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9. 연중5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오늘의 기도지향

연중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녀답게 착한 행실(사랑으로)로 구원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명백히 하십니다. 이 축복의 말씀처럼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고 살맛 없이,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착한 행실’(사랑으로)로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인 십자가 복음의 빛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소망하며 성찬례를 봉헌합시다.

본기도

신실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진리로 이 세상을 비추고,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8:1-12
  • 시편 – 112:1-9
  • 2독서 – 1고린 2:1-12
  • 복음서 – 마태 5:13-20

연중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녀답게 착한 행실(사랑으로)로 구원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1독서는 ‘참된 예배와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을 축복’을 선포하는 《이사야》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주전 8세기), ‘제 2이사야’(40장~55장, 주전 539년 이전), ‘제 3이사야’(56장~66장, 주전 537년 이후~510년 경)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배정한 1독서는 ‘제 3이사야’에 속합니다. 예언이 선포된 본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제 3이사야의 역사적 배경과 전체 신학적 특징을 살펴봅니다. ‘제 3이사야’(56장~66장, 주전 537년 이후~510년 경)는 ‘바빌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에 ‘제 1차 포로귀환 후’부터 성전이 재건될 무렵의 ‘중간시대’(또는 재건되고 난 후 시대)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공동체의 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실 제 3이사야가 활동한 시대나 예언자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재건되기 전 상황’임을 알려주는 단락(이사 63:18; 64:9~12)이 있는가 하면, 성전이 이미 ‘재건되고 난 후 상황’임을 알려주는 단락(이사 56:1~8; 66:2~4)도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 사람의 예언자인지 아니면 더 많은 예언자인지도 결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제 3이사야를 ‘1차 포로귀환 후’부터 ‘성전이 재건될 무렵’까지(주전 515년) 약 20년 동안 활동한 것으로 시대를 추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성전이 재건되고 난 후의 시대 배경이라는 관점에서 오늘 1독서 말씀 나눔을 준비했음을 밝힙니다.

먼저 제 3이사야가 선포하는 말씀의 대상인 귀향민들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주전 605년 유다 왕 여호야킴은 바빌론 제국 느브갓네살의 신하가 되어 ‘조공’(朝貢)을 바쳐야 했습니다(열왕하 24:1). 그 때 다니엘과 세 친구, 왕족과 귀족들이 포로로 끌려갔고, 성전기구도 약탈해 갔습니다(다니 1:1~6; 5:2; 역대하 36:5~7). 이것이 ‘제 1차 바빌론 포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1차 유배가 있은 지 약 70년만인 주전 537년, 예레미야의 예언대로(예레 25:11~12; 29:10) 유대인들의 1차 포로귀환이 있었습니다. 귀향민들의 수는 49,897명인데, 유대 총독으로 임명받은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여호수아)가 그들을 인솔하고 돌아왔습니다(에즈 2:64~66).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폐허’로 변한 ‘예루살렘 성과 성전 터’를 보면서 그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각 가문의 어른들이 위로하면서 성전 건축에 필요한 예물을 바쳤습니다(에즈 2:68). 7월 설날이 되자 각 성읍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귀향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왔습니다. 바빌론 유배시절에도 지켜 온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옛 성전 터’ 위에 즈루빠벨과 예수아 일가 사람들이 ‘번제단’을 쌓자 아침저녁으로 하느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에즈 3:2). 또 7월 15일이 되자 ‘장막절’(초막절)을 지켰고 ‘성전 건축 준비’를 했습니다(에즈 3:1~7). 이렇게 귀향민들은 율법에 명령한 절기와 전례를 지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주전 536년 2월, 총독 즈루빠벨과 대사제 예수아(여호수아)의 주도로 옛 성전 터 위에서 ‘기공식’을 올렸습니다(에즈 3:8). 포로로 끌려가기 전 ‘옛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를 본 적이 있던 노인들은 감격해 목 놓아 울었고, 많은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에즈 3:12~13). 하지만 옛 북왕국 이스라엘 땅인 ‘사마리아 성읍’에 이주 해 살던(열왕하 17:24~41) ‘사마리아인’의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무려 16년간(주전 520년까지)이나 ‘성전 건축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에즈 4:1~5,23~24). 감격도 잠시, 일이 중단되자 귀향민들은 저마다 자기 성읍으로 돌아가 집을 짓고 정착할 길을 찾기에 바빴습니다(하깨 1:9). 더욱이 귀향민과 유다 각 성읍에 이미 살고 있던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이 갈등과 대립을 이해하기 위해 2차, 3차 바빌론 포로민 이야기도 하겠습니다. 우선 598년 ‘2차 바빌론 포로’가 있었습니다. 바빌론제국의 느부갓네살은 ‘여호야킨’ 시절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약탈합니다(열왕하 24:8~11,13; 역대하 36:9~10). ‘가난한 지방민’(변두리 계층들)만 유다에 남겨두고 예루살렘 전 시민, 권력층, 군인들, 기술자, 기타 반란의 구심점이 될 만한 사람들을 ‘여호야긴’ 왕과 함께 싹 다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열왕하 24:10~16).

‘3차 바빌론 포로’는 기원전 587년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다 왕은 ‘시드키야’입니다.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예레 27:12~15) 반(反) 바빌론 정책을 펼치다(열왕하 24:20; 역대하 36:10~13; 예레 37:2; 52:3) 왕국의 멸망을 초래했습니다(열왕하 25:1~17; 역대하 36:17~21. 예레 39:1~2, 52:4~30). 예루살렘을 함락한 바빌론 군대는 ‘성전’을 약탈하고 ‘왕궁’과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초토화시켰습니다(열왕하 25:9~17). 그나마 남아있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고, ‘가장 비천한 층의 소수 사람들만’ 예루살렘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가꾸게 하였습니다(열왕하 25:12). 이렇게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완전히 황폐화되었고, 하느님의 백성들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 남겨진 이들, 재난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간 이들로 말입니다(열왕하 25:26).

이제 남왕국 유다가 망하고 2세대가 흐르는 동안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각 성읍마다 이방인들이 들어와 포로로 끌려가지 않은 유대인과 한 데 어울려 살게 되었고 ‘새 지배층’이 형성 되었습니다. 훗날 1차 귀향민들이 돌아오자 유다 땅의 권리를 두고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는 고레스의 칙령(에즈 1:1~4)을 들고 온 귀향민들은 ‘포로기 이전의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각 성읍에서 새 지배층을 형성한 이들과, 귀향민의 수 보다 훨씬 많았던 이방인들은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표면화된 것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둘러싼 사마리아인들과의 갈등과 대립입니다.

