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3. 사순 6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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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5:10-11
  • 시편 – 34:4-6,21-22
  • 복음서 – 마태 6:7-15

사순 6일차입니다. 해마다 ‘사순절’(四旬節) 여정을 출발하면서 교회는 ‘세 가지 수행’(修行)에 힘쓰도록 안내해 왔습니다.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재의 수요일’을 시작하면서 이 ‘세 가지 수행’을 언급하는 복음이야기를 항상 낭독하고 출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선’(사랑과 정의를 세우는 일인 선행)은 ‘이웃’, ‘기도’는 ‘하느님’, ‘단식’은 ‘자신’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들 수행이 균형을 이루어야 우리의 삶은 바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단식’이 ‘자기 과시’와 ‘종교적 위선’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기도’와 ‘자선’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관련 설교는 사순 3일차를 참고하세요). 이들 수행이 균형을 이룬 상태를 다른 말로 ‘자유’(自由)라고 합니다. ‘자유’(自由)는 ‘스스로의 이유’라는 뜻입니다. 자기 행동의 원인이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있다는 뜻이고, 결과도 스스로가 책임지는 성숙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 1주차’를 출발하여 두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재의 수요일’ 이후 묵상해 온 <전례독서> ‘주제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재의 수요일’에는 ‘자선’(선행), ‘기도’, ‘단식’에 대하여 들었습니다(마태 6:1-6, 16-21). ‘사순 2일’에는 ‘첫 번 수난 예고’와 ‘제자도와 부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사순 3일’에는 ‘단식’이야기에 담아낸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날’에 대한 예고를 다시 들었습니다(마태 9:14-15). ‘사순 4일’에는 ‘회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루가 5:27-32). ‘사순 5일’에는 ‘사랑과 정의를 세우는 일’인 ‘자선(선행)을 실천하라’고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시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마태 25:31-46). ‘사순 6일’인 오늘은 어떤 ‘주제’가 나올까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 6:7-9a

오늘은 ‘기도’를 ‘주제’로 한 가르침을 듣습니다. ‘사순 8일’에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한 번 더 나올 것입니다. 우선, 개념정리부터 하겠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너’(관계)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말할 때는 언제나 나를 존재하게 하는 ‘관계들’(나보다 더 큰 세계)을 유념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점은 항상 ‘대전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나’를 좀 더 축소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있습니다. 흔히 ‘신체’와 ‘정신’(혼과 영), 혹은 ‘육체’와 ‘마음’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육체’이고 어디까지가 ‘마음’인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을 만큼 ‘몸’을 가진 ‘나’라는 존재는 ‘신묘막측’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언어습관으로 ‘몸’은 ‘신체’(육체)를 뜻하고, ‘마음’은 신체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것’(생각, 감정, 기억, 의지)으로 쓰입니다. 오늘날 ‘뇌과학’(신경과학)에서는 ‘마음’을 ‘뇌의 전기적 신호’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물질’(뇌)인 ‘몸의 기능’을 ‘추상화’ 한 것이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몸과 마음은 하나다’,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뇌과학 전문가는 아니니 우리의 언어습관을 따라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기도가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타박상이나 몸(신체)에 난 상처에는 분명 ‘약’을 바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상처가 나면 그 ‘상한 마음’은 결코 ‘약’으로 치유할 수 없습니다. 가끔은 둘 다 ‘기도’로 치료(치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존중하지만 하느님께서 ‘약’이나 ‘의사’를 만들어 놓은 이유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분명 ‘기도’는 몸(신체)보다는 ‘마음’에 대한 것이고,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는 이웃종교의 말처럼 마음은 몸을 넘어서 있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이 ‘마음’을 돌보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돌보는 그 일’을 ‘기도 수행’으로 해 나갑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에 ‘기도’는 우리 ‘몸’(신체)에도 좋은 작용을 합니다. 물론 ‘몸’을 건강하게 돌보고 싶다면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이 필수입니다. 그렇지만 신체적인 필요에만 집중함으로써 ‘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이러저런 ‘질병들’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이 내린 ‘결정들’ 때문입니다. 이것을 의학에서는 ‘심인성’(心因性)이라고 부릅니다. 현대 질병의 대부분이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이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결정’했고, 우리 ‘마음’이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용서하지 말지를 ‘결정’해 왔습니다. 그 결정의 결과가 지금의 몸 상태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다스리고 돌보아야 합니다.

