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8. 사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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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사순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의 의로 얻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새로 나야 만이 하느님의 나라(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고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영생에 이르는 ‘새로 남’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성령’만이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세례를 받고, 영생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났습니다. 이렇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새로 남’은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새로 난’ 사람답게 더욱 ‘믿음’과 ‘사랑’으로 살면서 아직도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자애로우신 하느님, 지극한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보살펴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어, 하느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2:1-4상
  • 시편 – 121
  • 2독서 – 로마 4:1-5,13-17
  • 복음서 – 요한 3:1-17

사순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의 의로 얻는 선물’입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며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창세 12:4b).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를 약속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떠나자’고 부르십니다. 하나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이고(창세 12:2), 다른 하나는 좀 더 나중에 나오는데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창세 12:7).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그와 항상 ‘동행’해 주시고(창세 12:3a), 그를 ‘세상의 상속자’(창세 12:3b; 로마 4:13)로 세우신다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본문에서 주의할 점은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하느님의 약속’(은총의 선택)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믿음의 여정’을 출발하였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출발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자기 삶의 ‘보장’과 ‘울타리’였던 모든 것, 즉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오직 하느님만 믿고 나아가는 놀라운 결단이었습니다. 물론 조카 롯을 데려가는 부분적 순종인 면은 있습니다. 그 믿음의 결단이 훗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로 들어가는 모본이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덕’을 입고 있습니다(창세 12:3b).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반응’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사순절 여정을 지나는 우리도 ‘하느님의 약속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떠나야할 것’들을 온전히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약속’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자꾸 머뭇거린다면 ‘하느님과의 동행’도 ‘영원한 생명의 상속’도 차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를 은총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영글어 가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찬미’인 <121편>입니다. ‘늘’(언제나, 항상) 지키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빛납니다. ‘당신과 함께 떠나자’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의 동행’을 보는 듯합니다. 이 <121편>을 윤색(潤色)하여 임성숙님이 가사를 쓰고, 서울대성당 음악 감독인 이건용 교우가 작곡한 <성가> 243장은 성공회 신자들이 애창하는 찬미입니다.

어느 날 시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룩한 곳, 영혼의 고향이라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떠났습니다. 관광이 아닌 모든 순례가 그렇듯이 인생에서 들어야할 ‘한 말씀’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따가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과 강도들의 위협이 있는 골짜기를 지납니다. 낮과 밤의 교차 속에 드디어 저 멀리 목적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성전산’(시온산)의 ‘위용’(威容)과 ‘배경’이 되는 하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특히 그 성전산의 ‘견고함’과 ‘든든함’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견고한 곳에 세우시고,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시며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그들 역사에서 1독서 《창세기》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한없는 은총’을 당신의 백성에게 ‘늘’(항상) 베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성전산’이 견고히 서 있는 그 땅을 그들이 차지한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선택과 은총’ 덕택입니다.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은총으로) 선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의 신실하심’(끈질김) 덕택입니다.

그런 생각을 길어 올리자 지쳤던 몸에 갑자기 생기가 돕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예인 자신에게도 ‘늘’(항상) 그와 같은 ‘선택과 은총’으로 ‘동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순례 길도 목자가 되시어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구름기둥’을 보내시어 광야의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주신 것처럼, 차가운 ‘달빛’의 미신적인 두려움에서 ‘불기둥’으로 보호하신 것처럼, 자신과 ‘늘’(항상) 동행해 주셨습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게 ‘늘’(항상) 보호하셨고, 어떤 재난도 그를 덮치지 못하도록 ‘늘’(항상) 지켜주셨습니다. 그의 피가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찬미가 저절로 샘솟습니다.

