일이 생겨 한 주라도 빠지게 되면, 그 자리는 한 주 동안 쓸쓸히 비어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기도의 자리’이자, ‘믿음의 자리’입니다.

더욱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을 믿게 한 ‘라자로’처럼, 우리교회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내 존재가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의 존재임’을 믿으십시오. 내가 앉아 있는 이 믿음의 자리, 기도의 자리를 보고, 성찬례에 참석한 다른 교우가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고,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다른 이들 안에서 그런 생명의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들은 이 시대의 또 다른 ‘라자로’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마르타’는 음식 장만을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마리아’도 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수고가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니 기쁘다는 말로도 그들의 심정을 미처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 덕택에 잃었던 오빠를 되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상복’(喪服)을 벗기고 ‘기쁨의 옷’으로 입혀 주셨습니다. 아까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특히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어쩐지 그녀의 마음에는 이번이 아니면 ‘감사’를 표현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다급함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지난밤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 혁명당원 ‘시몬’이 했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미묘한’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바 있는데, 도대체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던 순간 마리아는 이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일전에 ‘오빠’가 출타했을 때 예수님 일행이 집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루가 11:38-42). 언니는 음식 준비로 바빴지만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언니는 그런 자신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가르침을 들으면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죄와 죽음에 붙잡힌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확신했습니다. 더욱이 그날 방문이 있기 얼마 전, 그녀가 전해들은 말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했다고 합니다(마태 16:21-23, 22-23; 마르 8:31-33, 9:30-32; 루가 9:22,44-45).

하지만 제자들 중 누구도 그 말씀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만류하는 제자도 있었고, 슬퍼하며 더 이상 묻기조차 그들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전해 듣던 순간 이상하리만치 ‘마리아’는 ‘수난과 죽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선히 믿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오래 계실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작동했습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여자의 ‘예감’은 이상하리만치 맞는 편입니다. 며칠 전에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거처를 아는 자는 곧 신고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요한 11:57).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마리아’는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감사’를 표현할 ‘지금의 기회’를 붙잡아야 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실 그 분을 향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헌신’(실존적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만찬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 파열음이 들렸습니다. ‘어떤 여인’의 돌발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 기자는 처음에는 ‘어떤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3절) 향유를 부었다고 전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는 예언자나 제사장이 어떤 사람을 ‘제사장’, ‘왕’, ‘예언자’로 승인할 경우 ‘머리’에 ‘향유’(올리브기름)를 부었습니다(출애 29:7, 30:30; 사무상 10:1; 열왕상 19:15-16). 특히 ‘왕’은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운 이”로 추앙되었습니다(사무상 24:7; 시편 2:2). 여기에 쓰인 ‘기름 부운 이’가 히브리어로 ‘마쉬아흐’, 즉 ‘메시아’(Messiah)입니다.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이 ‘크리스토스’이고, 우리말로는 ‘그리스도’(한자로는 ‘기독’(基督)이라 함)로 불립니다. 따라서 ‘이름도 없는 어떤 여인’(나중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일’은 예수님을 ‘메시아’, 즉 ‘왕’으로 승인하는 일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행위는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유대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여인이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일’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승인한 공공연한 ‘예언자적 행동’입니다. 동시에 그 ‘향유’ 부음을 받고 계신 예수님은 자신을 ‘왕’으로 주장하신 셈입니다. 이렇게 ‘왕’을 옹립한 셈이니 그야말로 정치적으로 위험천만한 사건, 국사범(國事犯)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을 감지하였던지 <마르코복음> 기자는 이 사건을 변형시킵니다(마태오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예수의 몸에”(8절) 부은 것으로 변형시킵니다(요한복음만 ‘발’에 붓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건을 ‘비정치적 사건’으로 만듭니다. 다시 말해 그 여인의 행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수난의 길), 즉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한 것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그 ‘위험한 정치적 논란’을 피해갑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름 없는 어떤 여인’의 ‘위상’(位相)은 조금도 감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르코복음> 기자는 이 여인을 어떤 사람으로 증언합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가야할 ‘십자가 수난의 길’을 ‘깨달은 제자’로 증언합니다. 다른 남성 제자들은 세 차례의 ‘수난 예고’를 듣고도 깨닫지 못한 점을 상기해 보십시오. 심지어 ‘수(首)제자’라 불리는 ‘베드로’는 첫 번 수난 예고를 듣고 펄쩍 뛰며 말리다가 예수님께 ‘사탄’이란 말까지 들었습니다(마르 8:32-33).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름 없는 어떤 여인’은 참다운 믿음을 가진 제자이고, 예언자인 셈입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복’을 선포하십니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 마르 14:8-9

