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26. 재의 수요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지으신 만물을 극진히 사랑하시며, 죄를 통회하는 모든 이를 용서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통회하여 탐욕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온전한 구원을 바라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요엘 2:1-2,12-17
  • 시편 – 51:1-18
  • 2독서 – 2고린 5:20하-6:10
  • 복음서 – 마태 6:1-6,16-21

오늘부터 우리는 사순절(四旬節) 여정을 시작합니다. 교회는 사순절의 첫 날인 오늘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릅니다. 성찬례 중에 ‘재’를 축복하여 이마에 바르는 예식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이 예식에 사용하는 ‘재’는 작년 ‘고난주일 성지축복’에서 받았던 ‘성지’(聖枝)를 불에 태워서 마련했습니다. 사순절을 다른 일이 아니라 ‘재’를 축복하는 예식으로 출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재’는 우리에게 진정 어떤 날을 약속하는 상징입니까?

《성경》에서 ‘재’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보잘 것 없음’과 ‘비천함’을 ‘재’에 비유합니다(창세 18:27; 욥 30:19).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낼 때 ‘재’를 사용합니다(지혜 2:2-3). 깊은 ‘슬픔’과 ‘고통’을 밖으로 표현할 때 ‘재’를 사용합니다(사무하 13:19; 욥 2:8; 시편 102:9; 예레 6:26; 에제 27:30; 다니 9:3; 에스 4:1-3; 1마카 4:39-40). ‘참회’하는 내면의 변화를 나타낼 때 ‘재’를 사용합니다(욥 42:6; 요나 3:5-6; 이사 58:5; 유딧 4:11; 마태 11:21). 죄와 불순물을 씻어낸 ‘정화’와 ‘순수’의 상징으로 ‘재’를 사용합니다(레위 4:12; 민수 19:17).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한 멸망’을 비유할 때 ‘재’를 사용합니다(에제 28:18; 말라 3:21; 2베드 2:6).

사제는 이런 의미를 갖는 ‘재’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수’를 뿌리고 ‘분향’하여 거룩하게 합니다. 이어서 자신과 신자들 ‘이마’에 ‘재’를 바릅니다. 보통은 가로와 세로로 선명하게 ‘두 줄’을 긋습니다. 사제는 다음과 같은 숙연한 ‘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먼지)이니 흙(먼지)으로 돌아가리라.

‘타락한’(분순종한) 아담을 향해 그 ‘본래의 자리’와 ‘유한성’을 상기시켜주시는 하느님의 선포입니다(창세 3:19c). 그의 후예인 모든 인생은 ‘죽음의 권위’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는 이 숙연한 선포를 나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축복의 한 말씀’으로 들으며 ‘재의 예식’에 참여합니다. 다시 말해 ‘몸’을 갖고 살고 있는 우리 ‘존재의 진실’로 돌아갑니다.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을 노래하지만 종국에는 최종적 불가능성인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자신임을 발견합니다. 스스로를 향한 모든 ‘찬미’가 이 숙연한 선포 앞에서 허물어집니다. 인간을 향한 모든 찬미가 ‘거짓 위안’임을 ‘직시’(直視)하고, ‘존재의 실상’을 보도록 눈을 열어주는 ‘한 줄기 빛’입니다. 인생은 시간 속에서 흔들리다 그 있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가련한 존재임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습니다. ‘꽃’처럼 피었다가 스러지고, ‘풀잎’처럼 시들어 버립니다. 위세를 떨며 다닌다지만 실상은 ‘석양의 그림자’입니다. 땅 위를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덧없습니다. 한 번 죽음의 도장이 찍히면 결코 되돌아 올 수 없는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1역대 29:15; 욥 8:9; 14:2; 시편 39:6; 102:11; 144:4; 지혜 2:5; 집회 34:2).

