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2. 사순 32일(목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7:3-9
  • 성시 – 시편 105:4-9
  • 복음서 – 요한 8:51-59

사순 32입니다. <전례독서>는 주님의 ‘약속(계약)과 복’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계약’ 속에는 엄청난 ‘약속과 복’이 열거됩니다. ‘많은 민족의 조상’, ‘많은 자손과 큰 민족’, ‘왕들의 할아버지’,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 ‘영원한 계약’, ‘가나안 땅을 주심.’ 이 약속과 복은 그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방적인 선택이고,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하느님은 그 계약을 “너와 네 후손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고 단단히 못을 박으십니다. 우리는 이 약속과 복 앞에서 아브라함이 취한 ‘믿음의 태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으로 찬미한 <105>은 하느님께서 ‘자기 계약백성에게 주신 복’을 찬미합니다. 시인은 아브라함의 여정부터 가나안 정착에 이르기까지 고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개괄하며 하느님을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으로 찬미합니다. 오늘 배정한 단락(4-9절)은 족장들과 놀라운 계약을 맺으시고 그 약속을 지키신 하느님을 찾고 그 위대한 역사를 기억하라는 초대입니다. 한마디로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신 ‘계약의 하느님께 믿음의 기초를 두라’는 노래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사순 29일(월요일)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온 《요한복음》 8장입니다. 오늘 드디어 마지막 단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8장을 묵상해 오면서 유다인들이 예수님과 얼마나 엇나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번번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 요한 8:51

자신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엄청난 ‘약속과 복’입니다. 이 ‘약속과 복’은 1독서 《창세기》에서처럼,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고, 자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이실 때만 이치에 맞습니다(54-56절). ‘내 말’은 예수님이 전하신 지금까지의 메시지이며, 특히 나중에 말씀하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입니다(요한 13:34-35).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요한 14:21). ‘지킨다’는 것은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머리나 입술로가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믿음’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말씀’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보장’하십니다. 물론 죽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입니다. 우리의 등은 차가운 관 바닥에 눕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얼굴만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향해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교훈대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었고(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로마 6:22).

이 말씀을 듣던 유다인들은(특히 적대자들인 종교지도자들) 너무나 기뻤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체포할 확실한 구실을 잡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신성모독의 낌새’를 느끼는 중입니다. 그들은 우선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며 ‘조롱’했고,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 취급을 하며 대들었습니다(51-53절). 그러면서 예수님을 몰아세웁니다.

그래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 요한 8:53

예수께서는 조금도 물러서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말하며 잘 안다는 유다인들(특히 적대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주장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라고 강하게 압박하십니다(54-56절).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씀하는 중이라 재차 밝히십니다(54절).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지만 자신은 하느님 아버지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오직 그 분의 말씀을 지키는 순종의 삶으로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55절).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 누구이신지에 대한 엄청난 선언을 하실 참입니다(56-59절).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 요한 8:56

그들은 예수께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냐?”고 물었고,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크실 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이 사실을 인정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언제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하였을까요?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로 바친 사건(창세 22:1-18)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 사건을 무엇의 모형으로 보아야하는지 가르쳐주시는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창세기》는 ‘모리아산’을 향해 가려던 부자의 대화를 이렇게 들려줍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 창세 22:7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 창세 22:8

그러나 그 산 어디에도 제물로 쓸 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아야 했습니다. 그 때까지도 제물로 쓸 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던 찰나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창세 22:11

주님의 천사가 큰 소리로 하늘에서 불렀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게 하지 말아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 창세 22:12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어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숫양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창세 22:13). 아브라함의 눈에서는 ‘기쁨의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장면을 회상하면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교훈한 바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 로마 8:32

하느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다른 결과를 만드셨습니다. 외아들을 제물로 내어주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리스도교는 이사악 대신 번제물로 바쳐진 그 ‘숫양’이 세례자 요한이 증거 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이 모리아산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고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쉰 살’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냐?”고 따졌습니다(57절). ‘율법’에서 ‘쉰 살’은 성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의 은퇴 나이(30세에서 50세)에 해당합니다(민수 4:3). 그러니까 예수께서 아직 한창 나이인데 그런 소리를 한다는 핀잔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엄청난 ‘자기선언’을 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 요한 8:58

그리스어 원문에 따르면 이 문장의 마지막은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입니다. ‘에고 에이미’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신하신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는 ‘신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해 자신이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요한복음》이 전하는 7개의 정형화된 자기선언(생명이 빵, 세상의 빛, 양의 문, 착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 외에 또 하나의 자기선언인 셈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자기선언을 듣던 그들은 무슨 뜻인지 완벽히 알아차렸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를 ‘영원한 신’이라 칭하셨다고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성모독’을 느끼며 격분했습니다. ‘신성모독’은 율법에 돌로 치게 되어 있습니다(레위 24:10-16). 큰 일 났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전공사가 진행 중인 이방인의 뜰로 돌을 집으러 갑니다. 그 틈에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가십니다(59절).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지만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는 주님의 약속(계약)과 복, 그 약속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이야기를 읽을 때면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든 그 말씀에 ‘아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이 흔들리면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말씀 나눔을 듣는 여러분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 엄청난 ‘약속과 복’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신 모든 ‘약속과 복’은 그의 믿음을 따르는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로마 4:13,16,22-24). 그리스도인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길을 인도하는 빛으로 삼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지 과거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인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현재’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인생길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참 빛’이십니다. 오늘도 그 빛의 인도 속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이기를 축복합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시편》의 시인처럼,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을 ‘신뢰’하며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너무나 ‘절박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을 통해 우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 주님이십니다. ‘영원한 말씀의 성육신’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 주님께 감사를 바치며 ‘인류를 위한 기도’로 들어갑니다.

온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신 사랑의 주님, 코로나19라는 어둠의 권세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절박한 인류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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