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23. 주의 변모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7주일이자 주의 변모주일입니다. 우리는 ‘공현대축일’로 시작한 ‘공현절기’를 마감하고, ‘사순절’(四旬節)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몇 걸음 앞두고 있습니다. 그 시작을 앞둔 오늘 예수님께서 ‘신성의 빛’을 발하시며 영광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변모(變貌)하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변모만이 아니라 ‘빛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 자신의 본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 역시 소중합니다. 우리도 영광의 주님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일상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이 ‘빛의 자녀’로 거듭났음을 명확히 알아차리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코로나19’로 환난을 겪는 국민들을 모든 근심과 불안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 보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들이 이 세상의 근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24:12-18
  • 시편 – 2
  • 2독서 – 2베드 1:16-21
  • 복음서 – 마태 17:1-9

연중 7주일이자 ‘주의 변모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주님의 변모,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꿈꾸라’입니다.

오늘은 ‘공현대축일’(1월 6일)로 시작한 ‘공현절기’를 마감하는 ‘주의 변모주일’입니다. 정확히는 ‘주의 세례 주일’ 이후 주간부터 시작한 ‘공현 후 연중시기’를 마감하고, ‘사순절’(四旬節)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몇 걸음 앞둔 주일입니다. 지금까지의 위대한 여정을 마감하고 새로운 시작을 앞둔 오늘, 예수님께서 ‘신성의 빛’을 발하시며 영광스러운 본래의 모습으로 ‘변모(變貌)하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Ready for Ash Wednesday”, younhaology@instagram

교회력에 따르면 ‘주의 변모축일’(The Feast of the Transfiguration)은 해마다 8월 6일로 고정입니다. 8월 6일이 주일과 겹칠 경우에는 다른 주일보다 우선하는 ‘주요축일’로 기념합니다. 전통적으로 성공회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직전 주일을 ‘공현 후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주의 변모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이렇게 ‘주의 변모’ 사건을 두 번 기념하는 데, 어느 시점에 기념하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지는 셈입니다.

물론 ‘사순절’을 시작하는 직전 주일이 아니라 ‘사순 2주일’을 ‘주의 변모주일’로 지키는 세계성공회도 있습니다(로마가톨릭도 이 전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새로 수정된 기도서의 ‘사순 2주일’ 전례독서도 ‘주의 변모사건’을 <복음서>로 읽을 수 있도록 ‘선택’(option)으로 배정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교회력으로 ‘가해’이고, 가해 동안은 《마태오복음》이 <복음서>로 주로 낭독됩니다[사순절기 주일에는 《요한복음》이 배정되기도 합니다]. 교회력에서 ‘주의 변모사건’이 갖는 위상에 대한 이런 배경이해를 가지고 이제 말씀 나눔을 진행합니다.

‘주의 변모사건’은 <공관복음> 모두에 전해집니다(마태 17:1-9; 마르 9:2-9; 루가 9:28-36). <공관복음>은 ‘마태’, ‘마르코’, ‘루가’라는 세 <복음서>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또 잘 묵상해 보면 《요한복음》도 이 사건을 회상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요한 1:14). <공관복음>이 보다 직접적인 ‘주의 변모사건’에 대한 서술이라면 《요한복음》은 그 사건의 핵심만을 한 줄로 서술하는 식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모두가 ‘주의 변모사건’을 서술하고 있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주의 변모사건’을 서술하고 있는 <공관복음> 중에서 《마르코복음》이 ‘원(原)자료’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원자료를 참고해 자신들의 신학적 관점을 반영하여 본문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세히 살피면 <공관복음> 사이의 제법 많은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은 아무런 여유도 주지 않고 ‘급작스럽게’ 일어난 ‘변모사건’으로 서술합니다. 반면에 ‘기도’를 강조하는 《루가복음》은 이 사건이 ‘기도하시는 동안’ 상대적으로 좀 더 천천히 일어났다고 서술합니다. 데려간 제자들 이름의 순서도 차이가 납니다.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루가복음》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이것은 당시 각각의 교회 공동체 안에 퍼져있던 제자들 사이의 서열의 반영일지도 모릅니다. ‘변모순간’을 서술하면서도 《마르코복음》이 ‘옷’에 좀 더 치중했다면 《루가복음》은 다소 단순하고, 《마태오복음》은 ‘옷’ 뿐 아니라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고 그 정점의 순간을 서술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별과 함께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라고 성탄이야기를 들려준 그의 신학적 관점과 일치 합니다.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일상에서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은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났다’고 서술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그 자리에 나타난 두 사람의 순서를 ‘모세’와 ‘엘리야’로 수정합니다.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은 그 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침묵’합니다. 하지만 《루가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대화’였다고 밝힙니다.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은 그 변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처음부터 ‘깨어’있지만, 《루가복음》은 세 제자가 깊이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것으로 서술합니다.