‘셰익스피어’는 제가 지금 열거한 《성경》 말씀들을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Macbeth)』에서 이렇게 담아냈습니다.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었다. 언젠가는 듣게 될 소식이었다. 내일, 내일, 또 내일. 정해진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매일 조금씩 기어가고 있다. 지나간 과거는 어리석은 이들을 비추어 한낱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밝히어 왔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 제 시간이 되면 무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시끄럽게 떠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없이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한 바보들의 떠드는 이야기일 뿐… – 5막 5장

그 위대한 작품을 썼던 ‘셰익스피어’도 어쩔 수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누구나 ‘폭군’인 ‘시간의 지배’를 받다 자신이 왔던 자리인 땅의 ‘흙’(창세 2:7, 원어로는 마른 흙, 먼지, 재), 즉 ‘티끌’로 돌아갑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이렇게 인생의 본래 자리와 유한성을 가장 극명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재’(ash)입니다. ‘재’를 앞에 두고, 우리는 ‘사순절’(四旬節) 여정을 출발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티끌’(재, 먼지)에 불과한 나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지금도 ‘숨’을 쉬게 해주신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라’는 ‘거룩한 초대’로 ‘사순절’을 ‘시작’합니다.

<전례독서>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들려줍니다. 오늘 《시편》은 <51>입니다. 예언자 ‘나단’의 고발, 정확히는 ‘하느님의 고소’ 앞에서 파렴치한 ‘다윗 왕’이 녹아내린 사건(사무하 12:7-15)을 배경으로 한 ‘참회시’입니다. ‘하느님의 고소’(告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죄가 “하느님을 얕보며” 저질러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은 단지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악행’으로 가장 ‘침해’를 당하는 분은 세상에 한 사람의 생명을 내신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암몬과 아람 군을 물리치고 최대 통치영역을 확보합니다(사무하 10:1-19). 그러자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벗어나” 점점 ‘오만’(傲慢)해졌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길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야전사령관으로 살아온 그였습니다. 그는 예전처럼 부하들과 함께 전장(戰場)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인데도 혼자 ‘왕궁’에서 빈둥거리다 그만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사무하 11:2-27). 충성스런 부하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그때 ‘예언자’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단’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는 사무엘처럼 왕을 지명하여 기름 부어 세우고, 왕에게 조언을 하면서 바른 길을 가도록 그 권한을 견제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 나단이 그에게 찾아와 ‘정의감’에 호소하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사무하 12:1-4). 다윗은 자기를 빗대어 하는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호기롭게 ‘사형’을 언도합니다(사무하 12:5). 그 순간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삼하 12:7)라는 ‘전광석화’ 같은 ‘책망’이 들려옵니다. 다윗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해냈다”고 여겼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순간 갈등합니다. 그는 예언자 하나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얼마든지 없애버릴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왕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사무하 12:13)라고 ‘자백’합니다.

‘배은망덕’하게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얕보며” 저지른 ‘죄 값’은 무엇입니까? 그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미 선고(宣告)한 것처럼 ‘사형’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령하고 있습니다(레위 24:19-22). 나단의 책망 후에 그가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지은 ‘시’(詩)가 <51>이라 전해집니다. 그는 깊은 ‘죄책감’ 속에서도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기억”했습니다. 비록 그의 집안이 ‘죄의 형벌’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사무하 12:19; 13:28-29; 16:21-22; 18:14-15; 열왕상 2:24-25), 자비하신 하느님을 기억하며 바친 기도는 그를 새로운 삶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분명 허물 많은 왕이었으나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훗날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하였으며, <복음서>조차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입니다(마태 1:1).

이 시편에 ‘알레그리’(G. Allegri, 1582~1652)가 곡을 붙인 <참회의 노래, Miserere mei Deus, 라틴어로 번역한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는 교회음악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 한번쯤 감상(鑑賞)하시면 영혼의 고양(高揚)을 경험할 것입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36Y_ztEW1NE).

