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20. 사순 21일(금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호세 14:2-10
  • 성시 – 시편 81:6-10, 13, 16
  • 복음서 – 마르 12:28-34

사순 21입니다. <전례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듣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듣습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귀를 핥아주셔서 우리가 잘 알아듣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신 ‘황금률’을 알고 있습니다(마태 7:12). 복음이야기는 그것과 나란히 할 수 있는 ‘가장 큰 계명’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해 수도 없이 들어왔기에 퀴즈처럼 금방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 12:29-31

하지만 정작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답변에 동의했을 때 그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소중한 약속’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 마르 12:34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답변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원하시는 일’을 명백히 가르쳐주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도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 일을 행하는 자녀들에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복, 즉 하느님의 영원하신 구원 계획을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그 일과 계획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유일하신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살도록 창조되었고, ‘사랑’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사랑을 사는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보게 하는 일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기쁨’을 위해 ‘계획’ 되었고,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즉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과 당신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바를 이미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두 예언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 미가 6:8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 – 호세 6:6

‘미가’ 예언자가 선포한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미가’와 ‘호세아’ 예언자의 이 같은 선포는(호세 6:6은 사순 22일 1독서이기도 합니다) 어디에서 유래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던 ‘시나이 산’에서입니다. 한마디로 ‘계약’이 시작되던 때가 ‘기원’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계약’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 신명 6:4-7

이제, 너 이스라엘아!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고 그가 보여주신 길만 따라가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요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냐?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야훼의 계명과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냐? 이것이 너희가 잘되는 길이다. – 신명 10:12-13

사실 하느님은 인류를 창조하신 ‘한 처음부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창세 1:26-29; 2:7-9, 15-17). 그러나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이러한 ‘기대’에 실패했습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은총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의 후손이 온 세상을 대표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줄 말이다. – 출애 19:5-6

그러나 그들 역시 하느님의 ‘기대’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율법 해석과 그 자구(字句)에 매달린 나머지 그 ‘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율법 준수나 희생제사의 의무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 일’을 그들은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잊어버린 그 정신, 더 중요한 ‘한 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한 처음부터’ 명백히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는 궁극적 진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신다.’는 진실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부활’로 가는 ‘자기 죽음’이라는 ‘사순절 여정’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느님 나라’(영원한 생명)로 가는 인생 여정에 있습니다. 이 여정을 가는 데 있어서 ‘교회 전통’이 간직해 온 《성경》이 우리의 ‘등불’이고 ‘나침반’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을 증언한다는 것을 ‘이성의 사유’로 우리는 식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며 가고 있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 좋을 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이 기뻐하시고 상대방을 살리는 데 기여하는 ‘사랑의 섬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사랑 빼놓고 다른 것이 다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돈의 지배’(권력, 명예의 지배)를 받으며 이 여정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길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교회뿐이겠습니까!

오직 ‘사랑’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 가르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사랑’이 ‘가장 위대한 계명’이라고 오늘도 ‘한 말씀’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인간은 자기만을 위하려는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언제나 진짜 사랑은 ‘자기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위대한 계명으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우리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사랑’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지 아닌지는 ‘사랑’만이 증명합니다.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안 됩니다. 믿는 것과 행동이 같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과 행동이 달라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거짓말쟁이입니다. 예수님처럼 상대방이 어찌하든 ‘사랑’과 ‘섬김’을 지속해야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포기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 행하는 우리의 모든 것은 단지 쓰레기일 뿐이라고 사도 바울로는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향한 그 어떤 뛰어난 조언도 충고도, 그 어떤 가르침도 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성직자도 평신도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1고린 13:1-3).

우리는 다른 옷이 아니라 ‘성공회’라는 그리스도교의 옷을 입고 ‘사랑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성공회’라는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요? 그리스도교를 양분하는 거대 교파 속에 존재하다보니 성공회의 ‘자리 찾기’는 한 두 해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정체성 찾기의 노력들은 귀하고 어려운 일인 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성공회 교회의 특징들’을 정의하는 여러 주장들이 있습니다. 의미 있고 소중한 정보들입니다. 하지만 ‘성공회’가 그런 ‘신학적 토양’과 그 모든 ‘신앙적 분위기’를 갖고 있다(지향한다)는 뜻이지 현재의 ‘대한성공회’가 그렇다는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성공회’를 어떤 교회라고(그것도 자신의 틀로) ‘특정’하거나 ‘단정’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특정 경계’로 스스로를 울타리 짓는 일은 자칫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들을 ‘정죄’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성공회적’이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어느 그리스도교나 성공회 교회가 주장하는 그런 특징들과 어느 정도 겹쳐져 있다는 것이 정직합니다.

역사 속에서 ‘성공회’는 스스로를 한 두 마디로 정의하기보다 <기도서>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과 신학과 신앙을 표현해 왔습니다. 사실 전례와 성사 뿐 아니라 그 밖에 모든 것들은 전부 무엇을 위한 그릇일 뿐입니다. 그 무엇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분명 ‘성공회’라는 ‘교회’도 ‘사랑’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 사랑을 다른 말로 ‘하느님 나라’라고 합니다. 전례와 성사, 그밖에 모든 일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섬김’을 위해 존재합니다. 성공회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랑의 섬김으로 증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성공회를 성공회이게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전례와 성사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특정한 전례와 성사라는 다른 관점으로 성공회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공회를 표현할 뿐입니다. 항상 사랑이 성공회의 핵심이며, 성공회의 전례이고, 성공회의 성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서’ 전례와 성사의 ‘전문가’(사제를 그렇게 부릅니다)인척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일입니다. 저 같은 사제들이 귀담아들어야할 ‘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 증거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순종과 겸손 속에서 주님과 이웃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그 누구라도 ‘오직 사랑 속’에서 걸어가면 ‘하느님의 나라’는 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응수한 율법학자처럼 세련되게 신학이나 교리를 말하지 못한다고 쫄지 마십시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고 섬기며 사는 ‘우리 교회’ 말입니다.

고요히 손을 모으고 사랑 속에서, 겸손 속에서 기도로 들어갑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며 그 주실 ‘복’을 예고합니다. 《시편》은 주님만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사랑할 것을 찬미합니다. 오늘도 호세아 예언자처럼, 시인처럼 사랑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세포에 새기며 기도에 잠깁니다.

주님, 사랑이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님을 배웠나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겸손히 내보여 드리나이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저를 먼저 사랑 속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이시며, 가장 위대한 섬김을 주신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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