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 1. 사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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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광야 사십 일을 금식하시며 유혹을 이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기도와 절제로 육신의 욕망을 이기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2:15-17, 3:1-7
  • 시편 – 32
  • 2독서 – 로마 5:12-19
  • 복음서 – 마태 4:1-11

사순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유인들입니다.

지난 1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은 정세균 신임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재가’(裁可)하고, ‘임명장’을 수여했습니다. 언제나 대통령이 신임 각료를 재가하고 반드시 하는 일은 ‘임명장 수여’입니다. 자신이 지명한 사람이 해당 공직에 ‘합당한 자격’이 있음을 공공연히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임명장 수여’는 그 사람에게 ‘특정한 권세’가 있음을 ‘입증’하는 일종의 ‘자격증명서’(정체성 확인)인 셈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인사청문회’가 공직 수행의 자질을 평가하는 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자격 시험대’는 ‘임명된 후’부터입니다. 신임 총리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자신이 그 공직에 ‘적임자’임을 지금부터 여실히 ‘증명’해 가야 합니다. 요사이 신임 총리는 대구에 머물며 ‘코로나19 상황’을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총리’로서의 ‘자격 검증’을 국민들 앞에서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스크 대란이 발생하자 직접 마트와 약국을 돌며 유통 상황을 점검하는 모습도 전파를 탔습니다. 그때 총리는 “국민들께 송구하다”고 말씀하면서 “마스크 대책이 이행되도록 공권력을 가진 모든 정부기관이 나서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정말이지 자신의 경륜을 잘 살려서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증거들’을 ‘결과’로 만들어내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그 ‘증거들’을 보고서 국민들은 ‘내각 전체를 이끄는 총리’라는 ‘공직’(자격)에 합당한 분임을 마음으로부터 ‘인정’할 것이고, ‘존경’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마태오복음》입니다.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작년에는 평행본문이 《루가복음》으로 말씀 나눔을 하면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괴테’는 오늘 1독서 《창세기》에 기록된 ‘뱀의 유혹 이야기’와 ‘악마의 유혹 이야기’를 ‘모티프’로 『파우스트』를 창작했다고 언급하면서 일독을 권했습니다. 《마태오복음》으로 <복음서>를 배정한 올해는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추천합니다. <대심문관>은 카라마조프가의 둘째 아들 ‘이반’이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창작 서사시(일종의 액자 소설)로 복음이야기를 끌어들여 정말 ‘심도’(深度) 있게 다루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에서 ‘악마의 유혹 이야기’를 ‘자유’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풀어갑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에 기반 한 믿음’, 자유에 기반 한 사랑’을 갈망한 이야기로 ‘유혹 이야기’를 해석합니다. 소설 속 ‘대심문관’은 아흔 살의 로마가톨릭 추기경으로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빗나간 일종의 변절자입니다. 실제로 ‘정교회’ 신자였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에서 로마가톨릭을 맹비난합니다.

<대심문관>은 종교재판이 한창이던 중세 말인 16세기, ‘에스파냐 세비아’의 ‘신성 재판소’ 감옥에서 있었던 ‘대심문관인 추기경’과 ‘재림한 예수’ 사이의 대화입니다. 물론 예수는 말 한마디 없이 침묵하고 대심문관이 집요하게 추궁합니다. ‘대심문관’(사실 그는 알료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반’ 자신과 우리 자신을 상징하며, 악마를 상징합니다)은 인간을 갓난아기처럼 나약하고, 배은망덕하며, 영원히 악덕하고, 하찮은 반역자로 창조되었기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고 봅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이런 인간들의 ‘양심’을 영원토록 정복하고 사로잡는 ‘세 가지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힘’(사실은 모두가 ‘신적인 힘’입니다)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힘은 ‘기적’, ‘신비’, 그리고 ‘권위’입니다(신적인 기적, 신적인 신비, 신적인 권위). 대심문관은 악마가 예수에게 ‘세 가지 힘’을 가지고 인간들을 행복하게 만들라고 ‘충분한 경고’와 ‘지시’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충분한 경고’와 ‘지시’가 바로 ‘광야에서 있었던 악마의 유혹’입니다.