배은망덕한 다윗 왕의 ‘참회’처럼, 우리도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그러나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오늘 ‘기억’합니다. ‘티끌’(재, 먼지)에 불과한 나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지금까지 ‘숨’ 쉬며 살게 해주신 ‘은혜의 하느님’ 앞에서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돌아봅니다. 하느님이 ‘선물’해 주신 ‘인생’을 자신이 만들어야 할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들며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한껏 향기를 풍기는 ‘백합’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른 꽃과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다른 이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얼마나 ‘몰입’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감동할만한’ 그런 인생길을 몰입하며 걸어왔는지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맞게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내가 있어야할 ‘길’과 가야할 ‘목적지’ 위에 있는지 돌아봅니다.

<구약성경> 첫 다섯 권을 ‘토라’(율법, 모세오경)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야라’(yarah)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야라’는 “던지다, 쏘다, 가르치다”는 뜻이 있습니다. 돌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아서, 또 손가락을 이용해서 어떤 사실을 알려주고 계시해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인생들에게 지켜야할 ‘하느님의 뜻’(기준)을 깨우쳐 주는 ‘교사’와 같습니다. 진리의 길을 깨우쳐주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는 ‘스승’과 같습니다. 쉬운 말로 ‘궁수’(弓手)가 ‘화살’을 쏘는 이유가 ‘과녁’을 ‘명중’시키는데 있듯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야할 진리(목적지)를 가리켜 주는(명중시키기 위한) 원리’(나침반, 방향)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일이 발생했습니다. 은유적으로는 ‘길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의 단어가 ‘하타’(hatah)입니다. 하타는 ‘길을 잃다’는 뜻도 있고, ‘죄를 범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가야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지 않고 ‘빗나가 있는’ 인간의 비극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하타’입니다. 우주의 깃든 ‘하느님의 질서’(섭리)에 어긋나 있는 인간의 비극적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기준을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의 이런 비극적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도 바울로는 ‘하마르티아’(hamartia)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 길을 잃어버리다”란 뜻의 그리스어 ‘하마르타네인’(hamartanein)의 명사형입니다. 본래 ‘하마르티아’는 그리스 영웅들의 성격에서 기원하는 ‘비극적 실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하마르티아를 의지적인 죄인 ‘휘브리스’와 비교하면서 단순한 실수, 과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울로는 이 말을 가져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적 상태를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어떤 규율을 구체적으로 위반했느냐의 차원보다는(외적행위 보다는) 자신이 ‘가야할 길 위에 있지 않은’ 인간의 총체적인 비극적 상태를 말하는 셈입니다. 자신이 인생에서 가야할 길을 모르는 ‘무지’(無知)이고, 그 길을 찾으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찾았다하더라도 가지 않고 있는 ‘나태’(懶怠)입니다.

이 시간 ‘성령의 조명’(照明) 아래서 고요히 스스로를 ‘성찰’합니다. 나는 ‘있어야할 길 위’에 있는지, ‘반드시 가야할 목적지를 알고’ 있는지, 그 길로 가기 위해 어떻게 ‘수행’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봅니다. 머리를 조아립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온 인생임을 ‘시인’합니다. ‘되어야할 최선의 자기’가 되지 못 한 채 살아온 인생임을 ‘인정’합니다. 최고는커녕 ‘게으름’을 피우며, ‘속임수’를 부려온 인생임을 ‘자백’합니다. 스스로에게 ‘몰입’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고, 남이 가진 능력을 시기하며 살아온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맞지 않게 살아오면서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온 인생임을 ‘자백’합니다. ‘있어야 할 길’과 ‘가야할 목적지’ 위에 있지 않고, 다른 길을 기웃거리며 살아온 인생임을 ‘시인’합니다. 이런 ‘죄’의 대가는 하느님과의 단절인 ‘죽음’임을 뼈저리게 성찰합니다(로마 6:23; 1고린 15:56).

