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4. 사순 16일(토요일)

본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우리가 감히 바랄 수 없는 신비한 일을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진리와 사랑으로 이끌어주시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미가 7:14-15, 18-20
  • 시편 – 103:1-5, 9-12
  • 복음서 – 루가 15:1-3, 11하-32

사순 16입니다. <전례독서>는 이 세상 어디에도 하느님 같이 자애로운 분이 없음을 들려주는 내용입니다. 1독서 《미가》는 ‘자신의 계약에 성실하신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3>도 우리의 죄와 잘못을 저지른 대로 갚지 않으시고 사랑이 그지없으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한결같은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에 잠기는 오늘 하루이기를 소망하면서 말씀 나눔을 시작합니다.

복음이야기는 그 유명한 ‘두 아들을 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전하는 《루가복음》입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문학가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이야기입니다. 읽는 사람들을 끌어당겨 대화에 참여시키고 성찰하게 하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이른 바 ‘고전’(古典)들이 갖는 역사성과 현재성, 특수성과 보편성을 갖춘 그자체로 탁월한 이야기입니다.

‘루가’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을 먼저 들려줍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 루가 15:1-2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따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을 구별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세리들과 죄인들’과는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에 빌붙어 먹고 사는 창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라고 불리던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또 ‘병’을 앓거나 ‘장애’를 갖게 되면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 여기던 시절이기에 ‘장애인’과 ‘병자들’도 함께 할 수 없는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면 그들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하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을 잘 안다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훈계’하십니다. 동시에 가르침을 들으려고 모여든 ‘세리들과 죄인들’을 ‘격려’하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너무나 인상 깊은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들은 우리 내면의 또 다른 나입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작은 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리들과 죄인들’을 상징하는 ‘작은 아들’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죄인의 회개’임을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만의 세계’, ‘자기만의 왕국’을 꿈꿨습니다. 그 세계(왕국)에서는 당연히 ‘자신이 왕’입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려면 아버지의 품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집은 자신을 통제하기만 하는 곳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자기 삶이 훨씬 빛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실현하려면 아버지로 상징되는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깨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온통 자기주장과 이기심과 자기만 옳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세상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만용’을 부렸습니다. 가족보다는 친구가 더 믿을 수 있고 소중하다고 여겼습니다. 크게 한 방 터뜨릴 정말 기가 막힌 청사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실패해도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창조주가 지으신 현실보다 자신의 욕망이 창조한 꿈을 더 믿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러면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아버지’를 떠나갔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기 인생을 살겠다는 선택입니다. 대단한 모험의 시작입니다.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꿈의 실현이 아니라 ‘인생 낭비’였고, ‘자기 상실’, ‘자기 파멸’이었습니다. 대우받던 아들에서 ‘알거지’로, ‘자유인’에서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물입니다. 따라서 그가 ‘돼지우리’에 살게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품위’가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돼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무도 도와줄 이 없는 ‘죽은 인생’, ‘자기를 잃어버린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실패한 인생, 빈털터리 인생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기를 실현하겠다는 욕구는 ‘자기 상실’, ‘자기 파멸’ ‘자기 소외’로 끝났습니다.

어느 날, 이 방탕한 아들은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바닥을 쳤기 때문에 비로소 ‘길’을 찾았습니다. 죄와 어둠의 신비입니다. 그가 겪은 삶의 고난들, 아픔, 슬픔, 고통, 죄, 어둠이 오히려, 아니 ‘드디어’ 그에게 ‘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며 회심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도 ‘방탕한 아들’로 살아왔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제 인생의 귀찮은 ‘충고자’로 여겼습니다. 교만하고, 무례하며, 어리석게 살아왔습니다. 가족이나 공동체, 윤리나 사회규범, 십계명’이나 ‘주의기도’ 같은 것들을 ‘장애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시간과 재능을 쓸데없는 일에 실컷 낭비하며 살아왔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싫증난다며 남의 가르침이나 사상에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흉물로 변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은총의 빛’을 받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온전히 믿어졌습니다. 돌아온 저를 아버지는 안아주셨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사치스러울 정도로 ‘용서’하며, ‘넘쳐흐를’ 정도로 풍부한 ‘사랑’을 가졌습니다. 만일 이 비유를 흔히 말하듯이 ‘탕자의 비유’라 부른다면, 이 아버지야말로 두 아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사랑’과 ‘관대함’을 마구뿌리는 ‘방탕한’ 아버지입니다. 게다가 언뜻 드는 생각으로는 자식 양육에도 실패한 별로 권위도 없어 보이는 아버지입니다.

