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5. 사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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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예수가 주신 생명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꿰뚫어 본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자기 민족에게 예수님을 전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증오와 분단의 벽을 허물고, 화해와 하나됨이 일어나게 하는 거룩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 역시 민족의 화해와 통일, 사회에 만연한 증오와 대립을 허물고 평화를 가져오는 하느님의 일꾼이 되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제 헛된 갈망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7:1-7
  • 시편 – 95
  • 2독서 – 로마 5:1-11
  • 복음서 – 요한 4:5-42

사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예수가 주신 생명으로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올해로 우리민족은 ‘분단 75년’을 맞이합니다. 오랜 세월 남북으로 ‘반목’하고 있습니다. 냉전시대가 끝난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이데올로기(이념논쟁)의 귀신이 배회하는 땅입니다. 탐욕스런 정치인들과 그들과 유착한 언론들은 그 귀신을 이용해 국민들 위에 군림해 왔습니다. 자기들 말을 듣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처럼 국민의 자유를 구속해 왔습니다. 계속해서 동족 간의 증오를 부축이고 분단을 고착화시켜 왔습니다. 더욱이 교회들마저 ‘이념논쟁’에 휘둘리며 ‘정권의 부역자’ 노릇을 해 온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딱히 지금이라고 다르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교회 안에도 깨인 사람들이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겪는 불행의 근본에 ‘분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민족이 겪고 있는 이 같은 ‘분단’이 모든 불행의 근본임을 깨달은 이상 보다 주체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외세(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가 통일을 도와줄 것이라는 헛된 꿈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분단극복과 통일의 그 날을 위해 국민 전체가 주인의식을 갖고 나서도록 보다 활발한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참으로 ‘분단극복’과 ‘통일’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서 펼쳐지는 모든 신앙교육도 이 점을 지향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믿음의 일꾼을 양육해야 할까요? 분단을 고착화하는 증오의 이념논쟁을 철폐하고 후손에게 ‘통일의 무지개’를 안겨주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떤 눈을 떠야 합니까? 오늘은 복음이야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므리바’(다툼)와 ‘마싸아’(시험함)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야여정 중에 목이 말라 죽기 직전이었던 이스라엘은 ‘구원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생명의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 기적을 맛보았다면 ‘다툼’이나 ‘시험함’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보다는 보다 멋진 이름을 붙여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곳에서의 경험이 어찌나 수치스러웠던지 재차 언급할 할 정도였습니다(신명 6:16). 그들 역사에서 가장 불신앙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기억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기대대로 해 주시는 지 안 해 주시는지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기도 때마다 《시편》으로 노래하는 <95편>도 이 불신앙적이고, 불명예스런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민수기》에도 등장합니다(민수 20:2-11) 사도 바울로는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생명의 물’이 터져 나온 그 ‘바위’가 ‘그리스도’였다고 교훈합니다(1고린 10:4). 자세히 보겠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씬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당도합니다. 극도로 피곤했고 목말랐습니다.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습니다. 분명 하느님이 지시하시는 여정이지만,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큰 시험 거리였습니다. 광야에서의 ‘물’은 생존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재 상황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슬슬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정말 새로운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중인지 신뢰하기 힘듭니다.

그들의 화살은 모세에게로 향합니다. 지도자인 모세가 자신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의심합니다. 그를 따르기로 한 일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자신들을 잘못 인도할 수도 있는 결함투성이 지도자를 신뢰하기로 한 것은 아닌지 ‘자책’합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다’라는 분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를 약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애 3:8, 4:30). 하지만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르비딤’은 그 무엇도 흐르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를 느낍니다. 따라나선 것을 후회합니다. 꿈이 좌절된 상태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사람이 너무 피곤하고 배고프면 하게 되는 행동을 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대상, 비난과 공격의 대상, 책임전가의 대상을 찾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마라 죽게 할 작정이냐? – 출애 17:3

요즘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 힘들어 죽겠다. 옛날이 좋았어. 다리가 너무나 아파. 발이 다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어. 따뜻한 물에 샤워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푹신한 침대가 그립다. 모세, 당신은 우리가 길을 잃게 만들었어. 왜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어. 당신은 틀렸어. 우리는 결코 약속의 땅에 가지 못 할 거야. 다 당신 때문이야…

인간들은 왜 이런 식일까요? 서로 ‘협업’(협동)해서 문제를 헤쳐 나가기보다 불평과 원망의 대상, 즉 ‘희생양’ 찾기에 더 빠른 것일까요? 왜 그들은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돌보심을 신뢰하는 대신, 누군가를 비난하고 공격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까요?