그 갈등과 대립으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 성전과 성읍의 건축을 위해 동원된 또 다른 부류의 이방인들까지(이사 60:10; 61:4~5) 합세해 갈수록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게다가 반복되는 자연재해로 귀향민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었습니다(하깨 1:5~11). 유대 총독으로 임명받은 ‘즈루빠벨’은 많은 수의 이방인을 소수의 유대인 속에 편입시키는 일과 사회 혼란을 극복하는 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현실 문제들을 돌파하기 위해 내건 ‘기치’(旗幟)가 중단된 ‘성전재건’입니다(에즈 5:2; 하깨 1:12~15). 그는 대사제 예수아(여호수아)와 함께 혼란에 빠진 민족을 응집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재건을 완료’하는 일은 유대 민족을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로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기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 시기에(주전 520년경) 예언 활동을 하면서 ‘성전재건’을 독려한 예언자들이 ‘하깨’와 ‘즈가리야’입니다(에즈 5:1). 백성들 사이에서는 ‘성전이 완공’되면 다윗왕과 솔로몬왕 시절의 옛 영화를 자기 민족이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도 작용했습니다(하깨 1:8; 2:7~9; 즈가 8:1~23).

그러나 그 시기 제 3이사야는 하깨와 즈가리야의 그와 같은 예언활동과 ‘결’을 달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는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창조주시라고, 우주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 66:1~4). 성전에서 형식적으로 바지는 예배보다 하느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 66:2).

마침내 성전재건을 시작한지 약 4년 5개월여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즈가 6:15; 이사 66:2~4).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지 70년만인 주전 515년의 일입니다. 하지만 감격도 잠시, 귀향민들이 기도하고 꿈꾸던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안정’은 ‘성전재건’에도 불구하고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여전히 그들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째서 ‘응답’이 없었던 것일까요? 이것은 본문을 다룰 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회지도층은 상황변화 없이 하느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포로기 이전처럼,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탐욕’을 부리며, 점점 ‘타락’해 갔습니다(이사 56:9~12). 상황이 변하지 않는 원인을 자신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밖’(타인에게로 종국에는 하느님에게로)으로 향했다는 뜻입니다. 그 와중에 성전재건을 통해 이득을 보게 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성전 제의’를 통해 성전 권력을 장악한 ‘제사장 가문’입니다. 제 3이사야는 성전재건이 오히려 그들에게 ‘부’(富)의 편중을 가져왔다고 보았습니다.

갈수록 ‘가난한 백성들’을 바로 인도해야 할 지도층은 ‘잘못된 생활태도’를 고치지 않았고 ‘자신들의 배만’ 불렸습니다. ‘명절’에도 흥청거리기에만 바빴습니다.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이 ‘형식적인(위선적인) 예배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대다수 백성들도 ‘자신들이 기도하고 꿈꾸던 세상’이 오지 않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여기며 ‘다른 신들’에게로 향했습니다(이사 57:11~13b).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이유’도 본문을 다룰 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제 멋대로, 자기 욕망만 충족시키기에 바빴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역사로부터, 즉 유배생활로부터도 여전히 배운 바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귀향민 공동체는 다시 ‘갈라지고 허물어진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바라는 소수의 남은 백성들’도 있었습니다(이사 57:13c). 그야말로 백성들은 신앙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악인’과 ‘의인’입니다(이사 65:8~16; 66:2~6). ‘악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순종하지) 않고, 하느님 목전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물질적 풍요를 갈구하며, 종교적으로 극도로 부패한 생활에 빠졌던 ‘다수의 우상숭배자들’입니다(이사 57:1~13; 이사 65:1~12). 반대로 ‘의인’은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소수의 남은 자’입니다. 악인에게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들입니다(이사 66:2), 즉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에 충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소수의 의인들’(하느님의 말씀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패역한 ‘다수의 우상숭배자들’에게 ‘미움’과 ‘배척’을 당했습니다(이사 66:5). 이처럼 ‘악인’과 ‘의인’으로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이 심하다’는 점이 ‘제 2이사야’에 없는 ‘제 3이사야’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런 ‘어둠’ 속을 사는 ‘의로운 소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 3이사야’는 ‘빛이신 하느님이 개입’하실 것임을 선포합니다(60:1-3; 65:17).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안식일 준수’(이사 56:2,4,6; 58:13; 66:23), ‘금식’(이사 58:1~9), ‘성전예배’(이사 56:7; 60:7)에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특히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계 만민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보편주의’(universalism)는 ‘제 1이사야’(이사 2:2~4; 11:6~9; 19:19~25)와 ‘제 3이사야’(이사 56:1~7; 65:1; 66:18~21) 신학의 최고봉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이 개입하시어 온 인류가 하느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빛의 될 날이 온다’는 예언입니다. 그래서 ‘제 3이사야’는 도래할 ‘예루살렘(시온)의 영광스러운 회복의 새 시대’를 예언합니다(이사 60~62장). ‘의로운 소수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십니다(65:17~25; 66:22). 새 창조의 중심에는 ‘예루살렘’(시온)이 있습니다. 이 같은 제 3이사야에 대한 시대 배경과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1독서 본문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자가 드리는 참된 예배의 성격과 축복’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을 경외 한다’는 말은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소통하며 그 신성을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귀향민들의 기대 속에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그들이 기도하고 꿈꾸던 일, 즉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안정’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여전히 그들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째서 ‘응답’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께서 보아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 이사 58:3a

한마디로 그들은 “왜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없지?”라고 물었던 셈입니다. 하느님은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치워라. 너희 호소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고행의 날에 하는 짓이 고작 이것이냐?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 될 듯싶으냐? 그게 이른바 단식이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야훼가 이 날 너희를 반길 듯싶으냐? – 이사 58:3b~5

그들을 향한 불같은 ‘책망’입니다. 그들의 ‘형식적(피상적)이고 위선적인 예배’에 대한 ‘폭로’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에 관심이 없는 그들의 잘못된 생활태도’(3b~4절)와 ‘형식적인 예배생활’(5절)이 ‘기도 응답’이 없는 진짜 이유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외부의 성전’을 세우는 데만 급급했지 정말 ‘중요한 일’은 소홀히 했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과 일상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성전으로 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자신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짓는 일은 완성하지 못했습니다(이사 66:2). 한마디로 자신들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빛이신 하느님의 신성을 닮아가는 사람’으로 세워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 건축에 ‘결’을 달리한 제 3이사야는 옳았습니다(이사 66:1~4).

