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9. 사순5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주님’입니다. 복음이야기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가장 분명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가장 강력하며, 가장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 말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장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이미 무덤에서 풀려나와 부활 생명을 살고 있으니, 모든 존재가 창조를 회복한 부활 생명으로 피어나 자유를 누리게 하는 해방의 일에 나설 것을 다짐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성령의 참 자유를 주시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일생 거룩한 생활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37:1-14
  • 시편 – 130
  • 2독서 – 로마 8:6-11
  • 복음서 – 요한 11:1-45

사순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주님’입니다.

코로나19라는 ‘어둠의 그림자’가 유럽을 뒤덮고 있습니다. 언제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서 ‘폭풍우’가 지나기를 바라며 ‘동굴’에 머무르는 연약한 동물들처럼 일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집’에만 머물도록 강제됩니다. 언제 찾아들지 모르는 ‘어둠의 그림자’가 ‘손발’을 묶여 자유를 앗아가고, 얼굴은 ‘수건’(마스크)으로 가리도록 침묵을 강제합니다. 신문에 이어지는 ‘부고’(訃告)에 두 눈은 점점 초점을 잃어갑니다.

우리는 애통해 합니다. 우리는 두렵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죽음’에 삼켜져 그 있던 자취마저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다(무화無化 되는)는 두려움입니다. ‘죽음’은 모든 살가운 관계를 단절시키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은 결코 치료될 수 없는 ‘마지막 병’처럼 보입니다. 오늘 《시편》으로 노래한 <130편>의 기도처럼, 이 ‘깊은 구렁’ 속에서 부르짖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악몽’을 꾸고 있는 우리의 ‘이름’을 다정스런 엄마처럼 어서 불러 깨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어서 ‘폭풍우’가 지나 ‘동굴’ 밖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세상에 자비 베풀어주시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하는 요즘입니다.

사실 ‘죽음’은 코로나19의 악몽을 꾸고 있는 현대인만이 아니라 인류가 직면해 온 문제입니다. 피조물인 이상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궁극적 절망’입니다. 피해가려해도 어느 가정마다 항상 가까이 있는 주제이고, 해마다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는 ‘병’입니다. 더욱이 육체적인 죽음 말고도 우리는 여러 형태의 ‘어둠의 그림자’를 경험합니다. ‘허무와 절망’이라는 ‘무기력’에 사로잡혀 ‘기쁨과 희망’이라는 ‘생명력’을 포기해 버렸다면 이미 자신을 ‘무덤’(동굴)에 가두어 둔 상태입니다. 생생하던 관계가 점점 녹이 슬고, ‘의심과 미움’의 벽으로 둘러쳐지며, 회복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관계를 포기할 때 이미 스스로를 ‘무덤’(동굴)에 가두는 중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손발이 묶이는데도 저항하지 않고, ‘불의와 폭력’ 앞에서 ‘침묵’할 때 이미 스스로를 ‘무덤’(동굴)에 가두는 중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부활’(復活)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에제 37:12; 로마 8:11). 특히 복음이야기는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거하는 인생들에게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 찾아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결코 마지막일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죽음 저 너머’를 향해서도 ‘생명’을 명령하실 수 있는 진정한 ‘주인’이심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인류가 앓아 온 ‘죽음’이라는 병을 ‘치유’하시고, 우리 존재를 지금 여기서 ‘재창조’하시는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포합니다.