그들의 불평과 원망, 비난과 공격을 모세가 들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모세는 출애굽을 부추긴 당사자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구제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들은 현재 처한 곤경 때문에 마음의 눈이 가려졌습니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자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신앙의 영웅인 모세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번쯤 ‘리더’ 역할을 해 본 분이라면, 모세를 그렇게 바라보는 제 심정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목숨을 걸고 도우려했던 바로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믿음과 온유(겸손)의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자유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적들을 이집트 땅에서 행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출애 16:13-16). 그런 일들을 통해 모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충분히 과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과 온유의 사람’, 즉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가려는 겸손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격분한 그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낀 모세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흔들리는 모세에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의 현존을 느끼게 해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이 백성보다 앞서 오너라. 나일 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 출애 17:5-6

하느님의 지시사항은 백성들을 진정시키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물’이 전혀 없을 곳 같은 ‘바위’(하느님 자신, 시편 78:35)에서 ‘풍성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실 것이라는 너무나 황당한 약속입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호렙 산의 바위’가 ‘생수의 근원’이 될 것이고, 주님께서 그 ‘바위’ 옆에서 나타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바위는 목마르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들며, 하느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의심하는(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금 ‘하느님의 임재’를 상기시켜 줄 ‘표적’(表迹)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 말씀을 믿으시겠습니까?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고 하시는 데, 과연 그 말씀에 소망을 걸란 말입니까? 아무래도 따지기 좋아하는 저는 믿을 수 없다며 도망쳤을 것입니다.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였습니다. 결국 ‘순종의 사람’ 모세 덕택에 이스라엘은 예기치 못했던 ‘풍성한 생수’(은총)를 마십니다. 100% 천연 암반수입니다. ‘그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 이집트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게 했던 도구였습니다(출애 7:20). 이제는 그 ‘지팡이’가 ‘생명의 도구’가 됩니다. 장로들은 이 일의 목격자입니다. 하느님께서 돌보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의 증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꼭 ‘필요한 순간’에 모세 앞에 나타나시어 ‘당신의 현존’을 보이셨습니다. 풍성한 은총으로 순종의 사람 모세를 도우셨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은 ‘불순종’으로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생명’을 가져옵니다. 공동체가 ‘협업’(협동)하는 일은 소중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 ‘한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서는 일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1독서 《출애굽기》와 2독서 《로마서》의 연관을 봅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공통적으로 ‘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2독서 《로마서》만 예외로 보입니다. 그러나 1독서가 전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의 물’을 가져다 준 ‘모세’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이 온 인류에게 ‘하느님과의 화해’(올바른 관계, 평화, 구원, 영원한 생명)를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에 대한 ‘예형’(豫型)임을 인식하는 순간 <전례독서>의 연결이 확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2독서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일어난 ‘하느님과의 화해’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하느님께 ‘불순종’한 우리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느님의 사랑의 사건’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가 전하는 모세의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도자를 향해서든, 아니면 서로를 향해서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제공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 함께 고난의 문제를 헤쳐 나가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비난하고 공격할 희생양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함께 하심의 증거를 보여 달라고 ‘시험’해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여정에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했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표적’을 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했습니다. 그것이 그 광야 여정으로 하느님이 인도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아침기도 때마다 바치는<95편>은 창조주 하느님,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초대하는 ‘시’(詩)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바위’라고 찬미합니다. <성공회기도서>는 아침기도로의 초대 성격이 강한 전반부(1-7절)만 발췌했습니다. 후반부(8-11절)까지 보면, 이 시가 무슨 목적으로 지어졌는지 명백히 드러납니다. 시인은 1독서 《출애굽기》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기 회중에게 두 번 다시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광야 세대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했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일을 보고서 ‘감사’하기보다 하느님을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빗나가 하느님의 길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느님의 안식’, 즉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안식은 다른 말로 하면 ‘구원’,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제 복음서를 다룰 차례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사마리아 지역에서 행해진 예수님의 전도활동’을 전하는 《요한복음》입니다. 특히 ‘야곱의 우물가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한 여인과의 대화’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그 여인의 ‘꿰뚫어 봄’을 통해 서로 적대관계에 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하나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요한복음》 기자는 자신의 <복음서>를 꿰뚫는 주제를 한층 강화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믿음’이 ‘하느님과의 관계’와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라는 주제 말입니다.