그들을 향해 ‘제 3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윤리적’ 차원의 삶과 행동, 즉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라’고 ‘지도층’에게 외칩니다(6~7절).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권리를 그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까지 확대하라는 선포입니다. 과부와 고아, 더부살이하는 이들과 영세민을 억누르지 말고 골육끼리 해칠 마음을 품지 말라는 선포입니다(참고, 즈가 7:10). 그것이 하느님의 신성을 닮아가고자 하는 이의 삶의 모습이라는 선포입니다. 이렇게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 환경’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성전을 세우는 일보다 중요했던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단식과 참된 예배’라는 외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회 정의’에 대한 그의 이 선포는 ‘십계명의 정신’이며, ‘전례적으로’ 행해지는 ‘헛된 단식’과는(3b~5절) 명백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위대한 ‘구원의 사건들’, 가령 ‘출애굽’, ‘시나이산 계약’, ‘광야의 여정’ 등은 ‘전례’를 통해 기념되고 재현됨으로써 그들의 믿음과 경험으로 ‘현재화’되곤 했습니다. ‘단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호소하며 전례적으로 ‘단식’을 지켜온 전통이 있었습니다(판관 20:26; 1사무 7:6; 열왕상 21:12; 시편 35:13).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로는 그 일을 상기하려고 해마다 오월이면 ‘단식일’을 정해놓고 전례적으로 지켜오기까지 했습니다(즈가 7:3,5).

문제는 전례적으로 ‘참회’의 표현이었던 ‘단식’이 점차 ‘형식적’(피상적, 위선적)이 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즈가 7:5). 심지어 하느님께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한) ‘거래’로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제 3이사야의 선포는 ‘위선적이 된 전례행위’에 대한 ‘시정’(是正)을 요구하는 목소리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위선적인 전례’(형식적인 예배생활), 즉 ‘빈 위장’이나 ‘영혼 없는 제사’보다 ‘사회 정의’를 세우는 일을 좋아하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정의’를 실천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희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는데 야훼의 영광이 그들 뒤를 받쳐 주리라. 그제야, 네가 부르짖으면, 야훼가 대답해 주리라. 살려달라고 외치면, ‘내가 살려 주마’ 하리라. – 이사 58:8~9a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참된 예배자),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소통하며 그 신성을 닮아가는’ 사람에게 ‘약속’하시는 ‘축복’입니다. ‘빛’이신 주님이 당신을 닮은 그들과 ‘동행’해 주시고 그들과 ‘교감’해 주시는 ‘보상’입니다.

이어서 ‘침묵’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개인이 만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오늘’을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그 조건들’을 제시합니다(9b~10절a). 간단히 하느님의 신성을 닮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의 명령입니다. ‘멍에’(압제,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일)를 치우고, ‘폭력’(삿대질)을 그만두며, ‘폭언’(못된 말)을 거두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일들은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삶입니다. ‘해서는 안 된다’(멈추라)고 하느님이 명령하시는 ‘오늘의 일들’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제 3이사야는 그들이 ‘오늘 다시 시작해야(실천해야) 할 두 가지 정의의 일’을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닮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실천할 수밖에 없는지의 명령입니다. ‘굶주린 자와 오늘 먹을 것을 나누고’, ‘고통 받는(쪼들린, 가난한, 기가 죽은) 이의 소원(배)을 오늘 충족시켜주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적 약자(가난한 이들) 편에 오늘 서는 일’이 하느님의 신성을 닮아가는 이의 삶입니다. 이 두 가지 ‘사랑의 의무’는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하느님의 목소리였던 ‘아모스’, ‘미가’, ‘제 1이사야’ 예언자의 결정적인 영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너희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 – 이사 58:10b

나크바의 날을 맞아 서안지구의 분리장벽 위에 올라서 시위하는 모습

‘오늘’ 이 ‘정의의 일들’을 ‘실천’하는 이들은 ‘빛의 세계’에 살게 됩니다. 자신들의 빛이신 하느님처럼, 다른 이들의 ‘빛’이 된다는 선포입니다.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사랑으로 도와주는 만큼, 그들에게 ‘빛’이 됩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의인들과 빛이신 하느님은 ‘동행’하실 뿐 아니라 그들 안에 현존하시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그들을 바꾸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드리는 ‘예배’(전례)를 하느님은 ‘오늘’ 받으시고 축복으로 ‘응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1독서가 오늘 복음이야기의 배경임이 밝혀지고, 우리가 여전히 공현절기를 지나고 있음도 밝혀집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빛이신 하느님께 기도와 예배를 드리러 나온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제 멋대로, 자기 욕망만 충족시키며 어둠 속에 살아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오늘의 일들’인 ‘사랑으로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를 세우는’ 빛의 일을 행하며 살아 왔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멈추고, ‘해야 할 일’을 ‘오늘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실천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면 그 역시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이를 하느님은 ‘회복’시켜 주십니다. 특히 ‘사회 정의’, 즉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를 ‘오늘’ 다하는 일을 빛이신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느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그 일이야말로 삶이 회복되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소통하며 그 신성을 닮아가고 있는 이의 모습입니다. 오늘 성찬례에 참여한 우리가 날마다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게다가 《시편》 23편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그 명령을 ‘오늘’ 충족시키는 이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배불리며 건강하게” 지켜주십니다(11절a). 그의 삶을 물이 항상 흐는 ‘동산’이오(예레 32:12),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가꾸어 주십니다(11절b). 나아가 그 ‘의인’(그의 백성들, 아들들)은 진정으로 허물어진 옛 터전을 재건하고, 버려진 옛 터를 다시 세우게 될 것입니다(12절; 이사 61:4).

이렇게 ‘오늘’ 이루어진 한 개인의 진정한 ‘회복’은 종국에는 ‘민족과 나라’의 재건과도 직결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개인의 삶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신과 민족이 영화를 누리기를 기도하고 꿈꾸는 일보다도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불공정’과 ‘불의’를 척결하고,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제 3이사야의 이 같은 선포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제 3이사야처럼 ‘민족과 나라의 재건’이 너무나 필요한 시대에 삽니다. ‘갈라지고 허물어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올해로 광복 75주년을 맞지만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잔재들,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도록 극복하지 못한 분단체제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공권력이 자행한 온갖 폭력들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모욕, 오래도록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며 진상을 호도해 왔으면서도 사과 한마디 없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일부 언론사들’, 국정을 농단하고도 여전히 건재한 특권세력들, 선거철이 다가오자 ‘위성정당’을 만들어 벌써부터 썩은 내를 풍기는 정치인들, 온갖 가짜 뉴스로 세상을 혼란케 하는 이들을 그냥 놔둔 채로 이 땅의 재건은 의미 없습니다.

