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11. 사순 13일(수요일)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18:18-20
  • 시편 – 31:4, 5, 14-18
  • 복음서 – 마태 20:17-28

사순 13입니다. 우리는 ‘삶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은 ‘섬김’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김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인물들은 ‘특별한 섬김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성인’(聖人)은 하나 같이 ‘특별한 섬김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 ‘특별한 섬김’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경지는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바친’ 경우입니다. 사순절 여정을 이미 깊이 들어 온 우리는 자기 수행의 정도를 가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애절한 ‘탄원’으로 묶여 있습니다. 1독서 《예레미야》《시편》으로 노래한 <31>에는 그 애절한 탄원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면 복음이야기에는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자기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데 어찌 탄원의 마음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안으로 삼켜지고 있을 뿐입니다. 종국에는 삼켜진 그 아픔마저 승화시키는 위대한 사랑을 마주합니다.

예레미야의 별명은 ‘눈물의 예언자’, ‘고난의 예언자’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멸망의 길로 치닫던 민족의 운명을 돌리고자 온 몸을 던져 섬긴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시민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향사람들마저 ‘하느님의 심판’을 외치는 그를 ‘매국노’ 취급하며 박해했습니다.

본문이 이것을 전해 줍니다. 자신은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시민들이 살 길을 외쳤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함정을 팠습니다. 자신은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지만 ‘배은망덕’이라는 탄원입니다. 민족을 섬기는 사명을 감당하다 조롱과 핍박과 채찍질과 투옥과 죽음의 처지로 내몰린 그의 생애는 구약의 예언자들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많이 포개집니다. 예레미야는 왕들과 귀족들, ‘하나니야’로 대변되는 거짓 예언자로부터(예레 27:9-10,14-17; 28:1-11), 예수님은 오늘 복음이야기가 전하듯이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마태 20:18).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도 묵상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나, 자기가 하고픈 일을 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가라는 곳으로 갔고, 하느님이 전하라는 말씀을 살아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라는 ‘궁극적 사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때로는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예레미야처럼 오해나 모함, 조롱이나 핍박이라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거기서 포기해 버립니다. 하지만 꿋꿋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그런 고난으로부터 눈을 돌려 자신을 부르신 ‘위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고난은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게 하는 ‘믿음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주님이 보내시는 자리마다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 사명’을 향해 꿋꿋이 걸어가기를 축복합니다.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와 ‘섬김의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가고 있는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체포와 수난,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길 끝에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일에 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정치적 메시아’가 되시면, 자신들이 그 왕국의 한 자리씩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늘나라’(하느님 나라)를 단지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제자들의 ‘몰이해’(沒理解)입니다.

그 때 한 여인이 예수께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엎드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였습니다(마태 27:56; 마르 15:40).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그 부인은 자기 아들들의 ‘자리’를 부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 마태 20:21

최측근이 되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열망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아들들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청탁입니다. 다소 당황하신 예수님은 어머니 곁에 서 있는 두 형제들에게 되물으십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 마태 20:22a

사실 ‘자리’ 때문이라면 그들은(어머니) 처음부터 잘못 간청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본래부터 자리는 예수님이 아니라 아버지가 ‘결정’(決定)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어머니)은 ‘청’(請)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늘나라’를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던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난예고’는 눈곱만큼도 알아들을 생각을 안 하고 단지 ‘자신들의 영광’만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이 아니라 ‘희생’의 관점에서 그들(어머니)의 ‘청’(請)을 생각해 보도록 먼저 이끄십니다.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 마태 20:22b

‘마시게 될 잔’은 일종의 ‘은유’로 문학적 표현입니다. 전후 맥락을 따져야하지만 《성경》에서 ‘잔’은 그 사람에게 닥칠 ‘운명’이나 ‘상황’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잔을 마신다’는 문학적 표현은 ‘하느님의 진노’, ‘고난의 형벌’(수치, 능욕)을 가리킵니다(이사 51:17; 예레 25:15-16; 에제 23:31; 하바 2:16; 마르 14:36).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당하셔야 할 ‘십자가 수난과 죽음’입니다. 그 운명에 동참할 수 있느냐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다시 한 번 문학적 표현으로 예고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그들은 ‘마시게 될 잔’을 ‘각오를 다짐하라’는 정도의 말씀으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지 ‘의리’(義理)를 물으신 것으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 ‘잔’이 ‘십자가 수난’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확신에 찬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 요한 20:23a

실제로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고백대로 각각 ‘잔’을 마셨습니다. AD 44년 ‘헤로데 아그립바 1세’가 팔레스틴을 다스릴 때 ‘야고보’는 순교자 명단에 오르는 ‘첫 번째 사도’가 되었습니다(사도 12:1-2). ‘사도 요한’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지는 고난을 당했지만, 살아남은 것으로 교회사는 전해 줍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내 잔’을 마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그 자리는 자신이 ‘결정’(決定)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미리 ‘정’(定)해 놓으셨다고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니라 ‘자리’를 미리 ‘정’(定)하시는 ‘아버지께’ 먼저 구해야 했습니다.