다른 <전례독서>에서처럼 ‘물’이 사건의 중요 매개체가 됩니다. 팔레스타인처럼 강수량이 적은 지역에서 ‘마실 물’을 얻을 수 있는 ‘샘’이나 ‘우물’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마을의 축복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물’은 ‘생존의 필수조건’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런 ‘물’을 가지고 모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진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수명’, 즉 ‘생존의 필수조건’인 ‘물’과 대조하여 ‘영원한 생명’의 필수조건인 ‘생명수’를 주시는 분을 ‘계시’해 줄 참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는 <복음서>에 전해지는 다른 만남들과 달리 아주 ‘이례적’(異例的)이고 ‘대조적’(對照的)인 성격이 강합니다. 가령 대화의 주체가 남자와 여자라는 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은 아주 이례적입니다. 또 ‘우물 물’과 ‘샘솟는 물’, 우물을 준 ‘야곱’과 샘솟는 물을 주는 ‘예수’, ‘예루살렘’과 ‘저 산’(그리짐 산)의 대조도 두드러집니다.

이런 이례적이고 대조적인 면에 주목하면서 복음이야기를 묵상하다보면 어느 새 사마리아 여인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끈질기게 이어가는 여인의 탁월함, 즉 ‘지성미’와 ‘탐구력’, ‘결단력’과 ‘실행력’에 감동을 받습니다. 사실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여인들을 예수님 공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갖는 사람들로 배치합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해석과 설교의 역사에서 특히, 가부장적인 우리사회와 남성중심적 성서해석이라는 교회전통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그 탁월함은 훼손당하곤 했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오늘 복음이야기를 배경으로 ‘리차드 블랜차드’(Richard Blanchard)가 지은 ‘우물가의 여인처럼’(Like the Woman at the Well)이라는 제법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성가개편위원으로 일할 때, 이 곡을 <2015 성가>에 넣을지 말지를 두고 전체 위원회가 ‘숙의’(熟議)를 거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가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전체 가사를 신학적으로 한 번 더 고민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너무나 유명하고 신자들 사이에서 애창되는 곡이었지만 함께 일했던 민마가렛 사제와 저는 반대표를 행사했고 결국 채택이 부결되었습니다. 이유는 사마리아 여인을 지나치게 폄하한 가사 때문입니다. 결코 그 여인은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하던 여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가사가 나온 이유는 딱 한 구절 때문입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 요한 4:18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에서 여인을 ‘행실이 나쁜’(매춘하는) 사람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애정욕구에 목말라 하던 여인으로 폄하해 버립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예수님의 언어는 그런 비판이나 정죄가 아니라 ‘고통’하며 살고 있는 한 존재에 대한 ‘공감의 언어’입니다. 오히려 이 여인은 대화가 거듭될수록 ‘개인의 실존적 고민’을 넘어 ‘민족과 공동체의 문제’를 온 몸으로 떠안고 살아간 숭고한 여인임이 드러납니다. 특히 저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아픔을 발견합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처럼 그 여인도 ‘민족의 고난’과 ‘반목’의 땅에 살며 고통을 겪던 ‘민족의식이 투철한 사람’입니다(요한 4:9,12). 사실 언제나 한 개인의 실존적 고통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과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의 문제는 항상 개인의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그렇지만 고통 속에서도 2독서 《로마서》의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로마 5:3b-4) 도래할 새 세상을 꿈꾸던 ‘희망의 사람’입니다. 차별과 경멸 속에 살아가는 민족의 고통과 억압을 풀어줄 ‘메시아’를 ‘희망하고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요한 4:25).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시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경계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예수님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피해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려 했습니다. 갈릴래아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가로지르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릴래아나 유다로 여행하는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땅’에 발을 들여 놓기보다는 ‘요르단 강 동쪽 베레아’를 통해 서로 왕래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처럼 ‘반목’하며 ‘원수’로 지내왔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가졌던 이유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배경들이 깔려 있습니다. 기원전 10세기, 솔로몬 왕의 사후 통일왕정이던 이스라엘은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중심의 ‘남왕국 유다’로 갈라졌습니다. 분단된 두 왕국은 반목을 지속했습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리는 고대근동의 패권은 ‘아시리아 제국’이 쥐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살마네셀 5세’는 서진(西進) 정책을 펼쳐서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열왕하 17:1~6), 그 땅에 ‘이주민 정책’(혼혈정책)을 펼쳤습니다(열왕하 17:24~41). 이름 하여 ‘사마리아인’들의 시작입니다.