‘대심문관’은 악마가 유혹한 그 세 가지를 역사가 존재하는 한 가장 위대한 ‘유혹의 정수’라고 한껏 추켜세웁니다.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미래까지 포함하여 인류 ‘역사 전체를 꿰뚫을’ 정도의 ‘힘’과 ‘깊이’와 ‘규모’를 갖는 ‘유혹’이라고 말입니다. 인간 본성의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역사적 모순들을 집약’해 놓은 ‘세 가지 형상’이 그 유혹들 속에 다 들어있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현자들을 불러 모아 ‘하느님의 아들’을 유혹할 수 있는 세 가지를 만들어내라고 과제를 줘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유혹들의 정수’라고 말입니다. 그는 그 세 가지 유혹이 악마로부터 제기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 가지 힘’(신적인 힘)을 가지고 인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온순한 양떼들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거부했다고 대심문관은 질타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인류의 빈곤과 고통을 무시했다는 비난입니다.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은 예수처럼 살 수 있을지 몰라도 ‘평범한 대다수의 인간들’(민중, 어리석은 양떼들, 이들은 우리 안의 무수한 자아들을 상징합니다)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이런 판단은 추기경의 교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인간들이 자신처럼 ‘기적’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자유의지’에 기반 하여 그들이 ‘신(神)과 함께 머물기’를 희망했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는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악마의 제안’을 거부한 것 아니냐는 비난입니다. 복종(순종)은 ‘자유의지’에 기반 한 것이어야지 ‘빵’을 주고 사는 복종, 즉 신적인 기적, 신적인 신비, 신격화된 권위를 통해 민중으로부터 얻는 복종은 결코 복종일 수 없기에 그런 것이라는 비난입니다. 한마디로 ‘자유에서 나온 행동’만이 가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이런 이유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고 ‘대심문관’은 말합니다. 하지만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소수’일 뿐이고, ‘평범한 절대 다수’(민중, 어리석은 양떼들)는 ‘자유’(정신적 가치)보다 ‘빵’(물질적인 조건이나 안정)을 원한다고 예수를 비난합니다. 그때의 예수의 ‘거부’는 ‘자유’라는 너무나 ‘무거운 짐’(고통)을 후대 인간들에게 ‘부과’한 셈이라고 말입니다. 비천한 인간의 본성은 결코 그런 ‘기적’(물질적인 조건이나 안정)을 ‘거부’할 수 없으며, 마음의 ‘자유로운 선택’(양심의 자유)을 견딜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신’보다는 ‘기적’을 추구하는 법이고, 기적 없이 남아 있을 힘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적’을 찾아 헤매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더욱이 예수는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고말고.”(마태 27:39-43)라고 유혹했을 때조차도 내려오지 않을 만큼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대심문관은 꿰뚫습니다. ‘기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믿음’, ‘자유로운 사랑’을 갈망했기에 예수가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착각’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인간들을 ‘너무 높이 평가했다’고 말입니다.

대심문관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이란 존재는 ‘반역자’에 ‘노예’일 뿐입니다. 인간들은 예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고 비열하며 저급하게 창조되었다는 비난입니다. 인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한다는 예수가 ‘자유’ 때문에 오히려 인간들에게 너무나 많은 ‘요구’를 하고 ‘불안’, ‘혼돈’, ‘불행’을 가져다주었다는 비난입니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하기를 바랐지만, ‘선택의 자유’처럼 무섭고 고통스러운 ‘짐’도 없다고 비난합니다. ‘자유를 주겠다’는 예수가 역설적이게도 인간들을 ‘노예상태’와 ‘혼돈’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입니다. 그러면서 예수처럼 ‘자유’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는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만’을 위해 세상에 온 것이냐고 따집니다. 예수에게는 그런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 소중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민중)은 소중하지 않느냐는 책망입니다.

