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27. 사순 2일(목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지으신 만물을 극진히 사랑하시며, 죄를 통회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통회하여 탐욕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온전한 구원을 바라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30:15-20
  • 시편 – 1
  • 복음서 – 루가 9:22-25

사순 2일차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선택과 결단으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특히 복음이야기는 예수님의 선택과 결단을 들려줍니다. 그 속에 드러난 선택과 결단은 사순절 전체의 ‘핵심’입니다. 크게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22절)는 예수께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밝히 드러내시는 가르침입니다. 흔히 ‘첫 번 수난예고’라고 하는데, ‘고난’과 ‘배척’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가르침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습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자신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하십니다(루가 9:18-19). 다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 생각은 어떤지 직접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런 감동스런 대답을 내놓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 루가 9:20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기뻐하시기보다 오히려 ‘함구령’을 내리십니다(루가 9:21).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베드로가 기대하고 희망했던 식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하지만 군중이나 제자들이 기대하고 희망하던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그리스도’(메시아)는 아니십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그리스도 상’(메시아 상)을 가지고 자신을 관계하려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당신께서 하실 일을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 루가 9:22

제자들은 아직 말이 끝나기도 전인데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난’과 ‘배척’과 ‘죽음’은 제자들 뿐 아니라 군중들이 기대하거나 원하던 ‘메시아 상’(그리스도 상)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겪는 ‘많은 고난’을 ‘필수’(반드시)라고 강조하십니다. 한마디로 ‘고난’은 ‘그리스도’에게는 ‘필수’입니다. 정말이지 그리스도의 고난은 갑작스럽게 세운 생각 차원의 계획이나 예측이 아닙니다. ‘고난’(배척과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천지창조 이전에 미리 계획되었고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 1베드 1:19-21

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천지창조 이전에 계획’된 일의 ‘성취’가 될 것입니다(묵시 13:8).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기 이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먼저 배워야했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고난’과 ‘배척’과 ‘죽음’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 루가 9:22

예수께서는 고난과 마찬가지로 ‘부활’도 그리스도께는 ‘필수’라고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들에게는 마지막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활’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 현장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후반부(23-25절)는 예수를 따르기로 ‘선택’(결단)한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제자도’입니다. 그러니까 선택과 결단의 반복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 루가 9:23

스승과 제자는 ‘같은 사명(운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동일시’(同一視)의 요청입니다. 저는 이 짧은 문구가 <복음서>에서 기록된 그 많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빛나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자 ‘선택’(결단)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멍에’입니다. 사실 이 가르침은 ‘동어반복’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이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선택(결단)하는 일은 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르침 역시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자기를 버리는 선택을 명령’하시는 가르침의 의미는 ‘제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영성적)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려면 좀 더 설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제 십자가를 지는 선택을 명령’하시는 가르침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제자들에게 명확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사용한 가장 끔찍한 ‘사형도구’입니다. 특히 로마제국에 저항한 ‘정치범’(국사범)에게 가하는 처형도구였습니다. 로마제국은 사형을 언도한 정치범에게 ‘강제로’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도록 했습니다(요한 19:17). 그렇게 해서 로마제국에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동족들에게 공포를 조장한 셈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고문, 모욕, 죽음의 도구였지 결코 영광의 징표가 아니었습니다. ‘자력 구원의 불가능’,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는 일, ‘자기 죽음’ 그 자체,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정말이지 ‘십자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피하고픈 ‘끔찍한 형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걷는 그 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하셨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길로 가는 선택과 결단을 했기에 제자로 따르기로 선택한 이들에게 ‘심사숙고’ 후의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자로 살기로 선택(결단)한 이들에게 ‘자발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요청하십니다. ‘자발적으로 죽으러 가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한번만이 아닙니다. ‘매일’입니다. 매일 십자가에 매달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 고문과 모욕과 자기 죽음의 그 엄청난 비극을 마주하고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일이 당신을 따르는 데 기다리고 있으니 나중에 딴 소리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양자택일’하라고 재촉하십니다.

또 ‘자기를 버린다’는 가르침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물론 말이 쉽지 행동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희생’입니다. ‘이기적인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타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특권’을 누리며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타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자기 옳음’의 ‘편견’에 빠져 타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며 ‘정죄’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타인을 포옹’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중심적인 나’가 죽을 때나 가능합니다. ‘탐욕’에 물든 ‘옛 사람’과 ‘세상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죽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신 이 ‘제자도’대로 살아내신 거의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당시의 권력과 영합(迎合)하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그들의 삶은 위선이며,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르 12:38-40; 마태 23:2-36; 루가 11:37-52, 45-47). ‘율법과 전통’의 이름으로 ‘병자와 장애인’, ‘여성과 이방인’(외국인, 소수자), ‘과부와 가난한 이들’에게 행해지는 정죄와 편견, 차별과 멸시에 저항하셨습니다. 더 큰 ‘선’(善, 하느님 나라)으로 통치되는 세상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자기’가 아니라 ‘우리를 중심’으로 살기 위해 ‘성육신’ 하셨습니다. 자기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 죽음의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겠다고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당신과 ‘행동의 동일시’라는 선택(결단)을 한 결과가 얼마나 영광스러울지 이런 ‘약속’으로 명백히 ‘못’을 박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 루가 9:24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란 말이 생각납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택하고 따르기로 결단한 그 삶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코에 불어넣으신 ‘목숨’만큼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그 ‘절대적’ 목숨을 당신을 위해 ‘봉헌’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면 ‘산다’는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그 ‘절대적 목숨’을 ‘예수님을 위하여 봉헌’하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 목숨을 ‘옛 사람의 완성’과 ‘세상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봉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봉헌하라’는 궁극적 선택(결단)의 요청입니다.