1독서 《에제키엘》은 사제이자 예언자인 에제키엘이 본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입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이 환상을 통해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를 그에게 설명해 주십니다(11절). 그가 들바닥에서 본 ‘마른 뼈들’은 바빌론에서 10년 이상 포로생활 하는 ‘무기력한 이스라엘 온 족속’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다 백성들의 황폐화된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당대 ‘절대 강국 바빌론’ 치하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마른 뼈’처럼 ‘완전한 절망’과 ‘완전한 죽음’ 속에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처지의 포로들에게 예언자 에제키엘을 시켜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기운’(영)을 불어넣어 그들을 살려내시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회개한 것도 아니고 무엇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순전히 ‘주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이 ‘희망의 약속’을 믿었을까요? 아마 대다수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미 멸망했기에 그냥 ‘바빌론’이라는 ‘절대 강국의 현실’에 안주하며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빌론 제국의 동화(同化) 정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처세술’에 맞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 말입니다. 그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왔지만, 자신이 살고 있던 그 ‘비참한 현실 너머’를 보는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본 ‘현실 너머’는 무엇입니까? ‘약속의 땅’으로의 ‘귀향’입니다. 제 2의 출애굽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그 ‘절망의 시기’에 ‘희망’을 노래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귀향’을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정말이지 그는 바빌론의 국가 신(神) ‘마르둑’이나, 바빌론 왕들이 아니라 오직 ‘야훼, 주님’만이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궁극적 주인’이심을 이 환상을 통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이 살았던 상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추함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의 세계’로, ‘거짓의 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이전의 자신은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 중에는 분명 ‘세례성사’를 받았음에도 ‘명목상’(名目上)의 신자로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의 풍조와 현실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2독서 《로마서》는 사도 바울로가 전하는 성령 안에서의 새 생활입니다. ‘명목상’의 신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경고하듯이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며, ‘육체를 따라’ 살아갑니다(로마 8:6). ‘입술’로는 주님이 ‘창조주’시라고, 주님이 ‘운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라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뼈 속 깊이 새기고 살아갑니다. ‘돈’을, ‘권력’을, ‘자신의 욕망’을 하느님으로 섬기며 살아갑니다. 현실을 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돈’과 ‘권력의 노예’로 갖다 바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로가 경고한 ‘하느님과 원수가 되는 길’(로마 8:7)로 다시 ‘역주행’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에제키엘(오늘의 성직자들)을 시켜 자신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다시 선포하게 하십니다.

물론 지금 말씀을 듣는 우리는 그런 ‘이름 뿐’인 신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창조주’시라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동시에 그 고백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운명과 역사의 궁극적 주인’이시라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동시에 그 고백은 우리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진정 ‘마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믿음의 고백’이 나오지 않기에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았지만 여전히 ‘마른 뼈’처럼 ‘신앙의 생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답게 숨 쉬는 기척’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이렇게 선포하도록 ‘한 말씀’을 주십니다.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너 사람아, 숨을 향해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 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 에제 37:9

에제키엘이 주님의 말씀을 첫 번째로 ‘대언’(代言)하자(에제 37:7-8) ‘마른 뼈들’은 분명 ‘사람의 꼴’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 뿐이었습니다. 아직 그 ‘형체’는 ‘숨 쉬는’ 기척이 없었습니다. 마치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지만 일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생기 없는 그리스도인’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으스스합니다. 들바닥에 바싹 마른 뼈들이 가득히 쌓여있는 것도 끔찍하지만 ‘영혼 없는’, 다시 말해 ‘생기 없는’ 시신들이 들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더 끔찍합니까!

한국교회가 신구교를 합쳐 1천만 명이 넘는 신자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면 머 합니까? 대사회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어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교 때문에 진정으로 이 땅에 ‘선’(善)과 ‘정의’와 ‘진실’이 가득해졌습니까? 그 많은 신자들이 사회에서 건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영혼 없는 시신’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더 끔찍할 뿐입니다. 저는 코로나19를 통해 알게 된 ‘신천지’의 급성장 상황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시체’와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애통했습니다.