물론 이 ‘아버지’는 세상의 어떤 ‘기준’이나 ‘한계’마저도 넘어서서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문학적으로 설정된 인물입니다. 사실 이 비유의 주인공도 두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기에 ‘탕자의 비유’라든지 ‘잃었던 아들’이라든지 하는 제목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방탕한’ 아버지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면, ‘무한히 자비로운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더욱이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세리들과 죄인들’ 뿐 아니라 우리 같은 죄인도 품으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저도 ‘아버지’로 살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품 안에 있었을 때는 매일 밤 침대를 찾아 이마에 손을 얹고 축복하며 잘 자라기를 기도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다른 아버지들처럼 제가 가진 것들과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무조건적으로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자라는 동안 많은 웃음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자식으로 만나 함께 해 온 세월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마음의 책장에 자리합니다.

지금도 자식들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잘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아버지입니다. 성인이 된 자녀들이지만, 귀가가 늦을 때면 밤을 지새우며 애간장을 태우는 아버지입니다. 이러저런 잔소리를 해 가며 한 집에 살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규칙을 말해 보지만, 불편해 하는 표정이 읽혀질 때는 섭섭함을 느끼는 아버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아버지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무능한 아버지입니다. 그런 제 자신이 초라하기만 합니다.

‘큰 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느님의 뜻(율법)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설정된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옳음’을 주장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을 만큼 스스로를 ‘성실’하고 ‘완전’하게 살아 온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모범생’으로 ‘절제된 인생’을 살아왔다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며 인생을 허비해 왔습니다. ‘불안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아버지 다음 가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계산’하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아버지의 ‘인정 욕구’에 목말라 하며 ‘종’처럼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것이 그가 아버지께 충성과 성실을 보인 이유입니다. 그는 손과 발로 아버지를 위해 일했지만 정작 ‘마음’으로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몸만 있지 마음은 있지 않은 껍데기 인생입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지위’와 ‘인정 욕구’와 ‘자기 옳음’을 위해 살아온 행복하지 않은 인생입니다.

더욱이 그는 동생과 자기 삶을 ‘비교’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동생이 잘못된 길을 가는 데도 바로 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동생이 무슨 잘못을 하며 사는 지 조사까지(30절) 할 정도였지만 정작 ‘형’이 되어주지는 않았습니다. 가혹하게 동생을 심판하고 비난만 할 줄 알았지 감싸 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기만 아는 인생이기는 그 역시 동생 못 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받은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기보다 부정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온 인생입니다. 동생이 집 나간 죄인이라면 그는 집 안에 머물러 있던 죄인입니다. 인생의 길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저도 ‘큰 아들’로 살아왔습니다. ‘자기 옳음’과 ‘인정 욕구’에 목말라 하며 살아왔습니다. 사랑을 행할 생각은 않고 남을 심판하고, 가혹하게 비난만 하며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제들과 ‘비교’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마음을 다해 신자들을 섬기기보다 손과 발로만 건성으로 섬길 때도 많았습니다. 자기 소명을 버리고 세상으로 돈 벌러 나가는 사람들을 몰래 부러워한 적도 있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인 마음과 영혼을 ‘불안감’에 저항하느라 허비했습니다. 사랑이나 구원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기보다는 알량한 ‘지위’와 ‘자리’를 두고 시기 질투하며 다투기도 했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기보다 불평과 원망, 부정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 온 적도 많았습니다. 사제여야 함에도 사제인 척 하며 살아왔습니다. 별로 우애하거나 더불어 살지 않아 왔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지난날의(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제 모습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이 세상 어디에도 하느님 같이 자애로운 분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인생은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빚지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자애로우심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에 용기를 내어 저의 부끄러운 고백을 나누었습니다. 오만하고 방탕한 작은 아들로, 무능한 아버지로, 불안한 큰 아들로 살아온 저의 양심을 성찰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자애에 이 몸을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제가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이든, 아니면 여전히 집에서 살고 있었던 큰 아들이든 상관없이 저는 오늘도 아버지께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려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던 작은 아들의 결과는 ‘자기 상실’이었습니다. 인생의 바닥을 치고, 어둠의 한 가운데를 걷다가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작은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속했음’을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베푸는 성대한 잔치 속에서 자신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리가 아버지 집임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이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에도,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모두 것이 은총임을 온전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처럼 하느님을 떠나 죽었던 우리, 자기를 상실한 우리였지만 그리스도 덕택에 다시 살아나고, 다시 찾아진 자신임을 발견하러 가는 거룩한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아버지의 은총임을 발견하러 가는 거룩한 여정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성대한 기쁨의 잔치’, 즉 부활의 잔치가 벌어질 그 집으로 가는 여정 위에 있습니다. 부디 아버지의 집에서 벌어질 그 잔치로 가는 여정에 더 많은 형제자매들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떠나간 사람은 자애로우신 아버지께로 돌아와야만 하고, 집안에 있는 사람은 마음과 영혼이 자애로우신 아버지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제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저를 당신의 영원한 집에 살도록 초대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임재 안에서 숨쉬고,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오늘도 이 집에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저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하는 하루로 살겠습니다. 자애로우신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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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백: 2021. 3. 6. 사순16일(토요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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