오늘 우리는 이렇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인정’과 ‘자비’(용서)를 간청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마’에 ‘재’로 그어진 두 줄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표시입니다. 자신의 ‘불편한 진실’, 즉 내면의 ‘어두운 곳’을 ‘인정’하는 일로부터 ‘거룩한 여정’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련한 존재가 ‘나’임을 ‘시인’합니다. “찢어지고 터진 마음”으로(시편 51:17) ‘간청’해야 할 불쌍한 죄인이 자신임을 고백하는 일로부터 ‘사순절’을 출발합니다.

1독서 <요엘> 예언자도 다윗처럼 “옷이 아니라 찢어진 심장을 하느님께 바치는 여정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요엘 2:13). “돌아오는 이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도 요엘 예언자와 같은 심정으로 “우리가 이미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하라”고 초대합니다(2고린 6:1).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과 등지지 말고 그 있던 흔적조차 사라지기 전에 “어서 화해하라”고 초대합니다(2고린 5:20).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2고린 6:2).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루신 ‘무죄선언’의 자리로 나오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2고린 5:21).

“십자가에서 예수의 시신을 내리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602

그 ‘무죄선언’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드디어 우리는 <전례독서>가 인도하고자 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억’ 앞에 섭니다. 가로와 세로로 이마에 그어진 ‘십자 표시’의 주인에 대한 ‘기억’ 말입니다. 그 ‘십자 표시’는 받은 이와 받지 못한 이 사이의 ‘영원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은혜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죽음의 독침’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하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게 합니다(1고린 15:55-57, 요한 3:5). <복음서>에서 그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권’(다스리심)이 미치는 현세와 내세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의미이지만,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석양의 그림자’ 같은 우리의 ‘수명’(壽命)이 끝나고 하느님의 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 ‘부활생명’도 가리킵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께서 은혜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는 ‘세례’(물과 성령)를 통해(로마 6:3-11), 하느님이 주실 ‘부활생명’(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미 참여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신앙고백처럼 ‘이미 도래했고 자라나고 있는 부활생명에 참여한(참여할) 하느님의 자녀’답게, 날마다 ‘감사’하면서 ‘성화’(聖化)되어 가고 있느냐는 항상 점검해야할 중요한 일입니다. 정말 ‘부활생명에 참여한(참여할) 하느님의 자녀’답게 ‘생각’과 ‘말’과 ‘행실’이 이전과 달라졌는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 점검과 성찰을 위해 교회가 마련한 장치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1년 단위’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전례 안에서 기억하고 경축’합니다. 이것을 ‘교회력’이라고 합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참여한(할) 우리의 ‘성화’를 위해 교회가 마련한 ‘자기 쇄신’과 ‘희망’의 장치입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은 사순절(四旬節)로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제인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할 지원자들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이 가야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발견한 이들을 교회공동체로 맞이하기 위해 철저히 점검하는 ‘시험 기간’이었습니다. 더욱이 박해시절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교회공동체 존속을 위해서라도 ‘신앙의 보증’이 확실한 이에게만 ‘세례’를 베풀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이 이렇게 “세례 준비 기간”이라는 전통은 이 시기에 낭독하는 <전례독서>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세례자이지만, “세례를 간절히 열망하고 준비하던 지원자의 심정”으로 돌아가 오늘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하느님 자녀’로 우뚝 서는 ‘자기 쇄신’과 ‘희망의 순례’에 나서야 합니다.