대심문관은 자신도 한 때는 예수처럼 ‘광야’에 있었고, 메뚜기와 풀뿌리로 연명했으며, 사람들의 ‘자유’를 예수처럼 축복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다수의 인간들’이 ‘자유’를 간직하고 ‘예수처럼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 광기에 봉사하는 것이 싫어서 예수의 ‘위업을 수정한 이들’(문맥으로는 로마가톨릭)에게로 돌아섰다고 말합니다. 예수처럼 ‘자유’(정신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역설적이게도 이들을 ‘오만한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이 아니라 ‘기적, 신비, 신격화된 권위’를 쫓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평범한 다수의 인간들’(역설적이게도 이들을 ‘겸손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의 ‘행복’을 위해 살기로 자신이 돌아섰다고 말입니다. ‘하늘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물질적인 조건과 안정)을 ‘멸시’할 힘을 가진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다수의 인간들’(이렇게 판단한 것은 추기경의 교만입니다)로부터 ‘자유’를 ‘반납’ 받고, 그들에게 ‘지상의 빵’(물질적인 조건과 안정)을 주면서 ‘군림’하는 삶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재림하여 로마가톨릭이 세워놓은 그동안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이 땅은 지옥이 될 것이기에 예수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대심문관은 선언합니다. 물론 예수는 대심문관의 질문에 끝까지 ‘침묵’하다 아흔 살 노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춥니다. 제 생각에 그 장면은 하느님이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넣은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는 ‘타락한’ 그를 살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노인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과 함께 예수를 ‘도시의 어두운 광장’으로 풀어줍니다. 예수는 그렇게 떠나고 노인은 여전히 예전의 이념을 고수한 채 살아가는 것으로 <대심문관>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대심문관>에서 ‘유혹 이야기’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 신비, 권위’ 대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자유’(자유의지에 기반 한 양심의 선택과 결정)의 구도로 풀고 있습니다. 그는 악마의 유혹을 받은 예수가 ‘기적, 신비, 권위’에 의존하기보다 ‘자유’를 선택했다고 해석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기적, 신비, 권위’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당신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유혹 이야기에 담긴 뜻이라는 그의 해석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관계할 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기반 한 ‘믿음’, ‘자유의지’에 기반 한 ‘사랑’만이 진짜입니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읽을 때면 ‘특권의식’과 ‘내가 옳다는 교만한 생각’에 빠져 살아가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뜨끔합니다. 언제 시간되실 때 한번 읽어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사랑’을 그 횡간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를 ‘자유의지’에 기반 한 ‘믿음’과 ‘사랑’으로 해석한 그의 더 깊고 색다른 묵상을 경험할 것입니다.

다시 복음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성경》에는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대표적인 세 편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나는 오늘 1독서 <창세기>에 전해집니다. 뱀이 ‘지식의 나무’ 열매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욥기>에 전해집니다(욥기 1:7-12). 사탄이 ‘천상회의’에 참석해 ‘욥’을 사이에 두고 하느님과 ‘내기’를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은 악마(사탄)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한 이야기입니다(마르 1:12-13; 마태 4:1-11; 루가 4:1-13). 교회력으로 올해는 ‘가해’이기에 《마태오복음》에서 배정했습니다.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 이야기는 쉽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자격 검증’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들은 복음이야기 바로 앞에는 ‘세례사건’이 전해집니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이라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신적 기원’을 갖는다는 마태오의 장치입니다.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육신의 아들이지만, 이 순간부터는 ‘신의 아들’로 임명받았다(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이 ‘천상의 노래’를 ‘객관적으로’ 들었다고 묘사합니다. 바로 이 장면이 세례사건의 평행본문인 《마르코복음》이나 《루가복음》과의 차이점입니다.

‘마르코’나 ‘루가’에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마태오’는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 모두가 이 ‘천상의 노래’를 들었다고 선포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당신의 아들로 ‘확인’해 주십니다. 말씀 나눔 처음의 ‘내각 구성’에 빗대면, 이 세례사건은 ‘예수의 정체성’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임명장’을 받는 절차였던 셈입니다.