시인은 성전 경내에 들어가 경신례를 바칩니다. 가까이서 보니 성전을 둘러싼 그 성전산의 ‘견고함’과 ‘든든함’이 더욱 피부로 와 닿습니다. 덧없는 인간 생명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성전산’이 그럴 수 있다면 그 산의 기초를 놓으신 하느님의 견고함과 든든함은 참으로 영원할 것입니다. 경신례를 마칠 무렵 그는 드디어 순례길 동안 ‘끈질기게’ 바쳐왔던 기도의 응답, 즉 ‘한 말씀’을 받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어디에 있든지 ‘늘’(항상) 하느님의 보호와 도우심 속에 있는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응답입니다. 이것이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궁극적 질문’과 함께 순례 여정에 올랐던 그가 깨우친 ‘응답’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그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깨우침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마음, 이 믿음으로 그가 살아가는 어디든 하느님이 ‘늘’(항상) 동행하시고 현존하시는 ‘성지’임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발견한 이 ‘정체성’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계약의 완성자’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참 성전’이십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 즉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순례자인 그가 응답받은 ‘한 말씀’은 성령을 모신 ‘성전’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늘’(항상)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찬미를 바칩시다.

2독서 《로마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가진 ‘믿음’의 위대함을 증언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길’과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길’이 ‘믿음’이라고 가르칩니다. 두 단락이 배정되었습니다.

전반부(1-5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중요 근거로 제시하는 본문입니다(갈라 2:16; 3:6; 히브 11:1-4,6,8; 야고 2:18-26). 바울로 당시 유대교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킨 그 공로(행실)로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이 되었다는 전승을 고수했습니다. 비록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지만 아브라함이 율법 전체를 직관적으로 행하였고, 행실에 있어서 완벽했다고 그 이전의 랍비들이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행실)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의 행실로 의롭게 되었다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인정’해 주셨습니까? 그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창세 15:6). 분명 아브라함이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의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 ‘믿음’을 보시고 그렇게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죄인’마저도 ‘올바른 사람’(무죄선언)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는 그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후반부(13-17절)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그 약속이 누구에게 상속되는지 교훈합니다. 먼저 바울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약속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 로마 4:13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입니다. 분명 그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약속’ 역시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일어났고, ‘믿음의 원칙’에 근거한다는 교훈입니다. 이어서 바울로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우리를 ‘세상의 상속자’가 되는 ‘약속’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 로마 4:14-15

 

‘율법’이 우리를 그 ‘약속’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 되기는커녕 우리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가져다주는 ‘매개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우리가 ‘율법’을 하느님께 ‘의롭다 함’을 얻는 ‘원칙’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더욱이 모든 ‘죄의 근원’(뿌리)은 율법을 어기는 차원 이전에 ‘하느님을 향한 신뢰 관계’(사랑의 관계)를 깨는 데 있습니다.

‘사순 1주일’에 낭독한 ‘아담’과 ‘하와’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는 ‘불순종’ 전에 먼저 하느님을 향한(또는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신뢰’(사랑)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창조세계를 돌보아야 할 ‘인간창조의 목적’(창세 1:28)을 ‘부인’(否認)했습니다.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창세 2:16-17)을 ‘부인’(否認)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자신들을 향한) 신뢰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깨뜨린 이래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율법을 지키는 대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일, 즉 ‘믿음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대신 율법을 지키는 일에 몰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구원 계획을 거역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세상의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원리에 의해 ‘세상의 상속자’가 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이 성취됩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으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약속의 상속자’가 됩니다. 세례성사한 우리가 바로 그런 ‘믿음의 은총’을 받은 축복의 인생입니다.

복음이야기인 《요한복음》에만 전해지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는 말씀을 통해 요즘 우리가 지나는 ‘사순절이’ 본래 어떤 교육목적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은 예비신자들을 위한 ‘세례준비 기간’에서 유래합니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설명 드리겠습니다.

한 옛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홍해를 건너 ‘자유인’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과월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이 ‘오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의 땅’에 정착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경험한 ‘종살이’와 ‘출애굽’, ‘홍해를 건넘’과 ‘광야 생활’, ‘가나안 정착’ 등은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본보기’입니다(1고린 10:6,11).