그러나 애통해 하고만 있을 일은 아닙니다. 에제키엘이 두 번째로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자(에제 37:10)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숨’이 불어오자 진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 그들은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 – 에제 37:10b

사람을 창조하시던 그 때처럼(창세 2:7) ‘하느님의 숨’(바람, 입김), 즉 ‘하느님의 영’(기운, 생기)이 불어오자 그들은 비로소 살아났습니다. 완전한 절망, 완전한 죽음 속에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을 ‘하느님의 영’이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재창조’하시고 ‘회복’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제요, 예언자인 에제키엘이 본 이 환상이 한국교회에 성취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버림받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마른 뼈들처럼, 별다른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국교회를 ‘하느님의 영’이 다시 살리시어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군대’로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숨’인 ‘성령’이 불어와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영혼 없는 ‘시신’처럼, ‘신앙의 생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숨 쉬는’ 기척 없이 세상 풍조와 현실의 가치관에 점령당해 살다보니 교회는 세상의 ‘조롱’을 넘어 걱정거리고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우리 안에 다시금 주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불어와 우리 ‘호흡’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실 때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믿음의 고백’이 가능합니다. 주님을 ‘창조주’, ‘운명과 역사의 궁극적 주인’으로 ‘마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삶’, 즉 세상과 현실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던 삶에서 돌아서서 ‘성령’을 따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새 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로마 8:8-9). 한마디로 ‘생명의 영’인 하느님의 성령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이전보다 좀 더 도덕적이고, 좀 더 윤리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차원에서 바울로가 그렇게 교훈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바울로가 뜻하는 것은 그것을 훨씬 넘어섭니다. 바울로는 도덕적 인간, 윤리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인간, 윤리적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였으면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살았어도 됩니다. 그는 이렇게까지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 필립 3:5-6

그는 자기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과 ‘쓰레기’로 여겼습니다(필립 3:7-8).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적 노력으로서는 그가 얻고자 했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즉 ‘자기 의’(義)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필립 3:9; 로마 3:20, 로마 7:15-24). 본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노동)을 통해(행위) 하느님께 올바르다(義)는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그 결과로 하느님께 ‘상’(품삯)을 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레위 18:5; 로마 10:5; 갈라 3:12). ‘품삯’ 중에서도 최고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마태 19:16-17). 만일 하느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구원)을 ‘품삯’으로 받지 못하고, 그 결과는 ‘죽음’ 뿐입니다. 바울로도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일을 통해 하느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얻고 ‘영원한 생명의 품삯’을 상으로 받고자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서’를 파고든 이유도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요한 5:39).

하지만 그토록 열심히 율법적으로 살아 온 바울로가 깨달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율법이 ‘생명’을 얻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죄책감’만 더해 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율법이 ‘의의 표준’이 되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표준’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 속에서 고뇌하던 바울로에게 어느 날 ‘빛’이 찾아들었습니다(로마 7:25). ‘자기 의’에 몰두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비하신 은총의 길’, 즉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복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필립 3:9; 로마 1:16-17; 3:24-26, 28-30; 4:3,13-16; 5:1 8:25).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이 행하신 은총의 사건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진실에 ‘확’ 눈을 떴습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느님의 복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율법을 넘어서는, 율법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그가 발견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생명의 깨달음’이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현존과 활동’ 덕택임을 《로마서》 8장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성령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는 더 깊은 차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는 고난과 죽음마저도 넘어섰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 필립 3:10-11

그렇습니다. 바울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차원을 말하려고 ‘성령’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로는 ‘수명’(壽命)이 아니라 ‘참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의 길’을 밝히려고 ‘성령’을 언급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습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바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 ‘마른 뼈’가 살아나듯이 비로소 우리는 ‘참된 생명’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오늘 2독서 《로마서》 말미에 모든 종교와 다른 ‘몸’의 부활이라는 독특한 ‘부활관’을 전해줍니다(1고린 15:50-55).