특히 교회 전통은 이 사순절(四旬節)에 ‘세 가지 수행’(修行)에 힘쓰도록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도래했고 자라나고 있는 부활생명에 참여한(참여할) 하느님 자녀’의 마땅한 삶의 태도로 ‘세 가지를 실천’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간단히 ‘의식의 변화’라고 합니다. 이 ‘수행’들을 통해 더욱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빚어가라’는 뜻에서입니다. 이것을 수행해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은혜로 구원 얻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감사함’으로 이 수행들을 이어가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의 세계로 건너온 하느님의 자녀’(새로 남, 요한 3:5)라면, ‘감사’해서라도 마땅히 빛처럼, 생명처럼 삽니다(로마 6장).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의 변화’를 ‘감사’해서라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공감하며, 행동합니다. 그런 삶을 ‘새로 났다’(요한 3:5),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처럼 ‘빚어지기’까지 우리에게는 “‘의지적’으로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공감하며, 수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빚어지지 못한 자신을 알아차렸을 때마다 얼른 ‘회복탄력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의식의 변화’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의지적인 노력’을 익숙한 용어로 ‘수행’(修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에 그 세 가지 수행이 언급됩니다. ‘자선’, ‘기도’, ‘단식’입니다. ‘자선은 이웃’, ‘기도는 하느님’, ‘단식은 자신’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은 ‘물질’과의 관계에서 수행해야할 ‘의식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의식의 변화’를 일구기내기 전 단계에 있는 이의 행동과 ‘의식의 변화’(성화)가 일구어져 가고 있는 이의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 명백히 교훈하십니다. ‘의식의 변화’가 일구어져 가고 있는 이는(새로 난 이는) ‘위선적’이지 않고 오로지 그 수행 하나하나와 일치된 ‘사랑의 행동’을 합니다. 이런 상태를 다른 말로 ‘자유’(自由)라고 합니다. ‘자유’(自由)는 ‘스스로의 이유’라는 뜻입니다. 자기 행동의 원인과 결과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오직 ‘사랑’ 속에 살고 있는 이에게 이런 ‘자유’(自由)가 가능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를 오롯이 ‘사랑하는 이’에게서 터져 나오는 수행의 면모들이 ‘참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한마디로 인생이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가슴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성화)를 일구어내기 위한 ‘수행의 출발’인 ‘이마’(머리: 예전에는 남자는 머리에 재를 얹었고, 여자는 이마에 재를 발랐습니다)에 ‘재’를 바르는 축복이 있습니다. 말쑥한 차림으로, 또 꽃단장을 하고 나왔는데 ‘이마’에 ‘재’를 바르는 행동은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마에 ‘재’를 바름으로써 우리는 이번 ‘사순절’도 ‘의식의 변화’를 위한 ‘첫 수행’을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재’가 갖는 상징뿐 아니라 그것을 사고의 사령탑인 ‘머리’(이마, 특히 뇌과학으로 말하면 두뇌의 사령탑인 ‘전전두엽’이 위치하는 부위)에 바르는 행동은 ‘머리(의식)의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대로 하자면 ‘남에게 과시하고픈 자기 욕망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매해 사순절마다 요청되는 ‘자기 죽음’의 첫 수행, 그것이 ‘재 축복’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머리’(죄로 오염된 의식들인 생각, 감정, 기억)가 죽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계산에 빠른 ‘머리’(냉철한 논리)로 살아온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가슴의 삶’으로의 ‘투신’이 신앙입니다(마태 16:24). 이기적 ‘소유욕’에 빠져 살던 자기는 죽고, 가난하고 아픔을 겪는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비’와 ‘연대의 길’이 신앙입니다(마태 6:1-4). ‘내 뜻’을 중심에 두고 살던 자기는 죽고,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는 ‘기도의 길’이 신앙입니다(마태 6:5-6). ‘이제부터 나는 모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묻고 듣는 ‘겸손의 길’이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삶의 ‘주인’과 ‘창조주’로, 자신은 ‘종’과 ‘피조물’임을 매일 시인하는 ‘온유의 길’이 신앙입니다. ‘곡기 끊기’가 상징하는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스스로의 인생에서 추구해야할 길, 반드시 걸어가야 할 ‘숭고한 가치’가 있음을 ‘식별하는 길’이 신앙입니다(마태 6:16-18). 축적할수록 근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인 ‘재물’을 ‘신’(神)처럼 떠받들고 살던 어리석은 나는 죽고, 숭고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증거’ 하는 ‘용감한 길’이 신앙입니다(마태 6:19-21). 하느님의 자녀답게 ‘가난’, ‘정결’, ‘순명’으로 자신을 올곧게 세워가는 길이 신앙입니다.

