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6. 사순 17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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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열왕하 5:1-15
  • 시편 – 시편 42:1-2, 43:1-4
  • 복음서 – 루가 4:24-30

사순 17일입니다. 1독서 《열왕기하》는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군사령관이었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사마리아에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 왔습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내놓은 ‘치료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터무니없었습니다. ‘이런 푸대접과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으려고 그 먼 길을 달려왔던가?’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발길을 돌렸습니다.

나아만은 자기 행동의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나병을 고쳐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아바나 강과 발바르 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 열왕하 5:11-12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도 자기 생각이나 논리에 맞아 떨어지는 ‘세상적인 방법’을 고집합니다. 주님이 ‘한 말씀’을 해 주실 때 믿음을 갖고 행동하기보다 자기 생각이나 논리와 맞아 떨어지는 ‘하느님의 방법’을 찾아 헤맵니다. 그렇게 해서 치유될 수 있는 기회마저 날려버립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많은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의 방법대로 하면 안 되는지 자기의 주장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로 ‘십자가 수난’이라는 방법을 택하셨을 때 제자들(베드로로 대변되는)은 펄쩍 뛰었습니다.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길로 ‘십자가 수난’이라는 방법을 내놓으셨을 때 제자들은 막아섰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방법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환영하고 한 상에 둘러앉았을 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정죄했습니다. 그것이 ‘영혼이 병든’ 인류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어울리는 다른 방법을 내놓으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들은 어째서 그 방법이 적당하지 않은지 구구절절이 자기 생각과 논리를 늘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유혹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께서 제시하신 방법, 즉 궁극적으로는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생각대로 다른 방법을 택하셨다면 영혼이 병든 인류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이야기인 《루가복음》도 그렇습니다. 고향을 방문하신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지만 그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가 4:24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출신을 잘 안다’는 자기들의 생각과 논리 때문에 ‘치유’와 ‘구원의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친숙함’이 오히려 그들의 치유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예수가 ‘희년을 성취할 하느님의 방법’이라고 믿기에는 자신들에게 너무나 익숙하다며 거부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와 맞아떨어지는 뭔가 다른 방법이어야만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만일 예수가 나자렛 출신이 아니라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방법이라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생각과 논리에 묶여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향해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을 경험한 사람들을 열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이름난 예언자인 엘리야와 엘리사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제쳐두고 ‘이방인’을 보살펴 주신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구원방법을 거절한다면 그 기회가 ‘이방인’에게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선택하신 ‘치유와 구원의 방법’은 하느님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수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자신을 ‘예언자’로 ‘신분세탁’을 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셈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이방인보다 못한 사람’ 취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이방인의 하느님으로’ 가르치는 것에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고향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하는 순간입니다. 회당 안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말렸지만 그 사나움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그들의 진정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고향 마을인 나자렛은 산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산벼랑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밀어뜨릴 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죽을 때까지 돌팔매질을 할 것입니다(민수 15:35; 사도 7:58).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든 첫 번째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오처럼 ‘헤로데’도 아니었고(마태 2:13-17), 마르코처럼 ‘바리사이파나 헤로데 당원들’도 아니었습니다(마르 3:6). 하마터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고향 사람들 때문에 시작하자마자 끝날 뻔 했습니다. 예언자 팔자 한 번 사납습니다.

어째서 예언자 팔자가 이렇게 사나울까요?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편한 진실’입니까? ‘내 안의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방법, 즉 ‘사명’을 그만 두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루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 루가 4:30

예수님은 윤동주처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갔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목숨을 구걸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얻는 인기를 성공의 척도로 여기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적대하는 그들의 한 가운데를 ‘용기’ 있게 걸어가십니다. 그 순간 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구원의 힘’이 그 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던 것처럼 그들은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악의에 차 있었고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고집하며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도록 온전히 그 방법에 내맡기라는 초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방법을 겸손히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제가 보다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어떻게 하면 제가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 생각과 논리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제시하시는 그 방법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자유로, 기쁨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방법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개방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영혼이, 마음이 병든 우리가 치유되는 기간입니다. 무감각해진 영적감수성이 치유되는 기간입니다. 이기적으로 살며 ‘자선’(선행)에 인색했던 마음이 치유되는 기간입니다. 세상 재미만 즐기고 ‘예배’와 ‘기도’에 게을렀던 ‘믿음’이 치유되는 기간입니다. ‘경청’하고 ‘공감’하기보다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기 바빴던 마음이 치유되는 기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이, 마음이 병든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자선’을, ‘기도’를, ‘단식’이라는 방법들을 교회를 통해 제공해 주십니다. 그 방법이 자기 옳음과 분노, 불안과 걱정에 휘둘리는 마음을 정화하고, 더 순수하고, 더 평화롭게 만드시기 위해 제공하시는 하느님의 방법들입니다. 자신을 ‘극기’하고, 이웃에게 ‘관대’하며, ‘용서’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방법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제공하시는 그 방법들이 너무 단순해서 시시한 것처럼 여길지 모르지만 거기에 우리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지혜’가 있습니다.

나아만의 부하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정말 지혜로웠습니다. 그들은 나아만 장군에게 진짜로 잘 생각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만일 이 예언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 열왕상 5:13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의 치유를 위해 더 어려운 방법을 제시하신다 해도 그대로 하려고 들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처럼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병든 저를 치유해 주소서. 저는 새로워지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 마음과 영혼을 당신께로 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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