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30. 사순 29일(월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여호 2:1-14
  • 성시 – 시편 23
  • 복음서 – 요한 8:1-11

사순 29입니다. <전례독서>에서 우리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배웁니다. 1독서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있는 창녀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푼 이야기입니다. ‘라합’은 적군을 숨겨준 ‘자비’ 덕에 나중에 부모와 형제와 식구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시대를 보는 눈을 간직한 ‘지혜’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한 여인에게 ‘자비와 연민’을 베푸신 이야기입니다. 이른 아침 예수께서 ‘성전’에 가시어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한 떼의 사람들이 한 여인을 짐승처럼 몰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몰아오는 방향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던 자리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서 앉아계신 자리에 이르자 손에 돌멩이를 쥐고 있는 무리들은 더욱 큰 소리로 여인을 위협했습니다. 그 때 무리들 속으로부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섰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 요한 8:4-5

그들은 여인의 행위에 대해 이미 ‘정죄’와 ‘심판’을 내렸으면서도 예수님께 묻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이는 경우는 약혼한 남자가 있는 여인의 경우입니다(신명 22:23-24). 따라서 이 여인은 ‘약혼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이상합니다. 본래 ‘간음’이란 혼자 저지를 수 없고, 현장에서 잡혔음으로 남자도 같이 잡아왔어야 했습니다. 또 간음죄로 이 여인을 재판하려면 약혼한 신랑을 제외하고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신명 19:15). 게다가 ‘법정’이 아니라 ‘성전’으로 데려온 것도 불법입니다. 이렇게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여인을 데려다 예수님 앞에 내세운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 요한 8:6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 ‘고발할 구실’을 잡고자 했던 그들의 시커먼 속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현행범인데도 남자를 도망가게 내버려 둔 것은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미리 계획적으로 꾸민 일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는 여인, 백성들에게 생명의 가르침을 주시다 난데없이 사건의 중심에 휘말리신 예수님. 상황이 몹시 위급합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행동을 하십니까?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 요한 8:6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땅바닥에 무엇을 쓰신 것을 보면 글자를 아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요? 흥분한 군중들의 눈길도 예수님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며 분위기가 좀 가라앉습니다. 그런 태도가 답답했던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모세 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그동안 사랑과 용서를 가르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모순입니다. 동시에 그 일은 ‘총독’의 허가 없이 사형 집행을 선동한 셈이어서 로마법을 어긴 셈이 됩니다. 하지만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유다인으로서 ‘율법’을 어긴 셈이 됩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 요한 8:7

예수께서는 이 문장을 땅에 쓰셨던 것일까요?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여인의 행위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녀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베푸는 선택을 하십니다. 사실 아담의 후예인 인류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씀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 요한 8:9a

그들은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그 중에 누군가가 돌로 여인을 쳤다면 그야말로 자기양심을 속인 신성모독자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신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을 보았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손목에서 힘이 빠지며 돌멩이가 툭하고 떨구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립니다. 아마도 그들이 나이 어린 사람들보다 살아오는 동안 더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며, 죄의 심각성을 이미 깨닫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자신들이 판 함정에 자신들이 빠진 꼴이 되었습니다. 올 때는 떼 지어 왔지만 갈 때는 하나하나 사라져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시편》 찬미처럼 그녀의 ‘목자’가 되어주시고 목숨을 구해 주십니다. 이제 그 현장에는 예수님과 여인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인을 죄의 용서와 새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으로 이 긴박했던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자비’와 ‘연민’을 주제로 한 복음이야기를 묵상하며 성찰합니다. 우리는 이웃과 어떻게 관계합니까?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빠른 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내는데 빠른 편입니까?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 마태 7:1-2

《시편》 시인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우리에게 먼저 ‘은총’을 베푸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정죄와 심판’ 대신 ‘목자’이신 예수님의 ‘자비와 연민’을 실천하는 남은 사순절이기를 다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 더욱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자비와 용서의 주님, 오늘도 당신의 마음을 닮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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