더욱이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을 배우는 신성한 곳들인 ‘가정’, ‘학교’, ‘마을’, ‘교회’라는 공동체는 부모, 교사, 어른, 성직자의 잘못으로 허물어지고, 버려지며, 갈라지고, 황폐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도덕적 권리를 ‘돈’과 ‘소유’가 유린(蹂躪)하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병든 그림자들’로 공동체는 급속히 ‘와해’(瓦解)되고 있습니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으며, ‘결과’는 정의롭지 않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정부와 여당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은 정말이지 요원한 듯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라도 하느님께서 ‘해서는 안 된다’(멈추라)고 명령하시는 일들, 즉 ‘멍에’(압제,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괴롭히는 일)를 치우고, ‘폭력’(삿대질)을 그만두며, ‘폭언’(못된 말)을 없애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말입니다. ‘하느님을 경외’(참된 예배자)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을 닮은 사람답게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회적 약자(가난한 이들)의 편’에 설 뿐 아니라 ‘정의와 사랑의 일’을 ‘오늘’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빛이신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임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말이지 주님의 교회들이 허물어지고, 버려지며, 갈라지고, 황폐한 이 땅을 재건하는 일에 ‘하느님의 빛’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자가 받을 축복’을 노래하는 <112편>입니다. 1독서가 《이사야》가 전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는지를 교훈합니다. <112편>은 <111편>과 여러 면에서 유사합니다. 둘 다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연속으로 사용하여 기록한 ‘알파벳 시’입니다. 길이도 같으며, 유사한 문구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학자들은 같은 사람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또 내용상으로도 《시편》을 여는 <1편>과 여러 면에서 유사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정당한 ‘보상’과 ‘사회 정의’라는 예언적 전통에 중점을 둔 ‘신명기 역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혜로운 삶과 정의(의로움)의 보상’이라는 주제가 되풀이되는 데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에 대한 응답일 뿐 아니라 오늘 복음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3절)는 ‘복 있는 사람’과 그의 ‘집안’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시인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찬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이 모든 ‘복’의 출발점입니다. <111편>에서 시인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라 끝을 냈는데(10절), <112편>에서 시인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의 축복”을 묘사합니다. 특히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사람은 ‘그 계명’(말씀,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마지못해 ‘의무감’으로가 아니라 ‘기쁨’으로(내면으로부터) 그 계명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르치려는 바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라” 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라”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만들어내는 ‘거짓 두려움’에서 구출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이 만들어내는 ‘거짓 두려움’에 굴하지 않습니다. 악을 꾸미는 자리나 죄인들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말씀(계명)을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하기에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순종은 세상의 모든 과도한 욕망에서 그를 해방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사랑(믿음)하기에 그 마음이 든든하고 불행이 온다 해도 겁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두려움’은 우리를 ‘악의 길’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막아줍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를 ‘기쁨으로 따르는 순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위대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의인의 ‘경외’(사랑과 믿음)는 ‘집안’이 하느님이 주시는 ‘복과 번영’을 누리도록 영향을 끼칩니다. 본문에 기록된 ‘복과 번영’은 물질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은 그들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 즉 ‘의로운 행실’의 도구들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물질적 부자가 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富)를 어떻게 ‘선용’(善用)하여 ‘의롭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신앙의 모범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고, 주님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루가 6:20).

후반부(4~10절)는 ‘하느님을 경외(敬畏)하는 의인’과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는 ‘악인’의 대조입니다. ‘의인’은 어둠 속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이 ‘태양’이라면 그는 ‘달’입니다. 태양은 그 자체의 찬란한 빛으로 빛나지만 달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납니다. 하느님과 의인의 관계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의인은 세상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도 빛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 어둠이란 인간들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나쁜 소식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어둠에 둘러싸일 때 두려워하고 절망하지만 ‘하느님을 경외하는 의인’은 그 어둠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빛납니다. 그에게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소식이 결코 나쁜 소식이 아니며, 종국에는 ‘선’(善)으로 바뀝니다(로마 8:28).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온갖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줍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의인의 ‘관대함’(5, 9절)은 영원히 기억되고, 사람들이 그 영광스런 모습을 우러릅니다. 여기서 오늘 복음이야기와의 직접적인연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마태 5:19).

이렇게 시인이 칭송하는 의인의 ‘인물평’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敬畏)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그는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질고, 자비로우며, 인정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꾸어주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모든 일을 양심으로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께 삶의 뿌리를 내렸기에 결코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한 악인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오늘 성시로 배정된 구절은 아니지만 악인은 의인을 보고 속이 뒤틀려 이를 갈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 갈 것입니다(10절).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의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입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나가는 ‘계속독서’이기에 다른 전례독서들과 주제의 일치성이 약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리스도인,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녀답게 착한 행실(사랑으로)로 구원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라는 <전례독서> 주제와의 연결성도 빛나고, 공현절기와도 어울립니다.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 1고린 1:4,9,12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의 ‘일치’를 호소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랑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라고 선포합니다(1~2절; 골로 2:2; 4:3). 자신은 그 ‘심오한 진리’(지혜, 비밀, 증언)를 선포할 때 ‘유식한 말’이나 ‘말의 지혜’를 가지고 하지 않았다고 재천명합니다(1절).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4절)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했다’고 전합니다(4절). 간단히 말하면 그는 전적으로 하느님만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십자가 복음을 전하였다’고 솔직히 인정합니다(3절).

그렇지만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고린토 교우들의 마음을 여시어 바울로가 전한 ‘십자가 복음’(2절)을 확신하는 ‘믿음’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5절). 이리하여 그들의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인 성령’에 바탕을 둔 것이지 ‘인간의 지혜’(설득력, 말솜씨, 수사학적인 미사여구)에 바탕 한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은총의 선물’입니다(1고린 1;29,31).