베드로가 그 사건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부른 ‘호칭’도 각각 차이가 납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랍비’, 《루가복음》에서는 ‘에피스타테스’, 《마태오복음》에서는 ‘키리오스’입니다. ‘랍비’는 아람어로 ‘선생님’(나의 주인님)이라는 뜻입니다. ‘선생님’으로 번역한 《루가복음》의 그리스어 ‘에피스타테스’는 ‘곁에 서 있는 자’, ‘감독’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마스터’(master)에 가까운 호칭입니다. ‘주님’으로 번역한 《마태오복음》의 그리스어 ‘키리오스’는 ‘모든 것을 통치하는 자’의 뜻으로 오로지 ‘로마 황제’에게만 붙이던 호칭입니다. 따라서 ‘에피스타테스’보다는 ‘키리오스’가 훨씬 ‘강력’하고 ‘존경도’가 담긴 호칭입니다. 이 외에도 좀 더 많은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 데 여러분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력으로 ‘가’해인 올해는 《마태오복음》에서 ‘주의 변모사건’을 배정했습니다. 내용에서 차이점들이 발견되지만 예수님의 ‘첫 번 수난예고 후’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루가복음》은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그 ‘첫 번 수난예고’가 있은 지 ‘여드레쯤’ 지나서 ‘주의 변모사건’이 일어났다고 서술했습니다. 반면에 《마태오복음》은 원자료인 《마르코복음》을 따라 이렇게 서술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 마태 17:1

‘6일 후’, 즉 ‘7일째’라고 서술합니다. 여러분은 ‘6과 7’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두 가지 사건이 떠오릅니다. 먼저 1독서 《출애굽기》에서 들은 것처럼 ‘모세가 십계명을 받던 사건’이 떠오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 올라 ‘율법을 받기 전 6일 동안’ 기다렸습니다(출애 24:16). 마침내 ‘7일째’ 되는 날 하느님께서 ‘구름’ 속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십계명’을 주십니다(출애 24:17; 31:18). 모세는 거기서 ‘40일’을 머물며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으로 《창세기》가 서술하는 ‘창조의 시작인 6일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제 6일)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제 7일)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습니다(창세 2:2).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6일 동안’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시며,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습니다(창세 2:3).

이 두 사건을 참고해 볼 때 ‘6일 후’, 즉 ‘7일째’는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완성의 전형’(典型)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마태오는 ‘변모사건’의 서두를 ‘엿새 후’, 즉 ‘7일째’라고 서술함으로써 이제 일어날 사건이 ‘하느님께서 완성하실 일의 전형’(典型)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종국적으로 가져다주실 그 ‘완성된 미래의 모습’을 보여줄 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가십니다. 그들은 ‘최측근’입니다. 말하자면 ‘선별’되었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도 이 세 명만은 꼭 데리고 가셨습니다(마르 5:37).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율법적 이유’도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어떤 사건에 대한 ‘증언’이 효력이 있으려면, 오늘 2독서 《베드로의 둘째 편지》에서 듣듯이(2베드 1:16-18), 적어도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신명 19:15).

