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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16. 연중6주일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하늘나라 공동체인 교회, 생명(행복) 근원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나무(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성경》 전체를 꿰뚫는 핵심 정신이요, 하느님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교훈하십니다. 이 가르침처럼 하느님의 은혜 아래 있는 우리가 내면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관계 속에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가져오도록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일찍이 계명을 주시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법을 마음에 새기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30:15-20
  • 시편 – 119:1-8
  • 2독서 – 1고린 3:1-9
  • 복음서 – 마태 5:21-37

연중 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하늘나라 공동체인 교회, 생명(행복) 근원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나무(성전)’입니다.

1독서《신명기》는 ‘생명을 선택하라’는 모세의 설교입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시나이 산’ 계약에 참여한 1세대들은 불순종으로 40년 광야여정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는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해 온 위대한 설교의 결론을 선포합니다. 그 결론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라’입니다. ‘우상’(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에 이스라엘의 운명과 모든 가능성이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을 선택(사랑)한 삶의 모습은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한 마디로 ‘율법준수’입니다. 이것을 모세는 ‘거듭’(申) 강조하여 명령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 申命記》입니다. 《신명기》는 출애굽 1세대에게 전해준 ‘하느님의 율법’을 가나안 입성을 앞둔 2세대에게 ‘다시 해석하여 전해주는 설교(말씀)’라는 뜻입니다. 물론 본문은 모세 당시가 아니라 ‘바빌론 유배시절’에 재편집되었을 것입니다(신명 30:1~7).

모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 신명 30:16

이 선포와 약속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설교말미에 또 환언합니다(20절).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는 삶이 ‘생명과 행복의 길’입니다. 어떻게 하는 일이 하느님을 향한 최우선의 사랑과 순종과 충성을 다하는 삶의 태도인지는 ‘율법’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준수’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삶이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이며,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는 삶입니다. 이 ‘생명(행복)의 길’을 선택한(하느님을 사랑한) ‘보상’은 그들과 후손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자리 잡고 오래 잘 사는 ‘복’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율법준수’라는 ‘생명의 길’을 ‘최우선으로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고, ‘순종’하며, ‘충성’하는 길을 걷지는 않습니다. 2독서와 연결하여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육적인 사람’처럼 세속적인 생활에 빠져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 ‘불순종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하늘나라)에서의 ‘추방’과 ‘포로생활’과 ‘민족의 멸망’입니다. 이렇게 ‘율법준수’를 명령하는 1독서는 하늘나라 백성 공동체인 교회에게 그 율법준수의 진정한 정신을 ‘드러내 주시는’(공현, 公顯) 복음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

《시편》 119(1-8절)은 ‘하느님의 말씀’(율법)인 1독서에 대한 응답(찬미)입니다. ‘율법(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복되다’고 찬미하면서 ‘그렇게 살 수 있기를 갈망’하는 노래입니다. 전체(1-176절)가 <1편>처럼(1편의 확대판이라는 별칭도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느님이 주신 ‘율법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미하는 시(詩)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흔히 히브리어 ‘알파벳 시편의 백미’(白眉)로 꼽힙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순서를 따라 ‘각 절의 첫머리를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절들을 8절씩 1문단으로 묶어 총 22문단으로 구성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가’ 이렇게 운을 떼고 ‘가’로 첫머리를 시작하는 절이 8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맨 마지막 문단은 ‘하’ 이렇게 운을 떼고 ‘하’로 첫머리를 시작하는 절이 8개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찬미한 1-8절은 22문단 중 ‘첫 문단’으로 각 절이 히브리어 알파벳 첫 자(字)인 ‘알렢’(Alef, א)으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119편>의 전체적인 구조가 ‘알파벳 시’의 형식이다 보니 내용의 짜임새나 각 문단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은 약합니다. 하지만 모든 절에 ‘율법’을 가리키는 ‘법’, ‘언약’, ‘길’, ‘계명’, ‘뜻’, ‘명령’, ‘바른 결정’, ‘말씀’, ‘약속’, ‘법규’ ‘ 법령’ 같은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룹니다. 또한 ‘유일하신 하느님이 주신 말씀’(율법)의 중요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삶이 괴로움과 곤경, 박해와 시련 속에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진정한 ‘위로와 기쁨’, ‘희망과 구원’, ‘생명과 빛’, ‘자유와 해방’, ‘지혜와 진리’의 ‘원천’임을 깨우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들려지거나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적용’되고, 그 의미가 깊이 ‘음미’(吟味)되며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사실 《시편》의 아름다움과 위대성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바로 그 힘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시인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삶의 지침’이 되며 ‘위안’이 됩니다.

