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3. 사순 15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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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37:3-4,12-13,18-28
  • 시편 – 105:16-22
  • 복음서 – 마태 21:33-43,45-46

사순 15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시련’을 겪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그 ‘시련’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시련’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할까요? 오늘 <전례독서>는 ‘하느님의 섭리의 눈으로 보라’는 초대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구약의 인물 중 수난 받는 예수님의 ‘예형’이라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은 유난히 요셉을 ‘편애’하였습니다. 그 유별난 사랑 때문에 요셉은 다른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제들을 찾아갑니다. 먼 길을 찾아왔건만 평소 요셉을 미워한 형들은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그들은 요셉을 잡아 구덩이에 처넣었습니다. 그들이 식사하고 있는 사이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이십 냥’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버려진 돌’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그들과 함께 이집트로 끌려갑니다. 끝 모를 ‘시련의 시작’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5>은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찬미합니다. 요셉이 당한 이 모든 ‘시련’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먼저 ‘섭리’하신 일 중에 있었다는 감사입니다. 주님의 ‘구원 섭리’는 ‘인간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는 찬미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노예로 이집트에 팔려온 요셉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주인집의 신망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거기서도 주인 아내의 모함을 받아 억울한 옥살이를 겪어야 했습니다. 시련의 연속입니다. 놀랍게도 그 옥살이 중에 요셉은 주님께서 쓰실만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구원의 때가 이르자 주님께서는 요셉에게 ‘지혜’를 주시어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게 하십니다. 파라오는 요셉을 풀어주고 이집트 온 나라 일을 주관하는 총리로 세웁니다. 마침내 요셉은 ‘시련의 터널’을 통과 했습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터널을 빠져 나왔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자 주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십니다. 결국 그 ‘기근’은 주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어릴 적 꿈을 성취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요셉은 천하만국 백성이 굶어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양식’을 공급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영적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예형’입니다. 이스라엘(야곱의 가문)은 전부 이집트로 내려가서 그 땅에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성취하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창세 15:13-14; 50:24).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계약 성취의 방법’이었습니다. 시인은 이처럼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먼저 ‘섭리’해 오신 주님께 감사의 찬미를 바칩니다.

우리도 시련을 당할 때 그 시련 너머의 보다 큰 그림, 즉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 ‘희망의 눈’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시련’ 중에 있을 때 가장 힘든 일은 도무지 그 ‘고난의 의미’(이유)를 모를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겪는 ‘시련의 의미’를 알게 되면 어떻습니까? 그 시련이 자신을 더 큰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한 주님의 방법’이라면 어떨까요? 더욱이 그 시련이 ‘주님의 구원 섭리’를 성취해 가시기 위해 ‘나’를 ‘요셉’처럼 택하신 것이라면 어떨까요? 아마 그 시련을 마주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시련의 터널’ 속에 있을 때 우리가 그런 눈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전례독서를 깊이 묵상해야 할 이유입니다. 요셉도 종국에는 이렇게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 창세 45:5,8a

복음이야기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전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곧 다가올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비유의 속뜻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어떤 지주) 이스라엘(포도원)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지도자들(소작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도조)하기를 요구하시며 거듭해서 예언자(종)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를 배척하고 박해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예수)까지 보냈지만 그들은 아들까지 죽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묵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행실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한 밤 중 제단에 불을 밝히고 고요히 십자가를 바라보며 비유를 묵상해 봅니다. 분명 예수님은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예상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수난이나 죽음이 아니라 ‘다른 구원의 방법’도 있으셨을 텐데 왜 굳이 그 방법이어야 했습니까? 대답은 예수님이 비유 끝에 하신 말씀에 등장합니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 마태 21:42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편 118:22)는 의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본래 《시편》 <118편>은 ‘과월절 축제’에 부르는 찬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오늘 1독서에서 들었듯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는 찬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118편>을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구원이 자신들은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던 대사제(성전을 지키는 자들)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들려주십니다. 실제로 1독서와 시편의 중심인물인 ‘요셉’이 그 증인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버려진 돌처럼’ 불쌍한 인생이었지만, 나중에는 민족을 구원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는 일도 이 《시편》의 성취여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의 ‘비극적 죽음’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구원의 방법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이루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구원의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현재 통과하고 있는 ‘시련’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하느님의 섭리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요셉이 되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시련은 희망으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로마 5:4).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찬미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저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을 베푸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저희의 삶이 주님의 구원 섭리 속에 있음을 감사하나이다. 저희를 이토록 귀하게 여겨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저희는 어떤 시련 속에 있든지 주님을 신뢰하나이다. 시련은 희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에 저희 몸과 마음을 의탁하나이다. 주님의 뜻대로 빚어가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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