《루가복음》처럼 세 명의 제자들을 ‘기도 수행의 언어’로 ‘의미주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가난’, ‘정결’, ‘순명’을 뜻합니다. 사실 모든 ‘기도 수행’은 ‘가난’, ‘정결’, ‘순명’이 함께 해야 합니다. ‘가난’으로 출발하고, ‘정결’로 진행하며, ‘순명’으로 끝맺습니다. ‘첫 번 수난예고’와 연결시키면 ‘가난, 정결, 순명’은 ‘죽는 일’입니다(마태 16:24). 자기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탐진치’(貪瞋痴)에 빠진 ‘이기적인 나는 죽고’, ‘하느님으로 사는 일’이 ‘기도 수행’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가신 ‘높은 산’이 어디인지는 정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볼’ 또는 ‘헐몬’ 산이라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모릅니다. ‘모세’를 좋아하는 마태오에 따르면 그 ‘높은 산’은 ‘모세’가 자기의 시종인 ‘여호수아’를 데리고 올라간 ‘시나이 산’을 떠오르게 합니다. 실제로 ‘산’은 ‘산상수훈’에서처럼, ‘마태오’가 뭔가 중요한 사건을 언급할 때 주로 등장시키는 ‘배경’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의 ‘위엄’과 ‘통치’의 동의어입니다.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계시의 장소’입니다. 한마디로 ‘산’은 지상에서 ‘하늘’로 가는 일종의 ‘문’(門)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산’으로 가서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2장). 순종한 아브라함은 거기서 ‘천국’ 같은 ‘야훼 이레’를 경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출애 19-20장; 24장). 그 거룩한 산에서 모세는 하느님과 이야기하였습니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대면하는 ‘천국의 체험’입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누가 참 하느님인지를 드러냈습니다(1열왕 18:20-40). ‘산’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원한 승리의 장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시온 산’ 위에 세워졌습니다(시편 50:2). 예수님은 ‘해골 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마르 15:22), ‘올리브 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루가 24:50-51; 사도 1:12). 오늘날도 하느님과 가까이 접촉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산’에 올라가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이처럼 산은 ‘하늘’을 보여주는 ‘창’(窓)이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門)입니다. 물론 그 ‘산’이 가리키는 ‘속뜻’은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에베레스트’ 보다 더 ‘높은 산’이 있고, 내면에 있는 ‘그 산’이야말로 진정 중요합니다.

Iconography Metamorphosis Transfiguration Church

거기서 그들은 결코 일상적이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 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 마태 17:2

이 ‘변모의 순간’을 묘사하면서 마태오나 마르코는 ‘변화하다’, ‘변형하다’는 뜻의 동사 ‘메타모르푸’(metamorphoo)를 사용했습니다. 루가는 ‘질적으로(형태적으로) 다른’이라는 뜻의 형용사 ‘헤테로스’(heteros)를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공관복음>이 사용한 단어는 차이가 나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상의 존재로 달라졌다’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특히 마태오는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 모세의 사건(출애 34:29-30)과 비교한 묘사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그 순간 ‘존재의 변화’를 그들 앞에 ‘드러내셨다’(公顯, Epiphany)는 뜻입니다.

2독서 《베드로의 둘째 편지》에서 사도 베드로도 그 변모가 꾸며낸 ‘신화’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들은 영광스러운 사건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정말이지 ‘성육신’으로 ‘인성’(人性)을 취하신 예수님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본질적인 신성’(神性)이 밝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지켜온 ‘공현절기’가 최고조로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달라진’ 예수님의 모습을 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공관복음>은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였다고 공통으로 전해줍니다. 원자료인 마르코는 ‘엘리야와 모세’라고 적었는데, 마태오와 루가는 ‘모세와 엘리야’라고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둘 다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신앙의 영웅들’입니다(출애 31:18; 열왕상 19:9-18).

먼저 ‘모세’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가 전하는 것처럼, 그는 ‘출애굽의 지도자’이자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이 적힌 ‘증거판’ 두 개를 받아가지고 내려옵니다(출애 31:18; 34:29-30). 백성들이 그의 얼굴을 보니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영광을 덧입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가 ‘시나이 산’에서 40일간 머무를 때 일어난 ‘변화사건’ 때문에 오늘 복음이야기의 배경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시나이 산’에 이른 1세대들인 그들은 ‘빛나는’ 얼굴의 모세가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출애 34:30). 그는 두려워하는 그들을 위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할 정도였습니다(출애 34:33-35). 사도 바울로는 이 장면을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 매여 살아가는 유다인들의 무지함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2고린 3:14-16).