 

우리는 지금 사순절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예비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기간에서 유래합니다. 예비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은총의 사건들’을 사순절 동안 집중적으로 배웁니다. 먼저 그들은 ‘인류’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음을 똑똑히 ‘인식’해야 합니다(창세 2:15-17). 하느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세례의 물’을 적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이렇게 ‘해방’과 ‘자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연 ‘부활절’에 ‘세례성사 할 예비신자들을 준비’시키려는 ‘교육목적’이 사순절에 담겨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에 주일마다 낭독하는 <전례독서>도 이 목적을 반영합니다. 우선 예비신자들은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의 처지와 유혹을 이기시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증명하신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 배웁니다. 이것이 ‘사순 1주일’ <전례독서>에 나타나 있습니다. 사순 2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믿음의 위대함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나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축복을 확신 받습니다. 더욱이 ‘십자가 사건’이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인지 보다 직접적으로 배웁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합니다. 높이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치유되었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들은 누구나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런 교육의 목적으로 오늘 <전례독서>도 채택되었습니다. 물론 예비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신자로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숙고하게 하는 <전례독서>입니다.

앞으로 남은 ‘사순 여정’ 동안 예비신자들이 <전례독서>를 통해 교육받는 내용을 <복음서>를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사순 3주일, 예비 신자들은 예수님이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구세주이심과 하느님을 예배하는 법에 대해 배웁니다. 사순 4주일, 예비 신자들은 예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 신앙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일의 소중함을 배웁니다. 사순 5주일, 예비 신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영원한 부활’의 소망으로 초대됩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복음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우리 귀에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이며, 신자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새로 태어남’과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표현은 ‘문자’를 넘어서는 ‘은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적 담론’(談論)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유대교 지도자인 바리사이파 사람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을 기록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만남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간에 발생한 신학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이런 갈등은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90-100년경 유대교인과 그리스도교인이 섞여 살던 대부분의 도시에서 절정에 달했을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된 후(주후 70년) 유대교는 대위기에 봉착합니다. 유대 땅에 대한 로마의 관용 노선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존재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고 산헤드린도 폐지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열혈당원’들도 모두 ‘마사다’에서 전멸 당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파괴 후 주로 ‘얌니아’(현재의 지명은 야브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위치)라는 도시로 이주 합니다. 거기서 율법 연구만 천착하는 조건으로 일종의 종교 활동인 유대문화 연구소(랍비 학교)의 설립을 허가받습니다. 이제 유대교 당파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기존의 전승 자료들을 검토하여 ‘유대교’를 ‘재건’해야 합니다. 그들은 성지 순례와 희생 제사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과정을 거치기 시작합니다. 즉 오랜 동안 유대교 삶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사라진 성전을 대신할 ‘구심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가르침과 실천 기준에 순응하지 않는 집단들을 구별해 ‘추방’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가장 먼저 표적이 된 대상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심혈을 기울인 일은 ‘유대교 정경 선포’입니다. 주후 90년 바리사이파는 로마제국의 허락을 받고 유대교 재건을 위한 ‘얌니아회의’를 개최합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성경(그리스도교 입장에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사용하던 70인역(기원전 250-117년 사이에 번역) 대신에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구분하는 24권, 그리스도교는 이를 70인역에 따라 39권으로 구분합니다)만을 새로 시작되는 유대교의 ‘정경’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그때 정경을 확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때 ‘얌니아회의’에서 정경화 작업이 결정됐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947년 ‘사해(쿰란) 사본’(기원전 250 – 주후 70년 사이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기존의 주후 90년보다 100년도 더 이전에 이미 구약이 정경화 되어 있었다는 징후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70인역인 ‘집회서’ 머리말에도 구약을 ‘율법’(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과 ‘예언서’(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 열왕기하,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12 ‘작은예언서’)와 ‘성문서’(시편, 욥기, 잠언, 아가서,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델, 다니엘, 에즈라, 느헤미야, 역대기)로 나누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얌니아 지역에서 소집된 유대교 공의회가 경전 정경화 작업을 위한 모임이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얌니아회의를 통해 ‘성전’(聖殿)이 아닌 ‘정경’(正經)이 유대인 삶의 중심이 됩니다. 각 지역의 ‘회당’(會堂)을 통해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바리사이파 주도의 유대교 시대가 열렸습니다. 한마디로 정경과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시대가 열려서 오늘에 이릅니다.