세월이 흐른 후, 남왕국 유다에 살던 백성들은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을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면서 ‘냉대’했습니다. 민족적으로 ‘혼혈’이라는 ‘차별’이자 ‘경멸’입니다. 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갔다 귀향한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배척’했습니다(에즈 4:2~3). 성전 재건에도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떤 유다인도 사마리아인과 결혼 할 수 없었습니다(에즈 9:1~10:17).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런 배제된 아픔을 간직한 이들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 취급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경전을 가지고 있었고 야훼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 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허락을 얻어 ‘세겜’에 있는 ‘그리짐 산’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이 아니라(신명 12:5) ‘그리짐 산’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예배장소로 여겼습니다(요한 4:20). 그들은 유대교 신앙에 필수적인 ‘예루살렘’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했고,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메시아의 약속으로부터 배제된 ‘이단자’로 여기며 그 땅을 ‘저주’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적대감’과 ‘분단’은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유대인과 상종하지 않을 정도로 분단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로 들어가십니다. 그만큼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밝혀지겠지만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동네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옛날에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인데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 요한 4:5b-6a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은 ‘세겜’을 말합니다(창세 33:18-20). 그 땅은 예루살렘에서 북쪽 약 60km 지점에 있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짐 산 사이에 있는데 야곱이 ‘세겜’에 들어가서 돈 주고 산 다음 후손에게 ‘요셉’에게 물려주었습니다(창세 48:22). 그 보다 먼저 언급되는 ‘세겜’은 아브라함이 주님의 약속을 처음 받은 곳입니다(창세 12:6). 요셉의 뼈가 이집트에서 나와 묻힌 곳도 ‘세겜’입니다(여호 24:32; 사도 7:16). 가나안을 차지한 12지파가 여호수아의 주도 하에 모세의 명령대로 계약 갱신을 한 곳도 ‘세겜’입니다(여호 24:1-28; 신명 11:26-31). 훗날 10개 지파 연합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번째 수도였던 곳도 ‘세겜’입니다(열왕상 12:25).

이렇듯 ‘세겜’은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유서(由緖) 깊은 곳입니다. 그 ‘세겜’에서 가까운 동네가 ‘시카르’이고 거기에 ‘야곱’이 후손들을 위해 파 놓은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가 오늘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세겜’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표현 속에 비록 지금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반목하고 있지만 본래 그들은 ‘야곱’이라는 한 조상의 ‘후손’임을 그런 식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형제’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토록 유서 깊은 조상의 땅을 유대인들은 저주해 왔습니다.

여행에 지치신 예수께서는 ‘그 우물가’에 가 앉으셨습니다. 자꾸 주위를 둘러보십니다. 마치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기라도 하신 듯 말입니다. 시간이 이미 ‘정오’에 가까웠습니다. 내리 쬐는 뙤약볕에 사람 구경하나 할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사실 바로 그 여인을 만나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물 한 모금만 줄 수 있겠소?

