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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7. 사순 10일(토요일)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26:16-19
  • 시편 – 119:1-8
  • 복음서 – 마태 5:43-48

사순 10일째입니다. 비로소 ‘일순’(一旬)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랑의 삶’이야말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1독서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을 상기’시키는 모세의 설교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시나이 산 계약’에 참여한 1세대들은 ‘불순종’으로 40년 광야여정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후예인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 새로운 세대에게 ‘출애굽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시킵니다.

출애굽의 하느님은 ‘당신의 뜻’이 담긴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주시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계약’은 쌍방이 그 의무를 지킬 때 ‘권리’도 유효합니다. 하느님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입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들 역시 ‘계약’에 충실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토록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시어 만백성 위에 높여주실 것입니다.

《시편》 119편(1-8절)은 ‘하느님의 말씀’(율법)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미하는 시(詩)입니다. ‘율법’, 즉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복되다 찬미하면서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들려지거나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로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인생길의 지침이 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복음이야기는 ‘율법’을 주신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삶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마태오복음》 5장에는 6개의 대립명제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살인’, ‘간음’, ‘결혼생활’, ‘맹세’, ‘보복’, ‘원수를 미워함’이라는 ‘율법조문’을 차례로 나열하십니다. 그 다음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6개의 ‘대립명제’를 통해 ‘율법의 참 정신’을 밝혀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문자’로 축소한 이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6개의 대립명제 중에서 어제 ‘사순 9일’에는 첫 번째 대립명제가 배정되었고, 오늘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립명제가 묵상할 본문으로 배정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립명제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 마태 5:48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이 정말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완전’은 궁극적으로 어떤 상태를 가리킬까요? 도대체 ‘완전’이라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요? 그렇지만 우리들 중에는 ‘완전함’(완벽함)을 삶의 ‘소명’이나 ‘목표’처럼 ‘좀 더 강하게’ 떠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에니어그램’(Enneagram)에서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가치중립적으로 숫자를 사용해 1유형의 사람이라 부릅니다.

‘에니어그램’(Enneagram)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지혜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 가지 ‘힘의 중심’에 따라 인간을 ‘아홉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각 유형이 ‘집착’하는 문제와 일상에서 ‘회피’하는 문제를 들려줍니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 유형이 무엇을 ‘자기방어기제’로 사용하는지 들려줍니다. 그 ‘집착’ 때문에 일상에서 발생하는 ‘근원적인 문제’, 즉 어떤 ‘죄’를 반복적으로 지으며 살아가는지 들려줍니다.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자기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들려줍니다. 서로의 다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세상, 창조주께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것이 부정적으로 발휘될 때는 집착이 됩니다)을 꽃피우고 열매 맺자는 ‘영신수련의 도구’입니다.

다시 복음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1유형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사실 에니어그램이 주는 지혜에 따르면 1유형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없이 자신을 ‘특정한 영역의 완벽함’(완전함, perfection)으로 몰아가는 뭔가가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착각’입니다. 옳음, 도움, 성공, 특별함, 지식, 안전, 즐거움, 힘, 평화. 이런 식으로든 우리 각 사람에게는 완벽에 이르려는 자신만의 영역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에게는 자기 생긴 꼴을 따라 ‘완벽함’(완전함)에 대한 요구가 내면에서 ‘욕동’(drive)하고 있습니다. 가정과 이웃 관계, 일과 취미, 종교생활과 사회생활 등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가령 1유형이라면 좁게는 부모, 배우자, 자녀, 직업에서의 ‘무결점’을 원합니다. 자신의 외모나 신체에 대해서도 ‘결함’없는 ‘완벽’(완전)을 요구합니다. 넓게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공동체, 사회와 국가, 세계에 대해서도 ‘이상향’을 요구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 ‘완벽함’(완전)이 단지 ‘자기’가 만들어낸 ‘기준’(방식)에 따른 것인데 그들은 이것을 놓치곤 합니다.

아무튼 꼭 1유형 뿐 아니라 우리는 ‘자기 방식의 완벽함’(완전함)에 끌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는 식으로 열을 올립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자기 방식의 완벽함’(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끝까지 몰아갑니다. 하지만 그 ‘완벽함’(완전함)에 도달하기까지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듭니다. 그런 경향의 우리가 하루속히 터득해야 할 ‘자기구원의 지혜’는 자신이 갖고 있는 그 ‘완벽함’의 기준이 단지 ‘자기만의 생각’(방식)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우리를 향해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교훈한 바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 이사 55:8

오늘 복음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우리 내면에 있는 그 ‘완벽함’(완전함)에 대한 ‘갈망’, ‘끌림’, ‘목표’가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모두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로부터 옵니다. 하지만 그 창조세계의 ‘완벽함’(아름다움)을 악마가 비틀어 놓았습니다. 악마의 유혹에 속아 넘어간 우리 마음이 ‘왜곡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완전’하시다”고 예수님은 깨우쳐 주십니다. “완전하신 하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답다”고 예수님은 계시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했다는 ‘시’(詩)를 읊으셨습니다(마태 6:29). 특히 하느님은 무엇에서 ‘완전’(아름다움)하시냐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하시다’는 점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결함’이 없으며,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배신, 부인, 도망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까지도 정복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사랑하십니다. 무결점의 사랑, 순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 ‘사랑’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완전’하심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 마태 5:43-44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정말 급진적입니다. 그 급진성에 인류의 스승다운 예수님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단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가 자신의 반항적인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악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지 물어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사랑은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형에 넘긴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루가 23:34a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가장 극명하게 구현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그 삶을 요청하십니다. 솔직히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이란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일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특별한 사명’(과제)을 수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그 부르심을 담고 있는 ‘거룩한 이름’입니다. 《성경》의 정신에 따르면, 일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계획’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일’을 가장 소중히 여기십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을 다 사랑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계획하신 그 ‘만남’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하며 진행 중입니다. 사랑하는 일, 그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주님께서 우리가 ‘완전’하기를 바라시는 삶의 진정한 영역입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성찰합니다. 마음에 주님의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얘야, 나는 단 하나의 이유로 너를 세상에 보냈단다. 그것은 ‘사랑의 일’이란다. 너는 지금도 그 일을 위해 존재한단다. 단지 너를 사랑하는 사람(가족, 친구, 교우)을 사랑하는 일은 쉽단다. 진실로 나는 네가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단다. 네가 나처럼 사랑에 있어서 완전하기를 기대 한단다.

이런 응답의 기도를 바칩니다.

예, 주님. 저는 더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이 마을 저 마을로 전도여행을 다니셨습니다(마태 4:23-25).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은 휴식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어쩌면 ‘과로’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순절(四旬節)이 오늘로 10일째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예수’를 닮는 여정을 진행 중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초대하십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름다운 것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고 주님은 초대하십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했다는 ‘시’(詩)가 바로 그 뜻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 말씀을 따라 소박하고 순수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완전’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 그대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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