더욱이 이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저주문’이 담긴 회당 기도문을 유대인들이 암송하도록 결정합니다. “나자렛파와 이단들은 순간에 망할지어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워 의인과 함께 섞이지 말게 하소서.”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을 파문하고 단절한 사건입니다. 이 모든 일은 재건(再建) 유대교를 장악한 바리사이파가 주도한 일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과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더 이상 유대인 중심의 회당에 참여할 수 없었고, 미움과 배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리사이파 주도의 재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갈등과 대립, 회당에서 내쫓긴 그리스도인의 복잡한 감정이 <복음서>에 많이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번번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충돌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서도 바리사이파(율법학자)를 부정적으로 지적하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옵니다. 이미 적대 관계로 돌아섰기에 굳이 긍정적으로 묘사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던 교회공동체에게 요한은 유대교를 넘어서는 ‘그리스도교의 우월성’(하느님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하느님이 예수와 함께 계시다)을 복음이야기 곳곳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가나 혼인잔치의 표징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바로 그 역할을 하는 본문입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해를 가지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 중에 니고데모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랍비’였고, ‘부자’였으며, 영향력 있는 ‘유대교 지도자’(유대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의 의원)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대표적인 유대인이며, 우리시대 말로 하면 잘 나가는 변호사 출신의 국회의원인 셈입니다. 하지만 최근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름 하여 ‘인생의 궁극적 질문’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을 실존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이고,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나라와 메시아의 도래’입니다. 이 질문의 해답을 찾아서 그는 당시 좀 ‘특별한 랍비’로 보이는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사실은 자신 말고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몇 명 더 있기는 했습니다. 드디어 연락이 왔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사람들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밤’은 요한이 사용한 문학적 장치이상입니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까지 니고데모가 겪고 있던 내적 갈등과 어둠, 무뎌진 영적 감수성과 영혼의 밤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그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위에 따라오는 사람은 없는지 한참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유명한 랍비’였고, 영향력 있는 ‘유대교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슴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왔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등경 위에 밝혀둔 등잔불보다 더 ‘밝은 주님’이 이미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곁을 내주며 앉으라고 하자 그의 가슴은 더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 요한 3:2

 

그는 예수님을 자기와 같은 ‘랍비’(선생님)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율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암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실에 적용해 가르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이를 뜻합니다. 게다가 그는 ‘기적’(표징)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런 ‘기적들을 행하는 힘’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께는 다른 ‘랍비’(선생님)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그가 자신이 온 목적을 밝히기도 전인데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 요한 3:3

 

이 말씀은 니고데모 뿐 아니라 오늘의 ‘영적 담론’(談論)을 대면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한 선포입니다. 과연 그 말씀이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에 대한 답이었을까요? 예수께서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하신 말씀일까요? 그가 추구해 온 궁극적 질문과 관련 있을까요? 정말 그랬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바로 앞 단락은 이렇게 끝납니다.

누구에 대해서도 사람의 말을 들어보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 속 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다. – 요한 2:25

‘새로 나야 한다’는 ‘위로부터 나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나야 한다’,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교적으로 이 말은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상태로 진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 자아’의 욕심에 끌려 살던 한 존재가 ‘참 자아’를 체득하고 빚어져 가는 여정의 출발입니다. 니고데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관심하는 ‘하느님의 나라’(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구원의 세계)는 “새로 나야 보인다.”는 답변인데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답변은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볼 수 없다.