훗날 환하게 빛나던 모세의 얼굴을 보았던 1세대들은 ‘하느님을 시험한 불순종’으로 40년 광야여정에서 다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남은 1세대들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후예들, 즉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둔 새로운 시대의 주역들에게 설교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도록 ‘거듭’(申) 강조하여 명령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 申命記》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미래에 세워주실 것이라 예언합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 신명 18:15

이 예언의 당사자인 모세의 출현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실 과업’(사명)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설교로 예언한 ‘예언자’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따라나선 ‘몇몇 떠돌이들’을 ‘노예’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이끌었지만,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하시어 ‘하느님 나라’(하늘나라)로 인도하실 일을 하실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정체성’과 ‘사명’은 너무나 고귀하기에 마르코와 달리 마태오와 루가는 ‘엘리야’보다 ‘모세’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엘리야’입니다. 그는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모세와 달리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승천’한 사람입니다(열왕하 2:1-12).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했다”는 확신은 그가 ‘메시아가 오시는 종말 사건들’이 있기 전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낳았습니다(말라 4:5-6). 따라서 예언자들의 대표인 ‘엘리야’가 그 자리에 출현한 것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있을 예수님의 ‘죽음’이 ‘종말 사건들’과 결정적으로 관련 있음을 나타냅니다. 더욱이 ‘살아서 승천한’ 그의 출현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늘로’ 오르실 분이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가르멜산 수도원 마당에 있는 엘리야 동상,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엘리야 한 사람이 대결해서 이긴 장면입니다(열왕상 18:20-40). 이어지는 이야기에도 1독서와 복음이야기의 경우처럼 ‘구름’이 등장합니다(열왕상 18:44).

이처럼 그 자리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께 사로잡힌 위대한 신앙의 영웅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상적 자기’에서 ‘신적 변화와 변형’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독특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갔고(신명 34:5-6), 세상의 종말에 돌아올 것으로 기대된 인물들입니다. 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원자료인 《마르코복음》을 따라 《마태오복음》도 침묵합니다. 《루가복음》을 참고하자면 이렇습니다.

… 그들은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루가 9:31

《루가복음》에 따르면 그 대화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수행하시려는 ‘공생애의 마지막’, 즉 ‘죽음’입니다. 《루가복음》에 수사학적으로 ‘죽음’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기본형은 ‘엑소도스’(exodos)입니다. 《출애굽기》의 영어 제목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떠남(나가기), 탈출, 출발, 여행의 시작, 출구’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디서 어디로 ‘탈출’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자리에 서 있던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드러납니다. ‘지상’에서 ‘하늘’입니다. 이렇게 보면 ‘엑소도스’라는 단어는 ‘하늘로의 탈출’인 ‘승천’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루가 9:51). 더욱이 ‘예수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은총’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죄’(혼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인 ‘구원’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를 노예로 붙잡고 있는 ‘죽음’(불안, 절망, 염려, 걱정)으로부터의 ‘출구’이자 ‘해방’입니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모세가 행한 ‘출애굽 사건의 새로운 재현’일 것이라 해석해 줍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하늘’로의 탈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시킬 그 ‘구원의 과업이 이루어질 곳’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물론 ‘예루살렘’은 우리 ‘마음의 중심자리’에 대한 영적 상징입니다. 인류 구원의 과업,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예루살렘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수난하시고 죽으실 것’이지만 그곳에서 ‘부활’하실 것입니다. ‘변모사건’은 예수님과 예루살렘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내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루가복음》의 도움을 받아 ‘주의 변모사건’이 ‘첫 번 수난예고’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공통으로 전하는 <공관복음>에 담긴 중첩된 의미를 발견합니다. ‘일차적’으로 ‘변모사건’은 ‘첫 번 수난예고’ 후에 ‘혼란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려는 목적’입니다. 그 ‘계시체험’(신비체험)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이 믿음과 희망을 간직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죄와 죽음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인류를 해방시킬 구세주이심을 밝혀주려는 목적’입니다. ‘예수께서 어둠 속을 살고 있는 인류의 참 빛이심을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려는 계시체험’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목적을 위한 ‘동반자’였습니다.