참으로 ‘아멘’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영원한 생명의 완성’에 동참하느냐 아니냐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를 선택하고 실천했느냐에 따라 판결날 것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믿음의 실천’(결단)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판결날 것입니다(마태 25:31-46). 어쩌면 이렇게 당당하게 가르치시고 ‘약속’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제자도’는 ‘옛 사람’과 ‘세상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자기 죽음’이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자기희생’, ‘자기봉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이 본문을 사순절 ‘둘째 날’에 배정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와 성시 <1편>에서 노래하듯이 인생에서 선택과 결단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선택하고 결단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깊이 성찰하지 않고서는 무엇이 진짜 생명과 행복을 위한 선택인지 식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무엇이 진짜 생명에 이르는 선택이고, 무엇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는 결단인지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따라 죽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으로, 참된 행복으로 완성됩니다.

그렇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이 본문을 사순절 ‘둘째 날’에 배정한 이유는 ‘죽음’이 ‘부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죽는 자기 죽음 없이 부활은 결코 없습니다. 이기적으로 살아가려는 나의 ‘의식의 죽음’ 없이 ‘존재의 변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순절 여정을 시작한 우리는 ‘첫 번 수난예고’와 주님을 따르는 이가 간직하고 있어야 할 ‘제자도’를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자기’(알아차려야 할 자기의 불편한 진실들)가 무엇인지 성찰해 가십시오.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으로 초대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버려야 될 자기’는 어떤 모습의 ‘나’입니까? 가정에서, 부부 관계에서, 직장에서, 교회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버려야 할 자기’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매일 짊어지고 따라야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지 한번 성찰해 가십시오. 십자가는 오늘날 처형도구가 아니라 ‘옳은 일’을 하다 불의한 권력으로부터 받는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약삭빠른 기회주의자들(철저히 이기적인 인간들)이 ‘자기 성공’과 ‘번영의 길’을 갈 때 오롯이 이 땅의 ‘해방과 민주화’, ‘평화와 인권’을 위해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선택하고 짊어진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역사의 고비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떨쳐 일어나 이 땅을 지켜낸 수많은 ‘민중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거철을 앞두고 돌아가는 정치판을 보면, 온전히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와 청소하지 못한 ‘적폐’로 인해 그 분들의 ‘자기희생’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겨우 13년, 그러니까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언론 적폐들의 공격’은 끊이질 않고, 또 거기에 속아 넘어간 일부 국민들은 너무나 성급합니다. 어떻게 ‘지난 75년간 쌓아온 적폐’가 단 한 번에 ‘마법’처럼 청산될 수 있단 말입니까!

온 국민이 ‘코로나 19’가 가져온 환난으로 두려워합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투명한 보고를 하고 있는 ‘질병관리본부’의 노고와 어려운 시기에 보여주고 있는 ‘대구시민들’의 성숙한 의식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럴 때일수록 ‘고난’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역사 속 더 어려운 일들도 결국은 극복해 왔습니다. 비록 대구 지역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 때 그 도시는 대한민국 진보의 심장이기도 했습니다. 봄은 반드시 옵니다. 대구 경북 뿐 아니라 온 국민이 힘을 내서 이 환난을 잘 극복하여 ‘국격’(國格)을 드높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교우 여러분, 누가 과연 ‘제자도’를 선택하고 결단하여 감행할 수 있습니까? 누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항상 ‘제자도’는 개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다고 깨달은 이가 감행합니다. 그것을 은유적으로 ‘큰 진리(眞)’, ‘큰 선(善)’, ‘큰 아름다움(美)’이라 부릅니다. 아마 이 모두를 수용하는 말이 ‘큰 생명’일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것을 ‘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24절). 큰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 ‘제자도’를 선택하고 감행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 덕택에 ‘나로부터의 자유’라는 빛을 발견한 이들이 ‘제자도’를 결단하고 감행합니다. 큰 진,선,미(眞,善,美)를 향한 이타적 ‘자기희생’으로의 부르심을 온전히 깨달은 이들 말입니다.

정말이지 ‘영원한 생명’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역사 속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부활’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목숨은 ‘완성’됩니다. 먼저 죽지 않고서 부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행동 없이’ 입술의 고백만 내세우면서 값으로 칠 수 없는 ‘하느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사순절(四旬節)은 ‘우리를 위한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선택과 결단)으로 우리 자신이 ‘빚어져 가고’, ‘변화되어’가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자기만 누리는 ‘특권’아니라 ‘타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더 ‘큰 선’(善, 하느님 나라)을 위한 ‘자기희생’을 감행하며, 타인의 ‘고난의 자리에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자기 옳음’에 똘똘 뭉친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포옹’하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추구’합니다. 약삭빠르고 탐욕스런 사람들처럼 자신의 방식만을 고수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이들’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자신의 기대와 꿈만을 위해 살아가던 삶에서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으로 돌아선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입술의 믿음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 루가 9:25

오늘 하루 이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어떻게 적절히 응답할 것입니까? 우리의 목숨을 어디에 봉헌할 것입니까? 우리는 기꺼이 ‘자기희생’과 ‘자기죽음’과 ‘자기봉헌’으로 응답할 것입니까? 물론 희생적인 삶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희생’과 ‘자기죽음’과 ‘자기봉헌’은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삶의 기본 원칙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십자가에 도달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부활’로 이끄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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