이어서 바울로는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와 같지 않다는 것을 증언합니다(6~8절).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인 ‘그리스도’(골로 2:2; 4:3)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감추어두셨던 지혜(비밀)인데, 지금은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드러나게’ 되었습니다(7절; 골로 1:26~27).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그 ‘심오한 지혜’(비밀, 깊은 경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10절). 그 ‘심오한 지혜’는 이방인인 우리마저도 ‘하느님의 백성’(교회)에 포함시키려는 ‘영광의 소망’입니다(에페 3:1~13; 골로 1:27).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지혜’(깊은 경륜)를 하느님의 영인 ‘성령’을 통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심오한 지혜’는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리는 일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고, 그리스 사람으로 대변되는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1고린 1:23). 더욱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강하며, 유력한 이들이 아니라 어리석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도(1고린 1:26~28)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이지 그 ‘구원의 일’은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도 이해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우리였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내세울 만한 ‘의’(義)가 있었다고 여긴다면 그는 아직 신앙인으로서 ‘인생 공부’가 짧은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있던 우리였습니다. 자기 밖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빛’을 전적으로 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내미신 ‘하느님의 은총’이자 ‘심오한 지혜’가 ‘십자가의 그리스도’입니다(1고린 1:29,31). ‘율법’을 언급하는 오늘 복음이야기와 연결하여 말씀드리면 ‘십자가’는 하느님께 가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 높이 들린 ‘빛’이며,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참된 의’(義)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일’과 ‘이방인’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고대에는 상상조차 살 수 없었습니다(9절).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그 ‘심오한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교회)에게 ‘나타내’(계시해) 보이셨습니다(10절). 우리(교회)도 성령이 아니었다면 그 지혜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洞察)하시기 때문입니다(10절). 사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듯이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영)만’이 압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생각’(구원 경륜)은 오직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만’이 아십니다(11절).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성령’을 우리(교회)에게 주시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를 깨달아 알게 하셨고, 지금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십니다(12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깊은 ‘구원 경륜’(經綸)마저 통찰하시는 그 ‘성령’을 받아 ‘십자가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참여했습니다. 더욱이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그 ‘심오한 구원 계획’(심오한 지혜)인 ‘십자가 복음’을 성령을 통해 더 깊이 통달해 갑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이자 ‘은총의 선물’임을 성령을 통해 더 환희 깨달아 갑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경륜’(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에 감사와 찬미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 덕택’입니다(12절).

참으로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신성), 즉 ‘자기희생적 사랑을 닮아가겠다’고 세례성사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잘 닮아가고 있습니까?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자기희생적 사랑, 즉 ’착한 행실’(1독서의 정의와 사랑의 일, 시편의 의로운 행실, 복음서의 옳게 살아가는 삶)만이 우리가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착한 행실’은 복음이야기에서 좀 더 다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연중 4주일’을 ‘주의 봉헌축일’로 지켰기에 <전례독서>가 달랐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연중 4주일’ <복음서>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서곡(序曲)’ 또는 ‘하늘나라 영성시의 서시’(序詩)에 해당합니다. 일반적으로는 ‘팔복’이라고 부르는 ‘참된 행복 선언’입니다. 언뜻 보기에 마태오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처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깊이 묵상해 보면 그 정도가 아닙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보다는 ‘새 법’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묘사합니다. 정말 그것이 ‘속뜻’입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출애 24:12-18)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 오른 ‘모세 한 사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에 비해 마태오에 따르면(마태 5:1) 예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무리들’에게(마태 7:28) ‘새로운 법’(사랑의 법)을 직접 주십니다. 일반적으로 ‘산’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위엄’과 ‘통치’의 동의어입니다.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계시의 장소’입니다. 한마디로 ‘산’은 지상에서 ‘하늘’로 가는 일종의 ‘문’을 상징합니다. 출애굽의 주인공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따라나선 몇몇 떠돌이들’을 ‘노예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이끌었고, 그들에게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의 노예로부터 해방’하실 ‘구세주’이시고, 제자와 무리들로 상징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새 법’을 주시는 ‘법의 제정자’(制定)이십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 왔습니다. 고대에는 스승은 앉고 배우는 제자는 일어섰습니다. 가르칠 준비가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온 하늘나라’에 받아들여질 사람이 누구인지 그 ‘조건’들을 마치 ‘시인’처럼 읊으십니다. 기다란 ‘영성 시’(詩)의 ‘서시’(序詩) 같습니다. ‘하늘나라 백성’은 어떤 ‘태도’와 ‘열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간직하고 있어야할 ‘제자도’(정신)입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그 ‘서곡’(序曲) 또는 ‘서시’(序詩)에 이어지는 본격적인 예수님의 설교인 《마태오복음》입니다.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3~16절)는 ‘이미 하늘나라 속한’ 백성들이(예수님의 제자로 초대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책무’(責務)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소금과 빛’처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책무’를 ‘드러내야 할 곳’은 ‘일상’입니다. 하늘나라를 이미 차지한 사람들이 실천하는 ‘착한 행실’(하늘나라를 드러내는 행동)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됩니다. 후반부(17~20절)는 ‘율법과 참된 의’(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영원토록 ‘유효’하며 ‘권위’를 갖는다고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일’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심지어 한 사람이 가장 작은 계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 ‘하늘나라’에서의 위치가 달라질 정도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율법, 계명)을 충실히 실천한 사람들이 받는 ‘보상’입니다.

사실 짠맛을 간직한 ‘소금’으로서의 책무,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밝게 비추어주는 ‘빛’으로서의 책무, 영원한 유효성을 갖는 ‘하느님 말씀(율법, 계명)을 충성스럽게 지켜가는 책무’는 초대교회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책무’로 지금껏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 ‘책무’를 살아냄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하늘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도 복음이야기 후반부에서 율법에 충실하다고 자부하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마태 23:23) ‘더 옳게 살지 못하면’(초과할 정도의 의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율법 준수가 절대적’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질 수 있습니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킴으로써, 즉 사람의 힘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뜻일까요? “그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이라는 ‘말씀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후반부에서는 그 속뜻이 사도 바울로가 선포한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인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믿음)함으로써 오는 ‘믿음의 의’(義)임을 밝힐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참된 의’(義)임을 밝힐 것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책무는 ‘소금’의 삶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소금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소금 기둥’으로 변한 ‘롯의 아내’(창세 19:26)와 ‘염분’이 워낙 강해 몸이 둥둥 뜬다는 ‘사해’(死海, Dead Sea)가 생각납니다. 지난 성지 순례 때 요르단도 다녀왔지만 ‘소금 기둥’이 있다는 사해 남부지역에는 가보지 못했고, ‘사해’까지는 가 보았습니다. 사실 바다는 아니고 ‘짠물 호수’입니다(창세 14:3; 여호 3:16). 사해는 ‘지표’에서 가장 낮은 곳(-423m)에 위치합니다. 제가 갔을 때는 ‘초막절’(장막절) 연휴 마지막 날이어서 제법 많은 인파들이 놀러와 있었습니다.