다소 길지만 천천히 <119편> 전체를 ‘음미’해 보십시오. 고난 속에 있던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고뇌’를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기도”하는 그 ‘신실한 모습’에 감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기에 ‘음미’하다보면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다잡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희망과 구원’을 발견합니까? 삶이 곤고하거나 힘겨울 때 마음에서 암송되고, 적용되며, 지침이 되는 그 ‘한 말씀’, 즉 ‘첫째가는’ 계명이 있습니까? 정말로 이 시인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고 있습니까?(1절) 하느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마음을 쏟아’ 하느님을 찾습니까?(2절) 나쁜 일 하지 않고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그 길’만 따라갑니까?(3절) 그렇게 살고 있다면 진정 ‘행복한 인생’입니다. 아무쪼록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갈망’하는 ‘어린양’ 같은 우리를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4-8절).

2독서는 ‘하느님의 일꾼’(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들’(어린이)을 비교하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입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은 ‘하늘나라 공동체인 교회, 생명(행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나무(성전)’라는 <전례독서> 주제와의 연결성이 빛납니다.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할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십니다. – 1고린 3:6~7

사도 바울로는 고린코 교우들을 ‘형제’라고 부르면서도 그들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1-2절).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기에 스스로를 ‘영적인 사람’으로 추켜세우고 싶겠지만 그것이 그들의 ‘현재 상태’입니다. 자신의 말이 좀 과했다 싶었는지 바울로는 살짝 바꿉니다. 그들의 상태는 잘 말해 준다면, ‘교인’이기는 하지만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 그들이 ‘육적인 사람’이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행동’입니다. 그들은 ‘파벌로 나뉘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4절). 이렇게 그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바울로는 교회 지도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5-8절). 바울로나 아폴로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고린토교우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소개한 사람들일 뿐입니다(5절). 다시 말해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한 ‘하느님의 일꾼’일 뿐입니다. 쉬운 말로 ‘한 팀’입니다. 따라서 어느 일꾼이 더 큰지를 두고 다투는 일은 어리석습니다(3-4절). 바울로나 아폴로는 단지 ‘일꾼’으로서 하느님이 그들 각자에게 하라고 하신 사명을 다했을 따름입니다(5절). 그들은 농부처럼 씨를 심었고, 물을 주었을 뿐입니다(6절). 그렇다고 농부가 씨앗을 자라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씨앗을 심고’, 그것이 잘 자라도록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나머지는 ‘씨앗의 생명력’이 일으키는 ‘기적’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송파교회’라는 ‘한 팀’으로서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잘 돌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분명히 기적을 일으킬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 안에 심겨진 ‘복음의 씨’가 생명의 기적을 일으키도록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7절). 이것을 잘 새겨두십시오. 교회에는 바울로도 필요하고, 아폴로도 필요합니다. 둘은 복음을 위해 필요한 ‘한 팀’입니다. 바울로는 아폴로의 몫을 존중해야 하고, 아폴로는 바울로의 몫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받은 나 자신의 몫을 감사함으로 감당하면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한 팀’으로서 일하지만 각자 자신이 수고한 만큼 ‘삯’(보상)을 받을 것입니다(8절). 머잖아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복음의 씨가 자라나 결실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구원생명의 최종 주관자이십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분열된 그들을 ‘화해’와 ‘일치’로 이끌며 놀라운 축복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 1고린 3:9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바울로와 아폴로 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복음전도자들)을 뜻합니다. 원문대로 번역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동역자”(fellow workers)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느님의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축복입니까?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니요! 이것이 바울로가 꿰뚫은 진실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혼자 구원의 일을 해 나가시지 않습니다. 바울로나 아폴로나 사도들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 불러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하느님은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기꺼이 불러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없이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참여를 너무나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하느님 없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기회와 특권을 받은 ‘우리’입니다.

