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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4. 사순 34일(토요일)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37:21-28
  • 성시 – 시편 121
  • 복음서 – 요한 11:45-57

사순 34일입니다. <전례독서>는 십자가 사건이 흩어진 주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대속과 구원의 계약이 될 것임을 교훈합니다.

1독서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한 데 모으고 통일하며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에서 포로살이 하는 이들 뿐 아니라 온 땅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며, 한 왕국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을 한 목자, 한 임금 아래 있게 하실 것이고 그들과 영원한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역사에서 이 예언은 아직 팔레스틴에서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목자와 임금으로 말씀하신 그 다윗, 그 성소(성전), 그 평화의 계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훨씬 보편적이고 세계사적인 구원을 가리키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고 믿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21편>은 1독서 《에제키엘》이 예언한 대로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하느님이 되어주심을 찬미합니다. 참으로 주님만이 인생들의 참된 피난처이시며, 항상 깨어서 당신 백성의 활동을 지키시는 보호자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이 되어 주시기 위해, 즉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방인인 우리가 받은 축복에 대한 찬미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산헤드린(의회)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그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일러바쳤습니다. 놀랍습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권능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께 대항하는 길로 갔습니다. 하긴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나중에 예수님께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듣고 몹시 난감해진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회’(산헤드린)를 소집했습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로 ‘법정’ 역할까지 겸합니다. ‘의회’로 모인 그들은 걱정하며 이렇게 의논합니다.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 요한 11:47-48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섬긴다고 행세하던 경건한 ‘종교인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앙과 선입견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보는 눈이 없었기에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를 가라앉게 할 방도를 찾습니다. 명분은 ‘자치권’ 유지였습니다.

본래 ‘산헤드린’(의회)은 로마제국 치하에서 유대 땅의 내정을 유대인들 스스로가 관장하도록 허락한 일종의 ‘자치정부’입니다. 로마제국은 자치정부가 제국의 평화와 체제에 순응한다는 조건으로 정치, 사법, 종교적 자치 권한을 ‘산헤드린’에 부여했습니다. ‘의회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열광적으로 믿고 따를 경우 ‘폭동’(로마 저항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위협을 느낀 로마제국이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 성전’과 ‘민족’을 짓밟을 것이라는 걱정스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민족을 위한 염려 같지만 실상은 자신들을 위한 염려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누려온 정치적, 사법적, 종교적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때 ‘산헤드린’의 의장인 그 해 대사제인 ‘가야파’(주후 18-36년 재임)가 나섭니다.

당신들은 그렇게도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 요한 11:49-50

‘죽입시다!’ 이것이 그가 제시한 ‘해결책’입니다. 놀랍습니다. 너무나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윤리적이진 않습니다. 역사에서 기득권자들이 내세우는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해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말입니다. 정작 그 ‘한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그 한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앞에서 그 ‘죄책’(罪責)을 어찌 다 받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하신 일들을 토대로 진정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인지 알아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협력자’다운 말입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을 알아보는 눈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민족이 멸망’을 피하는 길이었지만 ‘속내’는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일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기득권의 상징인 ‘성전’(거룩한 곳, 예루살렘 성)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일 만큼 ‘성전’이라는 ‘우상’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기자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무의식중에 예언한 셈입니다(51절). 그렇다고 《요한복음》 기자가 ‘가야파’를 칭찬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요한복음》 기자의 해석에 따르면, 가야파가 제시한 해결책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다민족을 대속하는 죽음을 훨씬 뛰어 넘어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까지 한 데 모으는 구속의 죽음이 된다는 뜻입니다(51-52절). 이처럼 《요한복음》 기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특정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적 구속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가아파와 산헤드린은 예수님의 죽음을 정치적 골칫거리 제거 정도로 생각했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그들의 손을 통한 인류의 대속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 요한 11:53

가야파의 제안은 ‘산헤드린’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정치적 힘을 가진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위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린’ 최대의 표징(요한 11:1-44), 즉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요한 11:4)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 자신을 죽이기로 음모하는 표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이 예정하신 ‘십자가의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55-57절). 교회력으로도 내일부터는 성주간의 시작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오늘(넓게는 금주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공식적으로 ‘산헤드린’에서 논의되고 결정되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정치적 힘을 가진 의회원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오늘 1독서 에제키엘에서 선포하듯이(에제 37:21-28), ‘유대 민족만’(보다 정확히는 자신들만)을 위하려는 그들의 음모를 오히려 온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구속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불과 10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자칫 기득권자들의 특권과 이득을 위해 투표하기 쉽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에 투표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권한’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산헤드린의 의원들에게서처럼 나의 한 표는 정치인들에게는 언제나 ‘위협’입니다. 진정 국민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뜻에 맞는 법을 제정할 국회의원들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가난한 이웃들과 후손들을 위한 신성한 한 표를 잘 행사할 수 있도록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 주시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시편》 시인처럼, 당신 자녀들을 모든 재앙에서 항상 지켜주신다 약속하신 구원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생명의 주님, 십자가로 온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어서 속히 코로나19의 재앙으로부터 저희를 구원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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