그리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주실 것입니다. – 로마 8:6-11

복음이야기는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7개의 표징들’ 중 마지막입니다. 본문들에 ‘기적’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세메이온’(semeion)은 어떤 것을 ‘확인’시키고, ‘인증’하려고 주어진 일종의 ‘표징’(표지, 표적)이란 뜻입니다. 쉽게 말해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입니다.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징(2:1-11),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징(4:46-54), 베짜타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징(5:1-9), 오천 명을 먹이신 표징(6:1-13), 물 위를 걸으신 표징(6:16-21),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신 표징(9:1-7),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11:1-44)입니다.

이 ‘표징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메시아)이시고,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계시하시는’(나타내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고 펼쳐지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간단히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시’입니다. 이 ‘7’개의 표징을 넘어서는 진정한 표징, 즉 제 8의 표징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새로운 창조의 표징”입니다(요한 11:25; 20-21장). 하지만 유다인들은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영적으로 눈이 먼 죄인임을 스스로 증명하며 멸망의 길을 갑니다.

예루살렘에 계실 때 유다인들로부터 ‘배척’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신 예수께서는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피신하셨습니다(요한 10:39-40). 거기 계실 때 ‘베다니아’로부터 한 통의 전갈이 옵니다. ‘베다니아’는 예수님이 ‘무조건적으로 사랑’(본문에는 이 의미를 갖는 ‘아가페’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하시는 세 사람, 즉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가 사는 동네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십니다. 이유는 ‘라자로의 병’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십자가에 죽게 되는 결정적인 표징이 됩니다)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베다니아’가 속한 유다로 가자고 하십니다(7절).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에서 가깝기 때문에 예수님 일행에게는 위험한 동네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베다니아’로 가는 것을 ‘만류’했던, 보다 정확히 말하면 ‘거부’했던 이유입니다(요한 11:8,16).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도착하셨을 때는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그가 진짜로 죽었다는 뜻입니다. 마르타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맞으러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여느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 요한 11:21-22

대단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께 특별한 호의를 요청하실 수 있는 그런 능력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믿음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이제 당신이 하실 일을 내비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 요한 11:23

마르타는 이 말씀에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가르치던 일반적인 부활 교리로 반응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1:24

마르타는 ‘부활’을 ‘미래의 일’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특별한 분이긴 하지만,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즉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이라고 당신이 하신 말씀의 뜻을 다시 새겨주십니다. ‘현재의 부활’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 요한 11:25

예수님의 ‘자기선언’입니다. 그리스말로 “에고 에이미”(나는…이다)로 표현됩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신학자들은 ‘에고 에이미’가 하느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는 하느님의 이름처럼, 예수님을 창조주 하느님과 동일시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자기선언 7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 요한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 – 요한 8:12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 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이다. – 요한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 요한 15:1

이 7개의 자기 선언들은 각각의 약속을 이뤄내신 예수님과 맺는 개인적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또한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더욱이 이 선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따르는 우리 서로를 통일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7개의 자기선언은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 관한 것이고 동시에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라는 자기선언은 예수께서 ‘부활의 근원’이시자 ‘현재나 미래의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시라는 선언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박해시절을 살던 1세기 말 요한공동체를 향한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19라는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악몽’을 꾸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이에게 ‘육체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오래 사는 ‘수명’(壽命)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즉 ‘참 생명’(가슴 뛰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마르타는 믿음의 결단을 요청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믿음’으로 결단합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 요한 11:27

마르타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물론 마르타가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고 한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믿음의 사람’이며 ‘우리에게서도’ 마음으로부터 고백되어야 할 믿음입니다. 마르타는 집으로 돌아가 동생 마리아를 조용히 불러 예수께서 오셨음을 알립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뵙자 언니처럼, 시편의 시인처럼 똑같이 울면서 애원합니다(시편 130:1-2).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 요한 11:32

예수님은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슬픔은 분명 인간성의 일부이고, 예수께서도 인생들의 슬픔과 고통을 공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를 어디에 묻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와서 보라’는 표현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데 사용되는 전형적인 문구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은 이에게 직면시키는 데 사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 서십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모습을 이렇게 담백하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 요한 11:35