기억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이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주간의 첫 날인 오늘, 평행본문 중에서 <요한복음>을 낭독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였다고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도 <마르코복음>을 따라 이 ‘도유사화’를 ‘수난사건’에 연결합니다.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던 ‘마르타’는 음식상이 두 번이나 새로 차려지도록 ‘마리아’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지난번처럼 예수님 말씀을 들으러 손님들 사이에 끼어들어간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마르타’가 식탁이 펼쳐진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마리아가 ‘언니’하고 불렀습니다. 가슴에는 ‘옥합’을 품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언니에게 ‘옥합’을 들어 보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말릴 새도 없이 식탁으로 다가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비스듬히 누워계신 자리로 가더니 무릎을 꿇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옥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옥합’에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이 들어있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나르드’ 향유는 이스라엘에서는 나지 않고 동방에서 들여왔습니다. 향도 향이려니와 피부병에도 효과가 높았습니다. ‘한 근’이라고 번역한 원문의 무게 단위는 ‘리트라’입니다. 1리트라는 약 ‘327’그램입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360ml ‘소주 1병’ 정도에 들어가는 양입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있던 ‘마리아’는 허리를 깊숙이 구부렸습니다. 그런 다음 ‘밀랍’으로 봉인된 ‘옥합’의 뚜껑을 깼습니다. 갇혀 있던 ‘향기’가 비로소 자유를 찾는 순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고요히 봅니다. 먼지투성이의 뜨거운 길을 지칠 줄 모르고 누비시며 ‘하느님 나라’를 전해 오신 ‘발’입니다. 1독서 《이사야》의 야훼 종의 첫째 노래처럼,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가르치며 살아오신 발”입니다(이사 42:1-4). “만국의 빛으로 살아오신 발”입니다(이사 42:6-7). 그 ‘발’이 이제 모든 사명을 내려놓고 쉬려고 합니다.

‘옥합’을 기울여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향기가 빠르게 번져갑니다. 마지막 한 방울이 너무 빨리 흘러나왔습니다. ‘향수’가 아니라 ‘향유’(원액의 기름)입니다. 소주 1병 정도의 양이니 ‘향수’로 만든다면 수백 명이 쓸 수 있는 엄청난 양입니다. 온 집안에 음식 냄새가 아니라 향유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봄밤을 맞아 문가에 찾아온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오래도록 퍼져갔습니다. 자신이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의 이름이 이 향유 냄새처럼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예수님의 ‘생’(生)이 여기서 끝난다 하더라도 자신만은 오래오래 그 말씀을 간직할 것을 다짐합니다. 마치 주인의 발을 씻기는 ‘종’처럼, 그 경건한 예식을 치르고 있는 ‘마리아’를 누구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라자로’와 ‘마르타’ 역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는 분명 오빠를 살려주신 일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가 보기에 그 행동에는 ‘감사’를 넘어선 그 무엇도 표현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가 사순절 여정동안 해 온 행동에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우리는 지난 35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생활을 이어왔습니다. 고요히 ‘찬미’를 바치고, ‘감사’를 바쳐 올렸습니다. 날마다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묵상했고, ‘참회연도’를 바쳤으며, 교회와 세상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이끌었습니까?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마리아’나 ‘우리’가 표현하는 ‘감사의 행동’은 ‘사랑’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가족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아침’을 차리고, 혹은 일터에 나가 성실하게 ‘일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온화한 미소와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사회적 소수자들 편에 서며, 자연을 보호하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 그것이 우리 ‘행동의 이유’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감사’는 실천됩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에는 더 근본적인 목적(이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갖는 그 근본적인 목적(의미)이 무엇인지 곧 말씀하실 참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내려놓은 다음 ‘수건’으로 감싼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삼단 같은 머리’로 향유가 흘러내리는 ‘발’을 닦아내기 시작합니다. 이 역시 관례에 어긋나는 ‘파격’입니다. 이 행동에는 ‘마르타’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의 관점으로는 여성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성차별적 언사지만 당시는 여인네들의 머리카락에 남성들이 유혹받을까봐 노출을 금하던 시절입니다. 관례적으로 ‘기름’(향유)은 발이 아니라 ‘머리’에 발랐고, 여인들은 잔치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남자와 신체접촉을 하는 일도 금하던 시절입니다.

