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6. 사순 9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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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18:21-28
  • 시편 – 130:8
  • 복음서 – 마태 5:20-26

사순 9입니다. <전례독서>는 ‘어서 속히 주님께로 돌아와 삶을 재설정하라’는 ‘회개의 부르심’입니다.

해외에 나가면 현지 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스마트폰의 ‘날짜와 시간’을 재설정하는 일입니다. 인공위성과 연계되어 있어서 스마트폰을 껐다 켜면 현재 있는 곳의 날짜와 시간으로 ‘재설정’됩니다. 사순절이 그런 ‘재설정의 시기’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을 삶의 표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기화’(일치)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사명’과 ‘가치관’과 ‘인생관’을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게 ‘교정’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하느님의 의’에 맞추어 ‘정렬’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의 방법’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하는 시기입니다. 흐릿해진 우리 ‘희망의 초점’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선명히 ‘맞추는’ 시기입니다. 이것이 ‘시간의 전례’(교회력)를 지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자녀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표준’으로 정하셨습니다. 사순절 여정에 들어서면 우리는 그 표준에 맞추어 삶을 바로잡고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방법’과 ‘시간’에 우리의 마음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정말이지 사순절은 올바로 살기 위해 우리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맞추는 성찰의 시기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순절은 우리 개인이 ‘창조주께 진실’해야 할 거룩한 시기입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은 삶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명백히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전에는 이런 신관이 없었는데, 비로소 에제키엘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만일 못된 행실을 하던 자라도 제 잘못을 다 버리고 돌아와서 내가 정해 준 규정을 지키고 바로 살기만 하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옳게 살던 자라도 그 옳은 길을 버리고 악하게 살다가 죽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악하게 산 탓으로 죽는 것이다. – 에제 18:21,26

살고 죽는 일은 철저히 ‘개인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삶을 망가뜨리고 공허하게 하며, 시간을 낭비하게 합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학대하고, 소진되게 하며,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하느님은 ‘나에게 돌아오라’고 초대하십니다(에제 18:21,27-28). 언제 그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까? ‘오늘’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입니다. ‘지금’은 죄악 된 삶을 살아 온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구원받을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 즉 ‘먼저’ 해야 할 일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 마태 5:23-24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다른 일을 행하기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고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하려는 일이 ‘예배’라는 거룩한 봉헌이라 할지라도 그 일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에게 ‘먼저’ 찾아가 ‘화해부터 하라’고 똑똑히 명령하십니다. 만일 이 초대를 거절하고 고집을 부리면 내 삶은 부러집니다. 결코 한 발작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또 “누가 너를 고소하여 법정으로 갈 때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고통만 가중 시킬 뿐이고 ‘하늘나라’로부터도 배제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지금’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 5:20

‘종교지도자들’인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은 당대에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보다 어떻게 더 옳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늘 <전례독서>와 연결시켜 말씀 드리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자신의 죄를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기에 자신들을 ‘의인’이라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능숙했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자부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냉소적’이었고, ‘공격적’이었습니다. ‘사랑’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칭 옳다’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 손가락질 하는 데 익숙할지 모르지만 결코 자신에게 그 손가락을 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는 ‘교만’입니다.

도대체 어쩌다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안타깝습니까? 진실을 말씀드리면 그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싫어하는 점들은 어쩌면 내 가까이에도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흠’들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남에서 그렇게 빨리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그들의 태도는 언제든 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제대에 불을 밝히고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앉아 있습니다(시편 130:7). 십자가의 주님을 고요히 바라봅니다. 심판주가 아니라 자비의 구세주가 필요한 우리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은 두 팔을 벌리시고 무릎을 굽힌 채로, 옆구리에서는 피를 흘리시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 ‘오상’(五傷, 양손, 양발, 옆구리의 상처)은 나에게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오상’에도 아랑곳없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고 부르십니다. 용서받으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용서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받으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밖에서, 우리 안에서, 한 결 같이 인자하게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고, 자기 멋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오늘도 다른 일들을 시작하기 전에 세상 모든 이들의 주인이신 ‘주님께로 지금 먼저 돌아오십시오.’ 내 생각과 말과 행실이 주님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면 어서 속히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스스로 자기 옳음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게 해 온 자신을 발견한다면 어서 속히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오늘 《시편》 기자처럼 기도하십시오.

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시편 130:1-3

우리는 사순절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일순(一旬)인데, 그동안의 여정이 어땠습니까? 생각’과 ‘말’과 ‘행실’을, ‘사명’과 ‘가치관’과 ‘인생관’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삶의 표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충실히 ‘동기화’(일치)해 오셨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사는 새로운 마음의 집’을 짓자고 부르고 계십니다. 새로운 집에 ‘새로운 영’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지금 먼저’ 할 일은 ‘옛 집’을 허무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는 일이 ‘새로운 집’을 위한 준비입니다. ‘주님께로 온전히 돌아가는 그 일’이 새로운 집을 짓는 출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로 먼저 돌아가야 할 그 사람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이는 ‘속죄의 은총’을 누립니다(시편 130: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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