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 사순 31일(수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다니 3:14-20, 24-25, 28
  • 성시 – 시편 24:1-6
  • 복음서 – 요한 8:31-42

사순 31일입니다. <전례독서>는 ‘주님 안에 거하는 참된 믿음’에 대한 교훈입니다.

1독서 《다니엘》은 죽음을 무릅쓰고 ‘우상숭배를 거부’한 유다인 세 청년 하나니야(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자리야(아벳느고)의 믿음을 전합니다. 괄호 안은 일종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이니 원래 이름대로 기억해야 합니다(다니 1:6-7). 그들은 ‘금신상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다 활활 타는 ‘화덕’에 던져집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다 고난을 겪습니다.

이 이야기는 묵시문학에 속하는 《다니엘》의 저자가 살던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교회사에서 《다니엘》은 ‘주전 2세기경’에 기록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을 숨기고 있는 저자가 자신이 받은 ‘묵시’(예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옛 시대의 인물인 ‘다니엘’의 이름으로 기록했습니다. 형식에 있어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1-6장이고, 후반부는 7-12장입니다.

전반부인 1-6장은 ‘주전 6세기에서 5세기’에 해당하는 ‘과거의 역사’로 저자가 자신이 살던 그 ‘암울한 시대’(주전 2세기 안티오쿠스 4세 치하)에 회상한 기록입니다. 유다 멸망 후 포로로 끌려가 살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느님께 충실함을 입증한 이야기가 회상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로 대변되는 제국의 문화와 종교를 거부하고 하느님께 충성했으며, 마침내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맛보았다고 전해줍니다. 이러한 과거 역사의 회상 후에 저자는 자기 시대에 겪고 있는 암울한 사건들이 ‘곧 실현될 하느님 나라’를 앞두고 벌어지는 ‘역사의 마지막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묵시’(환상)를 전합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두 번째 부분인 7-12장입니다.

오늘 1독서는 전반부에 속합니다. 기원전 2세 중엽,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리아 왕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잔악한 박해자 ‘안티오쿠스 4세’입니다(마카베오상 1:1-10). 그는 유대 민족 전체에게 ‘그리스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일환으로 유대교 행사(할례와 안식일)를 금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합니다(기원전 168년).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도 금하고 거기에 ‘제우스’ 신상(神像)을 세웠습니다(다니 8:11-12; 마카베오상 1:54). 이 일이 나중에 ‘마카베오 혁명’의 계기가 됩니다(마카베오상 2:1-28).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다니엘》은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목적은 하느님 백성에게 ‘악의 화신’이자 ‘억압자’에 맞서 싸울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청년들처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느님을 향한 충실’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다 활활 타는 ‘화덕’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성공회 예배용 ‘성경’인 《공동번역성서》에 있는 ‘24-90절’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고 70인역에만 첨가된 부분입니다. 흔히 제 2정경(또는 외경)이라 부릅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두 개의 긴 찬미로 구성됩니다.

첫 부분은 ‘아자리야의 찬미’입니다(25-45절). 오늘 배정은 ‘28절’ 한 절만 배정했습니다. 고난 받고 있는(고난의 한 가운데 있음을 상징하는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자기 민족의 죄를 인정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용서와 박해자들로부터의 구원을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세 친구가 함께 부르는 찬미’입니다(51-90절). 오늘 《시편》처럼 만물의 ‘창조주’이시자 ‘절대 지존’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을 찬미하자고 초대합니다.

오늘 낭독하지는 않았지만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됩니까? 박해자인 ‘느부갓네살왕’이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91절, 개역성경은 24절). 그는 ‘화덕’ 속에서 ‘네 사람’이 거닐고 있는 것을 봅니다. 느브갓네살왕은 그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련의 한 가운데를 걷고 있는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성한 사람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화덕에서 나온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 그슬리지 않았고 도포도 눋지 않았으며 불길이 닿은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94절). 모두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충성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신을 믿기 시작한 유다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전적인 충성과 순종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야기에 나오는 유다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피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믿음이 내포하는 ‘전적인 충성’을 아직 예수님께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믿었지만 믿지 않은 이들입니다. 사실 이런 믿음은 영적으로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시작한 믿음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 요한 8:31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말씀(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그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말씀) 안’에 살고, ‘예수님(말씀) 안’에 거하며, ‘예수님(말씀)을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제자’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참된 믿음을 소유했던 1독서 《다니엘》의 세 유다청년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말씀의 영향력 안에 전적으로 들어가 머무는 삶이 우리를 세상 사람들과 구별시키는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우리를 제자로 살게 하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시키는 그 말씀(계명)의 핵심이 ‘서로 사랑’이라고 전해줍니다(요한 13:34-35).