 

이제 하늘로부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임명장)을 증언 받은(인정받은)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겠습니까? ‘임명장’을 받았기에 그 ‘칭호’(자격, 임명)에 ‘합당한 분’임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입증’(立證)해 보이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야 그 증거들을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마음으로부터 ‘인정’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수행하시는 일(하느님 나라 전도)도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공무’라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마의 유혹을 이기신 사건’을 ‘세례사건’과 ‘갈릴래아 전도’ 사이에 위치시킵니다. 《마르코복음》이 ‘원(原)자료’인데 단 두 줄 뿐입니다(마르 1:12-13).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이 ‘원자료’를 가져다 풍요롭게 편집했습니다. 그들은 특히 ‘세례사건’ 후에 무엇이 ‘먼저’ ‘입증’(立證)되어야 하는지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특별한 분’으로 서술해 왔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다윗의 자손’(마태 1:1), ‘성령으로 잉태된 분’(마태 1:20),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마태 1:21), ‘임마누엘’(마태 1:23), ‘유다인의 왕’(마태 2:2),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마태 3:11), ‘심판주’(마태 3:12)로 증언해 왔습니다. 《루가복음》은 ‘하느님의 아들’(루가 1:32,35), ‘왕’(루가 1:33), ‘주님’(루가 1:43; 2:11), ‘구세주’(루가 2:11), ‘그리스도’(루가 2:11,26), ‘구원’(루가 2:30,31,32), ‘빛’(루가 2:32), ‘영광’(루가 2:32),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루가 3:16), ‘심판주’(루가 3:17)로 증언해 왔습니다.