이제 ‘공현절기 마감’과 ‘사순절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몇 걸음 앞둔 오늘 우리는 교회가 이 ‘변모사건’을 기념하게 하는 보다 ‘직접적인 의도’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격려하려는 목적’입니다. ‘우리 역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순절의 여정에 용기를 갖고 나서라’는 ‘초대’입니다. 곧 사순절기로 들어가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수난’과 ‘죽음’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부활’과 ‘승천’도 바라보라는 ‘은혜로운 초대’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보여주신 우리의 ‘영광스러운 미래’, 즉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존재 변용’을 희망하며(1고린 15:42-44, 52-53) ‘용기를 내라’는 ‘은혜로운 초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세 분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그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께 여쭙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 마태 17:4

그는 그 황홀한 광경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좀 웃깁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들이 ‘천막’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평소처럼 갈팡질팡합니다. 하지만 그는 일상의 차원과는 다른 ‘신적 존재들의 현존’ 앞에 자신들이 있다는 사실만은 똑똑히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그곳에 ‘초막’을 지어서 ‘영광스러운 임재’를 ‘계속해서’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 영광의 현장이 멈추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가 말한 ‘초막’은 자신의 ‘신적 체험’을 ‘구체화’하고, 그 체험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상징물’입니다. ‘산 아래’ 세상이 상징하는 ‘일상의 문제들’로부터 ‘해방’(탈출)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입니다.

더욱이 ‘첫 번째 수난 예고’와 관련짓자면 그의 말은 ‘예수님을 유혹’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중요합니다. ‘수난하고,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는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영광스럽게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하고만 같이 있고 싶다는 ‘집착’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에게만 미래의 십자가를 피하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십자가를 피하고 싶다는 욕심’입니다. ‘수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던 ‘욕망’입니다. 특히 그는 ‘천막 셋’이라고 말함으로써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대등하게 두는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좌충우돌’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정말 오해했습니다. ‘신비체험’은 나중을 위해 ‘저장’해 둘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분명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 내면의 ‘높은 산’에 올라 ‘천상의 영역’을 힐긋 보는 특별한 ‘신적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너무나 ‘황홀’합니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그야말로 ‘순간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순간적인 신비체험’이 아니라 ‘훨씬 긴 일상’을 살아야 할 존재임을 알아차립니다.

베드로가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던진 ‘초막’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3대 명절인 ‘초막절’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 34:22; 신명 16:16). ‘초막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매년 가을, 수확이 완료 될 때 1주간 지켰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 감사절’입니다. 이 ‘초막절’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을 새롭게 하는 절기라는 점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생각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초막’이란 말을 내뱉었지만, ‘변모사건’의 의미를 밝혀주는 대단히 중요한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눈을 통해 ‘변모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새 언약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물론 그 ‘새 언약’은 초막이 아니라 ‘골고타 산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산상에다 ‘초막’을 치고 사시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베드로의 그 정신없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빛나는 구름’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히브리어로 쇄키나)와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출애 16:10; 19:9; 24:15-18; 33:9-11). 그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마태 17:5

‘빛나는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를 듣고 그들은 너무도 두려워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죄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일종의 ‘예배 자세’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세 개의 ‘초막’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예수님은 굳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장면을 처음부터 보고 계셨던 하느님의 대답은 “안 돼!”였습니다. 이것을 명백히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했기에 하느님은 천사를 시키시지 않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물론 ‘빛나는 구름’ 속에서 들려온 그 음성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회상시킵니다(마태 3:13-17). 하느님은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시편 2:7; 이사 42:1). 이 구절 때문에 <2편>이 하느님 말씀의 응답인 《시편》으로 배정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세례 때의 음성에다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추가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수준이 아님’을 명백히 들려주십니다. 분명 그들은 훌륭한 믿음의 영웅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그들은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초점과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신명 18:15) 수난과 부활과 승천으로 나아가는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구원 과업을 위해 선택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주의 변모사건’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강조’입니다.