단 몇 글자이지만 문장을 대할 때마다 감동이 몰려옵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께서 세 번 우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며 우셨고(루가 19:41), 게쎄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히브 5:7).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도 ‘지치고 목마르셨던 인성’ 역시 강조합니다(요한 4:6-7; 19:28).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무덤 앞에 서신 예수께서 첫 번째 요청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돌을 치워라. – 요한 11:39a

주님과 ‘라자로’를 가로막고 있던 ‘돌’을 치우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돌’ 뒤에는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된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사람’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돌’이 치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가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 사이를 막아선 채,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단절시키고 있는 그 ‘돌’이 치워져야 합니다. 그 ‘돌’이 무엇인지는 여러분 자신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있는 ‘교만’과 ‘의심’과 ‘미움’과 ‘불평불만’의 ‘돌’이 치워져야 합니다. 어쩌면 성찬례에서 우리가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바치며, 말씀을 듣는 그 순서들은 그 ‘돌’을 치워내는 작업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마르타는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 요한 11:39

죽음이 만들어낸 끔찍한 현실에 대한 묘사입니다. 한마디로 ‘돌을 치우면 안 됩니다’라는 반대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한 것도 벌써 잊어버렸나 봅니다. 물론 죽어서 무덤에 묻힌 것은 썩기 마련이고, 냄새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이고,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흔히 우리는 관계가 어그러질 때 바로 잡기를 회피하면서 ‘내버려두자’고 말하곤 합니다. 그 때 작동하는 마음의 기제는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며, 누구도 둘 사이의 관계를 해결할 수 없다는 ‘불신앙’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차라리 건드리지 말자’, ‘내버려두자’ 이런 쪽입니까?

 

예수님은 그런 마르타의 불신앙 앞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는 조건으로서 ‘믿음’을 요청합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 요한 11:40

본문에는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라자로’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으시고 제자들에게 그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은 있습니다(요한 11:4). 사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난 다음에 믿으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라는 이 조건은 복음이야기를 듣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청되는 말씀입니다. 먼저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아도 결국 믿지 않습니다. 유다인들 중에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웁니다. 정말 썩은 냄새가 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냄새나는 무덤이나 시체를 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도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시어 사명을 감당하심을 나타냅니다. 만일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다면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무덤처럼 단절된 관계’에 놓여있는 이들이 서로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 지를 깨닫습니다. 관계 회복을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기도는 관계 단절 속에 있는 가족을 위해, 고통 하는 이웃을 위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입니다.

기도를 마치신 다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라자로야, 나오너라. – 요한 11:43

세상에나! 예수님은 ‘라자로’를 마치 그가 살아있기라도 한 듯이, 큰 소리로 부르십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를 부르시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죽음처럼 단절된 관계의 회복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그를 부르며, 관계 속으로 그를 다시 초대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진실입니다. 물론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서로를 생생한 관계 속으로 회복시키는 최선의 길입니다. 예수께서 마치 착한 목자처럼 사랑하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 요한 11:44a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이 컴컴하고 냄새나는 동굴(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그 음성은 죽은 라자로를 일으키고, 동굴(무덤) 밖으로 나오도록 이끌었습니다. 라자로는 ‘동굴’(무덤)을 나와 이 세상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부활의 신비 뿐 아니라 종교학적으로도 ‘영성적 깨달음’의 단계를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을 갖습니다. 제가 배운 종교학 상식을 동원하면 ‘동굴’은 ‘어머니의 자궁’을 상징합니다.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새로운 탄생’입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조용하고 여린 음성을 듣고 전혀 새로운 신관을 소유한 사람으로 변화된 호렙산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열왕상 19:9-18).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우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의 ‘웅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같이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과 변화에 ‘동굴’이 소재로 사용됩니다. 복음이야기의 라자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가득한 예수님의 음성은 죽음 속에서도 우리에게 다다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8장 끝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 로마 8:38-39

박해시절을 살던 1세기 요한공동체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은 바로 이 ‘믿음’ 속에서 배교의 유혹을 이기고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무덤 밖으로 나온 ‘라자로’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그의 모습에서 당시의 장래 풍습을 알 수 있습니다.

