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1. 사순 22일(토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호세 5:15-6:6
  • 성시 – 시편 51:1-2, 16-19
  • 복음서 – 루가 18:9-14

사순 22일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자기네만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기대(세계관)를 여지없이 전복시킨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들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결코 올바른 관계에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알려주십니다.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성찰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타인과의 비교나 평가나 손가락질이 아니라 이웃을 형제와 자매로 발견하는 시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지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그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돕는 일까지 나가야 진정한 기도임을 배웁니다. 이런 깨달음이 이 비유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기도하면서 말씀 나눔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자기네만 옳다고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그런 독선적인 사람들의 ‘표본’(標本)으로 ‘바리사이파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사람의 표본으로 ‘세리’를 등장시킵니다. 그들은 분명 ‘동족’이지만 전혀 ‘같은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한 편은 당대에 ‘존경받는’ 사람의 표본이고, 한 편은 당대에 ‘경멸받는’ 사람의 표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문화에서 서로 극과 극에 위치한 이 두 사람을 비유에 등장시켜 하느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겸손’, ‘자기 진실을 대면하기’,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의탁하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건물’을 세울 때도 ‘특별한 용도’가 있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특별히 세운 건물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그 특별히 봉헌된 공간에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을 만난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유념해야 합니다.

비유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들은 둘 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다인에게 성전은 ‘솔로몬 왕’이 봉헌하여 바친 이래로(역대하 6:20-21) 하느님께 기도하는(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들로서 예수님 당시 약 6,000명가량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구별된 의인’이라 불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성당에 잘 다니고, 신자의 의무를 다하며,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내면은 썩은 송장이 들어있는 무덤처럼 냄새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으로 가서 두 손을 쳐들고 보란 듯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 루가 18:11~12

그는 먼저 ‘자신’에 대해 하느님께 아룁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점을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가며 감사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올바름’을 확신하고 ‘자신감’에 찬 기도입니다. 곱씹어 볼수록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홍보’합니다. 일종의 ‘자랑’입니다. 다른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만 ‘단식’하는데, 자신은 일주일에 두 번씩, 그러니까 1년이면 무려 104일이나 ‘단식’한다고 ‘홍보하며 자랑’합니다. 다른 유다인들은 ‘곡식’이나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생산했을 때만 소출의 ‘십일조’를 바치는데, 자신은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라고 ‘홍보하며 자랑’합니다.

이렇게 그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한 ‘감사’는 아주 짧습니다. 반면에 자신이 행한 ‘종교적 의무’, 즉 하느님이 반겨하실 만한 일들을 해 온 ‘자신’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보고(홍보)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그토록 ‘독실하다’는 점을 하느님께 일깨워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누가 보더라도 자신은 올바르고, 모범적이라는 ‘자화자찬’(자기도취)입니다.

그러나 그의 ‘장황한(화려한) 기도’는 정확히 말하면 ‘자기기만’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문의 뜻을 살려 번역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다.”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분명 그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과 관계된 것임을 알고 있을 정도로 훌륭한 지식과 정보를 간직한 그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성전’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으니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화자찬하며, 자기자랑만 늘어놓는 ‘자기’말입니다.

더욱이 그의 기도는 ‘세리’, 즉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심판의 기도’였습니다. ‘독선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세리의 불의한 과거가 용서될 수 있음에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경멸’했습니다. 이처럼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도취적 홍보요, 자기중심적 자랑’입니다. 타인과 ‘비교’해 자기 삶의 우위를 주장하는 ‘교만’하고 ‘분리된 성별의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옳다’고 여겼기에 ‘오늘’ 하느님께 그 무엇도 간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만큼 ‘우월의식’으로 꽉 찬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웃기는 놈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많았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비유의 첫머리에서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하느님은 그의 기도에 전혀 ‘감명’ 받지 않으셨습니다. 비유 결론에 따르면 그의 기도는 ‘하느님을 우롱’하는 아주 ‘교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껏 실천해 온 ‘공로’(자기 의)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당연히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도 그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그의 기도는 자신의 신앙적 실천이 ‘사랑’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올바름’을 보상받고, 보답받기 위한 일종의 ‘거래’였음을 보여줍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자신의 선함과 옮음을 단지 검증해 주는 검증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분입니다. 그는 오늘 1독서 《호세아》와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이 진정으로 반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호세 6:6; 시편 51:16-17). 더욱이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웃 없이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 사람인 ‘세리’는 어땠습니까? 세리의 기도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목동, 백정, 의사, 이발사, 행상인, 고리대금업자, 오물수거꾼과 함께 천한 직업을 가졌다고 하여 ‘직업상의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특히 ‘세리’는 로마제국에 빌붙어 먹고 사는 ‘창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라고도 불렸으며,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한 마디로 ‘세리’는 민족 모두에게 ‘미운털’이 박힌 존재였습니다. 그런 죄인 중의 죄인이 ‘지금’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구역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섭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 루가 18:13b