 

더욱이 바울로는 ‘교회’가 ‘하느님의 밭’(경작된 땅)이며, ‘하느님의 건물’이라고 선포합니다. 이 ‘믿음’ 위에서 그는 온갖 박해와 비방을 이기며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성해 갔습니다(1고린 3:9~13).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밭’이고, ‘하느님의 건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어느 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해 온 이들 때문에 교회 세습이 일어나고, 세상의 비웃음을 사는 지탄의 대상으로 교회가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그 분 위에 건설되는 건물입니다(1고린 3:11). 우리는 ‘하느님의 소유된 백성’(1베드 1:9)이라는 이 믿음 위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요즘 우리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전하는 《마태오복음》을 복음이야기로 듣고 있습니다. 연중 4주일 복음이야기는 ‘산상수훈 서곡’(序曲)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초대된 당신의 제자들에게 ‘참된 행복’을 들려주십니다. 연중 5주일 복음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선포하십니다. 하늘나라 백성인 그들이 세상에서 살아야내야 할 ‘책무’(責務)입니다. 또 당신이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하러 오신 분임을 선포하십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본래의 의미대로 온전하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서’가 지향하는 ‘하늘나라 정신’을 ‘구현’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쳐주시는 그 ‘하늘나라 정신’(사랑)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들이 받는 ‘보상’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도 ‘율법의 참 정신’을 ‘하늘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당신의 제자들에게 드러내 주시는 보배로운 가르침입니다. ‘살인’, ‘간음’, ‘결혼생활’, ‘맹세’, ‘보복’, ‘원수를 미워함’이라는 율법조문을 차례로 나열하십니다. 그 다음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6개의 ‘대립명제’를 통해 ‘율법조문’의 ‘글자’(字句)에 얽매이는 ‘문자만능주의’가 아니라 율법의 ‘참 정신’을 제시하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율법조문’(문자)이 아니라 그 율법을 주신 ‘하느님’을 가리키고, 하늘나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4개의 ‘대립명제’를 다룹니다. 주의할 점은 이 ‘대립명제’를 통해 예수께서 모세에게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되고 피상적인 이해’를 바로 잡아 주신다는 점입니다. 율법의 어떤 계명은 ‘심화’(확대)시키고(22,28절), 어떤 계명은 ‘교정’(32절,44절)하거나 ‘폐기’하기도 하십니다(34,39절) 그렇게 해서 모세를 능가하는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여전히 지금이 공현절기임을 보여줍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정신’(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시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파의 두 거장 중 한 명인 랍비 ‘힐렐’(Hillel)입니다. 그는 ‘율법’ 요약을 묻는 ‘그리스인’에게 《토비트》의 말씀으로 대답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 – 토비 4:15a

그는 ‘율법 전체’가 이 경구의 ‘각주’(脚注)라고까지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공자도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면서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준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율법’ 뿐 아니라 ‘예언서’까지 합쳐서 한 문장 요약을 제시해 주십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 마태 7:12

 

‘율법과 예언서’라는 표현은 예수님 당시 <구약성경>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토록 분량이 많은 《성경》을 꿰뚫는 정신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황금률’은 당대의 다른 ‘랍비’들도 동의할 수 있던 ‘율법의 본질’일 것입니다. 힐렐과 공자가 ‘부정의 형태’로 ‘황금률’을 말했다면, 예수님은 ‘긍정의 형태’로 ‘황금률’을 제시하신 셈입니다. 문제는 “그 ‘남’이 누구냐?”인데 여기에 예수님만의 ‘독특함’이 있기에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온 인류의 스승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깁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그 많은 《성경》 두루마리를 다 읽어보시고 하신 말씀일까요?