사해의 진흙은 클레오파트라가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피부에 좋다고 해서 온 몸에 진흙을 바르고 ‘수영 체험’을 위해 들어갔습니다. 걸어들 가면서 “세상에서 제일 낮은 곳, –423m”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뒤로 누워 수영을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영’이 아니라 일종의 ‘부력 체험’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정말 몸이 떴습니다. 체중이나 피부색에 상관없이 물 속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공평하게 둥둥 떴습니다. 김장용 배추를 절이는 소금물의 염분이 대략 10% 정도라고 하는데, ‘사해’의 염분은 무려 30% 정도여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더 이상 들어가지 말라고 줄이 쳐져있는 곳까지 둥둥 떠서 가 보았습니다. 교우들 덕택에 ‘호강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체험해 보시지 못한 ‘사해’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염분이 너무나 강하고, 삼투압 작용으로 몸이 상할 수 있어서 10분 이상 물 속에 있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어째서 ‘사해’라고 불리는 것인지 나중에 이유를 찾아보았습니다. 염분이 강해 물고기가 살 수 없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문득 이름이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해’라고 부르기에는 엄청난 ‘수익’을 이스라엘에게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해의 소금은 효용가치가 대단히 높습니다. 피부미용이나 의약 목적 뿐 아니라 광물질 함유량이 높아 다양한 용도로 쓰입니다. 고대에도 사해 소금은 이스라엘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설교의 첫 마디를 좀 이상한 별칭을 짓는 것으로 시작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 마태 5:13

오늘날은 좀 다르지만 고대에는 ‘소금’이 아주 귀했습니다. ‘급료’(salary)라는 말도 ‘소금’에서 나왔는데, 로마시대 군인들이 소금으로 ‘보수’를 받을 정도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금’을 섭취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주식은 ‘빵’입니다. 주로 어머니가 맷돌에 가루를 빻아 만들었습니다. ‘누룩’을 넣으면 빵이 더 부드럽지만 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소금’은 ‘반드시’ 넣어서 반죽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소금’이라는 칭호를 주십니다. 그들은 나중에 ‘세상의(흙의) 소금’이 될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그렇습니다. 본문에 쓰인 ‘세상’(그리스어로 ‘게’)이라는 단어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의 그 ‘세상’(그리스어로 코스모스)과 다릅니다. 물론 ‘사람이 거하는 곳’(세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흙’, ‘땅’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빵 굽는 도구였던 ‘진흙’으로 만들어진 ‘화덕’을 생각해 보면 ‘세상’보다는 ‘흙의 소금’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런지는 “밖에 내버려 진다”는 부분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자선’에 앞장서는 사람을 ‘의인’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선’(쯔다카)이라는 단어가 ‘의’(짜딬)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자들에게 있어서 자선은 자신이 ‘의인’(하느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한 방편이었기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 실천했고, 그런 사람을 ‘소금’(멜라흐)과 같은 존재로 여기곤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드러내는 ‘자선’과 관련된 말이 ‘소금’이라는 히브리 전통도 있지만 꼭 그것을 몰라도 예수께서 ‘소금’을 언급하시는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소금’은 다른 음식의 ‘간’을 맞추고,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조미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의 ‘책무’를 소금에 비유하신 첫 번째 의미를 배웁니다. 제자들의 말과 행동은 ‘소금’처럼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사는 맛’을 더해주어야 합니다. 더욱이 소금은 꼭 있어야 하고 다른 음식에 영향을 끼쳐 맛을 더해 주지만 그 자체는 크게 주목을 끌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기와 명예를 얻고 싶어서 안달복달인데 예수님은 그런 허망한 일에는 신경을 끄라고 하십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삶이 허망하다”고 힘겨워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불안해합니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마음이 따라갈 수 없다고 호소합니다. 특히 요즘 같은 불경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매슬로우가 ‘욕구단계 이론’(Maslow’s hierarchy of needs)에서 주장한 것처럼, ‘생리와 안전욕구’는 인간의 삶에서 1차적이고 기본적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힘겨워하거나 허망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인생은 본래부터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비그리스도인 유명 강사들’도 있습니다. 의미니 가치니 하는 것도 사회가 ‘부과한 짐’이니, 그런 기준에 맞춰 살려고 안달복달하기보다 ‘그냥 과정처럼 현재를 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있지도 않은 의미나 가치를 찾으려 애쓰지 말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연륜이 쌓인 분들은 이제 그런 말들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말이고, 또 어떤 상황 속에서는 진실일 수 있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정말 현대인은 지나친 ‘의미 추구’에 빠져 살아가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상황이 힘겹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비그리스도인 유명 강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이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의미’는 찾아야할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하나의 과제처럼 충실히 살다보면 어느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쌓여서 ‘발견’되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비그리스도인들처럼 더 이상 그렇게 ‘믿음 없는 말’(짠맛을 잃어버린 상태)을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늘나라로’부터 ‘이미 삶의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고, 하느님 나라 일을 하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 드린 바 있지만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자기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늘나라’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 참된 행복을 이미 발견했기에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서 이런 ‘믿음’을 빼버린다면 그 즉시 우리의 삶은 마치 소금 넣는 것을 잊어버린 맛없는 음식처럼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또 소금은 ‘고기를 보존’하고 ‘부패를 늦추는 데’ 쓰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건강한 사회문화를 지키고 사회의 타락과 불의를 막는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갈수록 세상이 부패하고 있기 때문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축복처럼 제자들이 자신들의 ‘책무’에 충실하다면 사람들은 ‘살맛’을 느낄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뿐 아니라 지구는 더 깨끗한 곳으로 보존될 것입니다. 소금이 음식에 들어가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듯 우리가 사회 속에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웃들은 건강한 영향력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큰일입니다.

