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6. 사순 26일(목요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2:7-14
  • 성시 – 시편 106:19-23
  • 복음서 – 요한 5:31-47

사순 26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의 정체성, 즉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증언’과 ‘증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증언’과 ‘어떤 증거’가 자신의 ‘정체성’을 정당화해 주는지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정당화해 주는지 깨우치십니다. 단지 말만 앞세우는 성직자나 신자여서는 됩니다. 오늘은 그런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안식일’에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로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요한 5:1-18). 예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의 일’(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도록 이 세상에 보내진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5:19). ‘아버지의 일’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요한 5:24).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생명과 심판을 판가름하는 ‘전권’을 넘겨받으신 ‘아들’입니다(요한 5:22,27). 하지만 유다인들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요한 5:18).

예수께서는 그렇게 증언하실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며 논쟁을 이어가십니다. 어떤 사람이 혼자서만 특정 사건에 대해 혹은 스스로에 대해 증언한다면 그 증언은 법적인 효력이 없습니다. 모세오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나쁜 짓이든 어떤 잘못이든,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증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고소할 수 있다. – 신명 19:15

‘율법’에 따르면 ‘증언’이 효과를 가지려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부당한 고소고발로부터 한 사람의 인격을 보호하려는 취지입니다. 예수님도 이 율법조항에 근거해 자신의 정체성을 ‘증언’해 주는 ‘증인들’을 제시하십니다. ‘모세’, ‘세례자 요한’, ‘하늘 아버지’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결정적인 두 가지를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하나는 당신이 하시고 있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생명의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인데(요한 5:21,26) 예수님의 하시는 일 속에서 그 생명의 일들이 성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동이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서’입니다. 유다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성서’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서’가 자신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성서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전혀 ‘사심’이 없습니다. 결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도 않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작은 일들을 통해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광’을 추구하고, ‘칭송’(찬양)받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전혀 그렇게 하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실 만큼 ‘겸손’하십니다.

더욱이 유다인들이 추앙해 온 ‘모세’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이미 예언했습니다(신명 18:15,18). 예수님은 모세가 계시한 그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으로 모세를 믿었다면 모세가 증언하는 예수님도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고,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을 죽이려 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모세의 글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결국 이 일 때문에 그들이 희망을 걸어 온 모세가 오히려 그들을 고발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 기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스스로를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는 ‘아버지의 일’(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교회)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그대로 살고 있습니까? ‘착한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받듭니다. 스승의 ‘참 좋은 제자’는 평생토록 삶의 여정을 ‘스승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워진다면 우리의 무엇을 통해 증언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을 ‘증인’으로 언급하십니다.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0; 3:28). 자기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더 위대한 분이 오신다고 겸손히 증언했습니다(요한 1:26-27).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영향력 있는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결코 가로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신랑을 맞이할 친구처럼 기뻐했습니다(요한 3:29). 예수께서는 점점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더 작아지는 삶에 만족했습니다(요한 3:30). 오로지 예수님만 빛나시도록 철저히 ‘배경’으로 머물렀습니다. 요한이 보여준 이 같은 ‘증인의 삶’은 우리에게 ‘겸손’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분명 ‘겸손’은 우리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 중 하나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어떤 증거를 댈 수 있습니까? 성당에 다닌다는 것입니까? 신명(信名), 즉 크리스챤 네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를 닮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 아버지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 스승이신 분을 닮아서 ‘용서’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 겸손하게 섬기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온화하고 친절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아픔을 나누고 공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단순하고 검소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사랑하며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지 말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 자신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용서하지 못한 채, 복잡하게, 이기적으로, 배타적으로 살아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슬프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스승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8:22). 우리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기보다 남에게 보이려고, 칭찬을 받으려고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입니다(마태 6:1-4). 다시 말해 겸손하게 섬기며 살기보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나팔’을 불고 스스로의 명성과 유익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는 단지 이름뿐인 제자입니다.

언제나 단순함과 검소함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최고의 모본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지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두고 걱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중 나는 새들을 통해 그 배경인 하늘 아버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들꽃 속에 담긴 하느님의 솜씨를 노래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께서는 비싼 가구나 장신구 하나 없으셨는데도 삶을 찬미했고 만족하셨습니다. 무소유로 사셨는데도 그 단순함과 검소함은 소유에 집착하며 여러 가지 근심 걱정으로 복잡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지 말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함과 검소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냐면서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별로 이타적이지도 않고, 온화하지도 않으며, 포용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으로 어떻게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 증언하며, 그 증거들을 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을 살리시는 아버지, 스승의 용서, 겸손, 검소함, 온화함, 공감, 무조건적인 사랑을 따라 살아갈 때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종교(교파, 교회)는 그 구성원을 통해 증명됩니다. 이 세상을 어제보다 오늘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가장 좋은 종교(교파, 교회)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를 더 ‘성숙한 인격’으로 빚어가는 종교야말로 가장 좋은 종교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을 점점 더 이기적으로, 배타적으로, 관계 파괴적으로 만들고 있다면 빨리 거기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언해 주실만한 자녀요, 제자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제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아멘.

“2020. 3.26. 사순 26일(목요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20. 3.27. 사순 27일(금요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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