“예수의 시신을 돌 위로 옮기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604

이렇게 ‘머리’(의식)로 살던 자기가 ‘날마다의 수행’을 통해 죽고, 동시에 ‘의식의 변화’(의식의 깨어남)가 ‘날마다’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변화하는 ‘존재 변모의 길’, 즉 ‘완전한 자유의 길’로 나가는 출구가 ‘재 축복’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지난주일 말씀 나눔 말미에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죽음’으로 ‘날마다’ 나아가는 ‘의식의 변화’ 없이 언젠가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존재 변모’를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의식’(죄로 오염된 생각, 감정, 기억)이 ‘날마다의 수행’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만이(갈라 2:20-21)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웃)을, 하느님을, 나 자신을 전혀 새롭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늘을 나는 ‘나비’처럼, 종국에는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모습으로 옮아가도록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존재 변모’라는 ‘새 몸’을 선물 받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 이가 ‘석양의 그림자’가 지더라도 받게 될 ‘불사, 불멸의 옷’입니다(1고린 15:42-44; 15:52-53; 2고린 3:18b; 필립 3:21).

그러나 우리는 ‘수행’(修行)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웃종교의 ‘고행’(苦行)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순절’에 많이 듣는 ‘극기’, ‘절제’, ‘근신’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사순절을 ‘고행 기간’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은 ‘입술’로 닦는 일이 아니라 ‘몸’으로 닦는 일을 동반하기에 ‘쉬운 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그 좋은 머리로 단단히 따져보고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라고 촉구하셨을 정도입니다(요한 6:60-67).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들은 그 질문 앞에서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결단을 감행했습니다(요한 6:68; 마태 7:13-14).

오늘 우리도 ‘의식의 변화’를 위한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생명의 수행’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어떤 분은 ‘좁고 험해서’ 고달프다며 포기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행’은 관점에 따라 ‘고행’일 수도 있고, ‘기쁨과 감사’일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자신이 붙들려 살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에 들어섰다고 통찰한다면 ‘수행’은 ‘고행’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즐거움)입니다. 자기생각, 자기감정, 자기문제에 노예처럼 지배당하던 삶에서 ‘해방되는 길’ 위에 있다고 성찰한다면 ‘사순절’(四旬節)은 ‘감사의 기간’입니다. 그 수행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날마다 더 깊이 ‘자각’해 낸다면, ‘자신이 반드시 걸어야할 생명의 길’을 더 잘 걷게 된다면, ‘사순절’은 역설적이게도 ‘희망의 기간’입니다. 더욱이 ‘기쁨과 감사와 희망’은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부활생명’을 체득한 이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성령의 언어’입니다.

