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31. 사순 30일(화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민수 21:4-9
  • 성시 – 시편 102:1-2, 15-22
  • 복음서 – 요한 8:21-30

사순 30일입니다. 성주간이 다가올수록 전례독서는 ‘십자가 사건’으로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위대한 ‘사랑’과 ‘희생’을 깨달으라는 뜻에서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죄’를 지은 분이 아니지만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이셨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덕택에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자기상실’과 ‘영원한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치유’와 ‘구원’을 얻었습니다. 마음 안에 작용해 온 모든 ‘상처의 기억’으로부터 풀려났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긍정’하며, ‘수용’하는 ‘변화’가 우리 안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진정한 ‘엄마’는 성령 안에서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런 깨우침이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말씀 나눔을 시작합니다.

1독서 《민수기》는 ‘십자가 사건’의 예형인 광야의 구리뱀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하느님과 모세를 향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오늘 《시편》으로 찬미한 것처럼(102:1-2) 고통 중에 그들은 모세에게 와서 간청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뱀이 물러가게 기도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살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것은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쳐다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구리 뱀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비극의 원인인 ‘불순종’을 뜻합니다. 그 불순종을 직면하게 하는 일이 하느님이 마련하신 치유의 방법이었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이 작은 단락 안에 성육신, 십자가 죽음, 부활이 다 담겨있습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구원의 미래가 다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에서 오신 사람의 아들, 즉 ‘그리스도’라고 계시”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이 온 곳으로 간다”고 하시자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오해’합니다(21-22절). 예수께서는 오해하는 그들에게 자신이 ‘위에서 왔으며,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똑똑히 말씀하십니다(23절).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으리라고 하십니다(23-24절). 자신이 하느님이 보내신(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즉 그들이 기다려 온 《다니엘》에 예언된(7:9-14) ‘내가 그’(그리스도)라는 점을 강조하십니다(24절).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고 “당신은 누구요?”라며 예수님의 정체를 알려달라고 재촉합니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왔다고 말씀하십니다(25절). 자기를 보낸 분이 누구이고(26절), 자신이 하시는 일이 그 분이 기뻐하시는 일(29절)이라고 밝히십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27절).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이야기가 1독서 《민수기》가 전하는 ‘구리뱀 사건’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요한 8:28a

우리는 지난 사순 2주일,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영적 담론(요한 3:1-17)에서 ‘구리뱀 사건’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하늘(위)에서 내려오신 사람의 아들’(성육신)은 반드시 하늘(위)로 올라갑니다.”(요한 6:62; 8:28; 12:34) 올라가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인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십자가 사건’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신이 온 곳인 ‘위’로 돌아가시는 방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유다인들의 ‘영적인 눈’이 가려져서 예수께서 ‘사람의 아들’(그리스도)이심을 모르지만 ‘십자가 사건’이 있은 뒤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아무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행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28절).

그러면 ‘사람의 아들’(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어째서 모세가 구리로 만든 뱀처럼 높이 들리셔야 합니까? 무엇을 목적으로 합니까?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 3:15

이것이 성육신과 십자가 수난의 이유입니다. 믿는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수명의 연장이 아닙니다. 단지 ‘죄의 속죄’만도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에까지 이르는, 수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공관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로 표현했고, 교회에서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영성적’ 차원에서 말하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창조의 본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하느님과 하나’ 되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체험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의 눈’을 떠서 봐야할 ‘삶의 진실을 보고’, ‘진리를 행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한 생명’은 단지 미래에만 있을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한다는 것이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는 ‘통찰’입니다.

또한 십자가 수난은 ‘죄의 치명상’을 입고 ‘죽음’의 고통을 겪는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우리를 ‘치유하는 의사’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하느님을 거역하며 살아온 우리 삶의 ‘어두움’(불편한 진실들) 또한 ‘바라봅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가져온 ‘삶의 비극’(자기 소외)과 ‘파괴적인 면’(자기 상실)들을 ‘봅니다.’ 그러나 정직한 그 ‘바라봄’(직면, 인정)이 ‘자기를 상실’한 ‘영원한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치유’와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우리 마음을 괴롭혀 온 다른 모든 ‘상처의 기억’으로부터도 풀려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긍정’하고 ‘수용’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탄에게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하느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의 자리’입니다. 더욱이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이 모든 일의 ‘참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 3:16-17

‘온 세상’(코스모스)을 향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이 참된 이유입니다. ‘온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외아들’(사람의 아들, 그리스도,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보내주심’은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외아들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만 ‘실현’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심판’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아버지 사랑의 궁극적 목표는 ‘믿는 사람의 구원’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은 자기 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으리라고 하십니다(23-24절). ‘죄’가 얼마나 무서운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경고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느님 사이를 분리시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킵니다. 그 분리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것이 죄의 영향력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 즉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 복음을 전해주십니다.

우리는 어째서 죄를 짓습니까? 어떤 분들은 아담과 하와를 가리키면서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제 경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인간 본성이 연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건 우리를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가져온 죽음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기억과 바라봄이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합니다. 죄의 책임이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있듯이 구원 역시 우리 책임입니다.

《시편》 시인처럼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102:1-2). 아버지의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요히 두 손을 모읍니다. 그 한없는 용서와 사랑에 우리 자신을 의탁합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온 인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님, 인류가 처한 곤경을 아시오니 주님 이름 부를 때 귀를 기울이시고 빨리 대답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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