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3. 사순 33일(금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20:10-13
  • 성시 – 시편 18:1-6
  • 복음서 – 요한 10:31-42

사순 33일입니다. <전례독서>는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교훈합니다.

1독서 《예레미야》는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의 세상 속에서도 구원의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살아오면서 많은 고난과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가 다른 예언자(특히 하나냐)들이 ‘평화’를 노래할 때 불의한 세상을 ‘고발’하고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예레 20:8a). 하지만 그의 선포와 달리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그는 ‘웃음거리’가 되고 ‘놀림감’이 되었습니다(예레 20:7). 사람들의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예레 20:8b).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입술에 말씀을 담아 주신 ‘하느님을 조롱’한 셈입니다.

그는 오늘 《시편》에서 찬미하듯이(시편 18:4-5) 고난이 하도 심하여 자신이 짊어진 예언자의 삶을 포기할 결심을 합니다(예레 20:9a).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포기하고 ‘침묵’하며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생명’을 위협하는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 불처럼 타오릅니다.”(예레 20:9b) 말씀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포기하려던 마음을 포기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폭력’이나 ‘고난’보다 ‘예언자’로 부름 받은 그 ‘사명’에 대한 ‘침묵’이 그에게 더 고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이런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성공회 기도서>는 성직자와 신자 모두가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사목자’라고 가르칩니다. 그 가르침처럼 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되라고 예언자처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명을 감당하다보면 이 ‘불의한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할 때가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감당하다 ‘갈등’과 ‘스트레스’ 때문에 지칠 때가 있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거룩한 사명’을 포기하고 ‘빛과 소금’이라는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더욱이 나와 친했던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레미야도 그랬습니다. 친했던 사람들마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와 폭력에 가담하자 그는 몹시 흔들렸습니다(예레 20:10). 최대 위기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예언자의 삶을 그만 두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오늘 《시편》에서 찬미하듯이(시편 18:1-2a) “힘센 장사”이신 하느님을 더욱 ‘믿고 의지’합니다(예레 20:11).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공정한 감시자”이신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합니다(예레 20:12).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더욱 올곧게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불안과 공포의 시대, 폭력과 고난의 삶 속에서 찾아낸 ‘희망’은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는 ‘선’(善)이, ‘진실’이 승리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일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힘과 지혜’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렇게 그의 마음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고 나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가 살아가던 환경은 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서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은 더욱 커졌고,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마음에서 점점 작아졌습니다. 《시편》의 시인이 찬미하듯이(시편 18:1-6) 그의 입술에서는 ‘구원의 주님’을 향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일을 올바로 처리하실 것이라는 ‘승리와 구원의 확신’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의 세상을 살면서도 오직 하느님만이 ‘희망의 근거’이심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복음이야기 《요한복음》은 1독서 예레미야처럼 ‘폭력의 위협’ 앞에서 서 있는 예수님을 전합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그런 위협에 처했습니까? 본문 바로 앞 구절은 이렇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 요한 10:30

유대인들(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자’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33절). 그들은 율법에 따라(레위 24:16) ‘돌로 처형’하려고 했습니다(31절).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신성모독’은 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하느님 상’(像)을 전하는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준수’에 따른 ‘심판의 하느님 상’을 가르쳐왔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준수와 상관없이 한없는 ‘자비’와 ‘용서’,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 상’을 예수께서는 그 말씀과 행동으로 전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1독서 예레미야가 그 시대의 예언자들과 다른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그런 예수님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느님 상’이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이 다스리는 ‘종교 왕국’을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선한 일, 거룩한 일)을 하신(33,36절) 예수님을 ‘지도자’로 따르자 유대인들(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지도력’을 예수님께 빼앗길까봐 ‘질투’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온갖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성모독자’로 고발하는 이들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 요한 10:34-35

예수님은 율법서로 대변되는 성경, 특히 《시편》 82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고대에는 왕이나 재판관이나 예언자를 하느님께서 직접 임명하여 세우셨다고 믿었습니다(시편 2:7; 이사 41:1-4, 25; 예레 27:6; 요한 19:11; 로마 13:1). 그들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을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대리자’로 일하는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신’(神)이라 불렀습니다. 게다가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십니다.” 따라서 그 행하시고 있는 일에서 이미 증명되듯이, 하느님께서 거룩한 일을 맡겨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한 말씀 때문에 ‘신성모독’이라 하는 그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36절). 이렇게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그 표징들로써 자신의 신성과 하느님과의 관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이미 증명하셨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37-38절).

그 책망 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시기’와 ‘질투’가 드러나 있습니다. 자신들의 ‘불편한 진실’을 보게 된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레미야에게 ‘폭력’을 가하고, ‘핍박’하며, ‘고발’하려던 사람들처럼(예레 20:10), 그들은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사면초가’라 생각하며 붙잡으려 했습니다(39절a).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악마의 자식들’임을 증명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편》 노래처럼(시편 18:4-5) ‘죽음의 올가미’(죽음의 물결, 멸망의 물살, 저승의 그물)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습니다(39절b). 아직 주님의 때가 오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요즘 우리는 예레미야나 시인이나 예수님이 겪었던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비난 ‘코로나19’만은 아닙니다. 기후는 말 그대로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위기’로 치닫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했던 인간의 ‘탐욕’은 이제 인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심화, 약자에 대한 만성적인 억압과 폭력의 일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희망이 없는지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의 세상에서 과연 ‘교회’는 다르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행위에서 드러나는 착한 행실로 ‘믿음’과 ‘사랑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탐욕에 빠진 세상에서 그 행실로 ‘희망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과연 세상이 ‘희망’이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 증거자들이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정말 절망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거기서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우리와 함께 지금도 고난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생명을 바쳐 세상을 사랑하신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불안과 공포, 폭력과 억압의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을 따라 살 것을 다짐합니다. 하느님 자녀다운 착한 행실로 불안과 고난 속에 있는 이웃에게 믿음을 주고, 사랑을 주며, 희망을 주리라 다짐합니다. 그런 삶만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계심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시편》 시인처럼, 우리의 힘과 구원이신 주님을 신뢰하며,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이라는 ‘죽음의 물결’에 휩싸인 인류를 위한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우리 기도를 들으시며, 우리 부르짖음이 주님께 사무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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