그러면 제자들 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는 우리가 듣고 따라야할 ‘예수님의 그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 번 수난예고를 떠올려보십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 마태 16:24

부활절기를 준비하는 사순절기로 들어가는 우리가 ‘심장’에 새기고 있어야 할 ‘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두려워서 땅에 엎드려 있을 때 예수께서 가까이 오시어 ‘손’으로 어루만져주십니다. ‘손으로 어루만지신다’는 이 접촉의 표현은 ‘주의 변모사건’을 전하는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마태오만 전해줍니다. 사실 마태오에는 손 내밀어 어루만지시는 다정한 접촉이 반복됩니다(마태 8:3,15; 9:25,29). 이어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 – 마태 17:7

그 자비하신 손길과 음성 앞에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을 때는 예수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빛나던 구름도,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밖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앞에서 율법과 예언은 ‘마감’되고(마태 11:13), 구약의 모든 약속은 복음이신 예수님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즉 율법과 예언의 대표자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그 길을 준비하는 예비적(그림자)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제 율법과 예언의 완성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물러나야 합니다(마태 5:17).

종국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과 승천으로 구원을 완성하셨기에 그들의 역할은 모두 끝났습니다. 인류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공관복음> 기자들은 ‘주의변모 사건’에 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파송성가로 부를 484장 3절이 떠오릅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그곳이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하늘나라라는 찬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어디로 가자고 하십니까? 일상의 삶입니다. 그 일상에서 뭘 하자는 겁니까? ‘존재의 변화’를 일구러 가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름”으로써 일구어지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이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비체험’한 제자들이 허황된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이렇게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 마태 17:9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이른 바 ‘메시아 비밀’입니다. 오늘날처럼 인기를 끌려는 목적으로 자기홍보에 열을 올리는 세상에서는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당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존재의 변화’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였습니다. 실제로 ‘변모사건’을 목격한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이 그런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한들 당시에는 믿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오늘 서신으로 낭독한 《베드로의 둘째 편지》에서 이 사건을 또렷이 언급했고(2베드 1:16-18), 요한도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는 언급을 했습니다(요한 1:14).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을 통해 거듭나 일상에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마침내 ‘존재의 변화’를 온전히 일구어낸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분명 ‘변모사건’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첫 번 수난예고’ 후에 ‘혼란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에서 ‘기쁨과 용기’가 샘솟게 하려는 ‘신비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희망’을 위해서 베풀어주신 ‘신비체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그들이 겪게 될 ‘고난에 대비’시키는 일종의 준비였습니다. 고난과 죽음이 결코 마지막이 아님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처럼 ‘주의 변모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궁극적 승리’를 보여주시어 제자들을 ‘보존’하시려는 ‘주님의 은혜로운 초대’였습니다. 그들이 고난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변모사건’을 떠올린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증언해 주시던 ‘하느님의 음성’을 떠올린다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그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 때의 ‘신비체험’은 곧바로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만큼’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존재의 변화’를 그들에게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나누어주신(보내주신) ‘성령의 능력’을 받은 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거듭났습니다.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빚어가셨습니다. 그들은 담대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고, 사랑의 사람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들은 일상에서 점점 ‘존재의 변화’를 일구어 갔습니다. 모두가 성령이 일으킨 변화였습니다. ‘성령에 의해 그렇게 다시 태어나 빚어져 가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변화’이며, 하느님이 그들에게 ‘선물’하시는 ‘영광의 표시’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 ‘변화산’(변모산)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성령 안에서 거듭난’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구원의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처럼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상에서 ‘사랑의 삶’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 삶이 우리를 하느님 자녀다운 본래의 모습으로 빚어갑니다.