…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 마태 20:23b

약간의 섭섭함이 밀려옵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돈주머니를 관리하던 ‘유다’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예수님이 점찍어 놓은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이 ‘십자가’이고, 좌우의 자리를 차지할 두 사람이 ‘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기에 좌우의 자리를 원한다면 그들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한다는 이 끔찍한 진실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탐하는 그들에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직 그 자리는 ‘공석’(空席)인 것처럼 들렸습니다. 더욱이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여전히 예수님은 자신들의 ‘의리’를 굳게 신뢰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만면 가득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이 생각하던 그런 뜻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일종의 ‘보장’이라도 받은 냥 서로 눈빛을 교환했습니다.

어느 새 그들 곁에 다가와 ‘자리에 앉는 특권’에 대해 듣고 있던 열 제자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었음에도 말입니다. 본래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향이 강하고, 전체가 아니라 남의 말을 일부만 듣고 판단하면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아마 그들은 콧김을 내뿜고 두 형제를 쏘아보며 ‘여우같은 놈들!’이라고 눈을 부라렸을 것입니다. 수제자를 자처하던 ‘베드로’는 선수를 뺏겼다고, 뒤통수를 맞았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것입니다. 다 똑같은 수준입니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야심을 들켰지만, 질투와 분노, 경쟁심의 노예자리에서 빠져나올 기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누구 하나 스승의 마음을 고요히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자리’와 ‘권력’에 대한 ‘야심’, ‘질투와 분노’, ‘경쟁심’의 불길에 휩싸인 ‘그들을’ 예수님은 가까이 불러들이십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불어들이신 ‘그들’이 단지 ‘제자들’이기만 할까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사실 우리는 너무나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갑니다. 이 경쟁의 이유를 ‘사회 경제적 차원’에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민주시민사회에서는 ‘경쟁’을 통한 선발방식을 채택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선발방식은 주로 ‘공개 시험’이지만 때로는 공개 시험보다 외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인맥’, ‘학연’, ‘혈연’ 등과 같은 ‘특권’과 ‘반칙’입니다. 그러나 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합격했다 하더라도 새로운 경쟁이 다시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경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치열합니다. 더 좁아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미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정말이지 치열하고 끊임없는 경쟁 속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이런 사회상은 자라나는 세대들의 정신과 태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남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어떤 강박에라도 사로잡힌 듯 1등이 되려고 애씁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강박’을 상황, 즉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회 경제적 원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성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어떨까요? 우리가 그런 강박에 사로잡히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경쟁의 뿌리에는 ‘빈약한 자아상’(자기 결핍)과 미래에 대한 ‘자기 불안’이 자리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렇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빈약한 자아상’과 미래에 대한 ‘자기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무엇을 잘 해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자신이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어려서부터 인정받아 본 경험이 없거나 적습니다.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스스로를 사랑스럽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간혹 무엇인가를 해내야 부모로부터 혹은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사랑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가치 있다는 점을, 사랑받을 만 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인정받기 위해 울부짖고 있습니다.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경쟁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의 눈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을 향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비난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깥세상을 향해 인정, 존중, 사랑, 수용을 절실히 외치고 있습니다. 그 외침은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자기 내면의 고인 진정한 눈물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깥으로부터 오는 인정, 존중, 사랑, 수용에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그것들이 주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관계에서 그 4가지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존중’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사랑’받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이대로 ‘수용’되고 싶습니다. 누구로부터요? ‘타인’으로부터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권을 타인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갑니다. 모두가 ‘빈약한 자아상’(자기 결핍)과 미래에 대한 ‘자기 불안’속에 살아가는 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수용’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저라면 차라리 그런 ‘구걸’을 그만 두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복음’은 하느님이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인정’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시며, 이 모습 이대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는 그대로 온전히 ‘수용’하셨다는 소식입니다.