‘마태오’와 ‘루가’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증언해 온 이 모든 호칭들이 ‘세례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을 통해서 그것을 ‘입증’(立證)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 스스로 무엇인가를 성취해낸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예수 바깥에서 온 증언들’일 뿐이지 않습니까? 정말로 예수님이 그런 자격이 있는 분이심을 알 수 있는 보여 줄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제 ‘마태오’와 ‘루가’는 ‘세례사건’에서의 그 결정적인 ‘하늘의 증언’을 넘어 ‘예수 스스로’ 이것을 ‘입증’(立證)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자격시험’을 분명히 ‘통과한’ 분임을 먼저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올해 초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은 ‘요한’ 교우가 4주간의 기초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입대 했습니다. 그 기간동안 늘 곁에서 ‘복사’로 ‘제단’을 섬겼기에 시간이 언제 다 흘러가나 했습니다. 그런데 수료식을 마치고 우리 곁에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철없이 살아온 한 존재가 ‘군대’라는 곳을 통해 ‘자기의식의 변화’를 겪고, 이제는 복지관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돌보며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제가 복음이야기를 하다말고 요한 교우 ‘군입대’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설명해야 할 ‘통과의례’라는 개념에 딱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제가 아래에서 인용하는 ‘개념 설명’은 ‘종교학’을 배우러 다닐 때 <종교현상학> 과목을 강의하던 ‘유요한 교수’와 <기독교> 과목을 강의하던 ‘배철현 교수’를 통해 정리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특히 고대어 전공인 ‘배철현 교수’의 강의는 나중에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20세기 초, ‘반 즈네프’(Arnold Van Gennep)라는 인류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통과의례』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한 개인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연속적인 ‘세 단계’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분리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과거로 상징되는 개인의 생활양식들에서 단시간에 완전히 ‘격리’되는 단계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나 익숙하고 편안했던 생활양식을 가차 없이 버리고, 편안했던 세계와도 ‘의도적’으로 ‘단절’하는 시기입니다. 일종의 ‘옛 자아의 죽음’인데 가족의 품을 떠나 입대하던 날의 요한이의 경우가 이 단계에 해당했습니다. 이 분리의 단계는 ‘단시간’에 이전의 것들과 단절시켜 버리기에 다른 말로 ‘혁신’(革新)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혁(革)’자를 ‘해자’(解字)하면, 소의 가죽을 정교하게 벗겨내고 살을 발라낸 뒤 ‘뿔’, ‘몸통’, ‘꼬리’만 남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소의 몸체에서 정교한 칼로 가죽을 벗기듯이 자신이 편안하게 의지하며 살아온 과거의 가치나 기준들을 자기로부터 가차 없이 해체해 낸 실천이 바로 ‘자기 혁신’입니다. 이렇게 ‘옛 자아의 죽음’에 비유되는 사건이 ‘분리의 단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세례성사’가 이 분리의 단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상징이 ‘물세례’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전이(轉移)의 단계’입니다. 분리의 단계가 ‘단시간’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전이’의 단계는 과거의 낡은 자아를 점점 소멸시켜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는 ‘오랜 투쟁의 시간’입니다. 몸에 익숙한 사고나 습관, 행동을 완전히 제거해 가면서 ‘새로운 자아를 창조해 가는’ 중간 시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개인은 예전의 자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지위에 오른 자기도 아닌 ‘중간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래서 ‘불안한 시간’입니다. 요한이의 군생활이 그랬습니다. 입대하면 ‘대학생’이었던 이전의 자아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전의 자기를 용납해 주지 않고 ‘새로운 자아를 형성’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동료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외롭고 자신을 누구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는 ‘중간적인 인격’으로 취급될 때가 많아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 전이의 단계가 지나면 비로소 ‘사회’로 통합되는 ‘사회인’이 될 시간을 맞이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통합(統合)의 단계’입니다. 충분히 ‘전이’ 단계에 머물렀던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사회적 지위나 상태’에 들어서는 단계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새로운 존재’가 되었는지조차 모릅니다. 통합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스스로가 떠벌리는 순간, 그는 타락하고 맙니다. 인간 최대의 적인 ‘자만심’이 그를 가장 낮은 단계로 보내버리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삶도 이 ‘통과의례’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특히 ‘나자렛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 사이에는 결정적인 ‘두 사건’이 ‘경계’처럼 존재합니다. 하나는 ‘세례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 40일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각각 ‘분리’와 ‘전이의 단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나자렛을 출가하여 요르단 강으로 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단시간’에 일어난 ‘분리의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인 ‘광야의 40일’은 ‘전이의 단계’입니다. 공간과 시간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공간 속에서 ‘분리 단계’ 이전의 ‘나자렛 예수’를 점점 소멸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옮아가는 ‘영적 투쟁의 지난한 기간’을 보냅니다. ‘하느님의 아들’(그리스도)이라는 자신의 ‘새로운 지위’를 그 ‘공간’에서 스스로 ‘입증’(立證)해내야 하는 ‘중간적인 기간’입니다. 앞으로 있을 ‘공생애’를 위한 ‘영적 무장의 공간과 시간’이 ‘광야의 40일’이자 ‘전이 단계’입니다.

 

우선 ‘광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레모스’(Έρημος)입니다. 본래 의미는 ‘버림받은 땅,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땅, 비어있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확장됩니다. ‘40일’이라는 시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는 ‘40’일과 관련한 위대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모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특별히 예언자 ‘엘리야’는 ‘가르멜 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1열왕 18장) 불구하고 ‘이세벨’이 두려워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급히 도망칩니다(1열왕 19:1-3). 그는 우여곡절 끝에 ‘40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 거기서 그는 ‘폭풍’과 ‘지진’과 ‘번개’ 속에서가 아니라 ‘조용하고 여린 음성’(a gentle whisper)으로 속삭이시며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바깥에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내면에 계신 하느님이라는 상징입니다.