또 예수님은 율법교사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 마태 22:37-40

‘골자’라는 말은 ‘요점’,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요, 요점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말씀도 이 ‘정신’(골자)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루가 18:9~14)에서 보듯이 예수님 당시 부자들 중에는 자신들을 ‘의롭다’ 여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자선’도 많이 행하고, ‘계명’도 ‘문자적으로는 잘 지킨다.’는 근거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만심’에 빠져 자기를 높이는 그들을 향해 아마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자식들, 놀고 있네…”

그런 이들 때문에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새로운 공동체인 하늘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이들은 어떤 태도로 ‘율법’(계명)을 대해야하는지 가르치십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계명)을 준수함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난 외적행위’만을 문제 삼았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범죄의 성립요건에서 ‘구성요건 해당성’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누군가를 살인하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고, 몸으로 간음하지 않았으며, 그냥 소박하지 않고 이혼장을 써서 아내를 내보냈고, 말로써 거짓 맹세 하지 않았다면 ‘외적행위’로는 그 ‘계명들의 문자적 경계’를 넘어가지 않았기에 ‘계명을 지켰다’고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외적행위’보다 그 사람의 ‘마음’(내적동기)이 ‘계명 준수의 기준’이라고 교훈하십니다. 한마디로 하늘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여진 이들은 새로운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문자의 경계’가 아니라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정말로 철저합니다. 이제 대립명제의 시작입니다.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 마태 5:21~22a

십계명의 제 6계명(출애 20:13; 신명 5:17)은 타인의 ‘생명 존중’만이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모든 사회 사회체제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6계명을 글자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누구든지 ‘문자적으로 살인하지 않았다면’ 재판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둘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도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 진실을 6계명에 대한 대립명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내주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문자적으로는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제를 향해 ‘분노’했다면 ‘재판’에 넘겨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분노’를 ‘살인’과 동일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문자적으로는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제를 가리켜 말로써 ‘바보’라고 ‘모욕’한다면 ‘중앙법정’(산헤드린)에 넘겨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문자적으로는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제더러 말로써 ‘미친놈’이라고 ‘비방’한다면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불붙는 지옥’(쓰레기장인 게헨나)에 던져질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완전히 끝장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 대한 단지 ‘모욕’과 ‘비방’일 뿐인 것을 하느님을 향한 ‘신성모독’과 동일시하십니다. ‘중앙법정’과 ‘불붙는 지옥’이 그 뜻입니다.

 

더욱이 누구든지 ‘문자적으로는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제로 하여금 ‘원한’(억울한 마음)을 품게 한 적이 있다면 하느님은 그 죄 때문에 그가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원한’은 증인이나 증거가 없어서 ‘본인이 시인’하지 않으면 밝혀질 수 없는 ‘악행’으로 위탁물(담보물) 횡령, 도둑질, 분실물 착복, 돈을 빌려가서는 안 갚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라도 자기 죄를 뉘우치고 용서받기 원한다면 그는 자신이 피해를 입힌 억울한 형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5분의 1을 더하여 피해 보상을 해 준 뒤 ‘면죄제물’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습니다(레위 5:20-26). 게다가 ‘화해’할 일이 있으면 ‘얼른 화해해야’ 합니다. 우리 성찬례도 바로 이 ‘화해의 정신’에 입각해 있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문자적으로는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노’한 일만으로도, 말로써 ‘모욕’하고 ‘비방’한 일만으로도, ‘원한’을 품게 한 일만으로도 이미 그들은 ‘살인하지 마라’는 제 6계명의 경계를 넘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언급되고 있는 ‘분노’, ‘모욕과 비방의 말’, ‘원한’을 품게 만든 행위가 결국은 ‘살인’으로 자라날 수도 있는 ‘죽음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것들 전부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만약 ‘분노’가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니 ‘분노’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 ‘알아차리고 멈추었다면’ 끔찍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저 개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니 그런 ‘생각’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 ‘알아차리고 멈추었다면’ 끔찍한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야! 이 바보 멍청아!”라고 그가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아니 그 ‘말’이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 ‘알아차리고 멈추었다면’ 사람을 죽이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불의한 사회체제에 대한 항변을 권력가들이 좀 더 일찍 귀담아 듣고 돌아섰다면 무죄한 국민을 향한 공권력의 폭력과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싸움과 살인은 ‘마음의 생각과 말’에서 시작되기에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항상 옳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의 세상을 조금 더 개선시키려 오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늘나라 공동체’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늘나라 공동체’에서는 분노의 자리는 없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늘나라 공동체’에서는 ‘바보’라고, ‘미친놈’이라고 무시당하거나 경멸당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존중’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늘나라 공동체’에서는 모두가 ‘화해’와 ‘평화’ 속에 살아갈 것입니다.