Turkey, 2002, 사진 박노해 https://www.nanum.com/site/poet_walk/943607

우리가 이 ‘복음’을 온전히 ‘믿는다’면, 다시 말해 이 ‘복음’이 ‘진실임’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타인에게 인정을, 존중을, 사랑을, 수용을 구걸하러 다니는 대신 복음을 쫓아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과 화해하고, 다른 사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복음을 믿을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지금까지 느껴온 내 안의 모든 ‘불안’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런 자신에 대해 잠시라도 웃을 수 있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튼 ‘자리’와 ‘권력’에 대한 ‘야심’, ‘질투와 분노’, ‘경쟁심’의 불길에 휩싸인 제자들을 예수님은 가까이 불러들이십니다. 그들에게 ‘참된 위대함’이 무엇인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이 무엇인지 들려주실 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권력가들의 구린내 나는 속내를 꿰뚫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 마태 20:25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의 통치자와 권력가들은 결코 ‘백성’을 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이익’을 위해, ‘자기가족’의 특권을 위해 가진 힘을 남용하기까지 합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생활을 꿈꿨습니다. 예수님은 그 따위 ‘허망한 꿈’에서 ‘어서 깨어나라’고 이렇게 ‘호통’을 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 마태 20:26a

‘자기’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라는 질책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고요히 명령하십니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 마태 20:26b-27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일에 힘쓸 것을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다시 말해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자기 한 몸, 자기가족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참된 위대함’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 마태 20:26b-27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람들, 즉 교회로 모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배욕’과 ‘권력욕’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관계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자기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가진 사회적 지위, 돈, 인기가 ‘지도력’의 전제조건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섬김과 종으로서의 삶’이야말로 교회에 필요한 지도력의 전제조건이라고 교훈하신 셈입니다.

국가도 그렇습니다. 이제 한 달 후면 총선이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지배욕과 권력욕에 붙잡힌 욕심덩어리들을 국회의원으로 세울지, 아니면 겸손한 섬김의 종을 세울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 마음의 왕국도 그렇습니다. 지배욕과 권력욕에 불타는 왕국으로 만들지, 아니면 겸손한 섬김이 강물처럼 흐르는 왕국을 만들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사역은 그런 ‘겸손한 섬김’과 ‘종인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못을 박으십니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 마태 20:28a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사명’과 ‘목적’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놀랍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야기는 우리의 ‘섬김’ 이전에 어떤 일이 ‘먼저’ 있었는지를 명백히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섬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섬겨주셨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섬길만한 어떤 자격도 없고, 섬길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할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을 섬겨 무슨 ‘공로’라도 세울 수 있는 냥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무능한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섬김을 받고 있는 자신을 ‘자각’(自覺)하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다음 우리는 자신이 받은 섬김을 예수님께 되갚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욱 공고히 못을 박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 마태 20:28b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사명과 목적을 ‘한 번 더’ 명백히 하십니다. ‘몸값’(대속)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목적을 한 단어로 요약한 결정적 은유이며, 예수님의 ‘섬김’을 드러내주는 완전한 정의입니다.

오늘날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고대에는 ‘전쟁 포로나 노예’의 생명을 그 ‘몸값’에 해당하는 돈을 ‘대신 지불’해줌으로써 ‘구원’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몸값’은 한 존재에게 있어서 ‘새로운 생명의 기회’이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명을 수행하시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길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나는 요즘 무엇을 주님께 청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과연 그 청을 기뻐 반기실까요? 아버지의 뜻인지 아니면 내 뜻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배욕과 권력욕에 빠진 탐욕스런 세상 사람들과 달리 주님을 닮아 ‘사랑의 섬김’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정의로워지고, 평화로워집니다. 그들은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봉사와 희생의 삶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그런 ‘사랑의 섬김’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우리 나름의 ‘몸값 지불’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우리의 ‘섬김’ 이전에 어떤 일이 먼저 있었는지를 명백히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시기까지 먼저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의 섬김’을 받은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성찬례’는 그 확인입니다. 우리는 성찬례가 ‘지배욕과 권력욕’, ‘경쟁심과 분노’에 끌려 다니는 우리 ‘마음’을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섬김의 왕국’으로 변화시켜 간다고 믿습니다. 또 일상의 ‘기도수행’이 ‘빈약한 자아상과 자기 불안’에 떠는 우리 ‘마음’을 ‘사랑과 평화의 왕국’으로 변화시켜 간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섬김의 길을 가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사순절의 여정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야 할 변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섬김’을 받은 사람답게 겸손히 이웃을 향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의 섬김을 세상으로 가져갑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섬김을 ‘기억’하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십니다(히브 6:10). 오늘도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것입니까? 부디 성령께서 이 글을 읽는 교우들을 ‘섬김의 주님을 닮은 사랑의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나라를 위한 ‘사랑의 종’으로 써 주소서. 섬김 받기보다 섬기게 해 주소서. 인색하지 않고 넉넉히 나누게 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기쁘게 종으로 살 수 있는 사랑이 제 마음에서 터져 나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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