Giuseppe Angeli (Italian, 1712 – 1798 ), Elijah Taken Up in a Chariot of Fire, c. 1740/1755, oil on canvas, Samuel H. Kress Collection

그 만남을 통해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이전의 낡은 ‘신관’(神觀)이 소멸됩니다. 낡은 신관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그 ‘40’일의 여정을 통해 과거의 자기가 완전히 죽고, 새로운 존재로 ‘통합’해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40’일이라는 시간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과거의 자아가 소멸’되는 ‘전이 단계’입니다. 낡은 자아의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해 가는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역시 ‘분리의 단계’인 ‘세례’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단시간’에 ‘단절’하고, ‘광야 40일’이라는 ‘전이 단계’로 스스로 들어가십니다. 물론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사용하실만한 분인지 시험하신다는 의미도 “성령의 인도”라는 말 속에는 당연히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 40일’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입증’(立證)하고, ‘통합’해 가는 ‘수행’을 거치십니다. ‘광야 40일’을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최고의 시간’, 즉 ‘자기 사명’을 발견하는 ‘고독의 시간’으로 만드십니다. 중요한 것은 ‘전이 단계’의 스승이 자기 외부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수님도 ‘광야 40일’ 동안 단식 수행을 하시며 일찍이 ‘엘리야’가 들었던 것처럼 내면에서 들려오는 ‘조용하고 여린 음성’(a gentle whisper)에 귀를 기울이셨을 것입니다. 그 치열한 ‘광야 40일’ 단식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인 자신의 ‘사명’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라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사명’을 위한 삶으로 점점 변화시켜 가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통합(統合)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충분히 ‘전이 단계’에서 수행한 이가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사회적 지위나 상태에 들어서는 단계 말입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분명히 이 ‘통합의 단계’에 이르셨음을 보장해 주기라도 하듯이 ‘유혹하는 자’를 등장시킵니다. 그의 ‘입’에다 다른 말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담아냅니다. ‘통합의 단계’를 성취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악마를 등장시켜 명백히 ‘입증’(立證)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예수님이 펼치실 ‘하늘나라 전도 사업’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업이 될 것임을 독자들에게 먼저 명백히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본격적으로 ‘하늘나라(하느님 나라) 일’을 수행하시기 전에 그럴만한 ‘자격’이 넉넉히 있음을 먼저 이 사건을 통해 똑똑히 들려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에게 똑똑히 새겨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악마의 유혹 사건’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이 있음을 ‘입증’(立證)해 주려는 ‘목적’으로 ‘마태오’에 의해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통합의 단계’를 성취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그 유혹들을 물리치십니까? ‘성서에’라는 답변에 담긴 대로 ‘자유의지’에 기반 한 ‘하느님을 향한 순종과 신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성경말씀’, 즉 ‘하느님’이 계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의지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순종과 신뢰’에서 나온 그 ‘관계의 힘’으로 ‘세 가지 유혹들’을 물리치십니다. 이렇게 ‘자유의지에 기반 한 하느님을 향한 순종과 신뢰’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 자신이 성취하신 ‘통합의 단계’를 보여주십니다.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확실히 ‘검증’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특별히 ‘입증’(立證)해주어야 할 필요조차 없어졌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하실 일은 모두가 ‘하느님 아들’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사순 1주일인 오늘 우리는 ‘악마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내 마음의 중심을 무엇이 차지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고 살고 있는지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어떤 행동이 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먼저 ‘마음의 스크린’에서 그 행동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고 그것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잠언》은 마음의 중심에 그려지는 것을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것이 바로 복된 삶의 샘이다.”(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라고 교훈합니다. 예수님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15:18-19). 따라서 우리는 자기 ‘마음의 상’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자리’를 살피는 수행에 힘써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자리’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살고픈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영원하지도 못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전전긍긍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대심문관>에서 통찰했듯이, 하느님 보다는 ‘빵’으로 대표되는 ‘물질’이나 ‘재물’을 추구하기 쉬운 나약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의 명예’를 드높이기를 좋아하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이웃보다는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자기중심적 일들’을 쫓아가기 좋아하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자유의지’로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부귀영화’와 ‘권력’에 유혹당하기 쉬운 나약한 사람입니다. ‘자유 안에서의 믿음’과 ‘자유 안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기적, 신비, 권위’에 의존해 신앙하고 거짓 사랑하기 쉬운 나약한 사람입니다. 이런 일들에 마음의 중심을 빼앗기기 쉬운 존재입니다. ‘악마’는 우리의 이러한 부분을 너무나 잘 알기에 바로 그 부분으로 우리를 유혹한 후 우리 마음을 차지해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를 따라 오너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해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은 무엇을 통해 ‘입증’(立證)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 오늘 2독서 《로마서》처럼 그런 ‘풍성한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통해 알게 됩니까?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그 사람에게 ‘특정한 자격’이 있음을 ‘시험’을 통해 ‘입증’(立證)하게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운전면허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법조인이 되려면 사법고시를 통과해야 합니다. 심지어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도 성직고시를 치릅니다. 그 시험들을 통과해 자신이 그만한 자격이 있음을 ‘입증’(立證)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회에서 인정하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하려면 ‘자기정체성’을 ‘입증’(立證)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복음이야기에서 ‘유혹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페이라조’입니다. 이 말은 ‘시험해보다, 시련을 겪게 하다, 부축이다’의 뜻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웅들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자기정체성’을 검증해 보이는 ‘시험’(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도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셨음으로 ‘시험’(시련)을 통과해 자기정체성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입증’(立證)하는 자격시험을 날마다 치르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한번에 완벽히 입증해 내셨지만 우리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자신이 악마의 자녀나, 세상 사람들의 제자가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임을 일상에서 계속해서 ‘입증’(立證)해 갑니다. 신앙의 초보자가 아니라 신앙의 고수라는 ‘레벨 업’ 시험을 일상에서 매일 치릅니다. 대부분은 오늘 1독서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처럼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파송성가로 부를 <450장>처럼 날마다 도움을 주시는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이 필요한 우리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자유의지’로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느님을 향한 신뢰 속에서 그 유혹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입증’(立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유의지’로 ‘순종’하는 데서 증명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다른 무엇이 아닌, 하느님만을 ‘마음의 중심’에 모십니다. 하느님만을 마음의 중심에 모셨음을 날마다의 ‘기도’를 통해 ‘입증’(立證)합니다. 하느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셨기에 우리는 ‘성경’을 가까이 합니다. 하느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셨기에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우선합니다. 하느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셨기에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한 의무를 당부하신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도 스승의 말씀에 ‘자유의지’로 ‘순종’하는 데서 증명됩니다. 스승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제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 다른 길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자유의지에 기반 한 ‘믿음’과 ‘사랑’으로부터입니다.