예수님은 작은 ‘섬김’을, 작은 ‘호의’(好意)를 요청하십니다. 그 여인은 이 요청이 그녀를 하늘나라로 인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여인은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 요한 4:9

우리는 여인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 대답은 여인이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임을 드러내줍니다.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라는 말은 자기민족을 경멸하고 차별해 온 유다인들에 대한 ‘저항’이 담겨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얼굴을 보시며 빙긋이 웃으십니다. 자신이 그런 요청을 한 이유를 유대인과 사마리아으로 갈라온 전통에 의지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 요한 4:10

예수께서는 당신이 지금 우물가에 온 이유,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여인을 마주하고 있는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참여자를 더 깊은 대화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손색이 없는 말솜씨입니다. 정말 부러운 말솜씨입니다(이사 50:4). 예수님의 초대를 받은 여인은 좀 더 강한 어조로 도발합니다.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이 마셨고 그 자손들과 가축까지도 마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우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더 훌륭하시다는 말씀입니까? – 요한 4:12

여인은 정말 막힘이 없고 냉소적인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를 향해 계속해서 그런 알 듯 말 듯 한 말씀을 하는 ‘당신은 누구?’ 이러면서 단도직입적으로 훅 들어옵니다. 좀 체면을 차려 말씀드리면 “우리 조상 야곱은 후손들의 생존을 위해 이 우물을 마련해 주었는데 선생님도 우리 민족의 고통을 풀어주고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십니까?” 라는 뜻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분단된 민족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보았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그 막힘없는 당당함에 끌려 그만 서둘러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시고 맙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야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이라는 ‘자기 계시’입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 요한 4:13-14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물’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 ‘물’은 ‘생존’(수명, 갈증 해갈)을 위해 야곱이 파서 준 ‘우물 물’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그 ‘물’은 인류가 ‘갈망’해 온 ‘영원한 생명’(가슴 뛰는 삶, 지금 여기서 절정을 누리는 삶)을 위한 ‘생명수’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생명수를 주는 분’이십니다. 그 ‘생명수’를 마신 사람(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수’ 자체가 마신 사람(믿는 사람) 속에서 영원히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생명수’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성령 안의 새 생명)을 상징합니다(요한 7:37-39).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종말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로 드러내신 셈입니다.

여인은 아직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이 말씀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물동이를 들고 와 예수님께 건네며 곁에 앉습니다. 이렇게 과감하고도 당당하게 요청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 요한 4:15

눈치 채셨습니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가 물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여인의 ‘보조를 맞추어’(pacing) 주셨지만 어느 정도 친밀감이 형성된 뒤에는 ‘인도’(leading)해 가십니다.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한 여인이었기에 이 대답은 “그 물을 우리 민족에게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이 우리 민족의 고통과 목마름을 영원히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이라면, 정말로 그 물을 지금 우리민족 모두에게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물동이를 다시 건넵니다.

그러면서 물동이를 건네받던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고요히 말씀하십니다. 화제의 전환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계시하시려는 순간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정지된 듯 했습니다. 여인은 지금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집고 일어나면서 힘없이 이렇게 대꾸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여인의 말은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우스운 소리로 남의 편이 ‘남편’이랍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숨기려는 의도일까요? 예수님은 일어서서 가려는 여인의 등에다 대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 요한 4:17-18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목소리 톤이었을까요? 아니 어떤 표정으로 어떤 톤으로 말씀하셨기를 바랍니까? 여섯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여인의 ‘실존’을 꿰뚫어 보십니다. 여인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더욱이 많은 설교자들이 이 구절 때문에 여인을 무비판적으로 결혼생활에 실패한 성적으로 방종한 사람, 즉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여인 안에 있는 ‘죄책감’을 상기시키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를 알면 그런 주장이 좀 터무니없습니다.