 

‘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 마태 5:27~28a

십계명의 제 7계명은(출애 20:14; 신명 5:18) ‘결혼관계’(가정공동체)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가정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가정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결혼(가정)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계명을 어겨 가정공동체를 파괴하면 그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레위 20:10). 더욱이 가정공동체의 파괴인 간음은 세상의 근본을 흔드는 창조질서의 파괴와도 연결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7계명을 글자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남의 결혼생활에 ‘문자적으로’ 침범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계명의 참 뜻을 가르쳐주십니다. 누구든지 ‘문자적으로는’ 남의 결혼생활에 침범하지 않았고, 또 ‘몸으로 간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 ‘음란한 생각’을 품었다면 그 일만으로도 이미 ‘간음하지 마라’는 그 7계명의 경계를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음란한 생각’을 ‘간음’이라는 ‘행동’과 동일시하십니다. ‘여자’를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쳐다보는 것은 ‘한 인격’을 자기 ‘목적’을 위해 ‘대상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미 가족공동체와 이 세상의 파괴에 동조하는 셈입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늘나라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언제나 한 사람을 그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눈을 빼어 던져버리라”거나 “손을 찍어 던져버리라”는 말씀은 과장된 표현입니다. 2019년에 실시한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인들 중 절반 조금 못되는 수를 근본주의 신앙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구절에 대해서는 문자대로 믿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정작 이 부분에서는 건너 띕니다. 정말 이 세상 남자들 중에(그것도 피 끓는 청춘을 지났던 사람들 중에)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는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흥미로운 점은 남자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신체기관이 전부 ‘오른쪽’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훨씬 중요했습니다. 그 중요한 오른쪽 신체기관을 잃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하늘나라를 얻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면 그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 마태 5:31~32a

고대 이스라엘은 ‘남성 위주의 사회’였습니다. 어떤 남편들은 ‘이혼할 특권’을 내세웠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이혼장’을 써서 아내를 내보냈기에 자신은 더 이상 그 결혼에 매여 있지 않다며 새로 결혼할 권리를 주장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간음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결혼에는 남편과 아내 뿐 아니라 하느님도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소유권’이 창조하신 하느님께 있듯이 모든 ‘결혼생활의 소유권’ 역시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완고함에 빠진 남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이 버리고 싶을 때마다 버릴 수 있는 ‘소유물’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전도 9:9).

 

‘이혼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혼장’이라는 단어가 당혹스러운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본문은 이혼불가의 ‘교리적 근거’로 무조건적으로 들이밀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누구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지만 결혼생활은 혼자만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속가능한 결혼생활은 참으로 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살기 위해서 이혼이 정말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혼장’이라는 규정은 오늘날처럼 여성의 사회 진출이 허용되지 않아서 이 그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결혼해야만 했던 고대시기에 사용된 것임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본디 ‘이혼장’ 규정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모세’ 개인의 견해이고 그가 제정해 준 것입니다(신명 24:1; 마태 19:8). 모세는 ‘남편들 편’에서만 제기할 수 있는 이혼할 권리를(이런 면에서 고대 이스라엘은 철저히 ‘남성 위주 사회였습니다) 정당화해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남편으로부터 여러 가지 구실로 소박당하는 ‘아내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장’을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혼장’에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도 좋다’는 조항을 반드시 적도록 해서 ‘새 출발’(경제력이 없던 여성이 결혼해야만 살 수 있었던 고대 시기였습니다) 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내는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유일한 인격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정신입니다(창세 2:24; 마태 19:4~6). 그런데도 ‘음행한 경우’(이것은 마태오복음에만 있는 조항입니다)를 제외하고 ‘이혼장’을 써서 아내를 쉽게 버린다면 이것은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일이고(고대에는 버림받은 여인이 재혼하지 않을 경우 살아가기 위해 매춘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 그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하는 것입니다(마태 19:6; 루가 16:18; 마르 10:11-12).

예수께서 이 대립명제를 통해 말씀하시려는 진실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늘나라 공동체’에서는 어떤 여성도 물건처럼 이리 저리 내돌려지지 않습니다. 그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으로 ‘대우’ 받고 ‘안전’합니다. 재혼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생활이 가능하고 친교와 우정이 가득한 공동체입니다.

