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7. 사순 18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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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다니 3:25, 34-43
  • 성시 – 시편 25:3-10
  • 복음서 – 마태 18:21-35

사순 18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을 가르쳐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누구나 ‘용서’할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용서’라는 말을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진정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에, 이 사회에, 우리의 미래에 엄청난 유익을 주는 일이 ‘용서’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것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말씀 나눔을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최근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괴롭혀 온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사실 함께 부대끼며 살다보면 어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제일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좌우편이라는 ‘자리다툼’을 벌였던 제자들이 그랬고 오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 마태 18:21

그의 질문이 진짜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삶에는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그런 ‘한계순간’이 있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 ‘고의’라고 느껴질 정도로 반복적으로 ‘상처’를 안겨주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너무나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인생에는 우리에게 상처 주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용서하기 어려운, 솔직히 말하면 ‘용서하기 싫은’ 사람을 ‘한 사람쯤’ 마음에 담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는 우리 마음의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무덤까지 같이 갈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 우리 자신이 더 싫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주의 기도’를 바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빚진)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빚)을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용서를 실천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용서해 주어야할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맨날 나만 이렇게 당해야 하지?… 혹시 저 사람이 나를 호구(虎口)로 아는 거 아나? 누군 뭐 감정도 없는 줄 아나…”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용서하기 싫은) ‘한계순간’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마 베드로도 그런 ‘한계순간’을 맞이했나 봅니다. 사실 제자단은 함께 살아가기 버거운 사람들의 구성입니다. 그들 사이의 ‘서열’도 명확치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좀 더 ‘서열’을 명확히 하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한계순간’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지 ‘과시’하기 위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제자들 중에 자신이 ‘으뜸’ 아니겠느냐는 뜻입니다. ‘일곱 번’이면 정말 많이 해 준 것이라는 생각에 예수님의 동의를 얻기 위해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창조이야기’에서 듣듯이 ‘완전’, ‘완벽’, ‘최종’을 뜻합니다. 어제 들었던 복음이야기에서 나아만 장군도 일곱 번 요르단 강에 몸을 씻고 나았지요. 이렇게 베드로는 주변의 동료들을 둘러보고 나서 ‘일곱 번의 용서면 충분하고도 남는다.’면서 예수님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이미 정답을 말했다고 자신 만만해 했습니다.

예수님은 빙긋이 웃으십니다.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 마태 18:22

곁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도 우리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490번의 용서’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의 숫자’를 헤아리면서 490번의 용서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에서 ‘용서의 계산기’ 자체를 내버리라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용서의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어안이 벙벙해 진 그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입니다. 공동번역에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라고 제목을 좀 무시무시하게 붙여놓았습니다.

1만 달란트는 어느 정도의 돈일까요? ‘데나리온’이라는 화폐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1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 하루 품삯입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16년 치’ 품삯입니다. 비유에는 1만 달란트라고 했으니 ‘16만 년 치’ 품삯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액수입니다.

‘왕’(하느님)은 자신에게 그런 ‘빚을 진 사람’이 사정하기에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무자비’하게 굴었습니다.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다른 종들이 분개하여 왕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왕은 그 ‘무자비한 종’을 다시 불러 들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비유를 듣고 ‘그 놈 쌤통’이라며 통쾌하게 여긴다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은 겁니다. 그 ‘무자비한 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 모두가 ‘어떤 죄(채무)든지 간에 하느님의 용서를 먼저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우리가 만일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그 ‘용서의 원천’(근원)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가르치시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우리의 ‘선한 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의 ‘선한 감정’이 원천인 것도 아닙니다. 만일 용서를 우리 ‘의지’나 ‘감정’ 차원의 일로만 강조한다면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심리학적으로든, 상담학적으로든 ‘용서’는 건강한 삶에 있어서 필수조건입니다.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용서는 우리가 ‘외상 후 장애’로부터 더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통해 마음의 치유를 경험했다고 인정합니다. 어느 심리상담 프로그램이든지 치유의 과정에 ‘용서하기’를 넣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분명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용서’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또 사회학적으로도 ‘용서’는 그 사회 전체의 의식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올려놓는 진정한 ‘변화의 힘’입니다. ‘넬슨 만델라’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물질이 풍요로워야 비로소 그 사회 전체의 의식이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의’보다 강한 힘을 갖는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는 자행된 ‘악’을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에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는 자행된 ‘악(惡)의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고 ‘현재의 자기를 성장’시키려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입니다. 증오와 불의를 만들어낸 ‘과거의 사회적 조건’을 바꾸어 용기 있게 ‘미래 사회로 나가자’는 엄숙한 요청이 ‘용서’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용서의 삶’은 그런 심리학적, 상담학적, 사회학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것 이상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용서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라고 말합니다. 아니 의무를 넘어선 인생의 가장 강력한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용서의 원천’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의 원천’은 우리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한량없는 은총’에 ‘근거’합니다. 정말이지 우리를 향해 베풀고 계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원천’입니다. 비록 우리가 일상에서 그 은총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용서는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전히 의롭지 않습니다. 우리의 잘못과 허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살고 있다면 제자의 삶에서 아직 멀리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용서는 내면으로부터 오는 미덕이 아닙니다. 용서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해서’는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는 빚지고 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만큼이나 용서하는 일도 절대적임을 우리는 압니다. 한 번의 용서는 지옥으로 기울어진 내 삶의 저울추를 한 눈금 천국으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를 통해 풀려나는 죄수는 항상 우리 자신입니다.

한결같으신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노래한 《시편》 기자처럼,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하게 된 정신을 가지고 기도로 들어간 다니엘처럼, 우리도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은총 속에 살고 있는 우리임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제 마음을 치유해 주십시오. 용서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저를 위해 용서의 기도를 바치신 당신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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