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29. 사순 4일(토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지으신 만물을 극진히 사랑하시며, 죄를 통회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통회하여 탐욕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온전한 구원을 바라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8:9하-14
  • 시편 – 86:1-7
  • 복음서 – 루가 5:27-32

사순 4일차입니다. <전례독서>는 회복, 기쁨, 구원(치유)의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명을 들려주는 복음이야기는 가장 완벽한 ‘영혼(마음)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치유 받으라는 초대입니다. 사순절 여정을 출발한 우리의 영혼(마음)이 온전히 치유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인정해야 하고 누가 필요한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분명 <전례독서>를 잘 경청한다면 영혼의 회복과 기쁨과 치유를 체험할 것입니다.

복음이야기는 공생애 초기,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레위’가 잔치를 베풀 때 있었던 일입니다. 길을 가시다가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마태)를 보십니다(참고 마태 9:9). 그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부르십니다(루가 5:29). 오늘날 우리 눈에는 이 부르심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징수해 갔기에 ‘민족의 반역자들’(배신자)로 불리며 미움을 샀습니다.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하여 로마당국에 약속한 만큼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착복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강도들’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마을에 살던 어떤 사람이 세리의 길로 들어서면 부자가 되는 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을공동체(관계)로부터 추방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회당에서 파문되었으며, 재판에서 증인이 될 자격도 없었습니다. 동족들은 그들을 ‘경멸’하면서 ‘최악의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불명예’는 가족에게까지 덧씌워졌습니다. 따라서 그런 직업군에 속하는 ‘레위’를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신 일은 예수님마저 한통속으로 보게 만드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기꺼이 그렇게 하십니다. 전부 ‘사랑’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도 대단하시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한 ‘레위’ 역시 대단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세금 징수 사업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이러한 그의 추종은 다른 제자들보다 ‘더 희생적’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레위’에 앞서 제자로 부름 받은 어부 출신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루가 5:1-11) 언제든 다시 자신들의 직업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위’의 경우는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제일 부자였던 사람이 ‘레위’였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는 모든 것을 버리는 대단한 ‘희생’을 감행한 셈입니다.

더욱이 따라나선 후에 이어지는 ‘레위’의 반응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큰 잔치’를 베풀고 예수님을 모실만큼 그는 참된 행복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행복을 결코 혼자만 누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이 찾은 행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다음 장면을 읽으면서 상상해 보십시오.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들과 그 밖에 여러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 – 루가 5:20

이것이 그가 큰 잔치를 베푼 이유입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도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습니다. 자신만 행복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생겨나기를 축복합니다. 참회의 절기를 지나면서 ‘축복’을 말한다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혼자서만 하느님 나라에 가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당대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잔치를 트집 잡을(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세리’를 제자로 부른 것도 모자라 그의 집에서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식사까지 나누는 일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불쾌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입니까? – 루가 5:30

그들은 악명 높은 죄인들과 친교를 나누며 먹고 마시는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사실은 하느님 나라 일을 한다는 예수님을 향한 비난입니다. 이일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할 때는 단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입니다.

그들의 비난에 예수께서는 자기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가 5:31-32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은 ‘영혼의 위대한 의사’로서 그 자리에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며 그 자리에 계신 이유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대답은 심오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의사’이시기에 영혼이 병들 이들, 즉 죄인들과 함께 있는 일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비난하던 종교 지도자들도 분명 영혼이 병든 ‘죄인들’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병들었다고 독선을 부렸습니다. 자신들을 당대의 ‘의인’이라 자부했고 다른 사람들은 ‘죄인’이라 경멸했습니다. 착각도 참 가지가지입니다.

분명 레위로부터 그 자리에 초대된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회개와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 삶을 향한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응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프지 않다고, 자신들은 의롭다고 자부했기에 그런 가르침이나 초대에 응답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들 역시 영혼이 병든 이들임을 인정하고,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초대에 응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가르침과 초대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치료해 주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요즘 대구 경북 지역의 코로나19 감염병 치료를 위해 의료인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확진환자와 접촉한 의료인의 경우에는 ‘자가 격리’까지 해야 해서 그렇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수많은 의료인들이 자원해서 대구 경북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돕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치료받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은 항상 완벽하며 심지어 우리의 치유에 필요한 모든 ‘비용’까지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의사가 세상 어디에 또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병든 죄인이고 용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께 용서를 청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잠시 묵상하면서 생각나는 죄가 있다면  뉘우치는 마음으로 고요히 주님을 부르십시오.

가장 탁월한 의사이신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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