 

또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 마태 5:33~34a

이 계명은 십계명은 아니지만 모세오경(율법)의 규정 중 하나입니다(레위 19:12; 민수 30:2; 신명 23:21). 쉽게 말해 ‘십계명’이 오늘날의 ‘헌법’처럼 ‘최상위법’이라면, ‘모세오경’(흔히 율법)은 세부적인 ‘법률’에 해당하고, 율법학자들이 전승해 온 ‘조상들의 전통’(마태 15:2; 갈라 1:14)은 ‘조례’나 ‘판례’처럼 법률에 대한 더 세부적인 해석에 해당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맹세’(서원)는 허용되고, 어떤 경우에 그것이 ‘무효’가 되는지도 자세히 안내되어 있습니다(민수 30:2-17). 당시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곤 했습니다. 하느님이 그 맹세의 증인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고 교훈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맹세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몹시 흥분한 상태(혹은 구석에 몰려서)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느님을 증인으로 세우고 할 때가 많습니다. 몹시 흥분한 상태는 일종의 ‘무지’(어리석음)에 빠진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런 맹세는 지킬 수 없는 ‘헛맹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는 제 3계명을 어기게 된 셈입니다(출애 20:7). 차라리 맹세를 하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맹세를 함으로써 오히려 ‘죄’가 된 경우입니다. 그만큼 ‘맹세’는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은 약삭빠르게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일도 금지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머리카락 색깔 하나도 변화시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맹세’라는 수단을 동원합니까?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무너졌을 때입니다. 불신과 의심이 팽배해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말을 ‘보증’하는 수단으로 맹세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늘나라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은 달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꿰뚫은 것처럼 하늘나라(하느님의 다스리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늘나라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진실’을 말합니다. 하늘나라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사랑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사랑’하며 삽니다. 하늘나라 공동체에서는 누구나 ‘성실하신 주님’을 따라 살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맹세’가 필요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문자적인 외적행위’보다 ‘마음’을 주목하시고 일침을 놓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언제나 하느님은 ‘문자적인 외적행위’보다는 그 ‘행위 이전의 마음’을 ‘감독’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날마다 하느님은 ‘마음’을 ‘스캔’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계명 준수’ 여부는 ‘외적행위’, 즉 ‘문자적 경계’를 넘어갔느냐 넘어가지 않았느냐의 문제로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어떤 ‘의지’로 살고 있느냐를 고요히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찬례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며,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사오니,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하게 하시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하게 하소서.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지난 일주일 내 마음자리는 어땠습니까? 오늘 낭독한 1독서 《신명기》와 노래한 성시 <119편>을 다시 주목해 보십시오. 둘 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가르치고 노래합니다. 하느님을 선택(사랑)한 삶의 모습은 생활에서 ‘율법준수’(계명과 규정과 법령)로 나타납니다. ‘율법준수’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삶이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이며,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는 삶입니다. 이 ‘생명(행복)의 길’을 선택한(하느님을 사랑한) ‘보상’은 그들과 후손이 ‘약속의 땅 가나안’(하늘나라)에 들어가 자리 잡고 오래 잘 사는 ‘복’입니다. 복음이야기인 ‘산상수훈’과 연결하면 어떻습니까? 이미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정신’이 나타나 있는 ‘계명들’을 ‘문자’가 아니라 ‘마음’으로 일상에서 충실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답게 마음으로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마음에 일어났던 생각과 말은 어땠습니까? 칼로 그 사람을 찌르진 않았어도 ‘생각’으로 ‘난도질’ 한 적은 없었습니까? 총으로 그 사람을 쏘진 않았어도 ‘내면의 말’로써 ‘저주’를 소나기처럼 퍼부은 적은 없었습니까? 예수님 말씀처럼 상처를 주는 싸움과 살인, 성적 타락과 결혼생활의 파탄, 거짓된 행위는 모두 ‘생각과 말’에서 시작됩니다.