물론 유다인들은 여자가 두 번 아니면 세 번까지는 이혼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자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혼 할 권리는 남자들이 남용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러 저러한 구실을 붙여 아내를 소박하고 모세가 명한 이혼장을 써 주고 집에서 내보냈습니다. 그렇게 이혼 당한 여자들이 ‘재혼’을 통해 ‘새 출발’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생존을 위해 남자의 보호 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여인 역시 결혼했지만 이혼을 당했을 것이고, 생존을 위해 보호 속으로 들어간 남자들로부터 번번이 버림을 받았습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자신을 진짜로 보호해 줄 남편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 없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 불렀고 누구하나 살가운 인사를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정오’에 우물을 찾은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이 같은 현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 여인을 마을 사람들처럼 죄인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여인의 그 같은 ‘어둠’(불편한 진실)이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의 길’(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여인은 다시 뒤돌아서서 예수님 곁에 앉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 요한 4:19

이 고백은 여섯 남자와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알아맞혔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스런 자신의 현실을 예수님이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단지 ‘유대인’ 중 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자신을 빠져들게 만드는 이 분이 정말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자신 앞에 있는 분이 ‘예언자’, 즉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오래도록 자신을 아프게 했던 ‘진짜 문제’를 질문합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이었습니다. 언뜻 그 질문은 ‘예배장소’에 관한 종교적 질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사마리아인을 경멸해 온 ‘예루살렘 성전중심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이념논쟁)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담은 질문입니다.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 드렸는데 선생님네(유다인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 요한 4:20

‘저 산’은 야곱의 우물과 마주보고 있는 ‘그리짐 산’을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겜’에 있던 ‘그리심 산’은 유대인들에게 유서 깊은 곳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고, 그의 사후 통일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서로 죽이는 비극의 역사를 반복합니다. 남왕국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을 거룩한 곳이라 지칭하면서, ‘유다 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퍼뜨렸습니다. 이것은 포로기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기원전 4세기 ‘그리짐 산’에 성전을 세우고 제사를 드려왔지만 유다인들은 이 성전을 기원전 1세기 후반 파괴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서 제사를 바치는 이들을 죄인으로 못 박아 버렸습니다. 따라서 여인은 이런 ‘예루살렘 성전중심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면서 ‘유대인인 예수님의 생각’을 캐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저항을 이렇게 포옹하십니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 요한 4:21,23-24

예수님은 여인의 질문을 장소나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로 답변하십니다. 특히 당신을 통하여 ‘이미 시작된 미래’(지금)를 가리킴으로써 여인의 질문에 답변하십니다. 예배의 방법은 ‘의식적’(儀式的, 정해진 예식 절차)이 아닌 ‘영적으로 참되게’입니다. 흔히 ‘영적으로 참되게’ 라는 구절을 예배자가 지녀야할 ‘내면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느님을 예배하는 인간의 내면화된 태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영과 진리’입니다. ‘영’은 하느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속성, 또는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킵니다.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진리로써 하느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빛’(요한 3:21)과 ‘자유’(요한 8:31-32)와 ‘생명’(요한 14:6)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성령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라는 말씀은 본문의 맥락에서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배를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독점하는 ‘예루살렘 성전중심주의 기득권자들’에 대한 책망의 성격이 강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지배와 차별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던 ‘예루살렘 성전 지배자들’에 대한 고발의 성격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영’과 ‘진리’에 대립되는 자들은 ‘어둠’과 ‘거짓’과 ‘세상’으로 대표되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용기를 얻는 여인은 내면 깊이 간직한 자신의 희망을 꺼내 보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겠지요. – 요한 4:25

자신이 언젠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믿음 깊은 사람임을 드러내 줍니다. 반목과 차별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과 억압을 풀어줄 ‘메시아’를 대망(待望)하는 ‘믿음의 사람’임을 드러내 줍니다. 우리말로는 그렇게 번역했지만 원문대로 번역하자면, “저는 메시아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라는 ‘현재형’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마음이 완전히 열린 여인을 향해 그만 서둘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시고 맙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 요한 4:25