만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청각장애인으로 만들며, 결국 예수님께 적대적이 될 것입니다(37절, 40절). 사실 오늘 복음이야기는 말씀 안에 거하는(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31-36절)와 말씀에 적대적인(마음에 새기지 않고 살아가는) ‘악마의 자녀’(37-47절)가 비교되는 문단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 안에 거하기를 거부했던 이들은 결국 ‘적대감’을 넘어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습니다(요한 8:59).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제자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요한 8:32

이것이 예수님 안에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진리’(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는 ‘봉인을 뗀’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숨기우지 않고 공개되고 열려진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학문적(철학적, 추상적, 과학적) 진리(사실, 진실)’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접근 가능하게 된 ‘하느님의 실재’(현실)를 가리키는데 쓰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드러난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관계를 말씀합니다(14:6). 즉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결합’함으로써 인간은 죽음의 원인인 마음의 욕망과 죄와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감으로써 ‘진리’를 알게 됩니다. ‘거꾸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원의 진리’라고 알고 난 후에 그의 ‘말씀’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다보면’ 예수님이 참으로 ‘진리’이심을 알게 됩니다. 말씀(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다보면 비로소 우리의 ‘어두운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립니다. ‘눈이 열리면’ 우리는 ‘사랑의 삶’을 통해 우리가 예수의 제자이고,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모든 ‘이기적 욕망’으로부터, ‘불순종의 죄’로부터, ‘자기상실의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게(’해방과 구원) 하심을 경험합니다(36절). 그 ‘자유’(해방과 구원)는 ‘돈’이나 ‘권력’, ‘명예’나 ‘지위’, 그 어떤 것으로도 사거나 얻을 수 없으며, 그런 것들로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거꾸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권력’을, ‘명예’를, ‘지위’를 가지면 자신이 자유로울 것이라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 말고 ‘이기적인(죄와 우상 숭배하는) 우리에게 ‘자유’(해방과 구원)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자유’(해방과 구원)는 ‘학문적(철학적, 추상적, 과학적) 진리(사실, 진실)’ 추구나 투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제자가 되는 삶’에서 옵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제자됨의 출발이고, ‘진리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진리의 문’을 연 제자들은 그 무엇, 특히 이기적인 자신에게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집’(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36절). 사실 모든 학문과 종교에서 추구하는 ‘진리’는 ‘자유’, 즉 ‘이기적 나로부터의 자유’를 최종목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자유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유를 얻은 자신’을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치는 ‘순종’으로 연결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33절).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이 분명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세상권력’에 종처럼 ‘억압’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살이’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거짓말’합니다(38절). 1독서 《다니엘》에서 들었듯이 역사에서 그들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메대와 페르시아’, ‘그리스제국’의 종이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그들은 육체는 제국의 종이었지만 마음만은 그 제국들에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권력’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독립)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궁극적 차원, 즉 인간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의 노예’로부터의 ‘자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34절). 한 민족과 나라가 ‘정치적 자유’(독립)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민족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창조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인류에 속하는 한 ‘죄의 종’이며(로마 3:9-18),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종’은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35절).

그들이 계속해서 다른 민족보다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우월하고 하느님과 가깝다며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39절)라고 대듭니다. 자신들의 유일한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입니다’라고 대듭니다(41절). 예수께서는 명백히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창세 12:1-4a; 15:6; 로마 4:3,11-25), 하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으며(창세 18:1-8), 하느님의 명령을 지켰고(창세 22:1-18), ‘그리스도의 강생’을 고대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 8:56). 따라서 그들이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37,42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37,40절). 예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한 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 요한 8:40-41a

‘그들의 아비’는 누구일까요?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 요한 8:44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통해 자신들이 ‘죄의 종’이자, ‘악마의 자식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은 아닙니다(로마 4:13-24). 더군다나 ‘하느님의 자녀’는 더더욱 아님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는 ‘주님 안에 거하는 참된 믿음’에 대한 교훈입니다. 세 청년은 ‘고난의 한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주님을 향한 ‘충성스런 믿음’을 간직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의 ‘한 가운데’ 계셨지만 아버지를 향한 ‘충성스런 믿음’을 간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인 우리에게도 똑같은 요청을 하십니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인들이 ‘코로나19’라는 활활 타는 화덕 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의 말씀 안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이 믿음, 우리 안에 새기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말씀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오늘 1독서 《다니엘》의 아자리야가 찬미하듯이, 《시편》 시인이 찬미하듯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자유와 기쁨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고난의 화덕 안에 있는 인류를 위한 기도로 들어갑니다.

교회와 이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 어려움을 겪는 당신 피조물들을 어서 속히 구원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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