그도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자신에 대해’ 하느님께 아뢰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판단’(식별)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스스로를 옳다’고 여겼기에 ‘오늘’ 하느님께 요청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죄인’(원문에도 ‘죄 많은’이 아니라 ‘죄인’입니다)으로 ‘직면한’(판단한, 식별한) ‘세리’에게는 ‘오늘’이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보다도 필요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는 행위로는 자신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성전을 봉헌하고 지혜를 간구한 솔로몬처럼 말입니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다른 이를 쳐다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진다면 자신이 멸망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성전 경내에 발조차 디딜 수 없는 존재임을 그 행동으로 인정합니다. 이렇게 세리의 기도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정으로 깨달은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철저히 직면한 ‘현재의 기도’였습니다. 죄인인 그에게는 ‘오늘’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입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1독서 《호세아》 예언자처럼 ‘애타게’ 주님을 찾으며 ‘자비를 희망’했습니다(호세 5:15). 그는 《시편》의 시인처럼 ‘죄를 고하며, 자신의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제물로 주님께 바치며 ‘자비를 희망’했습니다(시편 51:1-2,17-18).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결론을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그 바리사이파 사람을 칭찬하실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에 대해 하느님으로부터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첫째들’이라고 단정 짓곤 했습니다. ‘세리들’에 대해서는 전혀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 ‘꼴지들’이라고 업신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어떻습니까?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 – 루가 18:14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혹은 세계관)를 여지없이 전복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스스로를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자부’(自負)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겸손히’ 스스로를 ‘죄인’으로 ‘직면’(판단)하고,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오늘’ 자신을 던진 세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부심’(自負心)으로 거들먹거리는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그 ‘세리에게만’ ‘오늘’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고 예수님은 결말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전’이라는 그 장소에 맞게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성취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리’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외에는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오늘 ‘회개’ 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말미에, 구원받아야 할 ‘현재의 자신’에 대해 이 세리처럼, 그렇게 인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만이 종말의 때에 진정으로 높여질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낮추실 것이고, 겸손히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높여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이웃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 옳음에 대한 홍보나 자랑이 아니라 자신과 의견이 다르고, 주장이 다른 이웃을 예수님 마음으로 ‘오늘’ 수용하고,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에 나타난 진정한 차이는 하느님 앞에서 ‘오늘’ 그들이 취하고 있는 ‘자기인식’에 있었습니다.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현재의 자기’ 처지를 정확하게 ‘직면’하고, 가장 적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여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갖추고 있어야 할 진정한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자기 옳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죄 속에 살아온 가련한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겸손히 인정하기’입니다. ‘자비를 간청하며 나아오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믿고 의탁하기’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 존재에게 지금도 확인하시는 사항이고, 우리 믿음의 기도가 서 있어야할 자리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기도는 홍보나 자화자찬이 아닙니다. 기도는 비교나 판단하는 독선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기우월감의 표시가 아닙니다. 기도는 ‘정직한 자기 보기’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겸손한 자기 보기’입니다. 기도는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 서로가 형제자매임을 깨닫는 ‘통찰의 시간’입니다. 서로의 얼굴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빛’을 선물 받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과 결코 올바른 관계에 있을 수 없음을 깨우침 받는 시간입니다. 분명 이 비유 안에는 그런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수행자’들이 가슴에 새기는 사자성어 중에 ‘관인엄기’(寬人嚴己)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는 뜻입니다. 듣기에는 참 좋은 말 같지만 적용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객관화’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에게는 ‘관대’(자비)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정의)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는 ‘자비’를, 남에게는 ‘정의’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자신이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참으로 ‘관대한 자비’가 엄격한 ‘정의’보다 더 풍부한 결실을 가져온다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습니다. 우리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욱이 자비와 용서의 실천은 하느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7; 6:12).

오늘 복음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묻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오늘’,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는 물으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보고(홍보)하거나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현재의 기도’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스스로를 올바른 사람으로 ‘자부’(自負)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순절 여정을 걸으며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구원받아야 할 자신에 대해 더욱 ‘바른 믿음’과 ‘바른 인식’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좀 더 너그러워지고, 좀 더 이해심 많게 되며, 이웃을 좀 더 수용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호세아’ 예언자처럼, 우리가 죄를 고백하며 찾아오기까지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주님을 기억합니다.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시며, 살려주시고 일으켜주시는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시편》 시인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선하신 주님, 죄를 없애주시는 어지신 주님께 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며 약점(단점)과 허물을 다 아시는 주님만 온전히 바라봅니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의’(義)를 덧입혀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사순절 여정동안 꾸준한 기도생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인정하시고 높여주실 만한 그런 겸손한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주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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