특히 고대 이스라엘에서 소금은 ‘전례적’으로도 중요했습니다. ‘향’을 만들 때(출애 30:35), ‘곡식예물’과 ‘번제물’을 드릴 때(레위 2:13; 에제 43:24), 하느님과 ‘언약’할 때도(민수 18:19; 역대하 13:5) ‘소금’을 사용했습니다. 심지어 민간에서는 ‘잡귀’를 몰아내는 ‘신묘한 힘’이 있다고 여겨서 갓난아기의 몸을 소금으로 문지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소금’이 ‘믿음의 전례’에서 꼭 사용되었듯이 세례성사를 통해 계약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믿음’이 빠지면 큰일입니다. 왜 큰일인지는 아래 화덕이야기에서 나눌 것입니다. 이렇게 어느 ‘가정’에나 있고, ‘전례’에서도 꼭 사용하는 ‘소금’을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책무’를 드러내는 은유로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 드러내는 중요한 은유입니다. 어쩌면 소금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가족을 위해 ‘화덕’에서 ‘보리빵’을 굽던 ‘어머니의 고마운 손길’을 떠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가정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화덕’을 갖고 있었습니다. 올리브기름을 바른 반죽을 화덕 내부에 붙여서 복사열(輻射熱, 방사열)로 빵을 구웠습니다. 부자 집은 ‘밀빵’이고, 대부분의 가정은 ‘보리빵’입니다. 나무가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올리브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나 가축의 배설물도 잘 말려서 땔감으로 썼습니다. 물론 고대에는 불을 피우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마다 공동으로 관리하는 화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올리브 찌거기나 가축의 배설물 그 자체만으로는 불이 잘 붙지 않기에 각 가정에서는 화덕 바닥에 ‘소금’을 깐 다음 그 위에 가축의 배설물을 깝니다. 이렇게 하면 소금이 번개탄 같은 촉매 역할을 해주기에 불이 잘 붙습니다. 주부들은 기능을 다한 소금을 주기적으로 ‘화덕 바닥’에서 걷어내야 했습니다. 그 때 걷어낸 소금은 전혀 ‘짠맛’이 나지 않았기에 밖에 내다버렸습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도 어머니를 도와 맷돌 가는 일뿐 아니라 화덕에서 걷어낸 소금을 내다버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 역시 소금처럼 짠맛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배웁니다. 제자가 제자도(정신)를 잃어버리면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내버려지고 짓밟힙니다.

두 번째 책무는 ‘빛’의 삶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면서 하느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징입니다(창세 1:3; 출애 19:16; 마태 17:2) 더욱이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전혀 없다”(1요한 1:5)고 선포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빛’으로 증언합니다(요한 1:1~9). 예수님도 스스로를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요한 8:12; 9:5). 이렇게 하느님께만 속하는 ‘신성의 표징’이자 ‘칭호’인 ‘빛’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기꺼이 선사하십니다. 아마 ‘소금’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때만 해도 놀라지 않았던 제자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이라는 칭호는 당대 유대인들이 존경하던 이름난 ‘랍비’에게나 돌리는 ‘칭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럼없이 당신의 그 초보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명백히 선언하십니다. 이 칭호는 만물의 창조주께서 직접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언 속에는 우리가 자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빛의 모든 작용이 포함됩니다. 빛은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눈이 있어도 한 줄기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빛 덕택에 우리는 천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고 사물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가야할 길을 보여줍니다. 빛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명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그의 연약한 됨됨이에도 불구하고 참 빛이신 창조주로부터 ‘빛을 선사받은 사람’이자 ‘빛을 주는 사람’입니다. 세례를 통해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넘어온 ‘빛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제자의 책무는 ‘산위에 있는 마을’처럼, ‘등경 위에 있는 등불’처럼 분명합니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려고 지은 일종의 ‘성채’(城砦)입니다. 산 아래에 있는 마을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영성적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은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가치’도 정립이 안 된 채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산 위에 이는 마을’은 ‘삶의 참 의미’와 ‘가치’가 ‘하늘나라’로 정돈되고 질서가 잡혀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제자들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안전한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고, 결코 숨겨질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이미 당신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그렇게 ‘아름답기’(美)를 바라셨습니다. 삶의 참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렇게 눈에 띄는 ‘착한 삶’(善)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진리’(眞)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만큼 그렇게 빛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의도적’입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등불을 더 높이 둘수록 효과적입니다. 이 당연하고 의도적인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당연하고 의도적인 책무를 드러내십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대부분의 가옥은 창문이 거의 없는 ‘돌집’ 구조였습니다. 그런 구조에서 ‘등불’은 필수입니다. 창문이 없다보니 등불을 끌 때는 집안에 그을음이 차지 않도록 됫박으로 덮었지만 등불을 켰을 때의 용도 한가지였습니다. 집 안을 밝게 비추는 일입니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이 ‘빛’의 칭호를 말씀하시는 순간 어릴 적 보았던 어머니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녁 무렵이면 어머니께서는 집 안 일을 할 수 있도록 작은 등잔에 올리브기름을 가득 채워 ‘벽 위쪽’에 있는 ‘등경’에 올려두시곤 했습니다. 그 일상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이 위대한 은유를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일상의 등잔불로부터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실을 깨우쳐주십니다. 게다가 “집 안의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춘다”는 말은 영성적 차원에서 볼 때 ‘내면의 진실들을 비춘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십니다.

참고로 가정용 등잔불에는 ‘올리브기름’을 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올리브나무의 열매를 따서 기름을 3차례 이상 짜냈습니다. 가벼운 돌을 올려 ‘처음으로 짠 가장 품질이 좋은 기름’[흔히 엑스트라 버진(Extra Virgin)이라고 하지요]은 ‘성전’에 바쳐 금촛대를 밝히거나 왕과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했습니다. 좀 더 무거운 돌을 눌러 두 번째로 짠 기름은 ‘식용’으로, 세 번째로 더 꽉 눌러 짠 기름은 ‘가정용 등잔’을 밝히거나 화장품과 의약품으로 사용했습니다. 찌꺼기는 가축의 사료나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아무튼 등불을 ‘의도적’으로 ‘등경 위’에 두듯이 하늘나라에 속한 우리는 우리의 빛이 더 높이 더 멀리 비추어지도록 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빛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을 비추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빛’이라 불림 받은 우리도 자신만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큰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빛을 먼저 선사받은 우리는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착한 행실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빛나도록 고요히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이단들처럼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은밀하게 신자들 사이에 스며들어 도둑처럼 존재하는 그리스도교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와 살고 있는 ‘빛의 자녀’이며,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을 책무가 있다고 교훈한 바 있습니다(에페 5:8~14).