 

이처럼 ‘계명의 철저성’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실패한 이들임을 고백’합니다. ‘문자적인 행위’ 이전에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성찰해 보건데, 우리 마음을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차지하기보다는 ‘분노’와 ‘비방’과 ‘저주’가 차지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랑’과 ‘진실’과 ‘정직’이 차지하기보다는 ‘욕설’과 ‘거짓’과 ‘음욕’이 차지할 때도 많았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책망한 것처럼 ‘시기와 다툼’에 빠진 ‘육적인 사람,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회개’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 용서를 간청합니다.

 

이제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죄인인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마태 5:20) 말씀하시는 데,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도 계명 준수에 실패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은 무엇입니까?

오늘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당신 뜻대로 힘써 살려 하오니, 이 몸을 아주 버리지 마소서. – 시편 119:8

그렇습니다. ‘매순간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내세울 수 있는 ‘의’(義)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실패한 이들이기에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교훈했듯이 하느님은 죄에 물든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예수님은 ‘실패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은혜’이자, ‘하느님의 의’(義)입니다. 예수님을 ‘매순간 바라보는 믿음’이 연약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성령님께 내 마음을 내어드리는 기도’입니다. 성령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통치하시도록 순간순간 ‘마음의 왕좌’를 내어드려야만 합니다. 성령 하느님께서 매순간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활동하시어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고쳐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 ‘사랑’이 점점 차올라야 합니다. 마음에서 ‘분노와 비방’, ‘저주와 욕설’, ‘음욕과 거짓’이 밀려나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순간순간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이자 ‘믿는 자’에게 제공되는 ‘하느님의 의’(義)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매순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통치’하시는 ‘기도수행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점점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의 뜻을 기뻐하며, 실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거운 짐’으로써가 아니라 ‘은혜 아래’ 살고 있는 ‘사랑의 사람’으로서 ‘율법을 완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사랑의 삶’이야말로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율법을 완성’하는 삶이라고 교훈했습니다(로마 13:8).

오늘도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 은혜 아래’ 있는 우리가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도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잘 안 보인다고요? 그 ‘금지 계명들’을 뒤집어보십시오. “살인하지 마라”는 제 6계명은 ‘사람을 살리는 정의와 평화의 일을 하여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음하지 마라”는 7계명과 ‘이혼장’은 ‘모든 가정을 존중하고 가정공동체를 잘 지켜나가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짓 맹세하지 마라”는 계명은 ‘일상에서 서로를 정직하게, 진실하게 대해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모두가 바라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사람들의 인격과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협력합니다. 사람들을 ‘바보’나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존중하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세상은 더 평화로워집니다. 자신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을 따라 죄에 물든 육체의 욕심과 이기심을 철저히 끊어 버리는 ‘기도수행’을 이어가는 이들은 ‘순결한 마음’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 마음은 정말 하느님의 자녀답습니까? 혼자 있을 때 나는 누구입니까? 하느님이 기뻐 받으시는 순종의 사람입니까? 오늘은 이 점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쭉정이들이 아니라, 사도 바울로가 가르쳐주신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도록 부름 받은 일꾼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거룩한 밭’이자 ‘건물’입니다.

이제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내뱉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버리십시오. 순간순간 ‘진실’과 ‘정직’을 선택하십시오. 그런 수행을 이어가다 보면 그 모든 것이 쌓여서 어느 자리에서나 한 송이 ‘연꽃’이 될 것입니다. 정갈한 마음의 자리에서 천사와 함께 노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고, 하느님을 뵙게 되는 ‘참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부디 오늘 성찬례에서 이 말씀을 듣는 우리교회가 ‘하느님을 밭’에 심겨진 ‘성령의 나무’로 잘 성장해 가며, ‘하느님의 건물’(성전)로 잘 세워져 가기를 축복합니다.

“2020. 2.16. 연중6주일”의 1개의 댓글

  1. 네. 그렇습니다. 순간순간 제 의식과 무의식은 일렁입니다. 제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이 무서운 죄성을 어찌할 수가 없네요.

    제가 기도해볼테니, 제게 믿음을 주십시오. 단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감지덕지 입니다.

    아닙니다. 돌이켜보니 제겐 기도의 의지도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 의식을 성령하느님께서 잠식해 주셔서 기도해야 한다는 알람을 계속 울려주십시오.

    주님 꼭 알려주세요. 그리고 알아차리게 해 주십시오. 기도해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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