나르드 향유와 예수님의 발과 ‘마리아’의 긴 머리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민망한 사태가 불편했던지, ‘가리옷 사람 유다’가 나서서 ‘핀잔’을 줍니다. 정말이지 그가 내뱉은 충동적인 말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 요한 12:5

그의 ‘눈썰미’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옥합의 크기를 잠깐 보고도 향유 값이 최소 ‘삼백 데나리온’임을 알 정도입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인 것을 감안한다면(마태 20:2), 1년 치에 해당하는 ‘상당한’ 돈입니다. 특히 ‘베다니아’가 ‘빈민촌’인 것을 감안하면 마리아의 예물은 정말 대단한 봉헌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지금 ‘가격’에 주목하면서 ‘마리아’의 행동이 ‘낭비’라고 비난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는 ‘사치’라고 비난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물건의 ‘유용성’과 행동의 ‘효용성’에 주목하면서 ‘마리아와 예수님’ 둘 다를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향유’는 ‘세간의 가격’이 아니라 ‘감사 예물’로 바쳐질 때 비로소 그 ‘가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경제적 논리’로 그 향유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랑’보다 ‘물질’을 높이 사는 ‘속물’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것도 아니면서 남의 ‘실존적 결단’에 따른 ‘봉헌’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이 지나친 열정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물론 오늘날도 물건의 ‘유용성’과 행동의 ‘효용성’은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은 아님을 꼭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관계의 유일한 기준’을 말하라면 ‘사랑’입니다. <요한복음>도 마리아의 이 ‘감사의 예물’과 ‘파격적인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유다’가 ‘도둑’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요한 12:6; 13:29). 그러나 마리아의 행동에는 ‘감사와 사랑’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목적’(이유, 의미)이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것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 – 요한 12:7

이 말씀은 ‘마리아’를 향한 예수님의 ‘고마움’의 표현입니다. 혹시라도 상처 입었을지도 모를 ‘마리아의 마음’을 ‘옹호’하십니다. ‘마리아의 행동’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의도’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의도는 ‘감사와 사랑’보다도 더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가슴에 두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아니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을 감행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으로 사명을 마감하더라도 자신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신다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치고, 머리까지 풀어 보일 정도로 스스로를 완전히 내려놓으며, ‘죽으실 예수께’만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감사와 사랑의 행동’에 담긴 진정한 의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1독서 《이사야》의 야훼 종의 첫째 노래처럼, “인류와 계약을 맺기 위해”(이사 42:6) 수난하시고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제물’을 가지고 왔기에 예수께는 소중했습니다. 2독서 《히브리서》 말씀처럼,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가 되시기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제물’을 가지고 왔기에 예수께는 소중했습니다. 정말로 ‘