 

생전 처음 겪는 ‘말씀의 어려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연적 혈통’을 물려받은 ‘유대인’이라 하더라도(그를 이스라엘이라 부른다 하더라도) 자연적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에게서는 그 해답이 나올 수 없고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이 세계(옛 것)와 오는 저 세계(새 것, 하느님 나라)의 불연속성입니다. “새로 나야 한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그는 다시 질문합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 요한 3:4

당황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 3:5

 

예수님은 “어떻게 다시(두번째로)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에 “물과 성령으로”라고 풀어서 대답해 주십니다(에제 36:25-27). ‘하느님 나라를 본다.’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로 바꿔서 대답해 주십니다. ‘물로 새로 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인간은 ‘물로’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물에서’ 태어났지 않습니까? 어떤 ‘물’입니까? 어머니 자궁 ‘양막’(羊膜) 안에 있는 ‘양수’(羊水)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물에서의 탄생’, 즉 ‘자연적 출생’(육체의 탄생)만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원죄’(죄성)에 물든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그 ‘본성적인 탄생’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다 한들 그가 태어난 세상은 여전히 구원이 필요한 세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물’로 새로 나야 합니까?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 ‘물’을 인간의 죄를 씻고,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나게 ‘세례성사’라고 교리적으로 해석해 왔습니다(요한 1:26; 에제 36:25). 세례성사는 죄악 된 옛 생활을 떠나(자기 죽음)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하는 ‘성령의 날인’입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하느님의 가정인 교회의 일원),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은총입니다. 이렇게 세례성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물’(그 많은 신학적 의미부여에도 불구하고 물로 씻는 외적행위인 세례)로부터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성령으로 새로 나야한다’고 덧붙이십니다(요한 1:33; 에제 36:26-27). 사실 여기에 이 ‘영적 담론’(談論)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죽음’의 의미를 갖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고, 더욱이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세례성사’는 분명 ‘성령의 활동’(은총)을 수반해야 비로소 온전해 집니다. ‘성령으로 새로 나는’ 일이야 말로 ‘하늘에서(위로부터)’ 태어나는 ‘참된 탄생’이며, 자신의 근원이 땅이 아니라 ‘하늘’(하느님)에 있음을 온전히 깨달은 ‘존재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육’과 ‘영’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6절).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자연적 인간’은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새로 나는’ 일이 없다면 ‘자연적 인간’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새로 나는’ 기적은 결코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은 각 자 다르게 진행되고 관찰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새로 나야 된다’는 말에 걸려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 요한 3:8

이렇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을 ‘바람’에 비유하십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바람 소리를 듣고 그 영향력을 알지만 그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손으로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바람’은 그야말로 자유롭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난 영적 인간의 경지도 그와 같습니다. 이런 경지를 이웃종교인 불교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불경, <숫타니파타>

 

‘바람’의 비유가 니고데모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사실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말입니다. 자신이 한 평생을 몸 담아 온 ‘유대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인간’은 ‘율법’해석을 숙지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지혜롭게 적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은 그 무엇에도 거리낄 것도 제한받을 것도 없습니다. 닫힌 꼴로 사는 사람들과 달리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삶의 경지입니다. 분명 다르게 행동하지만 예수님처럼 ‘생명의 빛’이 터져나오는 상태입니다. 바람의 비유는 그가 붙잡고 있던 ‘기준’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습니다. 마치 ‘해방의 빛’을 보는 것 같습니다. ‘율법’이 금하는 온갖 제한과 금기를 멍에처럼 메고 평생을 살아온 그였습니다. 예수님의 파격적인 대답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 그는 눈을 반짝이며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 요한 3:9

불교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어떻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내가 이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 요한 3:10-12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라는 말씀은 그가 《성경》의 ‘전문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는 “성령으로 새로 난다.”는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이미 이 주제를 약속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에제 36:25-27). 그런데도 그는 초보적인 영적 진리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이해력이 둔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라면서 《성경》의 그러한 예언과 그 성취조차 알아듣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사실 그가(우리 역시)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는 한 ‘하늘의 비밀’(하늘의 일)을 예수님이 들려준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안타까움은 어쩌면 예수님이 이웃종교인 불교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를 그에게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하늘의 일’은 오직 하늘에서 오신(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이자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밝혀줄 수 있습니다(요한 3:31-36).