사실 이러한 직접적인 ‘자기 계시’는 ‘니고데모’에게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지금 기다리고 희망하고 있는 ‘종말의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선언입니다. 이렇게 해서 ‘민족의 아픔’을 가지고 끈질기게 예수님을 대면했던 여인은 ‘종말의 때’에 메시아가 오시어 하실 ‘모든 일’을 ‘지금’ 꿰뚫어 보게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메시아가 오시어 종말의 때에 하실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2독서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 평화’입니다(로마 5:1). 차별과 분열을 조장해 온 ‘거짓 이데올로기’를 깨뜨리시는 일입니다(에페 2:11-12). 거짓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서로 원수처럼 살고 있는 유다인과 이방인, 서로 원수로 반목하는 모든 민족을 화해시켜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는 일입니다(에페 2:13-15). 하느님 안의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일입니다(에페 2:19).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생명)을 바쳐 이루실 일입니다(로마 5:6,8-11; 에페 2:16). 그 ‘사랑의 일’, 그 ‘생명의 일’, 그 ‘평화의 일’을 하실 종말의 메시아가 ‘지금 바로’ 자신 앞에 ‘빛’처럼 드러나는 ‘공현’을 맛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실존을 꿰뚫어 본 것처럼, 여인 역시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이 분이 《성경》(모세오경)에 예언된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는 순간입니다. 그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하실 일을 지금 그 자리에서 미리 꿰뚫어 보는 은총을 누립니다.

그 ‘꿰뚫어 봄’의 결과는 무엇으로 이어집니까? 그 여인은 사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돌아갔습니다. 완전히 회복된 자신의 영혼을 데리고 말입니다. 이제 그 어떤 상처나 주위의 평가도 여인을 돌려세울 수 없습니다. 여인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수, 즉 영원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여섯 남편’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주시는 ‘완전한 남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동네로 가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신 분(그리스도)을 ‘와서 보라’고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서 봅시다.”가 그 뜻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알아맞힌 분’을 가서 보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는 그렇게 표현되어 있지만 진짜 의미는 자신에게 ‘종말에 일어날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신 분’(그리스도)을 ‘와서 보라’고 전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직접 가서 확인해 보라는 선포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가 그리스도이겠느냐!’는 당당한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유다인들로부터 차별과 경멸을 받던 그 곳, 피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저주받은 이방인의 땅으로 불리던 그곳 사마리아 지역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한 ‘최초의 복음 선포자’로 정오의 햇빛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인의 증언을 듣고 믿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함께 묵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이틀 동안 묵으십니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인 예수님을 받아들여 ‘하나’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말에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이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꿰뚫어 본 ‘한 사람’으로 인해 반목과 분단의 벽이 허물어지고 화해와 구원의 역사가 두 민족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본래 ‘야곱’이라는 한 조상의 ‘후손’, ‘한 형제’임을 가리켜 주는 ‘세겜’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저주의 땅이 기쁨과 축복의 땅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마침내 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면하고 참으로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전례독서>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사람 ‘모세’를 만났습니다. 순종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꿰뚫어 본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이 결국 공동체를, 민족을, 인류를 살려냈습니다. 우리 가정에도, 교회에도, 나라에도 바로 그런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은 민족의 문제로 아파했습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나온다”며 차별과 분열을 조장해 온 예루살렘 성전중심주의, 유다중심주의에 저항하며 불의를 폭로했습니다. 불의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철폐하고, 차별의 아픔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명수’(영원한 생명)를 주기 위해 ‘그리스도’(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지금 사마리아에 와 있음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그 ‘모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다와 사마리아 사이의 반목과 분단의 벽을 허물고, 화해와 하나 됨을 가져온 ‘거룩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우리민족은 올해로 무려 75년이나 분단과 반목의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교회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게 합니다. 분단과 반목이라는 ‘원수의 길’이 아니라 민족을 하나로 회복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라고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우리 안에 상기시키면서 차별과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 분단과 반목을 고착하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여 당당히 일어서라고 지금도 우리를 ‘평화의 일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어서 속히 민족이 하나 되는 길로 나서라고 지금도 우리를 ‘평화의 일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저주받은 것처럼 신음하는 이 땅을 위한 ‘화해의 씨앗’이 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사순 3주간이 시작됩니다. 21대 총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탄핵이전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여전히 우리 사회는 만연한 증오와 대립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 모든 증오와 대립을 끝내는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십자가라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민족이 참으로 살 길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사는 길뿐입니다. 이 진실이 영원한 생명을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우리를 사로잡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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