‘단식’도 그런 차원입니다. 우리가 ‘단식’을 하는 이유는 살을 빼거나 외모를 가꾸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식’은 ‘몸’보다는 ‘마음’(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단식’은 ‘본능의 지배’에 따라 살아 온 지금까지의 ‘자기’, ‘몸(육체)의 지배’에 따라 살아 온 지금까지의 ‘자기’에 대한 ‘죽음의 시도’입니다. ‘단식’은 ‘감정’, ‘기분’, ‘아집’(我執)에 붙잡혀 살아 온 지금까지의 ‘자기’에 대한 ‘죽음의 시도’입니다. ‘몸’(본능과 감정)이 빼앗아간 ‘나’에 대한 ‘주도권’(통치권)을 ‘되찾아오기’ 위한 ‘숭고한 수행’이 ‘자기 죽음’으로서의 ‘단식’입니다. ‘감정’, ‘기분’, ‘아집’(我執)이 ‘나’로부터 앗아가 버린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한 ‘치열한 수행’이 ‘단식’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극기’(克己)라고 합니다. 사순 1주간 ‘본기도’는 이러한 ‘극기의 은총’을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식’은 우리의 ‘본능’을 ‘다스리게’ 하고, 어리석은 ‘육체적 갈망들’(탐욕)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게 하는 데 크게 유익합니다. 더욱이 ‘단식’은 나에게 ‘몸’(본능, 욕망, 미움의 감정들)을 넘어설 수 있는(마태 6:14) ‘마음’(영혼)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위대한 수행’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단식’이라는 수행은 단지 ‘출발’이고, ‘시작’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내가 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기도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기도 수행’은 ‘내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 계시고, 그 ‘주인의 다스리심’ 속에 살아갈 때 ‘참된 행복’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의식 변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 수행’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의 진정한 주인’이심을 ‘몸’으로 날마다 고백하는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 ‘기도 수행’ 속에서 우리는 ‘단식’, 즉 ‘곡기 끊기’가 상징하는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내 인생에서 반드시 추구해야할 길’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선물 받은 내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숭고한 목표’와 ‘가치’가 있음을 ‘식별’합니다. 자기 몸으로는 할 수 없었던 ‘용서’, 즉 자기를 구원하는 ‘용서’를 실천하게 됩니다(마태 6:14).

이렇게 하느님의 다스리심 속에 거하며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려는 ‘가장 위대한 수행’이 ‘기도’입니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세상에서 ‘용감하게 증언하는 길’이 ‘기도 수행’입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가난’, ‘정결’, ‘순명’으로 자신을 올곧게 세워가는 길이 ‘기도 수행’입니다. 이기적 ‘소유욕’에 빠져 살던 자기는 죽고, 가난하고 아픔을 겪는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비’와 ‘연대의 길’이 ‘기도 수행’입니다(마태 6:1-4). ‘내 뜻을 중심’에 두고 살던 자기는 죽고,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길이 ‘기도 수행’입니다(마태 6:7-10). ‘주님, 저는 모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묻고 듣는 ‘겸손의 길’이 ‘기도 수행’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주인’과 ‘창조주’로, 자신은 ‘종’과 ‘피조물’임을 날마다 시인하는 ‘온유의 길’이 ‘기도 수행’입니다. ‘자기 이득’과 ‘계산’에 빠른 ‘머리’(냉철한 논리)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가슴의 삶’으로의 ‘투신’이 ‘기도 수행’입니다(마태 16:24).

이제 말씀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몸’만이 아니라 ‘마음’(영혼)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단식’으로 출발했습니다. <성공회 기도서>에 따르면 ‘재의 수요일’은 ‘대재일’(大齋日)로 오전에 ‘단식’을 하도록 규정합니다. 여러분도 단식으로 출발하셨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 단식을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 연결합니다. 우리가 ‘몸’으로부터 ‘되돌려’ 받기 시작한 ‘나’에 대한 ‘주도권’을 ‘자유의지’로 온전히 ‘하느님’께 넘겨드리는 ‘봉헌’을 날마다의 ‘기도 수행’으로 실천합니다. 그 ‘기도 수행’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일이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입니다(에페 4:13).

분명 ‘몸’을 가진 우리에게는 ‘먹는 일’이 중요합니다. ‘단식’은 ‘몸’이 나의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몸을 넘어서는 ‘마음’(영혼)이 있음을 일깨워주기에 중요합니다. 더욱이 날마다의 ‘기도 수행’은 ‘내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 계시고, 그 분이 ‘하느님’이심을 인정하는 실천이기에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성령의 인도) 속에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행복하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일이기에 ‘기도 수행’은 소중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분명히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 마태 6:8

주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이사 55:11).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시편 34:4-6). 부디 ‘건강’(健康, 이 단어의 참 뜻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말입니다)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잘 돌보십시오. 나를 잘 돌보십시오. 나를 잘 돌보는 일이 세상을 돌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나는 ‘기도 수행’을 이어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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