이렇게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수준이 비교가 안 됨을 이 ‘영적 담론’(談論) 속에 녹여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수준이 비교가 안 됨을 《요한복음》 기자가 자신의 공동체에게 들려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뒤에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로운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 요한 3:13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구원의 미래를 이 한 말씀에 다 담아냈습니다. 성육신, 죽음, 부활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이 보내신’(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이라 표현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 예언서에 등장합니다(7:9-14). 예언자 ‘다니엘’은 환상(幻想) 중에 ‘재판관’이신 하느님께서 ‘최후법정’을 열고 ‘조서’(調書)를 펼치신 모습을 봅니다. 역사의 ‘최후심판’ 장면입니다. 그 심판 후에 하느님은 ‘사람의 모습을 한 이’(사람의 아들, 인자)에게 자신의 ‘신적 주권’(세계 통치권)을 맡겨 ‘왕’으로 세우십니다. 주목할 점은 ‘사람의 아들’이 스스로 ‘세계 통치권’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허락받았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예언자 ‘다니엘’이 본 환상은 일종의 ‘대관식’(戴冠式) 장면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에서는 그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다른 전통이 형성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최후심판’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세계 통치권’을 넘겨받으실 그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다니엘이 본 환상이 예수님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다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위탁과 전권을 받아서 몸소 ‘최후심판’을 주재하십니다(마태 25:31-46).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부르십니다(마르 2:10, 28; 마태 8:20,31; 9:31; 10:33-34; 11:19). 물론 다른 분인 것처럼 말씀하신 때도 있습니다(마르 8:38; 루가 12:8-9).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말고 ‘사람의 아들’일 수 있는 분은 없다는 것이 바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마태 8:20; 11:19; 28:18-20; 마르 10:45; 13:26; 14:62; 요한 3:13-14; 6:2;8:28; 12:23, 34; 13:31).

《요한복음》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성육신)은 반드시 하늘로 올라갑니다(요한 6:62; 8:28; 12:34). 올라가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에 기록된 한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구리 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 요한 3:14

《민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자 하느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민수 21:4-9).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보내 그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고통 중에 그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뱀이 물러가게 기도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하느님께서는 살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것은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쳐다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구리 뱀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비극의 원인인 불순종을 뜻합니다. 그 불순종을 직면하게 하는 일이 하느님이 마련하신 치유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사람의 아들’(당신도) 높이 들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세상에서 할 일은 모세가 구리로 만든 ‘뱀’처럼 ‘높이 들리는 일’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 3:15

이것이 성육신과 수난의 이유입니다. 믿는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수명의 연장이 아닙니다. 단지 죄의 속죄만도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에까지 이르는, 수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생명’을 위해서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공관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로 표현했고, 교회에서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영성적’ 차원에서 말하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창조의 본모습을 회복하여 사랑을 행하는 상태입니다. 하느님과 하나되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체험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의 눈을 떠서 봐야할 삶의 진실을 보고 진리를 행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한 생명’은 단지 미래에만 있을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한다는 것이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는 ‘통찰’입니다. 사실 우리는 요한의 통찰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짧게라도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체험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그 체험의 순간이며, 기도 역시 그 ‘영원한 생명’의 한 조각을 지금 여기서 맛보게 하는 기쁨의 순간입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James Tissot

또한 십자가 수난은 ‘죄의 치명상’을 입고 ‘죽음’의 고통을 겪는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우리를 ‘치유’하는 의사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하느님을 거역하며 살아온 우리 삶의 ‘어두움’(불편한 진실들) 또한 바라봅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가져온 삶의 비극(자기 소외)과 파괴적인 면(자기 상실)들을 봅니다. 그러나 정직한 그 ‘바라봄’(직면, 인정)이 자기를 상실한 ‘영원한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치유’와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우리 마음을 괴롭혀 온 다른 모든 상처의 기억으로부터도 풀려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탄에게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 자아가 죽고, ‘하느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의 자리’입니다. 더욱이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이 모든 일의 ‘참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 3:16-17

 

‘온 세상’(코스모스)을 향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이 참된 이유입니다. ‘온 세상’은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외아들을 보내주심’(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은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외아들을 믿는 사람들’ 속에서만 ‘실현’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심판’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아버지 사랑의 궁극적 목표는 ‘믿는 사람의 구원’입니다.