금주 수요일부터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고 발견해 가는 절기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일상에서 ‘존재의 변화’를 일구어가자는 ‘순수한 초대’입니다. 사순절에 강조하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전부 ‘자기 죽음’을 통해 ‘존재의 변화’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입니다. 이 ‘수행’을 이어가다보면 전혀 예상치 않은 순간 주님은 오늘 《마태오복음》이 전하듯이 ‘자신의 현존’을 우리 마음의 눈앞에 ‘빛’처럼 보이실 때가 있습니다. 이 수행을 이어가다보면 별안간 주님은 당신의 ‘세미한 음성’을 우리 마음의 귀에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 ‘신비체험’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황홀한 순간입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주님을 보았다거나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 속에서 우연히 예수님의 형상을 보았다고 기뻐서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벚꽃 흩날리는 봄바람 속에서 우연히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기뻐서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주장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말 주님이 그에게 그런 체험으로 만나주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욕망이 있고, 우리의 눈과 귀는 마음의 욕망을 바깥 사물들을 통해 그런 식으로 반영해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게다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느끼든지 아니면 느끼지 못하든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꼭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시지 않을지 몰라도 결코 우리를 홀로 남겨두시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만나고 있다면’ 이미 그는 진정으로 ‘신앙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을 ‘감사함’으로 살고 있다면, ‘일상’을 ‘사랑’하며 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사순절에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라는 수행을 교회가 강조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오늘 ‘주의 변모사건’을 묵상하는 우리는 ‘산 아래 세상인 일상’이 있음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베드로처럼 특별한 체험에 붙잡히지 않고 일상의 삶에 더 주목해야 함을 기억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기도(단식, 자선) 수행’을 통해 ‘머리’(생각)로만 살려는 ‘이기적인 자기를 부인’해야 함을 기억합니다(마태 16:24).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기도(단식, 자선) 수행’을 통해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가슴(공감하는)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기억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기도(단식, 자선) 수행’을 통해 자기생각(욕망), 자기감정, 자기문제에 붙잡혀 살아가는 ‘이기적인 나’는 죽고, 그 죽음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는 ‘존재변화의 길’, 즉 ‘자유의 길’로 나아가야 함을 기억합니다(마태 16:25).

우리가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이마’(머리)에 ‘재’(ash)를 바르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죽음’으로 나아가는 ‘의식의 변화’ 없이 ‘존재 변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의식’(생각, 감정, 기억)이 바뀌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세상을 전혀 새롭게 ‘보고 들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변모사건’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존재 변화의 길’로 들어서는 사순절이 결코 ‘고행’(苦行)의 기간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순절이라고 하면 ‘극기’니 ‘절제’니 하는 말들을 많이 듣다보니 다들 ‘고행’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반대입니다. 오히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구속’이 아니라 ‘자유의 길’을 가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길’을 안내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집착’이나 ‘자기문제’에 쳐 박힌 삶, 또는 ‘자기감정’에 묶인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한마디로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그러니까 ‘기쁘게’ 사순절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지, 고난의 행군처럼 지나는 기간이 결코 사순절이 아닙니다. 그런 영성은 정말이지 《성경》이 말하려는 본래의 뜻도 아니고 현대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나도 낑낑대면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 매여 있었는지, 내가 어디에 붙들려 있었는지를 명확히 발견하는 절기입니다. ‘내가 명예에, 돈에, 권력에, 인기(인정받음)에, 과거에, 경쟁에, 자식에, 사랑에 붙들려 있었구나…. 내가 분노(억울함)에, 슬픔에, 죄책감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붙들려 있었구나…’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기뻐지고, 삶을 더 즐기는 기간이 역설적이게도 사순절입니다. 차가운 ‘머리’에서 따뜻한 ‘가슴’으로 가는 길이 사순절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지 몸으로 체득해 가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감정에서, 기분에서, 자기 아집에서 나오라는 ‘초대’가 사순절입니다. 언제까지요? ‘감정’이 ‘감동’이 될 때까지, ‘기분’이 ‘기쁨’이 될 때까지, 혼자만의 ‘고행’이었던 삶이 ‘동행’이 될 때까지입니다. 내가 주님과 같이 있다고, 우리 서로가 함께 있다고 느낄 때까지입니다.

이렇게 ‘자기 죽음의 길’을 일상에서 잘 걸어간 이들은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것처럼, 언젠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2고린 3:18). 이 썩을 몸이 순식간에 ‘불멸의 옷’을 입을 것입니다. 이 죽을 몸이 순식간에 ‘불사의 옷’을 입을 것입니다. 그렇게 ‘애벌레’에서 ‘나비’처럼 ‘변모’하여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42-44, 52-53; 필립 3:21). 진정 그런 ‘복락’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공현절기를 마감하는 ‘주의 변모주일’을 통해 교회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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