우리가 그렇게 ‘착한 행실의 빛’을 비추어주는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가 아니라 연약한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사람들이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찬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거나 고립된 채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 앞에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드러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제 복음이야기의 후반부(17~20절)이자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율법’에 대한 충성의 책무입니다. 언뜻 율법에 대한 마태오의 태도는 바울로와 차이가 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종합적으로는 ‘참된 의’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 5:17

‘율법과 예언서’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당시의 표현입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본래의 의미대로 온전하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율법과 예언서’가 지향해 온 ‘하늘나라 정신’을 ‘구현’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시는 그 ‘하늘나라 정신’(사랑)을 충실히 실천하는 사람들이 받는 ‘보상’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이 ‘영원토록 유효하며 권위를 갖는다’고 선언하십니다. 심지어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어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일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재차 강조하십니다. 한 사람이 하늘나라를 가리키고 있는 가장 작은 계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 하늘나라에서의 위치가 달라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마태 5:13

마태오에게 있어서 ‘율법 준수는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가슴이 갑갑해 옵니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는 어쩌자고 이렇게 엄혹한 말씀을 ‘복음’이라고 기록한 것일까요? 그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요? ‘더 옳게 살지 못하면’(초과할 정도의 의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의 속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요? 율법을 지킴으로써, 즉 사람의 힘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이렇게 전할 것일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질책하십니다(마태 23:23).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생명(종국에는 하늘나라)을 얻는다”(로마 10:5; 레위 18:5)고 믿었기에 율법을 남들보다 철저히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점점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의’(옳음)에 빠지는 ‘독선’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자기 의’로 다른 사람을 ‘심판’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가리키는 ‘하늘나라’와 율법의 본래 정신인 ‘포용적인 사랑’과는 정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에 구원의 선물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과도 어긋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과 예언서의 영원한 권위와 유효성을 선언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핵심), 즉 ‘정신’을 무엇이라고 가르치십니까? 마태오에는 이것에 대한 언급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한 군데는 ‘산상수훈(山上垂訓)’에 나오는데 예수께서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가르치십니다. ‘황금률’입니다. 다른 한군데는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계실 때인데,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랑’(착한행실)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정신)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22:40). 어떤 사랑이냐면 오늘 <전례독서들>에 관통해 흐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마태 22:34~40).

헌법이 국가의 최고 법규이듯이 ‘사랑의 이중계명’은 모든 계명의 ‘부모’입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랑’을 마태오는 강조합니다(마태 9:13; 12:7; 19:19). 그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정의의 일’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사회적 약자들도 살만한 세상은 ‘하늘나라’ 밖에는 없지요.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십자가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실천되는 어떤 계명 순종도 하느님께는 역겨울 뿐입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 정신으로 살고 있으니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고 있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꿰뚫었습니다(로마 13:8~10).

이렇게 볼 때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 “그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이라는 ‘말씀의 속뜻’은 무엇입니까? ‘자기 의’(자기 옳음)를 추구하는 ‘사람의 힘’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 없이 행하는 율법준수’를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자기 의’(자기 옳음)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심판’하고 ‘정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있습니까? 마태오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바로 그 길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참된 의’(義)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태오는 사도 바울로와 통합니다.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의’(義,) 즉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인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오는 ‘참된 의’(義)가 인류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입니다(갈라 2:15~21; 필립 3:9; 로마 10:3~4).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 의’에 빠진 엄격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이 되기보다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도 온 마음으로 ‘율법의 정신’을 살아가신 사랑의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랑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살아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금이고, 하나는 빛입니다. 둘 다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물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금이 ‘될 것이다’도 아니고 빛이 ‘될 것이다’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소금과 빛의 비유는 탁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 말씀(율법, 계명)의 ‘정신’(골자, 핵심)인 ‘사랑’(착한행실)을 자신의 책무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받는 ‘보상’입니다.

이제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요즘 ‘빛(신성)의 드러남’이라는 공현절기(연중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묵상해 온 <전례독서>는 “예수님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성육신 하신 하느님, 메시아”시라는 ‘신성’을 증언하는 이야기들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내리신 진리의 큰 빛이 그 가르침을 만방에 힘차게 드러내시자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따르게 된다.”는 주제의 연속입니다. 특히 연중 4주일(지난주였는데, 주의 봉헌축일로 지켰습니다)부터 7주일까지의 복음이야기는 ‘산상수훈’의 연속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이들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어둠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빛의 전사’임을 증명합니다. 빛이신 주님의 초대에 신앙으로 응답하고 눈을 뜬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빛의 전사인지는 말의 고백이 아니라 그 완전한 행실인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는 가르침의 연속입니다(마태 5:48). 우리는 그동안 ‘빛’이신 주님을 얼마나 닮으며 살아왔을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책무’를 다시금 되새깁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으로 죽었다가 ‘세상의 빛’으로 부활하신 분이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소금과 빛은 음식의 맛을 내고 생명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소금이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이고 빛’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를 ‘이행’하거나 아니면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맛을 간직한 ‘소금’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살아갈 맛’을 얻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소금처럼 세상에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우리 역시 어둠을 몰아내는 ‘빛’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으면 반드시 그곳은 그만큼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태의 진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비추어주는 ‘빛’입니다. 우리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우리는 사람들 ‘내면의 진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삶’으로, ‘구원의 삶’으로, ‘빛의 세계’인 ‘하늘나라’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떤 이의 예배를 받으시고, 어떤 이의 기도에 응답하시는지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전례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을 경외하는 참된 예배자로 여기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의 삶은 영원히 기억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랑의 삶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사랑의 삶의 결정체’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인류의 ‘빛’으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심오한 지혜’인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 ‘심오한 지혜’를 영접하고 ‘하늘나라 백성 공동체인 교회’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성령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맛을 잃은 소금으로, 빛을 잃은 어둠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부디 우리는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답게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갑시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신성을 닮아가는 사람답게 ‘사회적 약자들’이 기를 펴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갑시다. 정말로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가 구호에 그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이 오게 하는 데 소금과 빛으로 삽시다. 빛이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녀답게 착한 행실(사랑으로)로 구원의 하느님을 날마다 드러내시기를 축복합니다.

1개의 응답 있음 “2020. 2. 9. 연중5주일

  • hyunjoo ryu
    2 주전

    설교는 10분으로 줄었는데, 텍스트는 와^^ 이 글 다 쓰시고 탈진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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