인간은 이 선물을 받을지 말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는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는 이단들이 떠드는 것처럼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구원)을 얻습니다. 결코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택이 자신의 ‘영원한 생명’ 또는 ‘멸망’을 가져옵니다.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다”, James Tissot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에 니고데모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높이 들리는 일’은 ‘십자가 처형’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기 7년 유대 땅에서 발생한 민란을 제압한 시리아의 총독 퀴리노는 무려 2천명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비극을 알고 있는 그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니고데모가 생각하던 ‘메시아 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메시아는 그렇게 나약하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눈 후에 니고데모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마지막에는 갑자기 니고데모가 등장해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9:38-42). 어째서 《요한복음》 기자는 그렇게 한 것일까요? 혹시 니고데모가 “성령으로 새로 났음”을 증언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요? 비록 그가 자신의 지위 때문에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마지막을 함께한 ‘숨은 제자’였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아마도 그는 이 ‘영적 담론’(談論) 끝에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배웅을 받으며 바라본 밤하늘은 참으로 빛났을 것입니다. 그의 내면은 더 이상 ‘밤’이 아니라 ‘진리의 등불’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그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전혀 다른 삶의 길, 즉 ‘새로 난’ 사람다운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 ‘새로 난’ 삶의 모습,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적 삶의 모습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부’(富)와 ‘명예’(名譽)와 ‘권세’(權勢)를 예수님을 후원하는 데 쓰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스스로 ‘성령으로 새로 났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소유’에 ‘집착’하고 있다면, ‘나눔’에 ‘인색’하다면, ‘정의’를 세우는 일에 ‘침묵’하고 있다면, 그는 새로 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의 ‘장례’에 사용한 그 엄청난 비용만 보아도(요한 19:39) ‘새로 난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이라는 상상력과 직관(直觀)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믿음의 여정’을 출발하였습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영원한(올바른 관계를 얻는) 친교’로 들어가는 모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약속’(은총의 선택)입니다. 사순절 여정을 지나는 우리도 우리를 은총으로 선택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하느님을 ‘믿고’, ‘떠나야할 것’들을 온전히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약속’은 ‘하느님’입니다. 그 여정 동안 하느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찬미가 오늘 《시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가진 ‘믿음’의 위대함을 증언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궁극적 추구인 ‘구원’(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증언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유일한 은총의 수단이라는 ‘복음’입니다. 복음이야기의 ‘영적 담론’(談論)이 증언하듯이 ‘믿음’은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바울로’처럼, ‘니고데모’처럼 인생의 ‘궁극적 질문’에 직면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느님의 나라(영원한 구원 세계)는 어떻게 해야 들어가는가?…” 예수님은 이 모든 ‘궁극적 질문’에 대해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스스로에게서는 그 해답이 나올 수 없고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신 예수’만이 인간 실존의 궁극적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새로 난 믿음의 사람’은 사랑하며 삽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부터 삽니다.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은 제한된 시공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사랑을 실천하며 영원을 준비합니다.

 

오늘은 사순 2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광야 40일’이라는 ‘고독의 시간’(단식과 기도)을 통해 자신이 가야할 ‘사명’을 깨달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자신을 위한 최고의 시간인 ‘고독의 시간’을 보냈습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사명을 발견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모세의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서 들려져 ‘사랑의 삶’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면 이미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한 영적인 사람은 ‘바람’처럼, 그 어떤 것에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다고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도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당당히 자신이 발견한 그 사명의 길, 사랑의 길을 오롯이 걸어갑시다. 부디 우리 안에 늘 ‘현존’하시며 ‘동행’하시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그런 영적 진보를 성취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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