이제 은혜의 사순절의 첫 주간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중심잡기’ 수행을 성령님과 더불어 날마다 일구어 갈 것입니다. 다른 것을 수행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닮고자 함입니다. 영원하지도 못하고, 또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도 못할 것이면서 여전히 내 마음을 차지하려는 유혹들을 즉각 알아차리고 끊어버리려 합니다.

오늘 1독서 《창세기》 말씀처럼, 모든 것이 풍족했던 에덴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실패한 아담과 하와처럼 자주 헛된 것에만 마음이 기울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2독서 《로마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자유의지’에 기반 한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그 ‘자유의지’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입니까?

 

이 사순절에 실천해 가는 자유에 기반 한 매일의 수행들이 우리를 변화시켜 낼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기도생활’이 우리를 변화시켜 낼 것입니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단식’과 ‘극기’가 우리를 변화시켜 낼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자선’(사랑의 실천)의 일들이 우리를 변화시켜 낼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기적, 신비, 권위’를 중심에 두려는 우리를 변화시켜 낼 것입니다. ‘재물, 자기 자신, 자기 왕국’을 중심에 두려는 유혹에 속아 넘어가던 마음을 이제는 그런 수행들이 일깨워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시대 속에서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올곧고 순결한 하느님의 자녀로 성령께서 우리를 빚어 가실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모른 채 유혹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생명의 빛’을 발하도록 성령님께서 우리를 빚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사도 바울로의 고백처럼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사는” 영원한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사순절 여정, 이 ‘전이의 단계’ 끝에서 통합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자기 통합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과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서로 손을 잡고 “예수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찬미를 봉헌할 것입니다. 그런 복된 인생으로 우뚝 서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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