…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 요한 11:44b

수의를 입히는 경우도 있지만 라자로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온 몸을 띠로 묶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기에 동굴을 더듬으며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 요한 11:45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는 일은 이제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인간 편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라자로는 죽은 자의 ‘구속’을 풀고 산 이들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영광이 완성’됩니다. 우선 ‘띠’로 묶여져 있는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다시 살아났지만 여전 묶여 있는 그의 손발은 이러저러한 ‘제한’과 ‘생각’(편견, 선입견, 관점)에 묶여 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의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기에 아직 가족이나 이웃들이 그의 진짜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수건에 감긴 그의 얼굴은 ‘가면’을 쓰고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사회적 관계 때문에 많은 ‘역할 가면’을 쓰고 살다보니 무엇이 서로의 진짜 얼굴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풀어주어 가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한 사람에게 부과한 모든 ‘죽음의 표시’를 제거하고, 자유하게 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우리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십니다.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일은 분명히 예수님이 해주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풀어주고, 해방시켜’ 주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동안 쓰고 살아온 부자연스러운 ‘가면’과 묶여 살아온 여러 가지 ‘결박’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까? 우리의 다정하고 사랑스런 행동으로 그만큼 우리 공동체에 들어온 이들이 자유로워졌습니까? 정말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온 이들이 참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전보다 더 많은 ‘가면’을 쓰게 만들고, 그전보다 더 많은 ‘구속’을 느끼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우리 자신은 정말 자유 합니까? 혹시 나는 ‘수건’(가면)을 겹겹이 쓴 채 상대방을 대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저러한 구속과 제약에 묶여 살면서도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성찬례 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쓰고 살던 ‘수건’(가면)이 벗겨지고, 자신을 구속하던 ‘띠’가 풀어져 자유하게 되는 은총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치유되고 자유로운 몸으로 서로를 만나고 환대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 공동체는 온전한 생명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과 ‘영생’을 경험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른 뼈’처럼,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겉모양으로는 세례성사도 받고, 각종 직분을 맡았기에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마른 뼈’ 같은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저런 지위와 명예를 가졌다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마른 뼈’처럼 가련하고 궁핍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 안에 계시며, 성령을 통해 날마다 주님이 참으로 ‘창조주’이시고, ‘운명과 역사의 궁극적 주인’이심을 마음으로부터 고백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진정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숨인 ‘성령’께서 이 시간 여러분에게 불어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안에 현존하시고 힘차게 활동하시어 주님이 창조주이시고, 운명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깨우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깨우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음에서 일어난 그 믿음이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비추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 믿음으로 우리가 오늘을 활기차게 살아야하는 분명한 존재의 이유를 확신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이란 언제나 ‘환상의 잠’(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입니다. ‘무덤’(동굴)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 일입니다. 부활이란 의식적으로 희망의 삶을 영위하는 일입니다. 절망의 묶임과 거짓의 가면 없이 열린 눈으로 사는 일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우리를 항상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 안에 들어서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덕택에 이미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히 하느님 곁에, 하느님 안에 사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죽음의 힘마저도 이미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 안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믿는 이들은 이미 부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증언하기 위해 《요한복음》은 기록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에제키엘을 희망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처럼, 이 부족한 사제를 시켜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저를 시켜 여러분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십니다.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 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 에제 37:4-6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안에 하느님의 숨인 성령이 가득히 불어오시기를 축복합니다. 희망 없이 버려진 뼈들이었지만 주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힘줄이 이어지고,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지고, 마침내 숨 쉬며 살아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 살아났습니다. 오늘도 코로나19라는 대혼란의 세상 한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도 성령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 요한 11:25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