그들이’(마르코복음에서는 거기 있던 몇 사람이고, 마태오복음에서는 제자들이며,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믿었다면, 예수님의 장례식 날에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다면, 결코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같이 행동한 목적은 ‘예수님의 장례’였습니다. 그녀 혼자만 유일하게 예수님의 지상사명이 끝나가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이 귀했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선’(慈善)처럼, 마리아의 행동은 반복될 수 있는 그런 헌신이 아닙니다.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단 한 번의 ‘결정적 예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임박한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헌신’을 ‘실존적 결단’으로 드렸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 곁에 있겠지만(베다니아가 빈민촌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이제 지상 생애를 끝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을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곁에는 늘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복지국가를 꿈꾼다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물든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고, 돈을 좋아하며, 소유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임박한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해야 할 ‘최고의 헌신’을 ‘실존적 결단’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는 침묵하고, 제자들도 침묵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위안’을 얻었으며, 가난한 사람들 역시 우리로부터 잊혀 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졌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성주간의 첫 날,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은 사건을 통해 또 하나의 ‘발 씻음’으로 인도됩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과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특히 다른 복음서에 전해지지 않는 ‘중요한 사건들과 가르침들’이 전해집니다. 그 중의 하나가 수난 직전에 행하신 ‘세족례’입니다(요한 13:1-15). 이 사건은 평범한 섬김이 아닙니다.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심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세족례 후에 예수께서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요한 13:14).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요한 13:17). 결국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발 씻김’이라는 ‘사랑의 행위’를 미리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首)제자’라 불리던 ‘베드로’조차도 ‘발 씻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요한 13:7).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비록 남성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닐 순 없었지만 분명 ‘재가(在家) 제자인 마리아’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했습니다.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단 한 번의 ‘결정적 헌신’을 감행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헌신’을 위해 ‘실존적으로 결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하나를 이룬 ‘참 믿음의 제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미리 보여준 ‘참 사랑의 제자’로 증언됩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 ‘발 씻김’ 자리에서 사흘 전 ‘베다니아’에서 있었던 ‘마리아의 헌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보여준 그 ‘독창적인 감사와 사랑’을, ‘계산하지 않는 감사와 사랑의 위대함’을 사도들은 기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일’을 미리 준비한 ‘마리아’의 그 위대한 믿음을 두고두고 기념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님께 최선의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실존적 결단’에서 우러나온 자신만의 행동을 통해 마리아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날도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묵묵히 자신의 일들을 수행하는 이는 ‘베다니아의 마리아’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참 제자’이며, ‘사랑의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기억할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어떤 여인’, ‘마리아’,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며 우리도 이미 사랑 받은 사람답게 주님께 ‘최선의 헌신’을 보일 것을 다짐합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이웃들이 우리를 통해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마리아처럼 사랑의 봉사자, 사랑의 향기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시편》 기자처럼(시편 36:10),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천천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사랑이 하늘까지 닿고 미쁘심이 구름까지 닿는 주님,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주시나이다. 제 보잘 것 없는 사랑을 받으시고, 저희도 당신을 닮아 사랑으로 살아가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2020. 4. 6. 사순 35일(월요일)”의 1개의 댓글

  1. 그렇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감지했다면, 이 여인의 헌신을 감히 누가 혹평하겠습니까?

    내게 있는 알량한 앎 조각(조각도 안 될 분자 같을)이 믿음의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불량 파편들이 음식이 박히면 부패가 진행되고, 예술작품에 박혀 들어가면 깨뜨림을 당하듯이… 영 쓸모없는 실존 덩어리로 확대 됩니다.

    알아차려야 할텐데… 깨달아야 할텐데…

    어쩔 때는 인생이 100년 남짓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 중년에도 이 모양인데 (ㅠㅠ) 한심할 때가 많습니다.

현주 류 에 응답 남기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