이처럼 ‘사순절’(四旬節)은 ‘머리’로 살아가던 삶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수행의 시기’입니다. 감정, 기분, 아집에 붙잡혀 살아 온 ‘나의 이마’(머리)에 ‘재’를 바르며 ‘죽음’을 선포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머리’를 잘라버리라는 초대가 ‘이마’에 ‘재’로 그어진 ‘두 줄’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통해 인생의 진정한 의미 속으로 들어오라는 수행기간의 출발이 오늘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고행’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세상 한 복판에서, 죄인들(소외된 사람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과 연대하면서, 반대자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걷는 동행’, 즉 수행의 출발이 오늘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깊이, 언제까지 자선’, ‘기도’, ‘단식’, ‘재물을 하늘에 쌓기’를 ‘수행’해야 합니까? 자신에게만 주목해 있던 널뛰는 ‘감정’이 이웃을 향한 ‘연민’과 ‘감동’이 될 때까지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휩쓸리던 ‘기분’이 내면의 ‘기쁨’(즐거움)이 될 때까지입니다. 혼자만의 ‘고행’이 주님과 함께 있다고 온전히 느껴지는 ‘동행’이 될 때까지입니다. ‘애벌레’에서 ‘고치’를 틀고 인내하다, 종국에는 ‘하늘’을 차지하는 ‘나비’처럼, 이 썩을 몸이 ‘불멸’, ‘불사의 영원한 옷’을 선물 받아 ‘존재 변모’를 누리는 그 날까지입니다. 우리는 그 ‘존재 변화(변모)의 날’을 ‘지금 여기서’부터 꿈꿉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꿈꿉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희망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로 ‘새 물결’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시편》과 《이사야》를 인용해, 오늘 전례독서에 등장하는 요엘과 바울로처럼, ‘바로 지금’ 성취되어야 할 자기 꿈을 향한 연민과 감동을 이끌어냈습니다. 우리도 이 ‘재’를 앞에 두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됩니다. 이미 도래해서 자라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반드시 완성될 ‘그 존재 변모의 날’을 ‘지금 여기서’부터 꿈꿉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일의 ‘출발’과 ‘완성될 영원한 미래상’을 ‘지금 여기서’부터 바라봅니다.

‘한 처음’ 하느님은 ‘티끌’(진흙은 원어로는 티끌입니다)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에도 ‘티끌’(재)을 ‘십자 표시’로 바른 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십자 표시’를 한 우리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는 ‘자기 수행’을 통해 올해도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의식의 변화’(성화)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를 오롯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의식의 변화’를 한 단계, 한 단계 일구어 가도록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렇게 ‘성령의 도움 안’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의식의 변화’를 일군 이들은 죽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새 하늘, 새 땅’에서 ‘부활 생명’을 누릴 ‘존재 변모’라는 ‘새 몸’을 선물 받을 것입니다(1고린 15:42-44; 15:52-53; 필립 3:21).

언제가, 하느님은 ‘새로 빚으신 그 몸’에 영원한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기 위해 당신 품에서 잠자던 우리를 ‘깨우실’ 것입니다. 그 ‘새 몸’의 주인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의 촛불이 꺼질 때 ‘당신 품에 모두 옮겨 놓으신’ 가장 빛나던 날의 나의 목소리를 ‘호~’하고 그 ‘새 몸’에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석양의 그림자’ 같은 내가 ‘사랑하는 마음’(연민의 마음)으로 살았던 순간들의 ‘기억’을 ‘당신 품에서 꺼내어’ 그 ‘새 몸’에 ‘호~’하고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마음으로 살았던 순간들의 ‘노래들’을 ‘당신 품에서 꺼내시어’ 그 ‘새 몸’에 ‘호~’하고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내가 이웃과의 ‘연대’와 ‘공감’으로 가장 빛나던 날의 ‘모습’을, ‘생명’과 ‘평화’를 일구며 당신의 뜻대로 살았던 날의 ‘모습’을, ‘가장 숭고한 가치에 나를 바치며’ 걸어가던 날의 ‘모습’을 ‘당신의 품에서 꺼내시어’ 그 ‘새 몸’에 ‘호~’하고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그 날, 나는 영원히 빛나는 ‘생명의 사람’으로 ‘깨어나’ 사랑의 주님을 찬미할 것입니다. 영원한 약속을 성취하신 ‘주님의 얼굴’을 마주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주님과 두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출 것입니다. 그 장면은 이번 사순절(四旬節)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의식의 변화’를 통해 ‘새 몸’을 입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미래입니다. 우리는 빛나는 서로의 존재를 찬미하며 영원한 친교를 누릴 것입니다. 그런 꿈의 날을 향한 출발이 오늘 ‘재 축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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